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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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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甲寅] 〈梁中大通六年이요 魏永熙三年이요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이라
○ 是歲 魏分爲二하니 凡三國이라
中軍將軍王思政 言於魏主曰 高歡之心 昭然可知
洛陽 非用武之地 宇文泰 乃心王室하니 今往就之하면 還復舊京 何慮弗克이리잇고
魏主深然之하야 以五千騎 西出長安하니 泰備儀衛하고 迎帝하야 謁見於東陽驛이라
魏主遂入長安하야 以泰爲尙書令하야 軍國之政 咸取決焉하다
○ 十月 魏丞相歡 至洛陽하야 集百官耆老하고 立淸河世子注+[頭註]淸河이니 乃文帝宏之孫이라善見하야 爲帝하니 孝靜帝卽位於城東北하고 遷都鄴注+[原註]世號東魏 始於此하다
○ 魏孝武帝 復與泰有隙注+[附註]孝武閨門無禮하야 從妹不嫁者三人 〈皆封公主〉 平原公主明月 南陽王寶炬之同産也 從入關이러니 泰使人殺之하니 孝武不悅이라 由是 復與泰有隙하니라이라
十二月 魏主飮酒遇酖而殂하니 泰乃奉太宰南陽王寶炬注+[頭註]文帝宏子京兆王愉之子而立之하다


갑인(534) - 나라 중대통中大通 6년이고, 나라 영희永熙 3년이고,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천평天平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나라가 나뉘어 둘이 되니, 모두 세 나라이다. -
중군장군中軍將軍 왕사정王思政위주魏主에게 말하기를 “고환高歡의 야심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낙양洛陽은 무력을 쓸 수 있는 요충지가 아니고 우문태宇文泰는 마침내 왕실王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지금 그에게 찾아가서 의지한다면 다시 옛 서울인 낙양洛陽을 수복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위주魏主가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겨서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장안長安으로 나가니, 우문태宇文泰가 의장대와 호위병을 갖추고 황제를 맞이하여 동양역東陽驛에서 알현하였다.
위주魏主가 마침내 장안長安으로 들어가서 우문태宇文泰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아 군국軍國의 정사를 모두 그에게서 결단하였다.
○ 10월에 나라 승상丞相 고환高歡낙양洛陽에 이르러서 백관百官원로元老들을 모아놓고 청하왕淸河王注+[頭註]청하왕淸河王원단元亶이니, 바로 효문제孝文帝 원굉元宏의 손자이다. 세자世子원선견元善見을 세워 황제로 삼으니, 효정제孝靜帝낙양성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注+[原註]孝靜帝卽位於城東北 천도업遷都鄴:효정제孝靜帝낙양성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 업성鄴城으로 천도하니, 세상에서 동위東魏라고 이름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나라 효무제孝武帝가 다시 우문태宇文泰와 틈이 있었다.注+[附註]효무제孝武帝규문閨門가 없어 종매從妹 중에 시집가지 않은 자 세 명을 모두 봉하여 공주公主로 삼았다. 평원공주平原公主 명월明月남양왕南陽王 원보거元寶炬의 동복형제로 효무제孝武帝를 따라 관중關中에 들어왔는데, 우문태宇文泰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니, 효무제孝武帝가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우문태宇文泰와 틈이 생겼다.
12월에 위주魏主가 술을 마시다가 짐독에 중독되어 죽으니, 우문태宇文泰가 마침내 태재太宰남양왕南陽王 원보거元寶炬注+[頭註]원보거元寶炬효문제孝文帝 원굉元宏의 아들인 경조왕京兆王 원유元愉의 아들이다. 를 받들어 그를 세웠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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