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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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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 〈隋恭帝侑義寧二年이요 恭帝侗皇泰元年이요 唐高祖武德元年이요 夏王竇建德五鳳元年이요 涼王李軌安樂元年이요 楚王朱粲昌達元年이라
무인(618) - 나라 공제恭帝 양유楊侑의녕義寧 2년이고, 공제恭帝(越王) 양동楊侗황태皇泰 원년이고, 나라 고조高祖무덕武德 원년이고, 하왕夏王 두건덕竇建德오봉五鳳 원년이고, 양왕涼王 이궤李軌안락安樂 원년이고, 초왕楚王 주찬朱粲창달昌達 원년이다.
○ 是歲 幷楚士弘, 魏, 定楊, 梁師都, 秦, 梁하야 凡十二國이러니 隋煬帝廣, 恭帝侑, 秦, 魏亡이라
○ 이해에 나라의 임사홍林士弘, 나라, 정양定楊(劉武周), 양사도梁師都, , 나라의 소선蕭銑까지 아울러 모두 12개국이었는데, 나라의 양제煬帝 양광楊廣공제恭帝 양유楊侑, 나라, 나라가 망하였다. -
四月 宇文化及注+[附註]述之子也 化及無賴러니 事帝於東宮하니 寵昵之하다 化及 從帝楡林할새 冒禁하고 與突厥交市어늘 帝怒하야 將斬之러니 旣而 釋之하야 以爲屯衛將軍하니라 弑煬帝於江都하고 自稱大丞相하다
4월에 우문화급宇文化及注+[附註]우문화급宇文化及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이다. 처음에 우문화급宇文化及은 무뢰배였는데, 양제煬帝동궁東宮으로 있었을 때 양제煬帝를 섬기니 총애하고 가까이하였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황제를 따라 유림楡林에 갔을 적에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돌궐突厥교역交易하니 황제가 노하여 목을 베려 하였는데, 얼마 뒤 석방하여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삼았다. 양제煬帝강도江都에서 시해하고 스스로 대승상大丞相이라 칭하였다.
○ 梁蕭銑 卽皇帝位하다
나라 소선蕭銑황제皇帝에 즉위하였다.
於是 東自九江으로 西抵三峽하고 南盡交趾하고 北距漢川 銑皆有之하니 勝兵 四十餘萬이러라
이때에 동쪽으로 구강九江으로부터 서쪽으로 삼협三峽에 이르고, 남쪽으로 교지交趾까지 다하고 북쪽으로 한천漢川에 이르기까지 소선蕭銑이 모두 소유하니, 승병勝兵(精兵)이 40여만 명이었다.
○ 五月戊午 隋恭帝禪位于唐하니 唐王 卽皇帝位하다
○ 5월 무오일戊午日(16일)에 나라 공제恭帝나라에 양위讓位하니, 당왕唐王(李淵)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隋煬帝凶問 至東都어늘 留守官 奉越王侗注+[頭註]代王侑之兄이라[通鑑要解]侗 眉目如畵하고 溫厚仁愛하고 風格儼然이라하야 卽帝位하고 改元皇泰하다
나라 양제煬帝의 부음이 동도東都에 이르자, 유수관留守官월왕越王 양동楊侗注+[頭註]越王 양동楊侗대왕代王 양유楊侑의 형이다. [通鑑要解]楊侗은 미목이 그린 듯이 아름다웠고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풍격이 엄숙하였다. 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하게 하고 황태皇泰개원改元하였다.
以王世充으로 爲左僕射하야 摠督內外諸軍事하다
왕세충王世充좌복야左僕射로 삼아서 내외의 여러 군사軍事를 총독하게 하였다.
