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戌]〈秦二十, 楚王負芻元, 燕二十八, 魏王假元, 齊三十八年이라
荊軻至咸陽
하니 王
이 大喜
하야 朝服設九賓
注+[頭註]文物大備를 卽謂九賓也라 或云 周禮九儀公侯伯子男公卿大夫士也라 一說에 賓은 謂傳儐之儐이니 儐者는 九人也라而見之
하다
因把王袖而揕之할새 未至身하야 王이 驚起하야 袖絶하니
左右以手共搏之
하고 且曰 王
은 負劍
注+[頭註]古者帶劍하니 劍長하야 未易拔故로 欲王推之於背하야 令前短하야 易拔也라 一曰 負猶持也라 曲禮에 負劍辟咡라한대 註에 以手挾童子於脅下하야 如帶劍然也라負劍
하소서 王
이 遂拔〈劍〉
하야 以擊荊軻
하야 斷其左股
하고 遂體解以徇
하다
於是
에 益發兵伐燕
하야 戰於易水
注+[原註]源出易州南安閻山하야 東經霸州文安하야 入寇[滱]하니 按卽漢固安縣也라之西
하야 大破之
하니 燕王
이 斬丹獻王
이어늘 王
이 復進兵攻之
하다
○ 王
이 問於將軍李信曰 吾欲取
하노니 於將軍
에 用幾何人而足
고 李信曰 不過用二十萬
이니이다
何怯也오하고 遂使李信, 蒙恬으로 將二十萬人하야 伐楚하다
갑술(B.C.227) - 秦나라 20년, 楚王 부추負芻원년元年, 燕나라 28년, 魏王 가假원년元年, 齊나라 38년이다.
○ 옛 나라가 다섯이고 새로운 나라가 하나이다.
荊軻가 咸陽에 이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조복朝服 차림으로
구빈九賓의
注+[頭註]문물文物을 크게 구비함을 구빈九賓이라 이른다. 혹자는 말하기를 “《주례周禮》의 구의九儀이니,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과 공公‧경卿‧대부大夫‧사士이다.” 하였다. 일설一說에 “빈賓은 명령을 전달하는 빈儐을 이르니, 빈儐하는 자가 아홉 명이다.” 하였다. 예禮를
진설陳設하고 만나 보았다.
荊軻가 지도를 받들어 왕에게 올렸는데, 지도가 다하자 비수匕首가 보였다.
荊軻가 인하여 왕의 소매를 잡고 찌르려 할 적에 비수匕首가 왕의 몸에 이르기 전에 왕이 놀라 일어나 소매가 끊어졌다.
荊軻가 왕을 쫓자 왕이 기둥을 돌며 도망하였다.
秦나라 법에 대궐 위에서 모시는 신하들은 한 자나 한 치의 병기도 휴대할 수가 없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손으로 함께 荊軻를 붙잡고, 또 말하기를 “왕은 칼을 등으로
注+[頭註]옛날에 검을 차니, 검이 길어서 쉽게 뽑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왕으로 하여금 등으로 밀어서 앞이 짧게 하여 뽑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부負는 잡음과 같다. 〈곡례曲禮〉에 ‘칼을 차듯이 옆에 끼고 입가까지 몸을 기울인다.’ 하였는데, 주註에 ‘손으로 동자童子를 겨드랑이 밑에 잡아서 마치 칼을 차는 듯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다. 돌려 뽑으소서.” 하니, 왕이 마침내 검을 뽑아 荊軻를 쳐서 왼쪽 다리를 자르고 마침내 해체하여 조리돌렸다.
이에 더욱 군대를 일으켜 燕나라를 쳐서 易水의
注+[原註]역수易水는 근원이 역주易州 남쪽 안염산安閻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패주霸州 문안文安을 지나 구주滱州로 들어가니, 바로 한漢나라 고안현固安縣이다. 서쪽에서 싸워 대파하니,
연왕燕王이 丹을 목 베어 왕에게 바쳤으나 왕이 다시
진군進軍하여 공격하였다.
왕王이 장군 李信에게 묻기를 “내가 荊(楚나라)을 취하려고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몇 명의 병력을 쓰면 충분하겠는가?” 하니, 李信이 말하기를 “20만 명을 동원하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王翦에게 물으니, 王翦은 말하기를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였다.
어찌 그리도 겁을 내는가.” 하고는 마침내 李信과 蒙恬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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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 진20, 초왕부추원, 연28, 위왕가원, 제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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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 진20, 초왕부추원, 연28, 위왕가원, 제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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