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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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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 〈唐武德四年이라
신사(621) - 나라 무덕武德 4년이다.
○ 是歲 夏, 鄭, 梁銑, 吳亡하니 幷楚, 梁師都하야 凡三國이라
○ 이해에 나라, 나라, 나라의 소선蕭銑, 오왕吳王이 망하니, 나라와 양사도梁師都까지 아울러 모두 세 나라이다. -
唐兵 圍洛陽注+[頭註]王世充 在洛陽이라하니 城中 乏食이라
나라 군대가 낙양洛陽을 포위하니,注+[頭註]왕세충王世充낙양洛陽에 있었다. 성안에 양식이 바닥났다.
竇建德注+[頭註]見上卷하니 丁丑年 稱長樂王이러니 戊寅年 하고 定都于河間府樂壽縣이라 備百官하고 改國號夏하고 改元五鳳하니라 救之할새 乃遺世民書하야 請退軍潼關하야 復脩前好하다
두건덕竇建德注+[頭註]두건덕竇建德은 상권에 보이니, 정축년(617)에 장악왕長樂王이라 칭하였는데, 무인년(618)에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하간부河間府 악수현樂壽縣에 도읍을 정하였다. 백관을 갖추고 국호를 라 고치고 오봉五鳳으로 개원改元하였다. 왕세충王世充을 구원할 적에 마침내 이세민李世民에게 편지를 보내 동관潼關으로 군대를 후퇴시켜서 다시 전일前日의 우호를 닦을 것을 청하였다.
世民 集將佐議之하니 皆請避其鋒이어늘 郭孝恪曰 王世充 窮蹙하야 垂將注+[頭註] 幾也面縛이어늘
이세민李世民이 장수와 보좌들을 모아 의논하니 모두 예봉을 피할 것을 청하였는데, 곽효각郭孝恪이 말하기를 “왕세충王世充이 곤궁하고 위축되어 얼굴을 쳐들고 두 손을 등 뒤로 묶고서 거의注+[頭註]는 거의이다. 항복하게 되었는데,
竇建德 運糧하야 遠來助之注+[原註]隋末 王世充 據洛陽하야 稱鄭하고 竇建德 據河北하야 稱夏하니라하니 天意欲兩亡之也
두건덕竇建德이 양식을 운반하여 멀리 와서 도우니,注+[原註]王世充……遠來助之:나라 말기에 왕세충王世充낙양洛陽을 점거하여 나라라 칭하고, 두건덕竇建德하북河北을 점거하여 나라라 칭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 둘 다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不過二旬 兩主就縛矣리이다
20일이 못 되어 두 군주가 다 포박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世民 善之하야 將驍騎하고 出武牢東하니 建德 迫於武牢하야 不得進하고 數戰不利
이세민李世民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겨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무뢰武牢의 동쪽으로 나오니, 두건덕竇建德무뢰武牢에서 압박당하여 전진하지 못하였으며 자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建德 中槊注+[釋義] 去聲이라이어늘 楊武威逐之하니 建德 墜馬 武威下擒之하다
두건덕竇建德이 창에 찔렸는데,注+[釋義]거성去聲(맞음)이다. 양무위楊武威가 그를 추격하니 두건덕竇建德이 말에서 떨어졌으므로 양무위楊武威가 말에서 내려 그를 사로잡았다.
世民 囚建德等하고 至洛陽城下하야 以示世充하니 世充諸將曰 吾所恃者 夏主러니 今已爲擒하니 雖得出이라도 終必無成이리이다
이세민李世民두건덕竇建德 등을 가두고 낙양성洛陽城 아래에 이르러 이들을 왕세충王世充에게 보이니, 왕세충王世充의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는 것은 하주夏主(竇建德)뿐이었는데 이제 이미 사로잡혔으니, 포위망을 탈출하더라도 끝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世充 素服으로 帥太子群臣二千餘人하고 詣軍門降이어늘
왕세충王世充이 소복을 입고 태자와 신하 2천 명을 거느리고 군문軍門에 나와서 항복하였다.