世充 漸結黨援注+[通鑑要解] 音圓이니 引也, 牽也하야 恣行威福하고 子弟咸典兵馬하야 勢震內外하니 皇泰王 拱手而已러라
왕세충王世充이 점점 당원黨援注+[通鑑要解]이 ‘원’이니, 끌어들임이요, 당김이다. 을 맺어서 상벌을 마음대로 내리고 자제子弟들이 모두 병마兵馬를 관장하여 권세가 내외에 진동하니, 황태왕皇泰王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 時 中國人避亂者 多入突厥하니 突厥注+[釋義]夏曰獯鬻이요 商曰鬼方이요 周曰獫狁이요 漢曰匈奴 魏曰突厥이라 突厥 其姓阿史那氏 蓋古匈奴北部也 彊盛이라
○ 이때에 중국中國에서 피난 가는 한족漢族들이 돌궐突厥로 많이 들어가니, 돌궐突厥注+[釋義]나라 때에는 훈육獯鬻이라 하고, 나라 때에는 귀방鬼方이라 하고, 나라 때에는 험윤獫狁이라 하고, 나라 때에는 흉노匈奴라 하고, 나라 때에는 돌궐突厥이라 하였다. 돌궐突厥은 그 아사나씨阿史那氏이니, 옛날 흉노匈奴북부北部이다. 이 강성해졌다.
東自注+[頭註] 音乞이니 本東胡種이라 其先 居鮮卑山이러니 至元魏하야 自號契丹이라, 室韋注+[釋義]契丹之別種也 丁零之苗裔 地據黃龍하니라 西盡吐谷渾, 高昌注+[釋義]吐谷渾 西域國이니 其先 本遼東鮮卑 (徙)[徒]河涉歸之長子曰이니 其孫葉延 遂以其(自)[名]으로 爲吐谷渾氏하니라 高昌 西域小國이라諸國 皆臣之하니 控弦 百餘萬이라
동쪽으로 거란契丹注+[頭註]거란契丹은 음이 걸(글)이니, 본래 동호東胡의 종족이다. 그 선조가 선비산鮮卑山에서 살았는데, 원위元魏(北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 거란契丹이라 이름하였다. 실위室韋注+[釋義]실위室韋거란契丹별종別種이고 정령丁零의 후손이니, 황룡黃龍 땅을 점거하였다. 로부터 서쪽으로 토욕혼吐谷渾고창高昌注+[釋義]토욕혼吐谷渾서역西域의 나라이니, 그 선조는 본래 요동遼東의 선비족이었다. 도하섭귀徒河涉歸장자長子토욕혼吐谷渾이니, 그 손자인 섭연葉延이 마침내 그 이름을 따라 토욕혼씨吐谷渾氏라 하였다. 고창高昌서역西域의 작은 나라이다. 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궐突厥의 신하가 되니,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군사가 백여만 명이었다.
唐初起兵 資其兵馬하고 前後餉遺 不可勝紀러라
나라가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돌궐突厥병마兵馬를 이용하였으며 전후로 그들이 보내준 군량과 물건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出突厥傳〉
- 《당서唐書 돌궐전突厥傳》에 나옴 -
○ 唐 命裴寂, 劉文靜等하야 修定律令하다
나라에서 배적裴寂유문정劉文靜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닦아 정하게 하였다.
