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 〈唐武德五年이요 漢東王劉黑闥天造元年이라
正月
에 劉黑闥
注+[附註]本王世充故臣也라 建德, 世充旣定에 建德諸將으로 居閭里暴橫者를 繩之하니 皆驚懼不安이러니 會에 詔悉徵建德故將한대 於是에 相謂曰 世充이 以洛陽降唐이어늘 其將相大臣을 皆夷滅之하니 吾屬이 至長安이면 必不免이라하고 乃謀作亂하야 以黑闥爲主하니라이 自稱漢東王
하고 都
州
러니 唐秦王世民
이 擊破之
한대 黑闥
이 奔突厥
하니 山東
이 悉平
이라
○ 八月己未에 突厥頡利可汗이 寇幷州하고 遣兵寇原州어늘
唐主謂群臣曰 突厥
이 入寇而復求和
하니 和與戰
이 孰利
오 太常卿鄭元
曰 戰則怨深
하리니 不如和利
니이다
中書令封德彛曰 突厥
이 하야 有輕中國之意
하니 若不戰而和
하여 示之以弱
이면 明年
에 將復來
하리니
○ 十月
에 唐淮陽王道玄
注+[頭註]唐主從兄之子라이 與黑闥
로 戰於下博
이라가 兵敗
하야 爲黑闥所殺
하니 山東震駭
하야 州縣皆叛
하야 附於黑闥
이라
旬(月)[日]間에 黑闥이 盡復故地하고 進據洺州하다
○ 道玄이 數從秦王世民하야 征伐이러니 死時年十九라
世民이 深惜之하야 謂人曰 道玄이 常從吾征伐에 見吾深入賊陳하고 心慕效之하야 以至於此라하고 爲之流涕러라
世民이 自起兵以來로 前後數十戰에 常身先士卒하야 輕騎深入에 雖屢危殆나 而未嘗爲矢刃所傷이러라
唐主謂世民曰 若事成이면 則天下皆汝所致니 當以汝爲太子라하더니
及爲唐王에 將佐亦請以世民爲世子어늘 唐主將立之러니 世民이 固辭而止하다
太子建成은 喜酒色遊畋하고 齊王元吉은 多過失하야 皆無寵이라
建成
이 內不自安
하야 乃與元吉協謀
하고 共傾世民
할새 曲意事諸妃嬪
하야 以求媚於上
注+[通鑑要解]秦王이 每侍宴宮中에 思早終하야 不得見唐主有天下하야 或噓流唏涕하니 唐主不樂이라 諸妃嬪曰 陛下春秋高邁하시니 宜相娛樂이어늘 而秦王如此하니 正是憎疾妾等이라 陛下萬歲後에 妾子母必無孑遺矣리이다 云云하니 由是로 無易太子意하고 待世民浸疎也하니라이라
太子中允王珪
注+[頭註]中允은 官名이라와 洗馬魏徵
이 說太子曰 秦王
은 功蓋天下하야 中外歸心하고 殿下
는 但以年長
으로 位居東宮
하야 無大功以鎭海內
하니이다
今劉黑闥
은 散亡之餘
에 衆不滿萬
하고 資糧匱乏
하니 以大軍臨之
면 勢如
朽
注+[原註]拉은 洛合反이니 折也라하리니
殿下宜自擊之하야 以取功名하고 因結納山東豪傑이면 庶可自安하리이다
黑闥이 引兵而南이어늘 建成, 元吉이 擊破之하니 黑闥이 食盡衆散하야 遂夜遁하다
王, 魏以輔導東宮爲職하니 當勸建成以孝於高祖하고 友於秦王이면
且建成이 旣爲太子면 則國其國也니 安在於立功이리오
夫以王, 魏之賢으로도 其爲建成謀 猶如此어든 況庸人乎아
임오(622) - 당唐나라 무덕武德 5년이고, 한동왕漢東王 유흑달劉黑闥의 천조天造 원년이다.
○ 이해에 초楚가 양梁을 겸병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
정월에
유흑달劉黑闥注+[附註]유흑달劉黑闥은 본래 왕세충王世充의 옛 신하였다. 두건덕竇建德과 왕세충王世充이 평정되고 난 뒤 당주唐主가 두건덕竇建德의 장수들 중에 여리閭里에 있으면서 횡포를 부린 자들을 다스리니,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였다. 이때 마침 조서를 내려 두건덕竇建德의 옛 장수들을 모두 부르자, 이에 서로 말하기를 “왕세충王世充이 낙양洛陽을 가지고 당唐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 장수와 정승 등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멸하였으니, 우리들이 장안長安에 이르면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모의하고 난리를 일으켜서 유흑달劉黑闥을 맹주盟主로 삼았다. 이 스스로
한동왕漢東王이라 칭하고
명주洺州에 도읍하였는데,
당唐나라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이들을 격파하자
유흑달劉黑闥이
돌궐突厥로 도망하니,
산동山東 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6월에 유흑달劉黑闥이 돌궐突厥을 이끌고 산동山東을 침략하였다.
○ 8월 기미일己未日(10일)에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병주幷州를 침략하고 군대를 보내어 원주原州를 침략하였다.
