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5)

통감절요(5)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後皇帝 下 附魏, 吳, 晉三僭國年紀
후황제後皇帝(劉禪) - 참국僭國(참람한 나라)의 연기年紀를 붙였다. -
[甲寅]十二年이라 〈魏靑龍二年이요 吳嘉禾三年이라
건흥建興 12년(갑인 234) - 나라 청룡靑龍 2년이고, 나라 가화嘉禾 3년이다. -
春二月 丞相亮 率大衆十萬하고 由斜谷하야 伐魏할새 遣使約吳하야 同時大擧하다
봄 2월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사곡斜谷을 경유하여 나라를 정벌할 때에 사자使者를 보내 나라와 약속하여 동시에 크게 군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 夏四月 丞相亮 至郿하야 軍於渭水之南하니 司馬懿引軍度(渡)渭하야 背水爲壘以拒之할새 謂諸將曰
○ 여름 4월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미현郿縣에 이르러 위수渭水의 남쪽에 주둔하니,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위수渭水를 건너서 강을 등지고 보루를 만들어 대항할 때에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若出武功注+[通鑑要解]武功 縣名이니 屬右扶風이라하야 依山而東이면 誠爲可憂어니와 若西止五丈原이면 諸將 無事矣注+[通鑑要解]懿已料亮之必屯五丈原이나 而力不能制일새 姑爲此言하야 以安諸將之心也리라하더니 果屯五丈原注+[釋義]在扶風郿縣域中하니라하다
제갈량諸葛亮이 만약 무공현武功縣注+[通鑑要解]무공武功의 이름이니, 우부풍右扶風에 속한다. 으로 나와서 산을 의지하여 동쪽으로 오면 진실로 우려할 만하지만 만약 서쪽으로 오장원五丈原에 그치면 장수들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注+[通鑑要解]若西止五丈原 제장무사의諸將無事矣:사마의司馬懿제갈량諸葛亮이 반드시 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할 것임을 헤아렸으나 자신의 힘이 제갈량諸葛亮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우선 이러한 말을 하여 장수들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이다. ” 하였는데, 제갈량諸葛亮이 과연 오장원五丈原注+[釋義]오장원五丈原부풍군扶風郡 미현郿縣의 구역 안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亮以前者數出 皆以運糧不繼하야 使己志不伸이라하야 乃分兵屯田하야 爲久駐之基하니 耕者雜於渭濱居民之間이로되百姓安堵하고 軍無私焉이러라
제갈량諸葛亮은 지난번에 여러 번 출동했을 때에 모두 군량을 운반해 오는 것이 계속 이어지지 못해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다 하여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둔전을 해서 오랫동안 머물 기반을 닦으니, 둔전하는 병사들이 위수渭水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사들은 사리사욕을 꾀함이 없었다.
[新增]胡氏曰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司馬懿之言 譎也
사마의司馬懿의 말은 속임수이다.
實畏孔明屯五丈原하고 又憚於逆擊이라 爲此語하야 以安其下爾
실제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할까 두려워하고, 또 역공逆攻을 할까 꺼렸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서 부하들을 안심시킨 것일 뿐이다.
孔明 此擧 蓋不復爲退計矣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이 거사에 다시는 후퇴할 계책을 하지 않았다.
親統大軍하고 入他人境하야 久駐而魏師不敢攻하고 雜耕而居民無所苦하니 三代之兵若時雨 孔明其庶幾矣어늘
그리하여 친히 대군大軍을 통솔하고 다른 나라의 국경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주둔하였으나 나라 군대가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고, 둔전屯田하는 병사들이 백성들 사이에 섞여서 경작하였으나 거주하는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삼대시대三代時代의 군대를 백성들이 단비처럼 여겼는 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거의 이에 가까웠다.
或譏其短於將略注+[頭註]하니 可謂誤矣로다
그런데도 혹자는 그가 장수의 도략韜略에 있어서 부족하다고 비판하니,注+[頭註]이 내용은 아래 진수陳壽사평史評에 보인다. 잘못이라고 이를 만하다.”
八月 懿與亮相守百餘日이라
8월에 사마의司馬懿제갈량諸葛亮과 서로 백여 일 동안 대치했다.
