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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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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乙巳]神龍元年이라
신룡神龍 원년元年(을사 705)
春正月 太后疾甚하니 張易之, 張昌宗 居中用事
봄 정월에 태후太后가 병환이 심하니,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이 궁중에서 용사用事하였다.
張柬之, 崔玄暐 與中臺右丞敬暉注+[頭註]姓名也 司刑少卿桓彦範 相王府司馬袁恕己 謀誅之할새 謂右羽林衛大將軍李多祚曰
장간지張柬之최현위崔玄暐중대우승中臺右丞 경휘敬暉,注+[頭註]경휘敬暉성명姓名이다. 사형소경司刑少卿 환언범桓彦範, 상왕부사마相王府司馬 원서기袁恕己와 함께 이들을 죽일 것을 모의할 적에 장간지張柬之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 이다조李多祚에게 이르기를
將軍今日富貴 誰所致也 多祚泣曰 大帝也로이다
“장군의 오늘날의 부귀는 누가 이루어준 것인가?” 하니, 이다조李多祚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고종대제高宗大帝이십니다.” 하였다.
柬之曰 今大帝之子 爲二豎注+[頭註] 僮僕之未冠者 輕之하야 以比奴僕이라 所危하니 將軍 不思報大帝之德乎
장간지張柬之가 말하기를 “지금 대제大帝의 두 아들이 두 간신에게注+[頭註]관례冠禮를 하지 않은 동복僮僕이니, 경시하여 노복奴僕에 견준 것이다. 위해를 받고 있는데 장군은 대제大帝의 은덕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多祚曰 苟利國家인댄 惟相公處分이라하니 遂與定謀하다
이다조李多祚가 대답하기를 “만일 국가에 이롭다면 오직 상공相公의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柬之又用彦範, 暉及右散騎侍郞李하야 皆爲左, 右羽林將軍하고 委以禁兵이러니
장간지張柬之환언범桓彦範경휘敬暉, 우산기시랑右散騎侍郞 이담李湛을 등용하여 모두 우우림위장군右羽林衛將軍으로 삼고 금병禁兵을 이들에게 맡겼는데,
俄而 姚元之注+[頭註]元之 姚元崇字也 突厥叱列元崇反하니 太后命元崇以字行이러니 下卷癸丑年 避開元尊號하야 復名崇하니라自靈武至都어늘 柬之, 彦範 相謂曰 事濟矣라하고 遂以其謀告之하니
얼마 있다가 요원지姚元之注+[頭註]원지元之요원숭姚元崇이다. 당시에 돌궐突厥질열원숭叱列元崇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후가 요원숭姚元崇에게 명하여 를 사용하라고 하였는데, 하권 계축년癸丑年(713)에 개원開元의 존호를 피하여 다시 요숭姚崇이라 이름하였다.영무현靈武縣에서 도성에 이르자, 장간지張柬之환언범桓彦範이 서로 이르기를 “〈당나라를 광복匡復하는〉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고는 마침내 그들의 계책을 요원지姚元之에게 말하였다.
太子於北門 起居注+[釋義]唐分宰相爲 故稱南牙(衙) 宦寺爲北司 故稱北門이라 [附註] 洛陽宮北門 亦曰玄武門이라 不從端門入하고 而從北門入하야 問起居 取便近이라 起居 問飮膳之增損 寢處之安否也 彦範, 暉謁見하고 密陳其策한대 太子許之하다
이때 태자太子북문北門에서 기거하였는데,注+[釋義]나라는 재상宰相이 거처하는 곳을 구별하여 남사南司라 하였으므로 남아南衙라 칭하고, 환시宦寺북사北司라 하였으므로 북문北門이라 칭하였다. [附註] 낙양궁洛陽宮 북문北門을 또한 현무문玄武門이라 하였다. 단문端門(正門)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북문北門을 따라 들어가서 기거起居를 문안한 것은 편리하고 가까움을 취한 것이다. 기거起居는 음식을 먹는 양과 잠자리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 환언범桓彦範경휘敬暉가 태자를 알현하고 은밀히 그들의 계책을 아뢰자, 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癸卯 柬之, 玄暐, 彦範 與左威衛將軍薛思行等으로 帥左右羽林兵五百餘人하고 至玄武門하야 遣多祚, 湛及王同皎하야 詣東宮迎太子하니
계묘일(정월 22일)에 장간지張柬之최현위崔玄暐환언범桓彦範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설사행薛思行 등과 함께 우우림군右羽林軍 500여 명을 거느리고 현무문玄武門에 이른 다음 이다조李多祚이담李湛왕동교王同皎 등을 보내어 동궁東宮에 나아가 태자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
同皎扶抱太子上馬하고 從至玄武門하야 斬關而入하다
왕동교王同皎가 태자를 부축하여 안아서 말에 오르게 하고, 태자를 따라 현무문玄武門에 이르러 관문을 부수고 금중禁中으로 진입하였다.
