[壬午]永昌元年이라 〈趙光初五年이요 後趙四年이라〉
王敦
이 將作亂
할새 謂謝鯤曰 劉隗
注+[頭註]帝引劉隗等하야 欲抑王氏하니 見上庚辰이라奸邪
하야 將危社稷
이라
吾欲除君側之惡
하노니 何如
오 鯤曰 隗誠始禍
나 然
城狐社鼠注+[頭註]城狐不灌하고 社鼠不燻은 謂其得所依憑也니 指人君左右近習이라니이다
敦怒曰 君은 庸才라 豈達大體리오하고 遂擧兵於武昌하야 上疏罪狀劉隗한대 沈充이 亦起兵於吳興하야 以應敦하다
帝大怒
하야 詔曰 王敦
이 憑恃寵靈
注+[頭註]靈亦寵也라하고 敢肆狂逆
하야 方朕太甲
注+[頭註]方은 比也라 敦上疏曰 昔에 太甲顚覆厥度로되 幸納伊尹之忠하야 殷道復昌故云云이라하야 欲見幽囚
하니 是可忍也인댄 孰不可忍이리오
今親帥六軍하야 以誅大逆호리니 有殺敦者면 封五千戶侯하리라
隗至하야 與刁協勸帝하야 盡誅王氏어늘 帝不許하니 隗始有懼色이러라
司空導 帥其從弟中領軍邃
와 左衛將軍
와 侍中侃, 彬
과 及諸宗族二十餘人
하고 每旦
에 詣臺
注+[頭註]尙書는 爲中臺요 御史는 爲憲臺라待罪
하다
周
將入
할새 導呼之曰 伯仁
注+[釋義]周顗字也라아 以
百口累卿注+[通鑑要解]累는 猶托也라 人謂其家之親屬曰라하니 欲使顗保護導하야 以全其家也라하노라 顗直入不顧
러니 旣見帝
에 言導忠誠
하야 申救甚至
하니 帝納其言
하다
顗喜飮酒하야 至醉而出할새 導猶在門하야 又呼之어늘
顗不與言하고 顧左右曰 今年에 殺諸賊奴하고 取金印如斗大하야 繫肘後호리라
旣出에 又上表하야 明導無罪하야 言甚切至호되 導不之知하고 甚恨之러라
導稽首曰 賊臣逆子 何代無之
리오마는 不意今者
에 近出臣族
이로소이다 帝跣而執其手
하고 曰 茂弘
注+[頭註]導字라아 方寄卿以百里之命
注+[頭註]欲라이어늘 是何言耶
오
○ 三月
에 以導
로 爲前鋒大都督
하고 加戴淵驃騎將軍
하고 詔曰 導以
大義滅親하니 可以吾爲安東時節
注+[釋義]懷帝時에 元帝嘗爲安東將軍하야 都督揚州하니라假之
라하다
○ 敦據石頭
注+[釋義]城名이니 今建業이라하야 歎曰 吾不復得爲盛德事矣
로다
帝命刁協, 劉隗, 戴淵하야 帥衆攻石頭러니 協, 隗俱敗어늘
帝令公卿百官으로 詣石頭見敦하고 以敦爲丞相, 都督中外諸軍, 錄尙書事하다
呂
注+[頭註]敦參軍也라說敦曰 周顗, 戴淵
이 皆有高名
하야 足以惑衆
이니 公不除之
면 恐必有再擧之憂
니라
敦然之
하야 從容問導
호되 導不答
注+[通鑑要解]敦參軍呂猗說之하니 然之하여 以問導曰 周, 戴는 南北之望이니 當登三司無疑也라하야늘 導不答하고 又曰 止應令僕邪아하야늘 又不答하고 敦曰 若不爾면 正當誅爾라하야늘 又不答하니 收顗及淵殺之하니라 顗被收에 路經太廟하니 大言曰 賊臣王敦이 傾覆社稷하고 枉殺忠臣하니 神祗有靈인댄 當速殺之리라하니 收人以戟傷其口하야 流血至踵이나 容止自若하니 觀者 皆爲流涕라 幷淵殺之하다이어늘 收顗及淵
하야 殺之
하다
王導後
에 料檢
注+[頭註]料理也라中書故事
라가 乃見顗救己之表
하고 執之流涕曰 吾雖不殺伯仁
이나 伯仁
이 由我而死
注+[通鑑要解]自愧於敦三問不答之意也라하니 幽冥之中에 負此良友라하더라
敦旣得志
에 暴慢滋甚하야 四方貢獻
을 多入其府
하고 將相岳牧
注+[頭註]舜有四岳十二牧이라 故로 後之居方面者를 謂之岳牧이라이 皆出其門
하니라
其弟趙穿이 遂弑靈公于桃園이러니 春秋書曰 趙盾이 弑其君夷皐라하고
客有毁郭解
注+[頭註]漢武時人이라者
어늘 解之客
이 殺之
한대 公孫弘曰 解雖不知
나 其罪甚於解殺之
라하고 遂族解
하니
二事雖不同이나 原心定罪하야 推其所自來하면 盾, 解固有難辭其責者라