數挑戰호되 懿不出이어늘 乃遺懿巾注+[釋義]婦人喪冠也 以巾上覆髮하니 如帕之類[通鑑要解]據劉昭續輿服志컨대 公卿, 列侯夫人紺繒幗이라하니 蓋婦人首飾之稱이요 不特喪冠也婦人之服한대
제갈량諸葛亮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사마의司馬懿가 출전하지 않자 제갈량諸葛亮이 마침내 사마의司馬懿에게 부인婦人들이 사용하는 수식首飾건괵巾幗注+[釋義]巾幗은 부인의 상관喪冠이다. 두건의 윗부분으로 머리카락을 덮어씌우는 것이니, (머리띠)과 같은 따위이다. [通鑑要解]劉昭의 《속여복지續輿服志》에 의거하건대 “공경公卿열후列侯부인夫人감색紺色 비단으로 을 한다.” 하였으니, 건괵巾幗부인婦人의 머리 장식의 명칭이요, 다만 상관喪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을 보내었다.
懿怒하야 上表請戰하니 魏主叡使衛尉辛毗 杖節爲軍師하야 以制之하다
사마의司馬懿가 노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싸울 것을 청하니, 위주魏主 조예曹叡위위衛尉신비辛毗로 하여금 을 잡고 군사軍師가 되어 제재하게 하였다.
護軍姜維謂亮曰 辛佐治注+[通鑑要解]佐治 辛毗字杖節而到하니 不復出矣리이다 亮曰 彼本無戰情이로되 所以固請戰者 以示武於其衆耳니라
호군護軍 강유姜維제갈량諸葛亮에게 이르기를 “신좌치辛佐治(辛毗)注+[通鑑要解]좌치佐治신비辛毗이다. 을 잡고 이르렀으니, 적이 다시는 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저들이 본래 싸울 마음이 없는데 굳이 출전을 청한 이유는 그의 무리들에게 위무威武를 보이고자 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遣使者하야 至懿軍한대 懿問其寢食及事之煩簡하고 不問戎事注+[通鑑要解]懿所憚者亮也 問其寢食及事之煩簡하야 以覘壽命之久近耳 戎事何必問耶리오
제갈량諸葛亮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마의司馬懿의 군중에 이르자, 사마의司馬懿제갈량諸葛亮이 자고 먹는 것과 매일 처리하는 일의 많고 적음만 묻고 군대의 일을 묻지 않았다.注+[通鑑要解]懿問其寢食……不問戎事:사마의司馬懿가 두려워한 것은 제갈량諸葛亮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잠자는 것과 먹는 것과 처리하는 일의 많고 적음을 물어 수명壽命의 길고 짧음을 엿보려 한 것일 뿐이니, 어찌 군대의 일을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使者對曰 諸葛公 夙興夜寐하야 罰二十已上 皆親覽焉호되 不至數升注+[通鑑要解]古升小故 數升이라이니이다 懿告人曰 諸葛孔明 食少事煩하니 其能久乎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제갈공諸葛公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20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살피되 먹는 음식은 몇 되注+[通鑑要解]옛날의 은 작기 때문에 몇 이라고 한 것이다. 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니, 사마의司馬懿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이 하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病篤이어늘 帝使尙書僕射李福으로 省侍하고 因諮以國家大計러니 亮曰 公所問者注+[頭註]蔣琬字 其宜也니라
제갈량諸葛亮의 병이 위독해지자, 황제가 상서복야尙書僕射 이복李福으로 하여금 살피면서 모시게 하고 인하여 국가國家대계大計를 묻게 하였는데,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이 물은 것은 공염公琰(蔣琬)注+[頭註]공염公琰장완蔣琬이다. 이 마땅하다.” 하였다.
復請蔣琬之後 誰可任 亮曰 文偉注+[通鑑要解]費褘字可以繼之니라
이복李福이 다시 “장완蔣琬의 뒤에는 누가 맡길 만한 자입니까?” 하고 묻자, 제갈량諸葛亮은 말하기를 “문위文偉(費褘)注+[通鑑要解]문위文偉비위費褘이다. 가 뒤를 이을 만하다.” 하였다.
又問其次한대 不答이러라
또 그 다음을 묻자, 제갈량諸葛亮이 대답하지 않았다.