世民 入宮城하야 觀隋宮殿하고 歎曰 逞侈心注+[頭註] 快也 恣肆快意也하야 窮人欲하니 無亡이나 得乎아하고
이세민李世民궁성宮城에 들어가서 나라 궁전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치하려는 마음을 부려注+[頭註]은 유쾌함이니,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욕심을 끝까지 다하였으니 멸망하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
命撤端門樓注+[頭註]皇城南正中門曰端門이라하고 焚乾陽殿하며 毁則天門注+[頭註]宮城正中門이라及闕注+[附註]門觀이니 人臣至此 思其所闕이라 爲二臺於門外하고 作樓觀於上하고 因謂之觀이라 又缺也 兩觀雙植하고 中央缺然而爲道 故謂之闕이라하고 廢諸하다
명령을 내려 단문루端門樓注+[頭註]황성皇城의 남쪽에 있는 정중문正中門단문端門이라 한다.를 철거하고 건양전乾陽殿을 불태웠으며 측천문則天門注+[頭註]측천문則天門궁성宮城정중문正中門이다. 注+[附註]문관門觀(門闕)이니, 신하가 이곳(궐문)에 이르면 군주의 부족한 점을 생각한다. 문밖에 두 개의 를 만들고 그 위에 누관樓觀을 짓고는 인하여 이라 이른다. 은 또 빠뜨린다는 뜻이니, 두 개의 을 양쪽에 세우고 중앙은 비워놓아 길을 만들기 때문에 이라고 이른다. 을 부수고 여러 도량道場을 폐지하였다.
〈出世充, 建德傳〉
- 《당서唐書》의 〈왕세충전王世充傳〉과 〈두건덕전竇建德傳〉에 나옴 -
[史略 史評]愚按 王世充 弑其君而自立하니 其罪大矣
[史略 사평史評]내가 살펴보건대 왕세충王世充은 군주(楊侗)를 시해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니, 그 죄가 크다.
是宜明正其罪而誅之可也어늘 世民 旣赦之하고 而又潛殺하니 豈義也哉리오
마땅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주벌하는 것이 옳은데, 이세민李世民이 이미 그를 용서해 주고 또다시 몰래 죽였으니 어찌 의로운 일이겠는가.
○ 七月 建德部將劉黑闥 起兵於漳南하니 兵勢大振이라
○ 7월에 두건덕竇建德부장部將유흑달劉黑闥장남漳南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군세軍勢가 크게 떨쳐졌다.
十一月 陷冀州하고 擊李世勣等하야 破之하고 遂攻拔相州하고
11월에 기주冀州를 함락하고 이세적李世勣 등을 쳐서 격파하고는 마침내 상주相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又取黎, 衛二州하니 半歲之間 盡復建德舊境이라
또다시 여주黎州위주衛州의 두 고을을 점령하니, 반년 사이에 두건덕竇建德의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丁卯 命秦王世民, 齊王元吉하야 討之하다
정묘일丁卯日(12월 15일)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에게 명하여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하게 하였다.
○ 隋末 錢幣濫薄하야 至裁皮糊紙하야 爲之하니 民間 不勝其敝러니 至是하야 初行開元通寶錢注+[頭註]食貨志注 錢文曰開元通寶 歐陽詢 制詞及書하니 이라하니라이라 積十錢하면 重一兩하야
나라 말기에 전폐錢幣(돈)가 남발되고 얇아져 가죽을 자르거나 종이에 풀칠을 해서 돈을 만들기까지 하니 민간에서 그 폐단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라가 처음으로 개원통보전開元通寶錢注+[頭註]신당서新唐書》 〈식화지食貨志에 “돈에 ‘개원통보開元通寶’ 네 글자를 썼다. 구양순歐陽詢이 글을 짓고 글자를 썼는데, ‘개원통보開元通寶’ 네 글자를 돌려가면서 읽으면 문장文章이 되어 읽을 수 있다.” 하였다. 을 유통시키니 10을 쌓으면 무게가 한 냥이었다.
輕重大小最爲折衷注+[釋義]言極停當也[頭註]衷 去聲이라 斷也 正當也 若斷折其物 與度相正當也하니 遠近 便之러라
경중輕重(무게)과 대소大小(크기)가 가장 알맞으니注+[釋義]가장 절충이 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정당(적당)함을 말한다.[頭註]衷은 거성去聲(합당하다)이다. 은 절단함이고 은 정당함이니, 마치 물건을 절단할 때에 자와 서로 딱 들어맞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근에서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出食貨志〉
- 《당서唐書 식화지食貨志》에 나옴 -
○ 唐主以秦王世民 功大하니 前代官 不足以稱之라하야 特置天策上將하니 位在王公上이라
당주唐主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공이 커서 전대前代의 관직은 그 에 걸맞지 않다 하여 특별히 천책상장天策上將을 설치하니, 지위가 왕공王公의 위에 있었다.
冬十月 以世民爲天策上將하고 開天策府하야 置官屬하다
겨울 10월에 이세민李世民천책상장天策上將으로 삼고 천책부天策府를 열어 관속官屬을 두었다.