置國子, 太學, 四門生注+[附註]四門學 始於魏하니 於四門 置學이라 唐有二館七學하니 曰弘文館, 崇文館 皆以宰相領之하고 其生徒 以皇屬國戚及大臣子孫爲之하며 曰國子學, 曰太學 亦以大臣子孫爲之하며 曰廣文, 曰四門 以朝臣之子孫與庶人之俊秀者爲之하며 曰律學, 曰書學, 曰算學 皆以庶人之通其學者爲之하니 凡六學 隷於國子監하니라[通鑑要解]唐六典 國子生 文武官三品巳上及子孫 從二品已上曾孫이요 四門生 文武官七品巳上及侯, 伯, 子, 男 若庶人子爲俊士生者하니 合三百餘員이요 郡縣學 各置生員하다
국자학國子學, 태학교太學校, 사문학四門學注+[附註][附註]四門學은 나라에서 시작되었으니, 사문四門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나라는 2 7이 있었으니, 홍문관弘文館숭문관崇文館은 모두 재상이 맡았고 황족皇族국척國戚(외척) 및 대신大臣의 자손을 생도生徒로 삼았으며,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은 또한 대신大臣의 자손을 생도生徒로 삼았고, 광문학廣文學사문학四門學조신朝臣의 자손과 서인庶人 중에 준수한 자를 생도生徒로 삼았고,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은 모두 서인庶人 중에 그 학문에 통달한 자를 생도生徒로 삼았으니, 6은 모두 국자감國子監에 소속되었다. [通鑑要解]《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국자학생國子學生문무관文武官 3 이상 및 국공國公자손子孫2品 이상의 증손曾孫이요, 사문학생四門學生문무관文武官 7 이상 및 서인庶人의 자제 중 준사생俊士生이 된 자이다. 등의 학교를 설치하니 생원生員이 도합 3백여 명이었으며, 군현郡縣에도 각각 생원生員을 두었다.
〈出刑法, 選擧志〉
- 《당서唐書》의 〈형법지刑法志〉와 〈선거지選擧志〉에 나옴 -
○ 唐主待裴寂特厚하야 稱爲裴監注+[通鑑要解]寂爲晉陽宮監일새 親之하야 以舊稱之而不名하고 委蕭瑀注+[頭註]內史令이라以庶政하야 事無大小 莫不關掌注+[頭註] 由也 如行者之有關津也하다
당주唐主배적裴寂을 특별히 후대하여 배감裴監注+[通鑑要解]배감裴監배적裴寂이 〈나라에 벼슬하여〉 진양궁감晉陽宮監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를 친근히 여겨 옛 관직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소우蕭瑀注+[頭註]소우蕭瑀내사령內史令이었다. 에게 모든 정사를 맡겨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관장關掌注+[頭註]은 경유함이니, 길을 가는 자가 관문과 나루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瑀亦孜孜盡力하야 繩違注+[釋義] 直其失也擧過하니 人皆憚之러라
소우蕭瑀 또한 부지런히 힘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고注+[釋義]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허물을 들어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 唐萬年縣法曹孫伏伽 上表하야 以爲隋以聞其過 亡天下
나라 만년현萬年縣법조法曹손복가孫伏伽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나라는 과실을 듣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陛下龍飛晉陽 遠近 響應하야 未朞年而登帝位하시니 徒知得之之하고 不知隋失之之不難也
폐하께서 진양晉陽에서 용비龍飛(興起)하자 원근遠近에서 호응하여 1년이 채 못 되어 황제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한갓 천하를 얻기 쉬운 줄만 아시고 천하를 잃기 어렵지 않음은 알지 못하십니다.
臣謂宜其覆轍하야 務盡下情이라하노이다 唐主省表大悅하야 下詔褒稱하고 擢爲治書侍御史하고 賜帛三百匹하다
은 마땅히 나라의 복철覆轍(실패한 자취)을 바꾸어서 되도록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다 아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당주唐主표문表文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손복가孫伏伽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로 발탁하고 비단 300필을 하사하였다.
〈出伏伽傳〉
- 《당서唐書 손복가전孫伏伽傳》에 나옴 -
[新增]范氏曰
[新增]范氏가 말하였다.
天下之勢 如人一身하야 必氣血周流無壅而後 能存이니 諫者 使下情上通하고 上意下達하야 如血氣之周流於一身也
“천하의 형세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반드시 이 두루 유행하고 막힘이 없은 뒤에야 생존할 수 있으니, 간하는 자는 아랫사람의 실정을 위로 통하게 하고 윗사람의 마음을 아래로 통하게 해서 가 온몸에 두루 유행하는 것과 같게 해야 한다.
言路開則治하고 言路塞則亂이라
그러므로 언로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언로言路가 막히면 나라가 혼란해지는 것이다.