太后在迎仙宮이러니 柬之等 斬易之, 昌宗於한대
이때 태후가 영선궁迎仙宮에 있었는데, 장간지張柬之 등이 낭무廊廡 아래에서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을 목 베자,
太后驚起하야 問曰 亂者誰耶 對曰 張易之, 昌宗 謀反이어늘 臣等 奉太子令하야 誅之하니이다
태후가 놀라 일어나서 묻기를 “난을 일으킨 자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이 모반하므로 신 등이 태자의 명령을 받들어 죽였습니다.” 하였다.
太后見太子하고 曰 乃汝耶
태후가 태자를 보고 말하기를 “바로 너였더냐?
旣誅하니 可還東宮하라
역적신逆賊臣이 이미 죽임을 당하였으니, 너는 동궁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彦範進曰 太子安得更歸리잇고
환언범桓彦範이 나와 말하기를 “태자가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天皇注+[頭註]甲戌年 高宗稱天皇하고 皇后稱天后하니라 以愛子託陛下하시니 今年齒已長이어늘 久居東宮이라
옛날에 천황天皇께서注+[頭註]갑술년甲戌年(674)에 고종高宗천황天皇이라 칭하고 황후皇后천후天后라 칭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폐하에게 부탁하셨는데, 지금 연치가 이미 성년이 되었는데도 오랫동안 동궁에 계십니다.
天意人心 久思李氏하고 群臣不忘太宗天皇之德이라 故奉太子하야 誅賊臣하니 願傳位太子하야 以順天人之望하소서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씨李氏를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고, 여러 신하들이 태종太宗천황天皇(高宗)의 은덕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태자를 받들어 역신逆臣을 죽인 것이니, 원컨대 태자에게 전위傳位하여 하늘과 사람의 바람을 따르소서.” 하였다.
甲辰 制太子監國하고 乙巳 太后傳位於太子하니 丙午 中宗卽位하다
갑진일(23일)에 태후가 조서를 내려 태자에게 나라를 감독하게 하고 을사일(24일)에 태후가 태자에게 전위하니, 병오일(25일)에 중종中宗이 즉위하였다.
丁未 太后徙居上陽宮이어늘 帝帥百官하고 上太后尊號曰 則天大聖皇帝라하다
정미일(26일)에 태후가 상양궁上陽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황제가 백관을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칙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하였다.
[新增]胡氏曰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武氏之禍 古所未有也어늘 張柬之等注+[頭註]이라 知反正廢主하고 而不能以大義 處非常之變하야 爲唐室討罪人也
무씨武氏의 화는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다. 그런데 장간지張柬之 등은 다만注+[頭註]는 다만이다. 폐위된 군주를 복위復位시킬 줄만 알고, 대의大義로써 비상한 변고에 대처하여 나라 황실을 위해 죄인을 토벌하지는 못하였다.