以王氏失職이라하야 致興兵犯順이어늘 導不能防之於始하고 又不能止之於今하니 雖欲辭其責이나 可乎아
賊旣東下에 始闔門待罪하고 石頭失守나 位爵如昨하고 至行胸臆報恩怨하야 不免假手于賊이라
自我雖不殺伯仁이나 伯仁由我而死一語로 推之컨대 導雖有格天之烈, 蓋世之功이나 欲免趙盾郭解之誅면 終不能也니라
○ 祖逖이 旣卒에 後趙屢寇河南이어늘 祖約이 不能禦하고 退屯壽春한대
○ 十一月에 帝憂憤成疾하야 崩하니 司空王導 受遺詔輔政하다
自古로 爭天下者는 常易하고 收天下者는 常難이라
唐人有言
호되 神堯
注+[頭註]唐高祖李淵이라以一旅取天下
어늘 이라하니 嗟夫
라
夫以匹夫而爭天下와 與失天下而收之者는 其勢甚不相若也라
凡人之情은 輕於用人之所有하고 重於用己之所愛하나니
輕則勇하고 重則怯하니 此爭天下與收天下之所以異也라
昔漢高帝資三尺之劍하야 五載而成帝業하니 何其銳也오 蓋高帝崛起豐沛之微하야
無寸土爲之階하니 兵은 秦兵也요 粟은 秦粟也요 城邑은 秦之城邑也라
驅非己之民하고 食非己之粟하야 而收非己之城邑이라
故得以肆意而爲之하야 降數十郡而喪之를 不恨也하고 捐數千里而授三將을 不惜也요 睢水之圍와 滎陽之脫에 濱於死而不衰也라
以匹夫而爭天下
에 其幸而集
注+[頭註]成也라則帝王
이요 不幸而不集
이면 吾如彼何哉
리오
晉元之南渡也
에 撫江都之勝
하고 兼吳會
注+[頭註]吳地는 爲荊, 揚, 交, 廣之都會라之饒
하니 亦足以奮矣
로되 而沒齒不能歸侵疆之咫尺者
는 非他也
라
其心이 愛夫一隅之可以自託하야 惴惴然惟恐其用之而倂失之也일새라
三代之後에 中興之功이 莫易於光武하니 豈光武獨能也哉아
蓋其勢亦高帝之勢요 而光武亦以高帝之道用之也일새니라
天下士民이 有思晉者 皆裹粮而歸之하야 中外勸進호되 拒而弗從이라가 及愍帝遇害에 始正位號하니 亦庶乎知節者라
初鎭江東에 頗荒于酒러니 王導正色直諫한대 亟命引觴覆之하고 所幸鄭夫人이 衣無文綵하고 布帳練帷하며 詳刑簡化하니 史氏稱其光啓中興이 非溢美矣라
初以懷帝之命으로 來臨江左하니 國有緩急이면 固宜糾合義旅하야 入衛王室이어늘 而乃自爲封殖之謀하고 無慷慨救時之志하야
懷帝遂以蒙塵
호되 迄不聞勤王之擧
하며 愍帝嗣立
에 增重寄委
하고 制詔深切
하니 所宜動心
이로되 顧乃坐視
과 戎馬縱橫
하야 曾不以介意焉
이라
方且陽爲出師하야 遷延不進하야 遂使河南으로 終淪左袵하니 惜哉라
夫受君父之托而坐視其禍變하고 因時事之艱難而僥倖以自利하야 三綱淪矣니 其能以討賊乎아
此所以建國規模 亦復不競하고 亂臣賊子에 如王敦者 不旋踵以起하니 豈無自而然哉아
영창永昌 원년元年(임오 322) - 조趙나라 광초光初 5년이고, 후조後趙 4년이다. -
왕돈王敦이 난을 일으키려 할 적에
사곤謝鯤에게 이르기를 “
유외劉隗注+[頭註]황제가 유외劉隗 등을 나오게 하여 왕씨王氏를 억제하고자 하였으니, 앞의 경진년조庚辰年條(320)에 보인다. 가 간사하여 장차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내가 군주 곁에 있는 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자,
사곤謝鯤이 말하기를 “
유외劉隗가 진실로
화禍의 시초이지만
성城 안에 사는 여우와
사社에 사는 쥐