是月 卒於軍中하니 長史楊儀 整軍而出하다
이달에 제갈량諸葛亮이 군중에서 죽으니, 장사長史 양의楊儀가 군대를 정돈하여 물러 나왔다.
百姓 奔告司馬懿한대 懿追之러니 姜維令儀 反旗鳴鼓하야 若將向懿者하니 懿斂軍退하야 不敢偪이러라
백성들이 달려가 사마의司馬懿에게 고하자 사마의司馬懿가 추격하였는데, 강유姜維양의楊儀로 하여금 깃발을 돌리고(군대를 돌이키고) 북을 울려서 진군하여 사마의司馬懿를 공격할 것처럼 하니,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거두고 후퇴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於是 儀結陳而去하야 入谷注+[頭註] 이라然後 發喪하니라
이에 양의楊儀가 진영을 구축하고 떠나서 사곡斜谷注+[頭註]사곡斜谷이다. 에 들어온 뒤에야 을 발표하였다.
百姓 爲之諺曰 死諸葛 走生仲達이라하니 懿聞之하고 笑曰 吾能料生이요 不能料死故也로다
백성들이 이 때문에 속담을 만들어 이르기를 “죽은 제갈량諸葛亮이 산 중달仲達(司馬懿의 )을 패주시켰다.” 하니, 사마의司馬懿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가 산 것만 헤아렸지 죽은 것은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懿案行亮之營壘處所하고 歎曰 天下奇才로다
사마의司馬懿제갈량諸葛亮영루營壘가 있는 곳을 순시하고서 탄식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다.
追至赤岸이라가 不及而還注+[通鑑要解] 趙子龍 至此橋而退軍할새 燒壞赤崖閣道緣谷一百餘里 其閣梁一頭入山腹이요 一頭立柱於水中이러니 今水大而急하야 不得安柱 赤崖 卽赤岸이라하다
추격하여 적안赤岸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注+[通鑑要解]追至赤岸 불급이환不及而還:예전에 조자룡趙子龍(趙雲)이 이 다리에 이르러 군대를 퇴각시킬 때에 골짜기를 따라 1백여 리에 이르는 적애赤崖각도閣道를 불태워 파괴하였다. 각도閣道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한 갈래는 산허리로 들어가고 한 갈래는 물속에다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은 수량이 많고 물살이 급하여 기둥을 지탱할 수가 없다. 적애赤崖는 바로 적안赤岸이다.
[新增]尹氏曰
[新增]尹氏(尹莘)가 말하였다.
孔明 進軍渭南하야 分兵屯田하니 懿雖引兵拒守 甘受巾幗婦人之服하야 勢已窮蹙이어늘 而亮乃告終이라
제갈공명諸葛孔明위수渭水의 남쪽으로 진군進軍하여 병력을 나누어서 둔전屯田을 하니, 사마의司馬懿가 비록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항거하고 지켰으나 부인婦人들이 사용하는 건괵巾幗을 기꺼이 받아서 형세가 이미 위축되었는데 제갈량諸葛亮이 마침내 죽음을 고하였다.
天不祚漢하야 使之功業不就하니 謂之何哉리오
하늘이 나라를 돕지 않아서 그의 공업功業이 성취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이나 亮受遺託孤之際 蓋嘗以竭股肱之力하고 效忠正之節하야 繼之以死 爲告하고 至其出軍上表하야는 又以鞠躬盡力하야 死而後已 爲言하니 由今觀之컨대 誠謂不食其言矣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유명遺命을 받고 어린 고아인 유선劉禪을 부탁받았을 때에 일찍이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고 충정忠正의 절개를 바쳐서 죽음으로 잇겠다고 고하였고, 군대를 출동하면서 출사표出師表를 올림에 이르러서는 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매진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말하였으니, 이제 살펴보면 진실로 식언食言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其討賊之義 死而不屈하야 至今凜凜하야 猶有生氣하니 其視曹, 馬注+[頭註]曹操, 司馬懿輩欺孤弱寡하야 狐媚以取人家國者하면 曾犬彘之不若也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죽어도 굽히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늠름하여 오히려 생기가 있으니, 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注+[頭註]조마曹馬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이다. 등이 고아를 속이고 과부를 무시하여 여우처럼 홀려서 남의 집안과 나라를 취한 것에 비한다면 일찍이 저들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世豈可以成敗論人物哉
그러하니 세상에 어찌 성패만 가지고 인물을 논할 수 있겠는가.”
