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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8)

통감절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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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十四年이라
원화元和 14년(기해 819)
春正月 中使迎佛骨하야 至京師어늘 留禁中三日 乃歷送諸寺하니 王公士民 瞻奉捨施호되 惟恐弗及하야 有竭産充施者하며 有燃香臂頂供養者
봄 정월에 중사中使가 부처의 뼈를 맞이하여 경사京師에 이르자, 이 부처의 뼈를 궁궐에 3일 동안 머물게 하고는 마침내 여러 절에 차례로 보내니, 왕공과 선비와 백성들이 부처의 뼈를 우러러보고 시주하였는데,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재산을 다 털어 시주에 충당하는 자가 있었으며, 팔뚝과 이마에 향을 태워 공양하는 자가 있었다.
刑部侍郞韓愈 上表切諫하야
이에 형부시랑刑部侍郞 한유韓愈가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간절히 간하였다.
以爲佛者 夷狄之一法爾
“부처는 이적夷狄의 한 가지 일 뿐입니다.
自黃帝 以至禹, 湯, 文, 武 皆享壽考注+[頭註] 引也 成也 하고 百姓安樂호되 當是時하야 未有佛也러니
황제黃帝로부터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長壽를 누리고注+[頭註]는 늘리는 것이요 이루는 것이다. 백성들은 안락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불교가 있지 않았습니다.
漢明帝時 始有佛法이나 其後亂亡相繼하야 運祚不長하고 宋, 齊, 梁, 陳, 元魏以下 事佛漸謹이나 年代尤促하니이다
나라 명제明帝 때에 중국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이 있었으나 그 뒤에 난리와 멸망이 서로 이어져서 국운이 장구하지 못하였고, 원위元魏 이후로 군주가 부처를 신봉하여 점점 공경하였으나 재위한 연수年數가 더욱 촉박하였습니다.
唯梁武帝 在位四十八年 前後三捨身하야 爲寺家奴로되 竟爲侯景所逼하야 하고 國亦尋滅하니 事佛求福 乃更得禍
오직 나라 무제武帝는 재위한 48년 동안 전후에 걸쳐 세 번 자기 몸을 시주하여 사찰의 가노家奴가 되었으나 끝내 후경侯景에게 핍박당하여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고 나라도 얼마 후 멸망하였으니,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한 것이 도리어 화를 얻었습니다.
由此觀之컨대 佛不足信 亦可知矣니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됨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百姓愚冥하야 易惑難曉하니 苟見陛下如此하면 皆云 天子大聖一心敬信이어든 百姓微賤 於佛 豈可更惜身命이리오하리이다
백성들은 어리석고 어두워 미혹되기가 쉽고 깨닫기가 어려우니, 만약 폐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을 본다면 모두들 말하기를 ‘천자와 같은 대성인大聖人도 오히려 한 마음으로 부처를 공경히 신봉하는데, 우리와 같은 미천한 백성이 부처를 신봉함에 어찌 다시 몸과 목숨을 아끼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佛本夷狄之人으로 不知君臣之義, 父子之恩하니 假如其身尙在하야 來朝京師라도 陛下容而接之하야 不過宣政一注+[釋義]宣政 殿名이라[頭註] 唐時 四夷入朝貢者 皆引見於宣政殿하니라 音現이라 이요 禮賓一設注+[頭註]唐有禮賓院하야 凡胡客入朝하면 設宴于此하니라 하고 賜衣一襲注+[頭註]上下皆具曰一襲이라 하야 衛而出之於境하야 不令惑衆也리이다
부처는 본래 이적夷狄의 사람으로서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은혜를 알지 못하니, 가령 그의 몸이 아직 살아 있어서 그 군주의 명을 받고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한다 해도 폐하께서 그를 포용하고 접견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注+[釋義]선정宣政은 궁전의 이름이다. [頭註]나라 때 사이四夷 중에 들어와서 조공朝貢하는 자들을 모두 선정전宣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은 음이 현이다. 한 번 만나보시고 예빈원禮賓院에서 한 번 잔치를 베풀어주고注+[頭註]나라에 예빈원禮賓院이 있어서 오랑캐의 객사客使가 입조하면 이곳에서 연향을 베풀었다. 의복 한 벌을 하사하신注+[頭註]상의上衣하의下衣를 모두 갖춘 것을 일습一襲이라고 한다. 다음 사람을 보내어 호위해서 국경을 나가게 하는데 불과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況其身死已久하니 枯朽之骨 豈宜以入宮禁이리잇고
더구나 부처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으니, 마르고 썩은 뼈를 어찌 궁궐 안으로 들여온단 말입니까?