世民 以海內浸平이라하야 乃開館於宮西하고 延四方文學之士하야 出敎注+[頭註] 韻書 詔命이니 帝曰詔 王及后妃曰敎 太子曰令이라하니라할새 以王府屬注+[頭註]秦王府官屬이라杜如晦 記室房玄齡, 虞世南 文學褚亮, 姚思廉 主簿李玄道 參軍蔡允恭, 薛元敬, 顔相時 諮議典籤蘇勗 天策府從事中郞于志寧 軍諮祭酒蘇世長 記室薛收 倉曹李守素 國子助敎陸德明, 孔穎達 信都文達注+[頭註]信都 縣名이라 文達 冀州信都人이니 凡姓 皆音盍이라 宋州總管府戶曹許敬宗으로 竝以本官으로 兼文學館學士하고 分爲三番하야 日直宿하고 供給珍膳하야 恩禮優厚하니라
이세민李世民해내海內가 점점 평정되어간다 하여 마침내 왕궁 서쪽에 학관學館을 열고 사방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초빙하여, 교서敎書注+[頭註]는 《운서韻書》에 “조명詔命이니, 황제皇帝라 하고, 후비后妃라 하고, 태자太子이라 한다.” 하였다. 를 낼 적에 진왕부秦王府 관속官屬注+[頭註]왕부속王府屬진왕부秦王府관속官屬이다. 두여회杜如晦, 기실記室방현령房玄齡우세남虞世南, 문학文學저량褚亮요사렴姚思廉, 진왕부秦王府 주부主簿이현도李玄道, 참군參軍채윤공蔡允恭설원경薛元敬안상시顔相時, 자의전첨諮議典籤소욱蘇勗, 천책부天策府 종사중랑從事中郞우지녕于志寧, 군자좨주軍諮祭酒소세장蘇世長, 기실記室설수薛收, 창조倉曹이수소李守素, 국자조교國子助敎육덕명陸德明공영달孔穎達, 신도현信都縣합문달蓋文達,注+[頭註]신도信都의 이름이다. 합문달蓋文達기주冀州 신도信都 사람이니, 으로 쓸 때에는 모두 음이 ‘합’이다. 송주총관부宋州總管府 호조戶曹허경종許敬宗을 모두 본직本職을 지닌 채 문학관文學館 학사學士를 겸하게 하고는 세 번으로 나누어 격일로 숙직하게 하고 진귀한 음식을 공급하여 은총과 예우가 지극하였다.
世民 朝謁公事之暇 輒至館中하야 引諸學士하야 討論文籍하야夜分乃寢하다
이세민李世民부왕父王을 뵙고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여가에 번번이 관중館中에 이르러 여러 학사들을 데리고 문헌과 전적을 토론하여 혹 밤이 늦어서야 비로소 잠을 자곤 하였다.
乃使庫直注+[通鑑要解]閻立本注+[通鑑要解]毗之子圖像하고 褚亮爲贊하고 十八學士라하니 士大夫得預其選者 時人 謂之登瀛洲注+[釋義]瀛洲 山名이니 神仙居焉이라 前郊祀志 蓬萊, 方丈, 瀛洲 此三神山 傳在海中이라하니 登瀛洲者 言如昇仙也라하니라
마침내 고직庫直注+[通鑑要解]고직庫直친사부親事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염입본閻立本注+[通鑑要解]염입본閻立本염비閻毗의 아들이다. 으로 하여금 이들의 화상畵像을 그리고 저량褚亮으로 하여금 찬사贊辭를 짓게 하고는 이들을 18학사學士라 칭하니, 사대부士大夫로서 선발에 참여되면 당시 사람들이 ‘등영주登瀛洲注+[釋義]영주瀛洲삼신산三神山의 이름이니 신선神仙이 사는 곳이다. 《전한서前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 이 세 신산神山은 바다 속에 있다고 전해온다.” 하였으니, 영주瀛洲에 올랐다는 것은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라고 하였다.
〈出本紀及褚亮傳〉
- 《당서唐書》의 〈고조본기高祖本紀〉와 〈저량전褚亮傳〉에 나옴 -
○ 初 杜如晦爲秦王府兵曹參軍이라가 俄遷陝州注+[頭註] 音閃이라長史하다
○ 처음에 두여회杜如晦진왕부秦王府병조참군兵曹參軍이 되었다가 얼마 후 섬주陝州注+[頭註]은 음이 섬이다. 長史로 옮겼다.
府僚多補外官하니 世民 患之어늘 房玄齡曰 餘人 不足惜이어니와 至如杜如晦하야는 王佐之才라하니 卽奏爲府屬하다
이때 진왕부秦王府속료屬僚 중에 외직外職으로 보임補任되는 자가 많자 이세민李世民이 이를 걱정하였는데, 방현령房玄齡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굳이 애석할 것이 없지만 두여회杜如晦에 이르러서는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입니다.” 하니, 이세민李世民이 즉시 아뢰어 진왕부秦王府관속官屬으로 삼았다.