前軍師注+[通鑑要解]蜀置中軍師, 前軍師, 後軍師하니라魏延 勇猛過人하고 善養士卒이라
처음에 전군사前軍師注+[通鑑要解]촉한蜀漢중군사中軍師전군사前軍師후군사後軍師를 두었다. 위연魏延이 용맹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사졸들을 잘 길렀다.
每隨亮出 輒欲請兵萬人하야 與亮異道하야 會于潼關 如韓信故事注+[頭註]見四卷丁酉年이라호되 制而不許한대 常謂亮爲怯이라하고 歎恨己才用之不盡하니라
제갈량諸葛亮을 따라 출전할 때마다 번번이 만 명의 병력을 청하여 제갈량諸葛亮과 길을 달리하여 진출해서 동관潼關에서 만나 옛날 한신韓信고사故事注+[頭註]한신韓信이 군대를 청한 고사故事는 앞의 4권 정유년조丁酉年條(B.C.204)에 보인다. 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 제갈량諸葛亮이 제재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위연魏延이 항상 제갈량諸葛亮을 일러 겁쟁이라 하고 자신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 諸軍 還成都하니 諡諸葛亮曰 忠武侯라하다
○ 여러 군대가 성도成都로 돌아오니, 제갈량諸葛亮의 시호를 충무후忠武侯라 하였다.
丞相長史張裔 常稱亮曰 公 賞不遺遠하고 罰不阿近하며 爵不可以無功取하고 刑不可以貴勢免하니 賢愚之所以僉忘其身注+[頭註] 皆也者也라하니라
승상장사丞相長史장예張裔가 항상 제갈량諸葛亮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은 상을 내릴 때에 소원한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내릴 때에 가까운 사람을 두둔하지 않았으며, 관작은 이 없이 취할 수 없고 형벌은 귀한 형세로 면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모두注+[頭註]은 모두이다. 자기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했던 이유이다.” 하였다.
陳壽評曰
진수陳壽에 말하였다.
諸葛亮之爲相國也 撫百姓하야 示儀軌하고 約官職하야 從權制하고 開誠心, 布公道하며 盡忠益時者 雖讐必賞하고 犯法怠慢者 雖親必罰하고 服罪輸情者 雖重必釋하고 游辭巧飾者 雖輕必戮하야 善無微而不賞하고 惡無纖而不貶이라
제갈량諸葛亮상국相國이 되었을 때에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의궤儀軌(모범)를 보이고 관직을 줄여서 권제權制(임시의 제도)를 따르며 성심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정한 를 폈으며, 충성을 다하여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을 주었고 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를 자복하고 실정實情을 바치는 자는 비록 무거운 죄라도 반드시 풀어 주고 근거 없는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여서, 은 아무리 작아도 상 주지 않음이 없고 은 아무리 작아도 폄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庶事精練하고 物理其本注+[頭註]言事事物物 必從其本而治也하며 循名責實하야 虛僞不齒하야 終於邦域之內 咸畏而愛之하야 刑政雖峻而無怨者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
모든 일을 하게 단련하고 일마다 근본에 따라 다스리며,注+[頭註]모든 일과 모든 물건을 반드시 그 근본에 따라 다스림을 말한다. 명분에 따라 실제를 요구해서 허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끝내 나라 안에서 모두 두려워하고 사랑해서 형법刑法정령政令이 비록 준엄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마음 씀이 공평하고 을 권면하고 을 경계함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可謂識治之良才 管, 蕭注+[頭註]管仲, 蕭何之亞匹矣注+[原註]本傳 又云 連年動衆이로되 未能成功하니 蓋應變將略 非其所長이라하니라로라
제갈량諸葛亮은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훌륭한 인재이고 관중管仲소하蕭何注+[頭註]관소管蕭관중管仲소하蕭何이다. 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이를 만하다.注+[原註]諸葛亮之爲相國也……管蕭之亞匹矣:《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또 이르기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장략將略은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다.” 하였다.