乞以此骨付有司하야 投諸水火하야 永絶根本하사 斷天下之疑하고 絶後代之惑하야 使天下之人으로 知大聖人之所作爲 出於尋常萬萬注+[頭註]八尺爲尋이요 倍尋爲常이라 萬萬 言數之多也 하시면 豈不盛哉리잇고
청컨대 이 뼈를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물과 불 속에 던져버려 영원히 근원을 끊으시어 천하 사람들의 의혹을 끊고 후인들의 미혹을 막아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대성인大聖人작위作爲하시는 바가 심상尋常한 것보다 만만배나 뛰어남을注+[頭註]8이라 하고 의 곱절인 16이라 한다. 만만萬萬은 많은 수를 말한다. 알게 하신다면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佛如有靈하야 能作禍福인댄 凡有殃咎 宜加臣身이리이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어서 화와 복을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면 모든 재앙과 죄과를 내릴 적에 마땅히 신의 몸에 가할 것입니다.”
上大怒하야 出示宰相하고 將加愈極刑이러니 裴度, 崔群注+[頭註]同平章事 爲言호되 愈雖狂이나 發於忠하니 宜寬容以開言路라하니
은 〈한유韓愈가 올린 표문表文을 보고〉크게 노하여 이것을 꺼내어 재상들에게 보이고 장차 한유韓愈에게 극형極刑을 가하려 하였는데, 배도裴度최군崔群注+[頭註]최군崔群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아뢰기를 “한유韓愈가 비록 광망狂妄하기는 하나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여 언로言路를 열어야 합니다.” 하였다.
乃貶愈爲潮州刺史하다
이에 한유韓愈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켰다.
[新增]按韓愈論佛骨表云
[新增]살펴보건대 한유韓愈논불골표論佛骨表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臣某言하노이다
“신 아무는 아룁니다.
伏以佛者 夷狄之一法耳
엎드려 생각하건대 부처는 이적夷狄의 한 일 뿐입니다.
自後漢時 流入中國이요 上古 未嘗有也하니이다
후한後漢 때에 중국中國에 흘러 들어왔고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昔者黃帝 在位百年이요 年一百一十歲 少昊 在位八十年이요 年一百歲 顓頊 在位七十九年이요 年九十八歲 帝嚳 在位七十年이요 年一百五歲 帝堯 在位九十八年이요 年一百一十八歲 帝舜及禹 年皆百歲이니이다
옛날 황제黃帝는 재위가 100년이고 연세가 110세이며, 소호少昊는 재위가 80년이고 연세가 100세이며, 전욱顓頊은 재위가 79년이고 연세가 98세이며, 제곡帝嚳은 재위가 70년이고 연세가 105세이며, 제요帝堯는 재위가 98년이고 연세가 118세이며, 제순帝舜우왕禹王은 연세가 모두 100세였습니다.
此時 天下太平하야 百姓安樂壽考 然而此時中國 未有佛也하니이다
이때는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안락하고 장수를 누렸으나 이때는 중국에 아직 불법佛法이 있지 않았습니다.
其後 殷湯亦年百歲 湯孫太戊 在位七十五年이요 武丁 在位五十九年이니 書史 不言其年壽所極이나 〈推其年數하면〉蓋亦俱不減百歲니이다
그 뒤에 나라의 탕왕湯王도 나이가 100세였고 탕왕湯王의 손자인 태무太戊는 재위가 75년이고 무정武丁은 59년이니, 역사책에 그 수명壽命의 이른 바를 말하지 않았으나 연수年數를 추산해 보면 또한 모두 연세가 100세보다 적지 않을 것입니다.
周文王 年九十七歲 武王 年九十三歲 穆王 在位百年이로되 此時佛法 亦未(至)[入]中國하니 非因事佛而致然也니이다
나라 문왕文王은 연세가 97세이고 무왕武王은 연세가 93세이고 목왕穆王은 재위가 100년이었습니다만 이때에는 불법佛法이 또한 중국中國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부처를 섬김으로 인하여 장수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漢明帝時 始有佛法이로되 明帝在位 纔十八年耳 其後亂亡相繼하야 運祚不長하고
나라 명제明帝 때에 비로소 불법佛法이 있었으나 명제明帝는 재위가 겨우 18년뿐이었고, 그 뒤에 난리와 멸망이 서로 이어져서 국운이 길지 못하였습니다.