高祖鑑隋之所以亡하야 首闢言路하니 可謂知先務矣
고조高祖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거울로 삼아서 첫 번째로 언로言路를 열어놓았으니, 급선무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是以 民知上之憂己하야 而疾痛 將有所赴愬也리니 唐室之興 不亦宜乎
이 때문에 백성들이, 윗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근심해 줌을 알아서 괴로울 때에 장차 달려가 하소연할 곳이 있을 것이니, 나라 황실이 흥왕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八月 秦主薛擧卒하고 太子仁하다
8월에 진주秦主 설거薛擧가 죽고, 태자太子 설인고薛仁杲가 즉위하였다.
○ 九月이라
○ 9월이다.
魏公李密 旣殺翟讓注+[釋義]先是 翟讓 以立密自負하고 求寶貨於房彦藻한대 彦藻等 因說密殺之하니라하고 頗自驕矜이라
처음에 위공魏公 이밀李密적양翟讓을 죽인 뒤에注+[釋義]이보다 앞서 적양翟讓이밀李密위공魏公으로 세웠다고 자부하고 방언조房彦藻에게 보화寶貨를 요구하자, 방언조房彦藻 등이 이로 인하여 이밀李密을 설득해서 그를 죽였다. 자못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였다.
하야 散米할새 無防守하니 取之者 隨意多少하야 或離倉之後 力不能致하야 委棄衢路하니 自倉城으로 至郭門 米厚數寸이요 群盜來就食者 近百萬口
낙구창洛口倉을 열어 쌀을 나누어 줄 때에 방비하고 지키는 자가 없어서 쌀을 가져가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많이 가져갔다가 혹은 창고를 떠난 뒤에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길거리에 쌀을 버리니, 창성倉城으로부터 곽문郭門에 이르기까지 쌀이 몇 치 두께로 깔렸으며 여러 도둑떼들이 와서 먹는 것이 백만 명에 가까웠다.
하야 謂賈閏甫曰 此可謂足食矣로다 閏甫對曰 以民爲本이요 以食爲天이니 今民所以襁負如流而至者 以所天注+[頭註] 以食爲天이라在此故也어늘
이밀李密이 기뻐하여 가윤보賈閏甫에게 이르기를 “이는 양식이 풍족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가윤보賈閏甫가 대답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으니, 지금 백성들이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물이 흐르듯이 오는 이유는 하늘로 여기는 곡식注+[頭註]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는다. 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而有司曾無愛吝하고 屑越注+[釋義]荀子 (屑)[薛]越이라하니 言輕棄之也[通鑑要解]屑 輕也 語辭如此하니 切恐一旦 米盡民散이면 明公 孰與成大業哉잇고
그런데 유사有司가 일찍이 곡식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함부로 버리니,注+[釋義]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설월薛越”이라 하였으니, 가볍게 버린다는 말이다. [通鑑要解]屑은 가벼움이요, 은 어조사이다. 하루아침에 쌀이 다 없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면 명공明公은 누구와 함께 큰 사업을 이루시겠습니까?” 하였다.
李密 與王世充注+[附註]隋大業初이러니 善伺帝顔色하야 以媚帝하니 帝愛昵之하다 世充 觀隋政亂하고 陰結豪傑하니 帝以有將略이라하야 委以捕諸盜러니 所向輒定하니라 自爲太尉, 中書令하야 置官屬하고 矯恭帝詔하야 自爲鄭王하다 又矯皇泰主侗策禪位하야 國號鄭하고 遂鴆侗이러니 後爲秦王所禽하니라하야 失利하고 與衆三萬人으로 歸關中하다
이밀李密왕세충王世充注+[附註]왕세충王世充나라 대업大業 초년에 민부랑民部郞이 되었는데, 황제의 얼굴빛을 잘 살펴서 황제에게 아첨하니, 황제가 사랑하고 가까이하였다. 왕세충王世充나라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은밀히 호걸들과 교분을 맺으니, 황제가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여 도둑들을 잡는 일을 맡겼는데, 향하는 곳마다 곧 평정하였다. 뒤에 스스로 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이 되어 관속官屬을 두고 공제恭帝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스스로 정왕鄭王이 되었다. 또다시 황태왕皇泰王 양동楊侗(恭帝)의 책서策書를 위조하여 선위禪位를 받아 국호國號이라 하고 마침내 양동楊侗을 독살하였는데, 뒤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사로잡혔다. 과 싸워 실패하고 무리 3만 명과 함께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
〈出李密傳〉
- 《당서唐書 이밀전李密傳》에 나옴 -
○ 薛仁杲之爲太子也 與諸將으로 各有隙이러니 及卽位 衆心 猜懼하니 由是 國勢浸弱이러라
설인고薛仁杲태자太子였을 적에 여러 장수들과 각각 틈이 있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이로 말미암아 국세國勢가 점점 약해졌다.