注+[頭註]성 안에 사는 여우는 물을 대어 잡을 수가 없고 사社에 사는 쥐는 불을 질러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의거할 곳을 얻었음을 이르니, 임금의 좌우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근신近臣을 가리킨다. 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왕돈王敦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용렬한 재주이니, 어찌 일의 대체大體를 알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무창武昌에서 군대를 일으키고서 상소하여 유외劉隗의 죄상을 나열하니, 심충沈充이 또한 오흥吳興에서 군대를 일으켜 왕돈王敦에게 호응하였다.
왕돈王敦이 무호蕪湖에 이르러서 또다시 표문表文을 올려 조협刁協의 죄상을 아뢰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
왕돈王敦이 은총과 신임
注+[頭註]영靈도 역시 총애하는 것이다. 을 믿고서 감히 미치고 패역한 짓을
자행恣行하여
짐朕을
태갑太甲에게 비교하여
注+[頭註]방方은 비교함이다. 왕돈王敦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태갑太甲이 법도法度를 전복시켰으나 다행히 이윤伊尹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여 은殷나라의 도道가 다시 창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폐幽閉하고 가두려 하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차마 못하겠는가.
이제 육군六軍을 직접 거느리고서 대역죄大逆罪를 범한 자를 주벌할 것이니, 왕돈王敦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오천호五千戶의 후侯에 봉하겠다.” 하였다.
황제가 대연戴淵과 유외劉隗를 불러 들어와서 건강建康을 호위하게 하였다.
유외劉隗가 이르러서 조협刁協과 함께 황제에게 권하여 왕씨王氏를 다 죽이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니, 유외劉隗가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사공司空 왕도王導가 그의
종제從弟 중령군中領軍 왕수王邃와
좌위장군左衛將軍 왕이王廙와
시중侍中 왕간王侃‧
왕빈王彬 및 여러
종족宗族 20여 명을 거느리고 매일 아침마다
대臺에 나아가
注+[頭註]상서尙書는 중대中臺라 하고, 어사御史는 헌대憲臺라 한다.대죄待罪하였다.
주의周顗가 들어가려 할 적에
왕도王導가 불러 이르기를 “
백인伯仁注+[釋義]백인伯仁은 주의周顗의 자字이다.아, 우리 집안
일족一族의 목숨을
경卿에게 부탁한다.
注+[通鑑要解]누累는 맡김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친속親屬을 일러 백구百口라 하니, 주의周顗로 하여금 왕도王導를 보호하게 하여 그 집안을 온전히 하고자 한 것이다. ” 하였는데,
주의周顗가 곧바로 들어가고 돌아보지 않았으나 황제를 뵙자
왕도王導의 충성을 말하여 변명하고 구원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주의周顗가 기뻐하여 술을 마시고 취해서 나오니, 왕도王導가 아직도 문 앞에 있다가 또다시 주의周顗를 불렀다.