宋齊梁陳元魏注+[頭註]北朝魏 本拓拔氏 後改元氏하니라 已下 事佛漸謹이나 年代尤促하니이다
원위元魏注+[頭註]북조北朝나라는 본래 탁발씨拓拔氏이니, 뒤에 원씨元氏로 고쳤다. 이래로는 더욱 삼가 부처를 섬겼으나 연대年代가 더욱 촉박하였습니다.
唯梁武帝 在位四十(九)[八]年 前後三度捨身施佛하고 宗廟之祭 不用牲牢하며 盡日一食호되 止於菜果러니 其後 竟爲侯景所逼하야 餓死臺城하고 國亦尋滅注+[頭註] 繼也 하니 事佛求福 反更得禍
오직 나라 무제武帝는 재위가 49년에 전후로 세 번 몸을 희사하여 부처에게 시주하였고, 종묘의 제사에 생뢰牲牢(희생)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하루종일 한 번 밥을 먹되 채소와 과일에 그쳤지만 그 후에 후경侯景에게 핍박을 받아서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고 나라 또한 얼마 후에 멸망하였으니,注+[頭註]은 잇는 것이다.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한 것이 도리어 다시 화를 얻었습니다.
由此觀之컨대 佛不足信事 亦可知矣니이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부처는 섬길 만한 것이 못됨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高祖始受隋禪하시고 則議除之注+[頭註]武德九年四月 高祖詔有司하야 沙汰天下僧尼道士女冠하니라러니 當時群臣 材識不遠하야 不能深知先王之道, 古今之宜하야 推闡聖明하야 以救斯弊하야 其事遂止하니 臣常恨焉하노이다
고조高祖께서 처음 나라의 선양禪讓을 받을 적에 불법佛法을 제거할 것을 의논하였는데,注+[頭註]무덕武德 9년(626) 4월에 고조高祖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천하의 승려와 비구니, 도사道士여관女冠(女道士)을 도태시켰다. 당시 여러 신하들의 재주와 식견이 원대하지 못해서 선왕先王고금古今의 마땅함을 깊이 알지 못하여 고조高祖성명聖明함을 미루어 밝혀 이 폐단을 바로잡지 못해서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으니, 신은 항상 이것을 한스러워 합니다.
伏惟睿聖文武皇帝注+[頭註]憲宗丁亥年 群臣請上尊號曰睿聖文武皇帝 陛下 神聖英武하사 數千百年已來 未有倫比
엎드려 생각건대 예성문무황제폐하睿聖文武皇帝陛下께서는注+[頭註]헌종憲宗 정해년(807)에 신하들이 청하여 예성문무황제睿聖文武皇帝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신성神聖하고 영무英武하시어 수천백 년 이래로 견줄 만한 데가 없습니다.
卽位之初 〈卽〉不許度人爲僧尼道士注+[頭註] 하시고 又不許創立寺觀하시니 臣常以爲高祖之志 必行於陛下之手하니이다
즉위하신 초기에 즉시 사람들이 도첩度牒을 받아 승려僧侶도사道士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注+[頭註]는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는 것이다. 또 사찰과 도관道觀을 창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항상 고조高祖의 뜻이 반드시 폐하陛下의 손에서 시행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今縱未能卽行이나 豈可恣之하야 轉令盛也리잇고
지금 이를 즉시 시행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불법佛法을 신봉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더욱 성행하게 하단 말입니까.
今聞陛下令群僧으로 迎佛骨於鳳翔하야 御樓以觀하시고 入大內하며 又令諸寺 遞迎供養이라하니
신이 이제 들으니, 폐하께서 여러 승려들로 하여금 부처의 뼈를 봉상鳳翔에서 맞이하여 누대에 납시어 구경하시고 이것을 가마로 실어 대내大內로 들여왔으며, 또 여러 사찰로 하여금 차례로 맞이하여 공양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臣雖至愚 必知陛下不惑於佛하야 作此崇奉以祈福祥也니이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반드시 폐하께서 불법佛法에 혹하여 이처럼 높이고 받들어 복과 상서를 바라지 않으실 줄을 압니다.