〈出亮本傳〉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나옴 -
朱黼曰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孔明 高臥南陽하야 自比管, 樂注+[頭註]管仲, 樂毅하니 時人 莫之許也
제갈공명諸葛孔明남양南陽 땅에 은거하여 스스로 관중管仲악의樂毅注+[頭註]관악管樂관중管仲악의樂毅이다. 에게 견주니, 당시 사람들이 허여하지 않았다.
余切(竊)論之컨대 孔明 王者之佐 伊尹注+[頭註]이요之儔也
내가 적이 논하건대 제갈공명諸葛孔明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질로 이윤伊尹注+[頭註]이고 이고 이름은 이다. 의 무리이다.
管, 樂之比 特主乎撥亂繼絶之志하야 一時自寓之言耳 若陳壽者 奚足以知孔明哉리오
관중管仲악의樂毅에게 자신을 견준 것은 다만 을 다스리고 끊어진 를 잇는 뜻을 위주로 해서 한때 스스로 붙인 말일 뿐이니, 진수陳壽와 같은 자가 어찌 충분히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알았겠는가.
夫孔明之於伊尹 所遇雖異 處心則同하니 要未可以差殊觀也
제갈공명諸葛孔明이윤伊尹에게 있어서 만난 처지는 비록 달랐으나 마음에 보존한 것은 똑같았으니, 요컨대 차별을 두어 보아서는 안 된다.
夫躬耕有莘而樂堯舜之道하고 躬耕南陽而吟梁父注+[附註] 步出齊城門하야 遙望蕩陰里 里中有三墳하니 纍纍正相似 問是誰家塚 田疆古冶氏 力能排南山이요 文能絶地紀 一朝被讒言하야 二桃殺三士 誰能爲此謀 相國齊晏子라하니라 景公 勇士公孫接, 田開疆, 古冶子하니 三人見晏子不禮 晏子請去之하고 乃饋之二桃하야 令計功而食하다 公孫接, 田開疆云云한대 古冶子曰 吾嘗從君濟河할새 黿唫左驂이어늘 左操馬尾하고 右挈黿頭而出하니 若冶之功 可以食桃矣니라 二子恥其功不及하야 自殺하니 古冶子亦自殺하다 孔明步齊城할새 見三墳하고 作是(今)[吟]以嘆之하니라 同一隱晦也 聘幣三往而後起하고 枉駕三顧而後從 同一出處也 一夫不被則有納溝之恥하고 漢室未復則爲一己之責 同是自任也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몸소 밭을 갈면서 를 즐거워하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몸소 남양南陽 땅에서 밭을 갈면서 양보음梁父吟注+[附註]양보음梁甫吟에 “걸어서 나라 도성문都城門을 나가 멀리 탕음리蕩陰里를 바라보네. 마을 가운데 세 무덤이 있으니 연이어 있는 것이 서로 똑같구나. 뉘 집 무덤이냐고 물었더니 전개강田開疆고야씨古冶氏라 하네. 힘은 남산南山을 밀어낼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의 이치를 다할 수 있었네. 하루아침에 참언讒言을 입어 두 개의 복숭아에 세 장사壯士 죽었다네. 누가 이러한 계책을 냈는가. 나라의 상국相國안자晏子라오.” 하였다. 나라 경공景公용사勇士공손접公孫接전개강田開疆고야자古冶子를 길렀는데, 이들 세 사람은 안자晏子를 보고도 예우하지 않았다. 안자晏子가 이들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마침내 복숭아 두 개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을 따져서 먹게 하였다. 공손접公孫接전개강田開疆이 복숭아를 먹기 위해 이리이리 자신의 공로를 말하자, 고야자古冶子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군주를 따라 황하黃河를 건널 때 큰 자라가 왼쪽 참마驂馬를 삼켰는데, 내가 왼손으로는 말 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자라목을 잡고서 나왔으니, 나의 공으로 말하자면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 하였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고야자古冶子에게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자살하니, 고야자古冶子 또한 자살하였다. 제갈공명諸葛孔明나라 을 걸어 나올 적에 이들의 세 무덤을 보고 이 양보음梁甫吟을 지어 탄식하였다. 을 읊은 것은 똑같은 은둔이요, 〈이윤伊尹탕왕湯王이〉 폐백을 가지고 빙문聘問하여 세 차례나 찾아간 뒤에야 나오고 〈제갈공명諸葛孔明소열제昭烈帝가〉 직접 왕림枉臨하여 세 차례나 초려草廬로 찾아온 뒤에 따른 것은 똑같은 출처이며, 〈이윤伊尹이〉 한 지아비라도 은택을 입히지 못하면 도랑에 밀어 넣은 것처럼 부끄러워하였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나라 황실皇室흥복興復하지 못하면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것은 똑같은 자임自任이었다.