주의周顗가 왕도王導와 말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금년에 여러 역적 놈들을 죽이고서 말[斗]처럼 큰 금인金印을 취하여 팔뚝 뒤에 매달겠다.” 하였다.
이미 나온 뒤에 또다시 표문表文을 올려 왕도王導의 무죄함을 밝혀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나 왕도王導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매우 한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왕도王導에게 조복朝服을 도로 돌려주게 하고 그를 불러서 보았다.
왕도王導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적신賊臣과
역자逆子가 어느 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번에 가까이 신의 집안에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황제가 맨발로 나와 그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
무홍茂弘注+[頭註]무홍茂弘은 왕도王導의 자字이다. 아, 막
경卿에게
백리百里의
정령政令注+[頭註]백리百里의 명命은 어린 군주를 부탁하고자 한 것이다. 을 맡기려 하는데, 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 3월에
왕도王導를
전봉대도독前鋒大都督으로 삼고
대연戴淵에게
표기장군驃騎將軍을 가하고 조서를 내리기를 “
왕도王導는
대의大義를 지키기 위해 친척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내가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있었을 때의
부절符節注+[釋義]회제懷帝 때에 원제元帝가 일찍이 안동장군安東將軍이 되어서 양주揚州를 도독都督하였다. 을 그에게 빌려 주겠다.” 하였다.
주의周顗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삼고, 왕수王邃를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
왕돈王敦이
석두성石頭城注+[釋義]석두石頭는 성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건업建業이다.를 점거하고서 한탄하기를 “내가 다시는 훌륭한
덕德이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황제가 조협刁協‧유외劉隗‧대연戴淵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석두성石頭城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조협刁協‧유외劉隗가 모두 패하였다.
황제가 공경公卿과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석두성石頭城에 나아가 왕돈王敦을 만나 보게 하고 왕돈王敦을 승상丞相‧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여의呂猗注+[頭註]여의呂猗는 왕돈王敦의 참군參軍이다.가
왕돈王敦을 설득하기를 “
주의周顗와
대연戴淵이 모두 높은 명망이 있어서 충분히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으니,
공公이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차 군대를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왕돈王敦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조용히
왕도王導에게 물었으나
왕도王導가 대답하지 않자,
注+[通鑑要解]왕돈王敦의 참군參軍인 여의呂猗가 왕돈王敦을 설득하니, 왕돈王敦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왕도王導에게 묻기를 “주의周顗와 대연戴淵은 남방南方과 북방北方의 명망 있는 사람이니, 이들이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라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였으나 왕도王導가 대답하지 않았다. 왕돈王敦이 또 말하기를 “삼공三公이 못 된다면 상서령尙書令이나 상서좌尙書左‧우복야右僕射에 그쳐야 하겠는가?” 하였으나 또 대답하지 않았다. 왕돈王敦이 말하기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만 그들을 죽일 뿐이다.” 하였으나 왕도王導가 또 대답하지 않으니, 왕돈王敦이 주의周顗와 대연戴淵을 체포하여 죽였다. 주의周顗가 체포당할 때 도중에 태묘太廟를 지나게 되자,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적신賊臣인 왕돈王敦이 사직社稷을 전복하고 충신忠臣을 억울하게 죽이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계신다면 속히 그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체포해 가는 사람이 창으로 그의 입을 찔러 피가 흘러서 발꿈치에까지 이르렀으나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니,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주의周顗를 대연戴淵과 함께 죽였다. 주의周顗와
대연戴淵을 체포하여 죽였다.
왕도王導가 뒤에
중서성中書省의 옛일을 정리
注+[頭註]요검料檢은 헤아려서 정리하는 것이다. 하다가 마침내
주의周顗가 자신을 구원해 준
표문表文을 보고는 표문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백인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백인伯仁이 나 때문에 죽었으니,
注+[通鑑要解]왕돈王敦이 세 번 물었을 때에 대답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뜻이다. 이러한 좋은 벗을 저버려서 마침내 죽게 만들었다.” 하였다.