武后以才人으로 蠱惑嗣帝 一罪也 戕殺主母 二罪也 黜中宗而奪之 三罪也 殺君之子三人 四罪也 自立爲帝 五罪也 廢唐宗廟 六罪也 誅鋤宗室注+[附註]戊子年 殺韓王元嘉, 霍王元軌, 魯王靈夔하니 皆高祖子也 越王貞 太宗子也 黃公 元嘉子也 江都王緖 元軌子 范陽王藹 靈夔子也 瑯琊王沖 貞子也 又庚寅年 殺南安王穎等十一人하고 又太宗之子紀王愼八男 相繼被誅하며 又殺鄭王等六人하다 又庚寅年 殺淮南王安顥等十二人 及故太子賢子二人하니 於是 唐之宗室殆盡이요 其幼弱者 亦流於嶺南하니라 七罪也 穢德彰聞注+[附註]見上六郞注 又僧白馬寺主懷義得幸하야 出入 乘御馬 太后詿言有巧思라하야 使入宮營造러니 補闕王求禮表請閹之라야 庶不亂宮闈라호되 表寢不出하니라 八罪也 尊用酷吏注+[頭註]侯思正, 王弘義, 索元禮, 來俊臣, 周興之流 하야四海注+[頭註] 疾也 作刑威以殺戮하야 毒病四海之人이라九罪也
무후武后재인才人으로서 뒤를 계승한 황제皇帝(高宗)를 고혹한 것이 첫 번째 죄이고, 황후皇后를 살해한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중종中宗을 내치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세 번째 죄이고, 군주의 아들 세 명을 죽인 것이 네 번째 죄이고, 스스로 서서 황제가 된 것이 다섯 번째 죄이고, 나라 종묘를 폐한 것이 여섯 번째 죄이고, 종실宗室들을 없앤 것이注+[附註]무자년戊子年(688)에 한왕韓王 이원가李元嘉곽왕霍王 이원궤李元軌, 노왕魯王 이영기李靈夔를 죽였으니, 이들은 모두 고조高祖의 아들이다. 월왕越王 이정李貞태종太宗의 아들이고, 황공黃公 이선李譔이원가李元嘉의 아들이고, 강도왕江都王 이서李緖이원궤李元軌의 아들이고, 범양왕范陽王 이애李藹이영기李靈夔의 아들이고, 낭야왕瑯琊王 이충李沖이정李貞의 아들인데, 이들도 모두 죽였다. 또 경인년庚寅年(690)에 남안왕南安王 이영李穎 등 열한 명을 죽였고, 또 태종太宗의 아들 기왕紀王 이신李愼 등 여덟 아들이 서로 이어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정왕鄭王 이경李璥 등 여섯 명을 죽였다. 또 경인년庚寅年회남왕淮南王 이안호李安顥 등 열두 명과 옛 태자 이현李賢의 아들 두 명을 죽이니, 이에 당나라의 종실宗室이 거의 다하였으며 어리고 약한 자들도 영남嶺南에 유배 보냈다. 일곱 번째 죄이고, 더러운 덕(음탕한 행실)이 드러나 알려진 것이注+[附註]앞의 갑진년조(704) 육랑六郞에 보인다. 또 승려인 백마사白馬寺의 주지 회의懷義가 태후에게 총애를 받아 출입할 적에 어마御馬를 탔다. 태후가 거짓으로 승려가 교묘한 생각이 있다 하여 궁중에 들어와 집을 짓게 하였다. 보궐補闕 왕구례王求禮표문表文을 올려 그를 환관으로 만들어야 궁중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라고 청하였으나 표문을 묵살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여덟 번째 죄이고, 혹리酷吏注+[頭註]혹리酷吏후사정侯思正왕홍의王弘義색원례索元禮내준신來俊臣주흥周興의 무리이다. 높이 들어 등용해서注+[頭註]는 병듦이니, 독부사해毒痡四海는 형벌을 만들어 죽임으로써 천하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온 천하에 해독을 끼친 것이注+[頭註]문강文姜나라 환공桓公의 부인이고 나라 양공襄公의 누이이다. 나라 양공襄公문강文姜과 간통하고서 공자公子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桓公의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였다. 아홉 번째 죄이다.
兵旣入宮이면 當先奉太子復位하고 卽以武氏 至唐太廟하야 數其九罪하야 廢爲庶人하고 賜之死而滅其宗호되 中宗不得而與焉이니 然後 足以慰在天之靈하고 雪臣民之憤하야 而天地之常經 立矣리라
군대가 이미 궁중에 들어왔으면 마땅히 먼저 태자를 받들어 복위시키고, 즉시 무씨武氏를 데리고 나라 태묘太廟에 이르러서 아홉 가지 죄를 열거하여 꾸짖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사사賜死한 다음 그 종족을 멸하되 중종中宗이 여기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어야 하니, 그런 뒤에야 구천九天에 있는 혼령을 위로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울분을 씻을 수가 있어서 천지의 떳떳한 벼리(道)가 확립되는 것이다.
