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祖入關에 約法三章하야 悉除苛法이로되 而挾書之律이 獨承秦弊라가 至惠帝始除하니 是高祖惡聞詩書之習이 不減於秦也라
使入關之初
와 或天下旣平之日
에 能弛此禁
이면 則遺書散漫
이 往往復出
하야 孔壁雖壊
注+[附註]書序에 至魯共(恭)王하야 好治宮室이라 壞孔子舊宅하야 以廣其居러니 壁中에 得先人所藏古文虞, 夏, 商, 周之書及傳과 論語, 孝經하니라 共王은 漢景帝子니 名餘也라 傳은 謂春秋라나 而全書不亡
이리니 然則高帝不事詩書
가 其害乃甚於秦之焚棄也
니라
“진秦나라 사람은 문학文學을 엄하게 금해서 책을 간직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도無道함이 지극하다.
고조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적에 삼장三章의 법을 약속하여 까다로운 법을 모두 제거하였으나 협서율挾書律이 홀로 진秦나라의 폐단을 이어오다가 혜제惠帝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제거되었으니, 이는 고조高祖의 시서詩書를 싫어한 습관이 진秦나라보다 덜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관중關中에 들어갔던 초기와 혹
천하天下가 이미 평정되었을 때에 이 금령을 풀어주었더라면 흩어지고 없어진
유서遺書가 왕왕 다시 나와서
공자孔子의 옛 집 벽속에서 나온 책이 비록 없어졌더라도
注+[附註]《서경書經》의 서序에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궁실을 다스리기를 좋아하였다. 공자孔子의 옛 집을 헐어 거처하는 집을 넓히려 하였는데, 벽 속에서 선대先代 사람들이 감추어 둔 고문古文인 우虞‧하夏‧상商‧주周의 글(書經)과 전傳 및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얻었다. 공왕共王은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이니, 이름이 여餘이다. 전傳은 《춘추전春秋傳》을 이른다. 전서全書가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니, 그렇다면
고제高帝가
시서詩書를 일삼지 않은 폐해가 도리어 책을 불태운
진秦나라보다 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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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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