왕돈王敦이 끝내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고 무창武昌으로 돌아갔다.
왕돈王敦은 이미 뜻을 얻고 나자, 포악하고 태만함이 더욱 심하여 사방의
공헌貢獻을 대부분 자기의 창고로 들이고
장상將相과
악목岳牧(牧伯)
注+[頭註]순舜임금은 사악四岳과 십이목十二牧이 있었다. 그러므로 후에 방면方面을 다스리는 자를 일러 악목岳牧이라 한다. 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왕돈王敦이 배반한 것에 대해 왕도王導도 죄가 없지 못하다.
진晉나라 영공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고 하자 조돈趙盾이 도망갔다.
그 아우 조천趙穿이 마침내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시해하였는데, 《춘추春秋》에 쓰기를 ‘조돈趙盾이 그 군주 이고夷皐를 시해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곽해郭解注+[頭註]곽해郭解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俠客)이다.를 헐뜯자
곽해郭解의 문객이 그를 죽였는데,
공손홍公孫弘이 말하기를 ‘
곽해郭解가 비록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나 죄는
곽해郭解가 직접 죽인 것보다 심하다.’ 하고 마침내
곽해郭解의
삼족三族을 멸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비록 똑같지 않으나 마음을 근원하여 죄를 확정해서 그 유래由來한 바를 미루어 본다면 조돈趙盾과 곽해郭解가 진실로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
왕도王導가 이미 국정을 담당하였으니, 왕돈王敦은 그의 종형從兄이었다.
왕씨王氏가 직책을 잃었다 하여 왕돈王敦이 군대를 일으켜 순리順理를 범하였는데 왕도王導가 처음에 이것을 막지 못하였고 또 지금에 저지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책임을 면하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역적인 왕돈王敦이 이미 동쪽으로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합문闔門에서 대죄待罪하였고, 석두성石頭城을 빼앗겼으나 지위와 관작이 예전과 똑같았으며, 심지어는 자기 감정대로 은혜와 원수를 갚아서 적에게 손을 빌려 줌을 면치 못하였다.
‘내가 비록 백인伯仁을 죽이지 않았으나 백인伯仁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한 마디 말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왕도王導가 비록 하늘을 감동시킬 만한 정성과 세상을 뒤덮을 만한 공로가 있다 해도 조돈趙盾과 곽해郭解의 벌을 면하고자 한다면 끝내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 조적祖逖이 죽은 뒤에 후조後趙가 자주 하남河南을 침략하였는데, 〈조적祖逖의 아우인〉 조약祖約이 막지 못하고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후조後趙가 마침내 진류陳留를 점령하니, 양梁‧정鄭 지방이 다시 소란하였다.
○ 11월에 황제가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어 붕崩하니, 사공司空 왕도王導가 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였다.
황제가 공손함과 검소함은 유여有餘하였으나 총명함과 결단성은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대업大業을 회복하지 못하고 화란禍亂이 안으로부터 일어났다.
“예로부터 천하를 다투는 것은 항상 쉽고, 천하를 잃었다가 수복收復하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당唐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
신요神堯注+[頭註]신요神堯는 당唐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이다. 는 1
여旅(500명)로 천하를 취하였으나 자손들은 천하를 가지고도
하북河北을 취하지 못했다.’ 하였으니, 아! 슬프다.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다투는 것과 천하를 잃었다가 수복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매우 다르다.
무릇 사람의 정情은 남이 소유한 것을 쓰는 것은 가볍게 여기고, 자신이 아끼는 것을 쓰는 것은 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가볍게 여기면 용감하고 중하게 여기면 겁을 내니, 이는 천하를 다투는 것과 천하를 잃었다가 수복하는 것이 다른 까닭이다.
옛날 한漢나라 고제高帝는 삼척검三尺劍을 잡고 5년 만에 제업帝業을 이룩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빨랐는가.