昔者 文姜注+[頭註]魯桓公夫人이요 齊襄公之妹也 襄公通而使公子彭生으로 桓公하야 殺之하니라 預弑魯桓하고 哀姜注+[頭註]魯莊公夫人也 通公子慶하고 預殺子盤, 閔公二君하니라預弑二君 聖人 例以遜書注+[頭註] 與孫通하니 春秋 書曰夫人孫于齊라하니라 하야 若其去而不返하야 以深絶之하시니 所以著恩輕而義重也
옛날에 문강文姜注+[頭註]애강哀姜나라 장공莊公의 부인이다. 공자公子 경보慶父와 간통하고, 경보慶父장공莊公서자庶子 자반子盤민공閔公 두 군주를 죽이는 데 참여하였다. 나라 환공桓公을 시해하는 데 참여하고 애강哀姜注+[頭註]과 통하니, 《춘추春秋장공莊公 원년조元年條에 “부인夫人나라로 사양하고 떠났다.[夫人孫于齊]”라고 썼다. 두 군주를 시해하는 데 참여하자, 성인聖人(孔子)이 전례대로 ‘’이라고 써서注+[頭註]적인걸狄仁傑혈식血食을 받는 일로써 무후武后를 속인 일은 앞의 무술년조戊戌年條(682)에 보인다. 마치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하여 깊이 끊으셨으니, 이는 은혜는 가볍고 가 중함을 드러낸 것이다.
武氏負九大罪하야 自絶於唐이어늘 柬之等 乃膠守常故하고 不能討治하야 使得從容傳位하고 又受顯冊, 竊尊稱하니 以是 見爲大臣하야 斷大事而無學이면 不能善始善終 決矣
무씨武氏는 아홉 가지 큰 죄를 지어서 스스로 나라를 끊었는데, 장간지張柬之 등이 마침내 떳떳한 옛 법을 고수하고 토벌하여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전위傳位하게 하고 또 옥책玉冊을 받고 존칭을 절취하게 하였으니, 이로써 대신大臣이 되어 대사大事를 결단하면서 학식이 없으면 틀림없이 시작을 잘하고 종말을 잘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或曰 使狄公而在 當有以異乎此耶 曰 狄公亦如是而已矣
혹자가 말하기를 ‘만일 적공狄公(狄仁傑)이 살아있었다면 마땅히 이와 달랐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적공狄公도 마땅히 이와 같았을 뿐이다.
觀其武氏之言하면 固不肯以血食紿之於先注+[頭註]紿 見上戊戌年이라 而以罪討之於後也리라
적공狄公무씨武氏를 설득한 말을 살펴보면 진실로 혈식血食을 받는 것으로써 앞에서 속이고注+[頭註]위씨韋氏중종中宗후비后妃이다. 죄로써 뒤에 토벌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或曰 文姜, 哀姜 與聞乎弑어니와 武氏未嘗弑也어늘 比而同之 不亦過乎
혹자가 말하기를 ‘문강文姜애강哀姜은 군주를 시해하는 일에 참여하였지만 무씨武氏는 일찍이 시해하지 않았는데 문강文姜애강哀姜과 똑같이 견주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기에,
曰 弑君, 立君 宗廟猶未亡也로되 罪已當絶이어든 況移其宗廟하고 改其國姓 是滅之矣 豈不重於弑君者耶
대답하기를 ‘군주를 시해하거나 군주를 세운 것은 종묘가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도 죄가 이미 마땅히 끊어야 하는데, 더구나 종묘를 옮기고 그 국성國姓을 바꾼 것은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니, 어찌 군주를 시해한 것보다 죄가 무겁지 않겠는가.
夫惟如是而不能討
이와 같은데도 토벌하지 못하였다.
故不旋踵 而韋氏注+[頭註]中宗之后 肆行하야 無所忌憚하야 意可以爲常事也하니라
이 때문에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위씨韋氏注+[頭註]지위가 서로 대등한 경우에 서로 이라고 부르니, 귀하게 여긴 것이다. 멋대로 행동하고 기탄하는 바가 없어서 마음에 떳떳한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였다.”
三月 이라하다
3월에 국호國號를 회복하여 이라 하였다.
○ 復立妃韋氏하야 爲皇后하다
황제가 위씨韋氏를 다시 세워 황후로 삼았다.
上在房陵 與后同幽閉하야 備嘗艱危하야 情愛甚篤이라
방릉房陵에 있을 적에 황후와 함께 유폐幽閉되어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겪어서 애정이 매우 돈독하였다.
嘗與后私誓曰 異時 幸復見天日이면惟卿所欲注+[頭註]凡敵體相呼曰卿이니 蓋貴之也이요 不相禁禦라하더니 及再爲皇后 遂干預朝政 如武后在高宗之世하니라
이 일찍이 황후와 은밀히 맹세하기를 “후일 다행히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되면 마땅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할 것이요,注+[頭註]장씨張氏장창종張昌宗장역지張易之이다. 제한하지 않겠다.” 하였는데, 위씨韋氏가 다시 황후가 되자 마침내 조정의 정사에 관여하기를 무후武后고종高宗 때에 하던 것과 똑같이 하였다.