秦王世民 至高注+[頭註] 音隻이라 城名이니 在定平縣이라하니 仁杲使宗羅㬋 將兵拒戰이어늘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고척성高墌城注+[頭註]이 ‘척’이다. 고척高墌의 이름이니 정평현定平縣에 있다. 에 이르니, 설인고薛仁杲종라후宗羅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막아 싸우게 하였다.
唐世民 引大軍하고 自原北으로 出其不意하니 羅㬋士卒 大潰 斬首數千級하다
나라 이세민李世民대군大軍을 이끌고 천수원淺水原 북쪽으로부터 불의에 출격하니, 종라후宗羅㬋사졸士卒들이 크게 궤멸되어 진왕秦王이 수천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世民 率二千餘騎하야 追之曰 破竹之勢 不可失也라하고 遂進至城下圍之하다
이세민李世民이 2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며 말하기를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였다.
夜半 守城者爭自投下하니 仁杲計窮出降하다
한밤중에 성을 지키는 자들이 다투어 스스로 투항하니, 설인고薛仁杲가 계책이 다하여 나와서 항복하였다.
諸將 皆賀하고 因問曰 大王 一戰而勝하고 輕騎 直造城下하시니 衆皆以爲不克이러니 而卒取之 何也잇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축하하고 인하여 “대왕大王께서 한 번 싸워 이기고는 경무장한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성 밑에 이르시니, 여러 사람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내 점령함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世民曰 羅㬋所將 皆隴外之人이라
이세민李世民이 대답하기를 “종라후宗羅㬋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농외隴外 사람이다.
將驍卒悍하니 吾特出其不意而破之 斬獲 不多
장수가 용맹하고 군사들이 사나우니 내가 단지 불의에 출격하여 격파했을 뿐이요,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은 많지 못하다.
若緩之 則皆入城하리니 仁杲撫而用之 未易克也 急之 則散歸隴外하야 折墌注+[頭註]城名이니 在保定縣이라 仁杲所據虛弱하리니 仁杲破膽하야 不暇爲謀
만약 이들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니, 설인고薛仁杲가 이들을 어루만져 사용한다면 쉽게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요, 만약 이들을 급하게 몰아붙인다면 흩어져 농외隴外로 돌아가서 절척성折墌城注+[頭註]절척折墌의 이름이니, 보정현保定縣에 있다. 설인고薛仁杲가 점거한 곳이다. 이 허약해질 것이니, 설인고薛仁杲의 간담이 서늘해져서 도모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此吾所以克也니라 衆皆悅服이러라
내가 이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世民 所得降卒 悉使仁杲兄弟及宗羅㬋 將之하야 與之射獵 無所疑間하니 畏威銜恩하야 皆願效死注+[通鑑要解] 致也러라
이세민李世民이 항복한 병졸들을 모두 설인고薛仁杲의 형제와 종라후宗羅㬋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그들과 활을 쏘고 사냥할 때에 의심하거나 간격을 두는 바가 없으니, 적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를 생각해서 모두 사력死力을 바치기注+[通鑑要解]는 바침이다. 를 원하였다.