直以年豐人樂하니 徇人之心하야 爲京都士庶詭異之觀 戲翫之具耳 安有聖明若此而肯信此等事哉잇가
다만 지금 연사年事가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즐거워하니, 백성들의 마음을 따라서 경도京都사서인士庶人들의 기이한 구경거리와 희롱하는 도구로 삼고자 하셨을 뿐이니, 어찌 이와 같이 성스럽고 밝으시면서 이러한 일을 기꺼이 믿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나 百姓愚冥하야 易惑難曉하니 苟見陛下如此하면 將謂眞心事佛이라하야 皆云
그러나 백성들은 어리석고 어두워서 미혹되기가 쉽고 깨우치기가 어려우니, 만일 폐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을 본다면 장차 진심으로 부처를 섬긴다고 생각하여 모두 말하기를
天子大聖 猶一心敬信이어든 百姓何人 於佛 更惜身命이리오하야
천자天子와 같은 대성인大聖人도 오히려 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믿으시는데, 우리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이 부처에게 몸과 목숨을 아끼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焚頂燒指하고 百十爲群하야 解衣散錢하야 自朝至暮 轉相倣效하야 惟恐後時
그리하여 이마를 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며 백 명과 열 명으로 무리를 지어 옷을 벗고 돈을 시주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려가면서 서로 모방해서 행여 뒤늦을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老少奔波하야 棄其業次하리니 若不卽加禁遏하고 更歷諸寺하면 必有斷臂臠身하야 以爲供養者하리니 傷風敗俗하고 傳笑四方하야 非細事也니이다
남녀노소男女老少가 앞다투어 달려와서 생업生業을 버릴 것이니, 만약 즉시 금지하지 않고 다시 여러 사찰을 돌게 한다면 반드시 팔뚝을 자르고 몸의 살점을 저며서 공양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풍속을 손상하고 무너뜨리며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어 작은 일이 아닙니다.
夫佛 本夷狄之人이라 與中國으로 言語不通하고 衣服殊制하야
부처는 본래 이적夷狄의 사람이라서 중국中國과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의복의 제도가 다릅니다.
口不言先王之法言하고 身不服先王之法服하며 不知君臣之義 父子之親이니이다
그리하여 입으로는 선왕先王의 법도에 맞는 말을 말하지 않고 몸으로는 선왕先王의 법도에 맞는 옷을 입지 않으며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친함을 알지 못합니다.
假如其身 至今尙在하야 奉其國命하야 來朝京師라도 陛下容而接之하야 不過宣政一見이요 禮賓一設하고 賜衣一襲하야 衛而出境하야 不令惑衆也리이다
가령 부처의 몸이 아직까지 살아 있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한다 하더라도 폐하께서 포용하고 접견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 한 번 만나보시고 예빈원禮賓院에서 한 번 잔치를 베풀어주고 의복 한 벌을 하사하신 다음 호위하여 국경을 나가게 하는데 불과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況其身死已久하니 枯朽之骨 凶穢之餘 豈宜令入宮禁이릿고
하물며 그 몸이 이에 죽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마르고 썩은 뼈와 흉측하고 더러운 잔재를 어찌 궁금宮禁으로 들여온단 말입니까.
孔子曰 敬鬼神而遠之라하시고
古之諸侯 行弔於其國에도 尙令巫祝으로 先以桃栵 祓除不祥注+[頭註] 本作茢이니 列, 例二音이라 鬼所惡也 苕帚也 所以除不祥也 音佛이니 去也, 除也 然後 進弔
하니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 하셨고, 옛날의 제후들은 자기 나라에서 조문을 행할 때에도 오히려 무당과 축관祝官으로 하여금 먼저 복숭아 나뭇가지와 갈대로 만든 빗자루를 가지고 불길한 것을 제거한注+[頭註]은 본래 로 되어 있으니, 음이 열과 예 두 가지이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싫어하는 것이고, 은 갈대로 만든 빗자루이니,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은 음이 불이니, 버리는 것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뒤에야 나아가 조문하였습니다.
今無故取朽穢之物하야 親臨觀之하시되 巫祝不先하고 桃栵不用이어늘 群臣不言其非하고 御史不擧其失하니 臣實恥之하노이다
이제 까닭없이 썩고 더러운 물건을 가져다가 폐하께서 친히 왕림하여 구경하시는데 무당과 축관들이 먼저 가지 않고 복숭아 나뭇가지와 갈대로 만든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신하들이 그 잘못을 말하지 않고 어사御史가 그 잘못을 거론하지 않으니, 신은 적이 부끄럽게 여깁니다.