○ 二張注+[頭註]昌宗, 易之 之誅也 洛州長史薛季 謂張柬之, 敬暉曰 二凶雖誅 , 祿注+[原註]呂産, 呂祿이니 比三思猶在하니 去草 不去根이면 終當復生이리이다
장씨張氏注+[原註]祿나라 여후呂后의 친정 조카인 여산呂産여록呂祿이니, 무삼사武三思에 비유한 것이다. 죽임을 당하자, 낙주장사洛州長史 설계창薛季昶장간지張柬之경휘敬暉에게 이르기를 “두 간흉姦凶이 비록 죽임을 당했으나 여산呂産여록呂祿注+[釋義]궤상机上은 도마 위이다. 아직 남아 있으니, 잡초를 제거할 때에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마침내 다시 나올 것입니다.” 하니,
二人曰 大事已定하니 彼猶注+[釋義]椹机之上이라
두 사람이 말하기를 “대사大事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저(武三思)는 도마 위의注+[釋義]춘추좌전春秋左傳장공莊公 6년조에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임금이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에 “설복제齧腹臍는 미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고기와 같을 뿐이다.
夫何能爲리오
어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所誅已多하니 不可復益也니라
주벌한 바가 이미 많으니, 더이상 주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季昶歎曰 吾不知死所矣로다
설계창薛季昶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느 곳에서 죽을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朝邑尉劉幽求 亦謂桓彦範, 敬暉曰 武三思尙存하니 公輩終無葬地리니
조읍위朝邑尉로 있는 유유구劉幽求가 또한 환언범桓彦範경휘敬暉에게 이르기를 “무삼사武三思가 아직 살아있으니, 들은 끝내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若不早圖 無及注+[釋義]左傳 若不早圖 後君噬臍라한대 齧腹臍 喩不可及也라하니라 이라호되 不從하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注+[通鑑要解]여자가 남에게 시집가는 것을 이라 한다. 따르지 않았다.
[史略 史評]愚按 張柬之等 但知反正廢主하고 而不能以大義爲唐室하야 討武后하고 誅三思等이라
[史略 사평史評]내가 살펴보건대 장간지張柬之 등은 다만 반정反正하여 무후武后를 폐위시킬 줄만 알았고, 대의大義로써 나라 황실皇室을 위하여 무후武后를 토벌하고 무삼사武三思 등을 죽이지 못하였다.
其末流之禍 遂至於此하니 尙誰咎哉
그러므로 그 말류末流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薛季昶所謂去草不去根이면 終當復生이요 劉幽求謂武三思尙存하니 張柬之等 終無葬地라하니 可謂有先見之知(智)矣로다
설계창薛季昶의 이른바 ‘풀을 제거할 때에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끝내 다시 나온다.’는 것이요, 유유구劉幽求가 이르기를 ‘무삼사武三思가 아직 남아 있으니 장간지張柬之 등은 끝내 장례할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견先見(미리 앞을 내다보고 앎)의 지혜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 上女安樂公主 適注+[通鑑要解]女嫁人曰適이라 三思子崇訓하다
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무삼사武三思의 아들 무숭훈武崇訓에게 시집갔다.注+[頭註]상관上官복성複姓이고, 완아婉兒는 이름이다.
上官婉兒注+[頭註]上官 複姓이요 婉兒 名也 者 辯慧善屬文하고 明習吏事하니 則天 愛之하야 自聖曆以後 百司表奏 多令參決이러니
상관완아上官婉兒라는注+[頭註]첩여婕妤여인女人의 관직명이다. 자가 말을 잘하고 총명하며 글을 잘 엮고 관리의 일에 익숙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녀를 사랑하여 성력聖曆 연간 이후로 백사百司에서 아뢴 표문表文을 결정할 적에 많이 참여하게 하였다.