〈出仁杲傳〉
- 《당서唐書 설인고전薛仁杲傳》에 나옴 -
○ 唐主使李密 迎秦王世民於豳州하다
당주唐主이밀李密로 하여금 빈주豳州에서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맞이하게 하였다.
自恃智略功名하야 見上 猶有傲色이러니 及見世民 不覺驚服하고 私謂殷開山注+[頭註]名嶠 以學行으로 爲元帥長史하야 從秦王討薛擧라가 爲所敗하야 除名爲民이러니 從平仁杲하고 討世充하야 以功封鄖國公하니라曰 眞英主也
이밀李密이 스스로 지략智略공명功名을 자부하여 을 뵐 때에도 오히려 오만한 기색이 있었는데, 이세민李世民을 만나 볼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복종하고는 은개산殷開山注+[頭註]은개산殷開山은 이름이 이니 학행學行으로 원수부元帥府 장사長史가 되어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따라 설거薛擧를 토벌하다가 패배당하여 〈진군공陳郡公에서〉 제명除名되어 서민庶民이 되었다. 뒤에 설인고薛仁杲를 평정하고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여 그 으로 운국공鄖國公에 봉해졌다. 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참으로 영명英明한 군주이다.
不如是 何以定禍亂乎
이와 같지 않다면 어떻게 화란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하였다.
〈出密傳〉
- 《당서唐書 이밀전李密傳》에 나옴 -
○ 徐世 據李密舊境하야 未有所屬이러니
서세적徐世勣이밀李密의 옛 영토를 점거하고서 아직 귀속한 바가 있지 않았다.
魏徵 隨密至長安하야 久不爲朝廷所知 乃自請安集山東이어늘 唐主以爲秘書丞하야 乘傳注+[釋義]乘傳者 依乘符傳命行 若使者持節爾 傳者 以木爲之하니 長尺五 書符其上하야 以爲信이라至黎陽注+[頭註]上丁丑年 李密 取黎陽倉이라하야 遺徐世勣書하야 勸之早降하다
위징魏徵이밀李密을 따라 장안長安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조정朝廷에 알려지지 못하자 마침내 스스로 산동山東 지방을 안집安集시킬 것을 청하니, 당주唐主가 그를 비서승秘書丞으로 삼아 역마驛馬를 타고注+[釋義]승전乘傳부전符傳을 가진 자가 부전符傳에 따라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것이 사자使者부절符節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 5이요, 그 위에 를 써서 신표信標로 삼는다. 여양黎陽注+[頭註]앞의 정축년丁丑年(617)에 이밀李密여양창黎陽倉을 취하였다. 에 이르러서 서세적徐世勣에게 편지를 보내어 빨리 항복하라고 권하게 하였다.
世勣 遂決計西向할새 謂郭孝恪注+[通鑑要解]長史曰 此民衆土地 皆魏公有也
서세적徐世勣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서쪽을 향하여 귀순하려 할 적에 곽효각郭孝恪注+[通鑑要解]곽효각郭孝恪장사長史였다. 에게 이르기를 “이 민중과 토지는 모두 위공魏公(李密)의 소유이다.
吾若上表獻之 利主之敗하야 自爲功以邀富貴也 吾實恥之하노라
내가 만약 표문表文을 올려 이것을 바친다면 이는 주군主君의 실패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아 부귀富貴를 바라는 것이니,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今宜籍郡縣戶口士馬之數하야 以啓魏公하야 使自獻之라하고 乃遣孝恪詣長安하다
이제 마땅히 군현郡縣호구戶口와 군사와 말의 숫자를 장부에 적어 위공魏公에게 아뢰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바치게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곽효각郭孝恪을 보내어 장안長安에 이르게 하였다.