伊尹 往來湯桀之間호되 二國 不以爲間注+[頭註] 去聲이니 疾也 訾也하고 就桀而復伐之호되 天下不以爲叛하고 相太甲而復放之하고 復太甲而終相之호되 天下不以爲專이라
이윤伊尹임금과 걸왕桀王의 사이를 왕래하였으나 두 나라에서 일찍이 헐뜯지注+[頭註]거성去聲이니, 미워하고 헐뜯는 것이다. 않았고, 걸왕桀王에게 나아갔다가 다시 걸왕桀王을 정벌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은 그가 배반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태갑太甲을 돕다가 다시 추방하고 태갑太甲을 돌아오게 하여 끝내 그를 도왔으나 천하 사람들은 그가 전횡專橫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孔明兄弟 分仕三國注+[頭註]諸葛誕 仕魏하고 諸葛瞻 仕吳하니라호되 國人 不以爲二하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형제가 세 나라에 나뉘어서 벼슬하였으나注+[頭註]제갈량諸葛亮촉한蜀漢에서 벼슬하고〉 제갈탄諸葛誕나라에서 벼슬하고, 제갈첨諸葛瞻나라에서 벼슬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그가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하지 않았고,
勸昭烈伐劉璋而迄取之호되 後世不以爲貪하고
소열제昭烈帝에게 유장劉璋을 치도록 권면하고 끝내 취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가 탐욕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昭烈 令輔後帝하고 且曰 苟不可輔어든 公自取之라호되 孔明 不以爲嫌하고
소열제昭烈帝후제後帝(劉禪)를 보좌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보필할 수 없거든 공이 직접 취하라.’ 하였으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이를 혐의하지 않았으며,
專國一十二年호되 後帝不以爲偪하니 果何修而得此哉
국정國政을 12년 동안 독단하였으나 후제後帝가 핍박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과연 어떻게 닦았기에 이러한 훌륭한 명성을 얻었는가.
孟子曰 伊尹 耕於有莘之野 非其道也 非其義也어든 祿之天下라도 弗顧也하고 繫馬千駟라도 弗視也라하시니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이윤伊尹유신有莘의 들에서 밭 갈면서 가 아니고 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말 천사千駟를 매어 놓더라도 보지 않았다.’ 하였으니,
豈非其素所不屑注+[頭註] 潔也者 足以取信於人哉
어찌 평소에 부귀富貴를 좋게 여기지 않은注+[頭註]은 깨끗하게(좋게) 여기는 것이다. 것이 충분히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方孔明蕭然草廬之中하고 資衣食於耒耜之業하야 擁膝長嘯하야 不求聞達하니 顧豈有一毫富貴之念이리오
제갈공명諸葛孔明초려草廬 가운데에서 쓸쓸히 살고 쟁기로 농사짓는 데에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길게 휘파람 불면서 영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털끝만큼인들 부귀해지려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迫之而起 要爲天下大義하야 撥亂繼絶耳 其肯以天下動其心乎 其肯負其主하야 以利其家乎 其肯爲不義하야 以利其身乎
사람들에게 몰려서 세상에 나온 것은 요컨대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해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고 끊어진 대를 잇고자 해서였을 뿐이니, 어찌 천하로 마음을 동요하려 하였겠으며, 어찌 군주를 저버리고 자기 집안을 이롭게 하려고 하였겠으며, 어찌 불의不義를 저질러서 자기 몸을 이롭게 하려고 하였겠는가.”
[新增]南軒張氏贊曰
[新增]南軒 장씨張氏(張栻)의 에 말하였다.