及上卽位 又使專掌制命하야 益委任之하고 拜爲注+[頭註]婦官名이라 하야 用事於中하니
이 즉위한 뒤에 또 그녀로 하여금 전적으로 제명制命(詔書)을 기초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여 더욱 중임重任을 맡기고 첩여婕妤注+[附註][附註] 판으로 하는 놀이 이름이다. 나무로 네모진 판을 만들고 판 가운데에 가 각각 여섯씩 짝이므로 쌍륙雙陸이라 하니, 인도에서 시작되어 조위曹魏로 전래되었고 때에 성행하였다. [通鑑要解] 주사위를 던져 판 위의 길을 가는데, 12개의 바둑알이 각각 길을 갈 때에 여섯씩 상대가 되므로 이를 일러 쌍륙雙陸이라 하였다. 임명하여 궁중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三思通焉이라 黨於武氏하고 又薦三思於韋后하다
무삼사武三思가 그녀와 간통하였으므로 무씨武氏당여黨與가 되었고, 그녀는 또 무삼사武三思위후韋后에게 천거하였다.
使韋后與三思雙陸注+[附註]局戲名이라 以木爲方盤하고 盤中彼此內外各六梁이라 曰雙陸이니 始於西竺하야 流於曹魏하고 盛於梁, 陳, 魏, 齊, 隋, 唐하니라[通鑑要解] 投瓊以行하니 十二棊 各行陸棊 謂之雙陸이라 하고 而自居傍하야 爲之點籌하다
위후韋后로 하여금 무삼사武三思쌍륙雙陸注+[頭註]오왕五王은 바로 경휘敬暉 이하 다섯 명이다. 두게 하고 자신은 옆에 있으면서 그들을 위하여 산대를 잡아 숫자를 계산해 주었다.
三思遂與后通이라
무삼사武三思가 마침내 황후와 간통하였다.
由是 武氏之勢復振하니 張柬之等 數勸上誅諸武호되 不聽하다
이로 말미암아 무씨武氏의 세력이 다시 떨쳐지니, 장간지張柬之 등이 누차 여러 무씨武氏들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이 듣지 않았다.
○ 三思與韋后 日夜譖暉等云 恃功專權하니 將不利於社稷이라
무삼사武三思위후韋后와 함께 밤낮으로 경휘敬暉 등을 참소하여 이르기를 “공로를 믿고 권력을 전횡하니, 장차 사직社稷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不若封暉等爲王하야 罷其政事 外不失尊寵功臣이요 內實奪之權이니이다
경휘敬暉 등을 봉하여 왕으로 삼아서 그들이 맡고 있는 정사를 파하는 것만 못하니, 밖으로는 공신을 높이고 총애하는 체통을 잃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실로 그들의 권력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였다.
上以爲然하야 以敬暉爲平陽王하고 桓彦範爲扶陽王하고 張柬之爲漢陽王하고 袁恕己爲南陽王하고 崔玄暐爲博陵王하야 罷知政事하다
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경휘敬暉평양왕平陽王으로, 환언범桓彦範부양왕扶陽王으로, 장간지張柬之한양왕漢陽王으로, 원서기袁恕己남양왕南陽王으로, 최현위崔玄暐박릉왕博陵王으로 삼고서 그들이 맡고 있는 정사를 파하게 하였다.
三思令百官으로 謀修則天之政하야 不附武氏者 斥之하고 爲五王注+[頭註]卽敬暉以下五人이라所逐者 復之하니 大權 盡歸三思矣러라
무삼사武三思백관百官들로 하여금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정사를 닦게 할 것을 도모하여 무씨武氏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배척하고 오왕五王에게 축출당한 자들을 다시 등용하니, 대권大權이 모두 무삼사武三思에게 돌아갔다.
역주
역주1 二豎 : 張易之와 張昌宗을 가리킨다.
역주2 : 담
역주3 南司 : 당나라 때 황궁 북쪽에 위치한 宦官들의 집무소, 즉 內侍廳을 北司라 하고, 남쪽에 있었던 재상들의 집무소는 南司라고 하였다.
역주4 : 무
역주5 小子 : 張易之와 張昌宗을 가리킨다.
역주6 : 선
역주7 : 경
역주8 : 부
역주9 : 랍
역주10 : 보
역주11 : 세
역주12 復國號曰唐 : 天授 元年에 武后가 국호를 周라고 바꾸었는데, 이때에 국호를 회복하였다.
역주13 : 창
역주14 : 궤
역주15 噬臍 : 서제
역주16 噬臍無及 :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후회하여도 이미 때가 늦음을 이르는 말이다. 一說에 사람에게 잡힌 사향노루가 배꼽의 향내 때문에 잡혔다고 제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하나 옳지 않다.
역주17 上官婉兒 : 上官儀의 손녀인데, 上官儀가 죽임을 당한 뒤에 적몰되어 內宮의 노비가 되었다.
역주18 婕妤 : 첩여

통감절요(7)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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