唐主聞世勣使者至 無表하고 止有啓與密注+[頭註] 予通하니 送也하고 甚怪之러니
당주唐主서세적徐世勣사자使者가 왔는데, 표문表文은 없고 다만 이밀李密에게 보내는注+[頭註]와 통하니 보내는 것이다. 장계狀啓만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孝恪 具言世勣意한대 唐主乃歎曰 徐世勣 不背德, 不邀功하니 眞純臣라하고 賜姓李하다
곽효각郭孝恪서세적徐世勣의 뜻을 말하자 당주唐主가 마침내 감탄하여 이르기를 “서세적徐世勣이 은덕을 배반하지 않고 을 바라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이다.” 하고 이씨성李氏姓을 하사하였다.
〈出本傳〉
- 《당서唐書 이적전李勣傳》에 나옴 -
[新增]范氏曰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古者天子建國 賜姓命氏 所以別其族類之所出이니 子孫 各本於其祖하야 不可改也
“옛날 천자天子가 나라를 세울 적에 성씨姓氏를 하사한 것은 그 족류族類가 나온 바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자손들이 각각 선조先祖를 근본으로 삼아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漢〈高〉祖賜婁敬姓爲劉하니 鄙陋無稽甚矣어늘 而唐世遂以爲法하야 或加於盜賊夷虜하야 遂以逆族異類 爲同宗하니 然則古之賜姓者 別之러니 而後之賜姓者 亂之也
나라 고조高祖누경婁敬에게 을 하사하여 유씨劉氏로 삼으니 비루하여 황당무계함이 심하였는데, 나라 때에는 마침내 이것을 으로 삼아서 혹은 도적과 오랑캐에게도 을 하사하여 마침내 역적의 집안과 다른 종족을 동종同宗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옛날에 을 하사한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였는데 후세에 을 하사한 것은 혼란하게 만든 것이다.
夫天親 不可以人爲어늘 而强欲同之 豈〈循〉理也哉
천연天然혈족血族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가 없는데 억지로 같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순리順理이겠는가.
上瀆其姓하고 下忘其祖하니 非先王之制 不可爲後世法也니라
위로는 을 모독하고 아래로는 선조를 잊는 것이니,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어서 후세後世이 될 수 없다.”
李密 驕貴日久하고 又自負歸國之功하야 朝廷待之 不副本望注+[附註] 密將至할새 唐主遣使迎勞相望하니 密喜曰 我擁衆百萬이라가 解甲歸唐하니 功亦不細 豈不以見處乎아하더니 至長安하야 乃拜光祿卿, 邢國公하니 密大失望하니라[通鑑要解]李密 遇會하야 職當進食하니 深恥之 退하야 以告王伯當한대 伯當曰 天下事在公度內耳라하니 乃言於唐王而請之云云이라이라하야 鬱鬱不樂이라
이밀李密이 교만하고 귀해진 지가 오래되었고 또 나라로 귀부歸附한 공로를 자부하여, 조정의 대우가 본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注+[附註][附註]처음에 이밀李密이 오려 할 적에 당주唐主가 사신을 보내 영접하고 위로함이 서로 이어지자, 이밀李密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백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고 있다가 갑옷을 벗고 나라로 귀부歸附하니, 공이 또한 적지 않다. 어찌 태사台司의 벼슬로 대접해 주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장안長安에 이르러서 마침내 광록경光祿卿형국공邢國公에 봉해지니, 이밀李密이 크게 실망하였다. [通鑑要解]李密이 연회할 때를 만나 직무상 음식 공급을 담당하게 되자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연회에서 물러나와 왕백당王伯當에게 얘기하니, 왕백당王伯當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공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왕唐王에게 말하여 이렇게 청한 것이다. 해서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않았다.
乃獻策於唐主曰 山東之衆 皆臣故時麾下
이에 당주唐主에게 계책을 올리기를 “산동山東의 무리는 모두 이 예전에 거느리던 부하들입니다.
請往收而撫之하야 憑藉國威 取王世充 如拾地芥耳리이다 乃以王伯當으로 爲密副而遣之하다
청컨대 가서 그들을 거두어 어루만져 국가의 위엄을 빙자한다면 왕세충王世充을 잡는 것은 땅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왕백당王伯當이밀李密부관副官으로 삼아서 보내었다.