당주唐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돌궐突厥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다시 화친을 요구하니, 화친과 전투 중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 하니, 태상경太常卿 정원숙鄭元璹이 말하기를 “싸우면 원망이 심할 것이니, 화친의 이로움만 못합니다.” 하였다.
중서령中書令인 봉덕이封德彛가 말하기를 “돌궐突厥이 개와 양과 같은 오랑캐의 많은 무리를 믿고서 중국中國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으니, 만약 싸우지 않고 화친하여 약함을 보여주면 내년에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
이미 이기고 난 뒤에 화친하면 은혜와 위엄이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당주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9월에 유흑달劉黑闥이 영주瀛州를 함락하고 진격하여 염주鹽州를 함락하였다.
○ 10월에
당唐나라
회양왕淮陽王 이도현李道玄注+[頭註]회양왕淮陽王 이도현李道玄은 당주唐主의 종형從兄의 아들이다. 이
유흑달劉黑闥과
하박현下博縣에서 싸우다가 군대가 패하여
유흑달劉黑闥에게 살해되자,
산동山東이 동요하고 놀라서
주현州縣이 모두 배반하여
유흑달劉黑闥에게 붙었다.
열흘 만에 유흑달劉黑闥이 옛 땅을 모두 수복하고 진격하여 명주洺州를 점거하였다.
○ 이도현李道玄이 여러 번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따라 정벌하였는데, 죽었을 때 나이가 19세였다.
이세민李世民이 그를 매우 아까워하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도현李道玄이 항상 나를 따라 정벌할 때에 내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본받아서 이에 이르게 되었다.” 하고는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세민李世民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전후로 수십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사졸士卒들보다 앞장서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만났으나 일찍이 화살과 칼날에 부상당한 적이 없었다.
○ 처음에 당주唐主가 진양晉陽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은 모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의 계책이었다.
당주唐主가 이세민李世民에게 이르기를 “만약 일이 성공하면 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한 것이니 마땅히 너를 태자로 삼겠다.” 하였다.
당왕唐王이 되자 장수와 보좌들 또한 이세민李世民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니, 당주唐主가 이세민李世民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세민李世民이 한사코 사양하여 그만두었다.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은 주색과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였고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과실이 많아 모두 당주唐主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의 공명이 날로 성해지니, 당주唐主가 항상 이세민李世民으로 이건성李建成을 대신할 의향이 있었다.
이건성李建成이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마침내
이원길李元吉과 도모하여
이세민李世民을 함께 거꾸러뜨리기로 하고 뜻을 굽혀 여러
비빈妃嬪들을 섬겨서
상上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였다.
注+[通鑑要解]曲意事諸妃嬪 구미어상求媚於上: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매번 궁중에서 상上을 모시고 연회를 열 때마다 태목황후太穆皇后가 일찍 죽어 당주唐主가 천하를 소유한 것을 보지 못하였음을 생각해서 혹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당주唐主가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비빈妃嬪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의당 즐겁게 해드려야 할 터인데, 진왕秦王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저희 첩들을 미워해서입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희들 모자母子는 반드시 모두 죽임을 당하여 씨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당주唐主가 이 때문에 태자太子를 바꾸려던 뜻이 없어지고 이세민李世民을 대하는 것이 점점 소원해졌다.
태자중윤太子中允 왕규王珪注+[頭註]중윤中允은 관명官名이다. 와
태자세마太子洗馬 위징魏徵이
태자太子를 설득하기를 “
진왕秦王은
공功이 천하를 뒤덮어
중외中外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전하殿下는 다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동궁東宮의 지위에 있어서
해내海內를 압도할 만한 큰 공덕이 없습니다.
지금
유흑달劉黑闥은 흩어져 도망한 뒤에 남은 무리가 만 명이 못 되고 물자와 군량이 다 떨어졌으니,
대군大軍으로써 임한다면 형세가 썩은 나무를 취하는
注+[原註]랍拉은 洛合反(랍)이니, 꺾음이다.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그를 공격하여 공명을 취하고 인하여 산동山東의 호걸들과 교분을 맺는다면 아마도 스스로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자太子가 마침내 출정할 것을 청하자 당주唐主가 이를 허락하였다.
- 《당서唐書 고조제자전高祖諸子傳 은태자건성隱太子建成》에 나옴 -
갑신일甲申日(11월 7일)에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하게 하였다.
유흑달劉黑闥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오자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이 그를 격파하니, 유흑달劉黑闥이 식량이 떨어지고 무리가 흩어져서 마침내 밤중에 도망하였다.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으니, 마땅히 고조高祖에게 효도하고 진왕秦王에게 우애하도록 이건성李建成에게 권했어야 했다.
이렇게 했으면 태자太子의 지위가 편안했을 것이다.
또 이건성李建成이 이미 태자가 되었으면 당唐나라는 자기 나라이니, 어찌 공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이건성李建成으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여 위엄을 세우게 하고 호걸들과 결탁하여 자신을 돕게 하였다.
이것은 다툼으로 인도한 것이니, 화란禍亂이 어디로부터 그치겠는가.
왕규王珪와 위징魏徵같이 어진 이도 이건성李建成을 위하여 도모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용렬한 사람에 있어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