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皇
이 東行郡縣
할새 上鄒嶧山
注+[釋義]正義曰 邾嶧山은 一名鄒山이니 在兗州鄒縣南이라 魯繆公이 改邾作鄒하고 遂因縣名山하니라하야 立石頌功業
하고 上
至顚(巓)
하야 立石頌德
하고 從
下
하야 禪於 梁
注+[釋義]梁父는 泰山下小山名也니 因以名縣하니 屬泰山郡이라 梁父는 在兗州泗水縣北八十里하니 父는 音甫라하다 遂東遊海上
이러니
方士徐市(불)等이 上書호되 請得與童男女로 入海하야 求三神山不死藥이라하다
○ 初
에 韓人張良
이 父祖以上五世相韓
注+[頭註]祖開地 相韓昭侯, 宣惠王, 襄王하고 父平이 相釐王, 桓惠王하야 凡五世라이라
始皇
이 東遊
하야 至陽武博浪沙
注+[釋義]地理志에 陳留에 有陽武縣이라 括地志云 今鄭州陽武東北十八里漢陽武城也니 博浪沙는 在陽武南이라 王氏曰 按輿地要覽컨대 汴梁路延州陽武南에 有博浪沙亭이 是也라中
이어늘 張良
이 令力士操鐵
하야 狙擊
注+[釋義]狙之伺物에 必伏而候之하니 凡伏而擊者를 謂之狙擊이라始皇
이라가 誤中
라
시황始皇이 동쪽으로
군현郡縣을 순행할 적에
추역산鄒嶧山에
注+[釋義]《사기정의史記正義》에 말하였다. “주역산邾嶧山은 일명一名 추산鄒山이니, 연주兗州 추현鄒縣 남쪽에 있다. 노魯나라 목공繆公이 주邾를 고쳐 추鄒라 하고, 마침내 현縣을 따라 산을 이름하였다.” 올라 비석을 세워
공업功業을 칭송하고,
태산泰山의 남쪽으로 올라가 정상에 이르러 비석을 세워
덕德을 칭송하고,
태산泰山의 북쪽 길을 따라 내려와
양보梁父에서
선禪을
注+[釋義]양보梁父는 태산泰山 아래의 작은 산 이름인데, 산 이름을 따라 현縣을 이름하였으니 태산군泰山郡에 속하였다. 양보梁父는 연주兗州 사수현泗水縣 북쪽 80리 지점에 있으니, 부父는 음이 보이다. 하고는 마침내 동쪽으로
해상海上에 유람하였다.
이때 방사方士인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동남童男‧동녀童女와 해도海島에 들어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오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상上이〉 강江에 배를 띄워 갈 적에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거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상上이 묻기를 “상군湘君은 어떤 신神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堯임금의 딸이고 순舜임금의 아내입니다.” 하였다.
시황始皇이 크게 노하여 상산湘山의 나무를 베어 그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처음에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은
부父‧
조祖 이상이 5대에 걸쳐
한韓나라의 정승이 되었다.
注+[頭註]장량張良의 할아버지인 개지開地가 한韓나라의 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양왕襄王을 도왔고, 아버지인 평平이 이왕釐王‧환혜왕桓惠王을 도와 모두 5대代에 걸쳐 정승 노릇을 하였다.
한韓나라가 망하자 장량張良은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시황始皇이 동쪽 지방을 유람하여
양무陽武의
박랑사博浪沙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진류陳留에 양무현陽武縣이 있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지금의 정주鄭州 양무陽武 동북쪽 18리 지점이 한漢나라 양무陽武의 옛 성城이니, 박랑사博浪沙는 양무陽武 남쪽에 있다.” 하였다.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여지요람輿地要覽》을 살펴보건대 변량로汴梁路 연주延州 양무陽武 남쪽에 박랑사정博浪沙亭이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가운데에 이르니,
장량張良이
역사力士를 시켜 철퇴를 잡고서
시황始皇을 저격하게
注+[釋義]원숭이가 물건을 엿볼 적에 반드시 엎드려서 기다리니, 무릇 엎드려 있다가 습격하는 것을 일러 저격狙擊이라고 한다. 하였으나 잘못하여
부거副車를 맞추었다.
시황始皇이 놀라 찾았으나 잡지 못하자, 천하에 명령하여 열흘 동안 크게 수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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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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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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