乞以此骨 付〈之〉有司하야 投諸水火하야 永絶根本하야 斷天下之疑하고 絶後代之惑하사 使天下之人으로 知大聖人之所作爲 出於尋常萬萬也하시면 豈不盛哉 豈不快哉잇가
바라건대 이 뼈를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물과 불 속에 던져버려 근본을 영원히 끊으시어 천하 사람들의 의혹을 끊고 후대 사람들의 미혹을 막아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대성인大聖人작위作爲하시는 바가 심상한 것보다 만만 배나 뛰어남을 알게 하신다면 어찌 거룩하지 않겠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佛如有靈하야 能作禍福인댄 凡有殃咎 宜加臣身이니
부처가 만약 영험이 있어서 을 사람들에게 내린다면 무릇 재앙과 죄가 내릴 적에 마땅히 신의 몸에 가해질 것입니다.
上天鑑臨하시니 臣不怨悔하리이다
상천上天이 굽어보고 계시니, 신은 원망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無任感激懇悃之至하야 謹奉表以聞하노이다
지극히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삼가 표문表文을 받들어 아룁니다.
臣某 誠惶誠恐하노이다
아무는 진실로 황공합니다.”
○ 愚按 憲宗號爲剛果로되 而所爲若此者 由其聖學不講하야 素無理義以養其心이라
내(劉剡)가 살펴보건대 헌종憲宗은 강하고 과단성이 있다고 이름났으나 행한 바가 이와 같았던 것은 성학聖學을 강구하지 않아서 평소에 의리로써 마음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外物足以移之爾
그러므로 외물外物이 족히 그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未幾 金丹躁渴하야 旣不足以享長生之效하고 而身且不保로되 佛亦無如之何하니 則其妄誕之說 顯然耳
얼마 안 되어 금단金丹을 복용하여 성질이 조급해지고 갈증이 나서 이미 장생長生의 효험을 누리지 못하고 몸도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부처 또한 어쩔 수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불법佛法은 망령되고 허탄한 말임이 분명하다.
韓公表諫이라가 幾致極刑이로되 要之排斥異端하야 正議不屈하니 讀之凜凜하야 猶有生氣
한공韓公이 표문을 올려 간했다가 거의 극형을 당할 뻔하였으나 요컨대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올바른 의논을 굽히지 않았으니, 이것을 읽어보면 늠름하여 오히려 생기가 있다.
但學者罕見其全文故 增錄之耳로라
다만 배우는 자가 그 전문全文을 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여기에 덧붙여 기록하였다.
自戰國之世 老, 莊 與儒者爭衡注+[頭註] 所以稱輕重이니 言無所輕重也 하야 相是非하고 至漢末하야 益之以佛이라
전국시대戰國時代로부터 노자老子장자莊子유자儒者와 우열을 겨루어注+[頭註]은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이니, 쟁형爭衡은 서로 비슷하여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음을 말한다. 번갈아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였고, 나라 말기에 이르러 여기에 불교가 보태졌다.
이나 好者尙寡러니 晉, 宋以來 日益繁熾하야 自帝王으로 至于士民 莫不尊信하야 下者 畏慕罪福하고 高者 論難空有注+[頭註] 去聲이니 釋氏之說 談空以難有 로되 獨愈惡其蠹財注+[釋義] 當故反이니 蟲食木爲蠹 蠹財者 言耗竭也 惑衆하야 力排之하니라
그러나 좋아하는 자가 아직 적었는데, 나라와 나라 이후로 불교가 날로 더욱 번성해져서 제왕帝王으로부터 사민士民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높이고 신봉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지식이 낮은 자는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고 지식이 높은 자는 를 논란하였는데,注+[頭註]거성去聲(논란하다)이니, 석씨釋氏의 설은 를 논란한다. 유독 한유韓愈가 재물을 좀먹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을 미워하여注+[釋義]당고반當故反(도)이니,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는 것을 라 한다. 두재蠹財는 재물을 소모하고 고갈시킴을 말한다. 강력히 배척하였다.
〈出愈傳〉
- 《신당서新唐書 한유전韓愈傳》에 나옴 -
[新增]朱氏曰
[新增]朱氏(朱黼)가 말하였다.
不見於後世하니 說者皆曰孟子之功也라하나
양주楊朱묵적墨翟의 학문이 후세에 보이지 않으니, 논설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맹자孟子의 공로이다.’라고 한다.
而韓愈論秦人之禍 與後世不見經書之全하야 皆以爲禍起楊墨이라하고 謂孟子之力 能存什一於千百이라하니 固不能使之息滅也
그러나 한유韓愈나라 사람의 와 후세 사람들이 완전한 경서經書를 보지 못하는 이유를 논하여 모두 이르기를 ‘양주楊朱묵적墨翟에게서 시작되었다.’ 하고, ‘맹자孟子의 힘으로 천분의 십, 백분의 일을 보존하였다.’고 말하였으니, 맹자孟子가 진실로 양주楊朱묵적墨翟을 깨끗이 없애버리지 못한 것이다.