고제高帝는 풍패豐沛의 미천한 신분으로 일어나서 한 자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였으니, 군대는 진秦나라 군대였고 곡식은 진秦나라 곡식이었고 성읍은 진秦나라의 성읍城邑이었다.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부리고 자기의 곡식이 아닌 것을 먹고 자기 성읍城邑이 아닌 곳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어서 수십 개의 군郡을 적에게 내주고도 이것을 잃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수천 리의 땅을 떼어서 세 명의 장수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수수睢水에서 포위당하고 형양滎陽에서 탈출할 때에 거의 죽을 뻔했는데도 쇠하지 않은 것이다.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다툴 때에 다행히도 성공
注+[頭註]집集은 이룸이다. 하면
제왕帝王이 될 것이요, 불행히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저
천운天運을 어찌하겠는가.
고제高帝는 또한 용감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남쪽으로 건너올 때에
강도江都의 아름다운 경치를 어루만지고
오회吳會注+[頭註]오지吳地는 형주荊州‧양주揚州‧교주交州‧광주廣州의 도회지都會地(모두 모이는 곳)이다. 지방의 풍요로움을 겸하였으니, 또한 충분히 분발할 수 있었으나 죽을 때까지 침략당한 강토를
지척咫尺도 돌려받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그 마음속으로 한 귀퉁이에 스스로 의탁할 수 있음을 아까워해서 벌벌 떨며 행여 이것을 쓰다가 아울러 그것마저 잃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는 또한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삼대三代 이후에 중흥中興한 공功이 광무제光武帝보다 더 쉬운 사람이 없었으니, 어째서 광무제光武帝만 홀로 능하였겠는가.
이는 그 형세가 또한 고제高帝의 형세였고 광무제光武帝가 또한 고제高帝의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원제元帝는 본래 우씨牛氏의 아들인데 거짓으로 전오典午(司馬氏)의 후예後裔라 하고 강표江表(江南)에 도망가 있었다.
천하天下의 선비와 백성 중에 진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모두 양식을 싸 가지고 그에게 돌아가서 중외中外에서 제위帝位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다가 민제愍帝가 살해당하자 비로소 천자天子의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았으니, 또한 충절忠節을 아는 자에 가까웠다.
더구나 천성天性이 간소하고 검약하며 직언直言을 받아들였다.
처음 강동江東에 진주鎭駐했을 때에 한창 술에 빠졌는데, 왕도王導가 정색正色하고 직간直諫하자 급히 술잔을 가져다 엎어 버리도록 명하였으며, 총애하는 정부인鄭夫人은 옷에 문채가 없었고 삼베 장막에 마전한 삼베로 휘장을 만들었으며, 형벌을 자세히 살피고 교화를 간략히 하였으니, 사관史官이 중흥中興을 크게 열었다고 칭찬한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원제元帝는 재구才具(재능)가 넉넉하지 못하고 지기志氣가 원대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회제懷帝의 명령으로 강좌江左(江東)에 와서 임하였으니,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진실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들어가서 왕실王室을 호위했어야 할 터인데, 마침내 자신이 제후諸侯에 봉해질 계책만 세우고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회제懷帝가 마침내 몽진蒙塵하였으나 끝내 근왕勤王하는 일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민제愍帝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더욱 중하게 위임하고 조서詔書의 내용이 깊고 간절하였으니 마땅히 마음을 움직였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신주神州(中國)가 외적에게 망하고 오랑캐의 군마軍馬가 종횡으로 치달리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일찍이 개의介意치 않았다.
그리고 또 겉으로 출병하는 체하면서 지체하고 전진하지 않아서 마침내 하남河南 지방으로 하여금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하였으니, 애석하다.
군부君父의 부탁을 받았으면서 화변禍變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시사時事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요행을 바라 자신에게 이롭게 하여 삼강三綱이 매몰되었으니, 어찌 역적逆賊을 토벌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건국建國한 규모規模가 또한 다시 떨쳐지지 못하였고 난신적자亂臣賊子 중에 왕돈王敦과 같은 자가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나왔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러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