與玄齡으로 常從世民征伐하야 參謀帷幄하니 軍中 多事로되 如晦剖決如流
두여회杜如晦방현령房玄齡과 함께 항상 이세민李世民을 따라 정벌하여 군막軍幕의 모의에 참여하니, 군중軍中에 일이 많았으나 두여회杜如晦가 흐르는 물처럼 신속하게 결단하였다.
世民 每破軍克城 諸將佐 爭取寶貨하되 玄齡 獨收采人物하야 致之幕府하고 又將佐有勇略者 玄齡 必與之深相結하야 使爲世民盡死力하니라
이세민李世民이 매번 적군을 격파하고 을 점령할 때마다 여러 장수와 보좌들은 다투어 보화寶貨를 취하였으나 방현령房玄齡만은 인재를 거두어 모아서 막부幕府에 데려왔으며, 또 장수와 보좌 중에 용맹과 지략이 있는 자가 있으면 방현령房玄齡이 반드시 그와 깊이 교분을 맺어 그로 하여금 이세민李世民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게 하였다.
每令玄齡入奏事 唐主歎曰 玄齡 爲吾兒陳事하니 雖隔千里 皆如面談이라하니라
이세민李世民방현령房玄齡으로 하여금 입조入朝하여 일을 아뢰게 할 때마다 당주唐主가 감탄하기를 “방현령房玄齡이 내 아들을 위하여 일을 아뢰니, 비록 천리 멀리 떨어져 있으나 모두 마주 보고 말하는 것처럼 상세하다.” 하였다.
〈出玄齡傳〉
- 《당서唐書 방현령전房玄齡傳》에 나옴 -
詔發巴, 蜀兵하야 以趙郡王孝恭注+[頭註]高祖叔父 初封越이러니 後改河間이라, 李靖으로 統十二總管하야 自夔州 順流東下하야 以擊蕭銑하다
당주唐主가 명하여 의 군대를 동원해서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注+[頭註]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고조高祖의 숙부이다. 처음에 에 봉해졌는데, 뒤에 하간군왕河間郡王으로 고쳐 봉해졌다. 이정李靖으로 하여금 12명의 총관總管을 거느리고 기주夔州로부터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서 소선蕭銑을 공격하게 하였다.
蕭銑 以罷兵營農也 纔留宿衛數千人이러니 聞唐兵至하고 大懼하야 倉猝徵兵하니 皆在江嶺之外하야 道塗阻遠하야 不能遽集이라
이때 소선蕭銑은 군대를 파하고 농사를 짓고 있었으므로 겨우 숙위宿衛하는 군사 수천 명만 남겨 두었는데, 나라 군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창졸간에 군사를 징발하니, 모두 강남江南영남嶺南 밖에 있어서 도로가 험하고 멀어 갑자기 모일 수가 없었다.
乃悉注+[釋義]謂見在之兵也하야 出拒戰이어늘
이에 현재 보유한 병력注+[釋義]견병見兵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대를 이른다. 을 다 동원하여 막고 싸우게 하였다.
李靖 縱兵하야 奮擊大破之하고 乘勝直抵江陵하야 入其外郭하고 又攻水城拔之하야 大獲舟艦이러니
이정李靖이 군대를 풀어 분격奮擊해서 대파大破하고는 승세를 타고 곧바로 강릉江陵에 이르러 그 외곽外郭으로 들어가고, 또 수성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전함을 크게 노획하였다.
李靖 使孝恭으로 盡投之江中한대 諸將 皆曰 破敵所獲 當藉其用이어늘 奈何棄以資敵이니잇고
이정李靖이효공李孝恭으로 하여금 노획한 전함을 모두 강물 속에 던져버리게 하자, 제장諸將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격파하고 노획한 것을 사용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버려서 적에게 이용하게 하십니까?” 하니,
靖曰 蕭銑之地 南出嶺表하고 東距洞庭하니
이정李靖이 대답하기를 “소선蕭銑의 지역은 남쪽으로는 오령五嶺 밖으로 나가고 동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에 이른다.