維忠武侯 識其大者하니 仗義履仁하야 卓然不舍(捨)라
충무후忠武侯는 그 대체大體를 알았으니, 를 따르고 을 행하여 우뚝 서서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方臥南陽 若將終身이러니 三顧而起하니 時哉屈伸이라
남양南陽 땅에 은거할 때에는 이대로 일생을 마칠 듯하였는데 삼고초려三顧草廬한 뒤에 나오니, 이는 때에 따라 굽히고 편 것이다.
難平者事注+[頭註] 音病이니 平其不平曰平이라 不昧者幾 大綱旣得 萬目乃隨
평탄하기 어려운 것은 일이고注+[頭註]은 음이 병(평)이니, 평탄하지 않은 것을 평탄하게 하는 것을 이라 한다. 어둡지 않은 것은 기미이니, 큰 강령綱領을 이미 얻으면 만 개의 조목條目은 따르게 마련이다.
我奉天討하야 不震不竦注+[頭註] 不震動, 不竦懼라하니라이라 惟一其心하야 而以時動하니 噫侯此心이여 萬世不泯이라
천토天討(하늘의 토벌)를 봉행하여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므로注+[頭註]부진불송不震不竦은 《시전통석詩傳通釋》에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음이다.” 하였다. 오직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때에 따라 움직이니, 아!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이 마음이여,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遺像有嚴하니 瞻者起敬이어다
유상遺像이 엄숙하니 보는 자들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킬지어다.”
長水校尉廖立 自謂才名 宜爲諸葛亮之副라하더니 嘗(常)以職位游散이라하야 怏怨謗無已어늘 廢立爲民하야 徙之注+[通鑑要解] 音岷이니 汶山 本冉이라 漢武帝置汶山郡하니 三國系蜀이라이러니
처음에 장수교위長水校尉 요립廖立은 스스로 자신의 재주와 명망이 응당 제갈량諸葛亮에게 버금간다고 여겼는데, 항상 직위職位가 일정치 않고 한산직閑散職이라 하여 앙앙불락하여 원망하고 비방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제갈량諸葛亮요립廖立을 폐하여 평민으로 삼아 문산汶山注+[通鑑要解]이 민이니, 문산汶山은 본래 염방국冉駹國이다. 나라 무제武帝문산군汶山郡을 설치하였으니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속하였다. 으로 유배 보냈다.
及亮卒 垂泣曰 吾終爲左袵矣로다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끝내 좌임左袵(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하는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다.
李平聞之하고 亦發病死하다
이평李平제갈량諸葛亮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병이 나서 죽었다.
常冀亮復收己하야 得自補復이러니 策後人不能故也注+[釋義]按綱目分注辛亥九年 丞相亮攻祁山時 以李嚴으로 爲中都護하야 署府事하고 名平하다 會天霖雨하니 平主督運이러니 恐糧不繼하야 遣參軍하야 呼亮還하다 亮旣退軍 平乃更言하여 軍糧饒足이어늘 何爲而退오하야 欲殺督運하야 以解不辦之責이라 亮出其前後手書하니 本末違錯이라 平辭窮謝罪하니 於是 亮免其官하고 削爵土하야 徙梓(橦)[潼]郡하고 復以平子豐으로 爲中郞將, 參軍事하니라[頭註]策 料也 後之人 必不復收錄我也러라
이평李平은 항상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자기를 거두어 등용해서 스스로 과실을 보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잇는 자가 다시는 자신을 거두어 써 주지 않을 것을 헤아렸기 때문이다.注+[釋義]李平聞之……不能故也:[釋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신해辛亥 9년조年條분주分注하기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기산祁山을 공격할 때에 이엄李嚴중도호中都護로 삼아 의 일을 맡게 하고 이름을 으로 바꾸었다. 마침 날씨가 장마가 지니, 이평李平은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는데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할까 염려해서 참군參軍을 보내어 제갈량諸葛亮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이미 군대를 후퇴시킨 뒤에 이평李平이 마침내 말을 바꾸어 ‘군량이 풍족한데 어찌하여 후퇴하였습니까?’라고 하여,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는 자를 죽여서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려고 하였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이 전후에 손수 쓴 편지를 내보이니, 본말本末이 서로 어긋났다. 그리하여 이평李平이 말문이 막혀 사죄하자, 이에 제갈량諸葛亮은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와 토지를 삭탈하여 재동군梓潼郡으로 귀양 보내고 다시 이평李平의 아들 이풍李豐중랑장中郞將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하였다.[頭註]策은 헤아림이니,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잇는 사람이 반드시 다시는 자신을 거두어 녹용錄用하지 않을 줄을 헤아린 것이다.