竊嘗論之컨대 楊氏之學 後爲老子하고 墨氏之學 本之晏嬰이요 申韓注+[頭註]申不害者 古鄭之相이요 韓非者 韓之諸公子 皆喜刑名法術之學하니라 慘刻 說者謂原之老子라하니 이라
삼가 논해보건대 양씨楊氏의 학문은 뒤에 노자老子가 되었고 묵씨墨氏의 학문은 안영晏嬰에게서 근본하였으며,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注+[頭註]신불해申不害는 옛날 나라의 재상이고, 한비韓非나라의 여러 공자公子이니, 모두 형명刑名법술法術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참혹함과 각박함은 논설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노자老子에게서 근원했다고 하니, 무릇 성인聖人을 비방하고 예교禮敎를 비판한 것은 안영晏嬰의 책이 그러하였다.
秦之尊君抑臣하고 嚴刑峻法 豈爲我之靡注+[頭註]爲我 楊氏 其是今非古하고 坑燔儒學 豈兼愛之激注+[頭註]兼愛 墨氏 也哉
나라가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며 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한 것은 어찌 양주楊朱위아설爲我說에 휩쓸린 것이 아니겠으며,注+[頭註]위아설爲我說양씨楊氏(楊朱)이다. 지금을 옳다 하고 옛날을 그르다 하며 유생儒生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경서經書를 불태운 것은 어찌 묵적墨翟겸애설兼愛說에 격동된 것이 아니겠는가.注+[頭註]겸애설兼愛說묵씨墨氏(墨翟)이다.
釋氏後入하야 言最宏闊이라
석씨釋氏의 불교는 중국에 뒤늦게 들어와서 내용이 가장 깊고도 넓다.
其罪福報應之語 旣足以鼓惑愚鄙之人이요 而其見心明性, 超出器形之論 又足以陷溺高明之士
죄와 복에 응보應報가 있다는 말은 어리석고 비루한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며, 마음을 보고 을 밝히며 을 뛰어넘는다는 의론은 또 고명한 선비들을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其徒坐食宂費하야 旣足以耗蠹海內하고 而斯民之和聲附影하야 忘本背親하야 又足以幻亂風俗하니 比楊墨之禍하면 不啻數十百倍也
부처를 따르는 무리(승려)들은 가만히 앉아서 밥만 먹고 쓸데없이 허비하여 이미 천하의 재정을 소모시키고, 이 백성들은 메아리에 응답하고 그림자처럼 따라서 근본을 잊고 어버이를 저버려서 또 풍속을 현혹시키니, 양주楊朱묵적墨翟의 화에 비하면 몇십 배나 몇백 배가 될 뿐만이 아니다.
晉, 宋, 魏, 梁, 陳以來 爲論排之者 雖未嘗絶이나 其究心竭力하야 終其身而不之置 獨愈一人而已
이래로 을 지어 불교를 배척한 자들이 비록 일찍이 끊이지 않았으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종신토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오직 한유韓愈 한 사람뿐이었다.
愈之用心 懇惻注+[頭註] 病也 深切 固見之與孟簡一書注+[頭註]孟簡 御史中丞이라 而其精微詳備하고 兼著本末之論 於原道注+[頭註]原道篇 推原堯舜禹湯文武相傳之正道하야 以辟邪說하니라 , 序文暢 見之 佛骨一表 忠諒有餘 其猶未見於詳乎인저
한유韓愈의 마음씀이 간절하고注+[頭註]은 병통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정성스러움은 진실로 맹간孟簡에게 준 한 통의 편지에서注+[頭註]맹간孟簡어사중승御史中丞이다. 볼 수 있고, 정미하여 자세히 갖추어지고 본말의 이론을 겸하여 드러낸 것은 원도原道注+[頭註]한유韓愈원도편原道篇, ,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서로 전한 정도正道를 미루어 근원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친 것이다.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볼 수 있으며, 논불골표論佛骨表 한 편은 충성스러움은 넉넉하지만 오히려 상세한 것을 볼 수가 없다.
憲宗時 館方士하고 劑藥物하야 以祈長生이어늘 愈以古今人主享國短長 享年壽夭 告之하니 宜其讀不終篇 諱惡而震怒也
헌종憲宗 때에 방사方士들을 에 머물게 하고 약물藥物을 조제하게 하여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바라자 한유韓愈고금古今의 군주가 재위한 햇수의 길고 짧음과 향년享年의 길고 짧음으로써 고하였으니, 마땅히 한 편을 다 읽기 전에 꺼리고 싫어하여 진노하였을 것이다.