懸軍深入하야 若攻城未拔하고 援兵四集이면表裏受敵하야 進退不獲하리니 雖有舟楫이나 將安用之리오
내가 만약 군대를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만약 을 공격하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적의 구원병이 사방에서 모인다면 나는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할 것이니, 비록 배와 노가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今棄舟艦하야 使塞江而下 援兵 見之하고 必謂江陵已破라하야 未敢輕進하고 往來覘伺하야 動淹旬月하리니 吾取之必矣리라
이제 전함을 버려서 강을 가득히 메우고 떠내려가게 하면 구원병들이 이를 보고서 반드시 강릉江陵이 이미 격파되었다고 생각하여 감히 가볍게 전진하지 못하고, 오가면서 엿보아 그때마다 열흘이나 한 달이 걸릴 것이니, 이렇게 되면 틀림없이 내가 점령할 수 있다.” 하였다.
銑援兵 見舟艦하고 果疑不進하니 內外阻絶이라
소선蕭銑의 구원병이 전함을 보고 과연 의심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소선蕭銑이 안팎으로 막히고 끊겼다.
乃謂群下曰 天不祚梁하니 不可復支矣로다
소선蕭銑이 마침내 여러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주지 않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若必待力屈이면 則百姓蒙患하리니 奈何以我一人之故 陷百姓於塗炭乎아하고 銑乃下令하야 開門出降하다
만약 반드시 힘이 다하기를 기다린 뒤에 굴복한다면 백성들이 폐해를 입을 것이니, 어찌 나 한 사람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겠는가.” 하고는 소선蕭銑이 마침내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銑降數日 援兵至者十餘萬이러니 聞江陵不守하고釋甲而降하다
소선蕭銑이 항복한 지 며칠 만에 도착한 구원병이 11만 명이었는데, 강릉江陵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갑옷을 벗고 항복하였다.
孝恭 送銑於長安하니 斬於都市注+[附註]范氏曰 蕭銑 故梁子孫이라 因亂하야 保據荊, 楚하고 欲復先業하니 最無罪어늘 而唐誅之하니 淫刑甚矣 胡氏曰 若以文告之하고 辭招而撫之하야 再三不下然後 用兵이요 旣服이어든 當矜其志하고 胙以江南百里之地하야 使奉梁祀 則唐之德 幾乎이어늘 而以盜賊待之하니 其不仁 甚矣로다하다
이효공李孝恭소선蕭銑장안長安으로 압송하니, 도성의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었다.注+[附註]범씨范氏가 말하였다. “소선蕭銑은 옛날 나라의 자손子孫이다. 난리를 틈타 지방을 점거하고 선대先代기업基業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니 가장 죄가 없는데, 나라에서 그를 죽였으니 형벌을 남용함이 심하였다.”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만약 글로써 고하고, 글로써 불러서 위무하기를 여러 번 했는데도 항복하지 않은 뒤에 무력武力을 동원하며, 이미 복종했으면 그 뜻을 가엾게 여기고 강남江南의 백 리 되는 땅을 주어서 나라 제사를 받들게 했어야 하니, 이렇게 하였다면 나라의 이 거의 무왕武王이 처음 즉위하여 베푼 정사에 가까웠을 터인데, 그를 도적으로 대하였으니 불인不仁함이 심하다.”
〈出李靖及蕭銑傳〉
- 《당서唐書》의 〈이정전李靖傳〉과 〈소선전蕭銑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聞江都敗 : 宇文化及이 무인년 4월에 江都에서 煬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大丞相이라 칭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2 端門樓 : 東都의 皇城 남쪽에 세 개의 문이 있는데, 中門을 端門이라 하고 端門 위에 있는 城樓를 端門樓라 하였다.
역주3 道場 : 隋나라 때 寺院의 이름으로 大業 9년(613)에 조서를 내려 천하의 사원을 道場으로 고쳤다.
역주4 其文回環可讀 : 돈의 面에 ‘開元通寶’ 네 글자가 있는데 시속에서 대부분 이 글자를 돌려가면서 읽어 ‘開通元寶’라 하였다. 이것이 後世에 銅幣를 ‘通寶’ 혹은 ‘元寶’라 이름하게 된 由來이다. 開元의 뜻은 새로 시작하여 새로운 紀元이라는 뜻이고 年號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南唐과 閩으로부터 太平天國에 이르기까지 또한 ‘開元通寶’를 주조하였다.
역주5 : 합
역주6 : 경
역주7 親事府 : 唐나라 초기에 秦王府와 齊王府에 설치한 관서로, 長史‧錄事‧別將‧庫直 등이 있었다.
역주8 : 현
역주9 武王下車之政 :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이긴 뒤에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黃帝의 후손을 薊에 봉하고, 帝堯의 후손을 祝에, 帝舜의 후손을 陳에 봉하였으며, 또 수레에서 내린 뒤에는 夏后氏의 후손을 杞에 봉하고 殷의 후손을 宋에 봉하였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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