十二月 李密 遂據桃林縣城하야 驅掠徒衆하고 直趣南山하야 乘險而東이어늘 盛彦師注+[頭註]行軍總管이라擊斬之하고 傳首長安하다
12월에 이밀李密이 마침내 도림현桃林縣을 점거하여 무리를 몰아 노략질하고 곧바로 남산南山으로 달려가서 험고한 곳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오자, 성언사盛彦師注+[頭註]성언사盛彦師행군총관行軍總管이었다. 가 공격하여 목을 베고 수급首級장안長安에 전달하였다.
〈出本傳〉
- 《당서唐書 이밀전李密傳》에 나옴 -
○ 有犯法不至死者어늘 唐主特命殺之러니 監察御史李素立 諫曰 三尺法注+[頭註]以三尺竹簡으로 書法律이라 王者所與天下共之也 法一動搖 人無所措手足이니이다
○ 법을 범하였으나 사죄死罪(사형에 처해야 할 죄)에 이르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당주唐主특명特命으로 그를 죽이게 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소립李素立이 간하기를 “삼척三尺注+[頭註]삼척법三尺法은 3죽간竹簡법률法律을 쓴 것이다. 왕자王者가 천하 사람들과 함께 준수하는 것이니, 법이 한 번 동요되면 사람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습니다.
陛下甫創鴻業注+[頭註] 與洪通이라 奈何棄法이니잇고
폐하陛下께서 이제 겨우 큰 기업基業注+[頭註]과 통한다. 을 창건하셨는데, 어찌하여 법을 버리신단 말입니까.
臣忝法司하니 不敢奉詔로소이다 唐主從之하니
이 외람되이 법사法司를 맡고 있으니, 감히 조명詔命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당주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自是 特承恩遇
이로부터 특별히 은혜와 대우를 받았다.
命所司하야 授以七品淸要官하니 所司擬雍州司戶어늘 唐主曰 此官 要而不淸이니라
관계 부서部署에 명하여 그에게 7품의 청요관淸要官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관계 부서部署에서 옹주雍州 사호司戶에 의망하자 당주唐主가 말하기를 “이 벼슬은 요직要職이기는 하나 깨끗하지 않다.” 하고,
又擬秘書郞한대 唐主曰 此官 淸而不要라하고 遂擢授侍御史하다
비서랑秘書郞에 의망하자 “이 벼슬은 깨끗하기는 하나 요직이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이소립李素立을 발탁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제수하였다.
역주
역주1 : 선
역주2 契丹 : 글안
역주3 吐谷渾 : 徒河涉歸는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맏아들은 吐谷渾이고 작은 아들은 若洛廆였다. 徒河涉歸가 죽자 若洛廆가 계승하여 부락을 통솔하여 따로 慕容氏가 되었다.
역주4 國公 : 封爵名으로 隋나라 때 처음 설치하여 明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隋書》 〈百官志〉에 의하면 國王‧郡王‧國公‧郡公‧縣公‧侯‧伯‧子‧男의 9등급이 있었다.
역주5 : 오
역주6 : 이
역주7 : 역
역주8 : 고
역주9 洛口倉 : 隋나라 大業 2년(606)에 지은 곡식 창고의 이름으로, 洛水가 黃河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하여 洛口倉이라 이름하였다. 興洛倉이라고도 한다.
역주10 民部郞 : 隋나라 초에 戶部侍郞를 두었는데, 煬帝가 ‘侍’字를 제거하여 戶部郞이라고 하다가 隋나라 말엽에 民部郞으로 고쳤다. 《通典》
역주11 : 척
역주12 殷開山 : 開山은 字인데, 字로 더 많이 알려졌다.
역주13 : 적
역주14 台司 : 唐나라 때에는 尙書省을 中台, 門下省을 東台, 中書省을 西台라 하고 이를 총칭하여 臺省이라 하였는 바, 台司는 三省의 장관을 가리킨 것이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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