釋氏之禍 雖不以愈言而息이나 然天下知其非是하야 而著論者自愈之後 益衆하니 史氏謂功齊孟子而其力倍之 詎不信然이리오
석씨釋氏의 화가 비록 한유韓愈의 말 때문에 종식되지는 않았으나 천하 사람들이 그 옳지 못함을 알아서 을 지은 자가 한유韓愈 뒤로부터 더욱 많아졌으니, 사씨史氏(史官)가 ‘한유韓愈의 공로는 맹자孟子와 같지만 힘은 배가 들었다.’고 말한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贊曰
신당서新唐書》의 〈한유전韓愈傳〉贊에 말하였다.
唐興 承五代剖分하야 王政不綱하니 文弊質窮하야 䵷(蛙)俚注+[原註] 胡媧反이요 亦作蛙[頭註] 䵷 或作哇하니 非也 鄙也 混幷이라
나라가 일어남에 분열된 오대五代(晉‧)의 뒤를 이어서 왕정王政이 기강이 없으니, 이 쇠하고 이 다하여 비루하고 속된 것이注+[原註] 䵷는 호왜반胡媧反(와)이요 로도 쓴다. [頭註] 䵷는 혹 로 되어 있으니 잘못이요, 는 비루함이다. 뒤섞여 어지러웠다.
天下已定 治荒剔蠹하고 討究儒術하야 以興典憲하야 薰醲涵浸 殆百餘年이라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뒤에 황폐한 것을 다스리고 좀먹은 것을 제거하며 유학儒學을 토론하고 강구하여 떳떳한 법을 일으켜서 훈도薰陶하고 침윤浸潤한 것이 거의 백여 년이었다.
其後 文章稍稍可述이러니 至正元元和注+[頭註] 德宗年號 元和 憲宗年號 하야 以樸注+[頭註] 與朴通이니 質朴也 하고 剗僞以眞이라
그 뒤에 문장이 점점 기술할 만하였는데, 정원貞元원화元和 연간에 이르러서注+[頭註]정원正元정원貞元이니 덕종德宗의 연호이고, 원화元和헌종憲宗의 연호이다. 한유韓愈가 마침내 육경六經의 글로 제유諸儒창도倡導가 되어 말류末流를 막아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돌이켜 질박하게 만들고注+[頭註]과 통용되니, 질박함이다. 거짓을 깎아 진실되게 하였다.
이나 愈之才 自(是)[視]司馬遷, 揚雄하야 至班固以下 不論也
그러나 한유韓愈의 재주는 본래 사마천司馬遷양웅揚雄에게 견주었고 반고班固 이하는 논하지 않았다.
當其所得 粹然一出於正하야 刊落陳言하고 橫騖別驅하야 大肆 要之無牴牾注+[頭註] 觸也 相交柱(拄)也 牴牾 言參 聖人者
당연히 그 자득한 것이 순수하게 한결같이 바른 데에서 나와 진부한 말을 제거하고는 멋대로 달리고 특별히 몰아서 왕양汪洋하여 크게 펼쳤으나 요컨대 성인聖人에게 어긋남이 없었다.注+[頭註]는 부딪히는 것이고 는 서로 버티는 것이니, 저오牴牾는 어긋남을 말한다.
는 스스로 맹가孟軻에게 견주어서 순황荀況양웅揚雄을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 말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至進諫陳謀하야 排難恤孤하고 矯拂注+[頭註] 本注 他候反이니 巧黠也라하니라 하야 皇皇於仁義하니 可謂篤道君子矣
간언을 올리고 계책을 아뢰어서 환난을 물리치고 고아들을 구휼하며 퇴락한 풍속을 바로잡아서注+[頭註]본주本注에 “타후반他候反(투)이니 공교롭고 약삭빠른 것이다.” 하였다. 인의仁義에 밝았으니, 가 돈독한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自晉迄隋 老佛顯行하야 聖道不斷如帶
나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크게 성행하여 성인聖人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가는 띠와 같았다.