習鑿齒論曰
습착치習鑿齒에 말하였다.
이라하시니 諸葛亮之使廖立垂泣하고 李嚴致死 豈徒無怨言而已哉
“옛날 관중管仲백씨伯氏병읍騈邑 300호를 빼앗았으나 일생을 마치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는데 성인聖人이 이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으니, 제갈량諸葛亮요립廖立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엄李嚴으로 하여금 죽게 한 것은 어찌 다만 원망하는 말이 없었을 뿐이었겠는가.
夫水至平而邪者取法하고 鑑至明而醜者亡怒하니 水鑑之所以能窮物而無怨者 以其無私也일새라
물은 지극히 평평하지만 간사한 자가 취하여 법으로 삼고 거울은 지극히 밝지만 추악한 자가 비춰 보고 노여워함이 없으니, 평평한 물과 밝은 거울이 물건으로 하여금 끝까지 다 드러나게 하는데도 원망함이 없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水鑑無私로도 猶以免謗이어든 況大人君子懷樂生之心하고 流矜恕之德하야 法行於不可不用하고 刑加乎自犯之罪하며 爵之而非私하고 誅之而不怒 天下有不服者乎
평평한 물과 밝은 거울이 사사로움이 없어도 오히려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대인군자大人君子가 살려 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을 펴서, 이 쓰지 않을 수 없는 데에 행해지고 형벌이 스스로 범한 죄에 가해지며, 관작을 내려도 사사로이 봐준 것이 아니고 죽여도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천하에 어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帝以丞相長史蔣琬으로 爲尙書令하야 摠統國事하다
황제가 승상장사丞相長史 장완蔣琬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아서 국사國事를 총괄하게 하였다.
新喪元帥하니 遠近 危悚호되 出類拔萃하야 處群僚之右하야 旣無戚容하고 又無喜色하야 神守擧止有如平日하니 由是 衆望 漸服이러라
이때 새로 원수元帥를 잃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으나 장완蔣琬은 무리들 가운데 뛰어나서 여러 동료들 위에 거하여, 이미 슬퍼하는 모습이 없고 또 기뻐하는 기색이 없어서 신수神守(精神)와 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으니,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신망이 점점 굴복하였다.
역주
역주1 陳壽註 : 《三國志》 〈諸葛亮傳〉에 “諸葛亮은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將略은 그의 所長이 아니다.”라고 비판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2 : 괵
역주3 : 담
역주4 : 염
역주5 斜谷 : 산골짜기의 이름이니, 陝西省 終南山에 있다. 골짜기에 두 개의 입구가 있으니, 남쪽을 褒라 하고 북쪽을 斜라 한다. 그러므로 또한 褒斜谷이라고도 칭하니, 전체 길이가 470里이다. 양 가장자리의 山勢가 험준하여 關陝을 움켜쥐고 川蜀을 控制하니, 예로부터 兵家들이 반드시 다투었던 곳이다.
역주6 梁父吟 : 제목의 뜻은 확실치 않다. 梁父는 梁甫와 통용되는 바, 이는 泰山 밑의 작은 산 이름이다. 梁甫吟은 楚 지방의 樂府曲名인데, 사람이 죽으면 梁父山에 매장한다고 해서 葬歌라 하기도 한다. 현재 전해지는 梁父吟辭로는 諸葛亮과 李白의 작품이 있다.
역주7 : 휵
역주8 詩通釋 : 元나라 劉瑾이 지은 《詩傳通釋》을 가리킨다. 劉瑾은 字가 公瑾이고 安福 사람이다.
역주9 : 앙
역주10 : 민
역주11 : 방
역주12 : 경
역주13 管仲……聖人以謂難 : 이 내용은 《論語》 〈憲問〉에 보인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