諸儒倚天下正議하야 助爲怪神이러니 愈獨喟然引聖하야 爭四海之惑이라가 雖蒙訕笑 而復奮注+[頭註] 躓也 하니 始若未之信이나 卒大顯於時
여러 유자儒者들이 천하의 바른 의논에 의지하여 이를 도와서 괴이하고 신묘하게 만들었는데, 한유韓愈가 홀로 탄식하고 성인聖人을 이끌어 온천하의 의혹한 사람들과 다투다가 사람들의 비방과 비웃음을 당하였으나 넘어졌다가 다시 분발하였으니,注+[頭註]은 넘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듯하였으나 끝내는 세상에 크게 드러났다.
孟軻拒楊墨 去孔子才(纔)二百年이어늘 愈排二家 乃去千餘歲로되 撥衰反正注+[頭註] 治也 又轉之也 하니 功與齊而力倍之
옛날에 맹가孟軻을 막은 것은 공자孔子와의 거리가 겨우 200년이었는데, 한유韓愈을 배척한 것은 바로 천여 년의 거리였으나 쇠퇴한 것을 다스려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였으니,注+[頭註]은 다스리는 것이고, 또 전환하는 것이다. 공로는 맹자孟子와 같지만 힘은 배가 들었다.
所以過(向)[況]雄 爲不少矣니라
이 때문에 순황荀況양웅揚雄보다 뛰어남이 적지 않은 것이다.
自愈沒 其言大行하야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이라
한유韓愈가 죽은 뒤로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서 배우는 자들이 그를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
文藝傳敍曰
신당서新唐書》의 〈문예전文藝傳〉敍에 말하였다.
唐有天下三百年 文章 無慮注+[頭註]擧凡之言이니 無小思慮而大計也 又慮 疑也 猶言多少如是無疑 三變이라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300년 동안에 문장이 무려注+[頭註]무려無慮는 대략이라는 말이니, 작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큰 것만 계산하는 것이다. 또 는 의심하는 것이니, 다소 이렇게 의심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세 차례 변하였다.
高祖, 太宗 大難始夷하니 沿江左餘風注+[頭註]江左 謂宋, 齊, 梁, 陳이라 하야 絺章繪句注+[頭註] 去聲이니 縫刺也 五彩也 하고 揣合低昂이라
고조高祖태종太宗이 큰 난리를 처음으로 평정하니, 강좌江左(南朝)의 남은 풍속을 이어받아서注+[頭註]남조南朝나라‧나라‧나라‧나라를 이른다. 장구章句수식修飾하고注+[頭註]거성去聲이니 꿰매는 것이고, 는 다섯 가지 채색이다. 음절音節고저高低에 영합하였다.
王楊 爲之伯이라
그러므로 왕발王勃양형楊炯이 으뜸이 되었다.
玄宗 好經術하니 群臣稍厭雕(琢)[瑑]하고 索理致하야 崇雅黜浮하야 氣益雄渾하니 則燕許擅其宗이라
현종玄宗경학經學을 좋아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츰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는 것을 싫어하고 이치를 탐색하여 고아함을 높이고 부화浮華함을 내쳐서 기운이 더욱 웅혼雄渾하였으니,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이 그 종주宗主를 독차지하였다.
是時 唐興已百年이니 諸儒爭自名家
이때 나라가 일어난 지 이미 백 년이 넘으니, 여러 학자들이 다투어 스스로 명가名家라 하였다.
大曆注+[頭註]代宗年號 正元間 美才輩出하야 嚌道眞注+[頭註] 而宣切이니 與撋同이라 嘗也 하고 涵泳聖涯하니 於是 韓愈唱之하고 柳宗元, 皇甫湜, 李翶等 和之하야 排逐百家하야 法度森嚴이라
대종代宗대력大曆 연간과注+[頭註]대력大曆대종代宗의 연호이다. 덕종德宗정원貞元 연간에는 아름다운 인재들이 배출되어 의 참맛을注+[頭註]이선절而宣切(연)이니 과 같다. 는 맛보는 것이다. 연구하고 음미하며 성인聖人의 경지에서 한가롭게 노니, 이에 한유韓愈가 선창을 하고 유종원柳宗元황보식皇甫湜이고李翶 등이 화답해서 백가百家를 축출하여 문장 짓는 법도가 삼엄하였다.
注+[頭註] 踐也 晉魏하고漢周하야 唐之文 宛然注+[頭註] 本敍作完이라 爲一王法하니 此其極也
나라와 나라를 밀어 젖히고注+[頭註]은 밟는 것이다. 위로 나라와 나라에 이르러 나라의 문장이 완연히注+[頭註]은 《신당서新唐書》 〈문예전文藝傳〉의 본서本敍에는 으로 되어 있다. 왕법王法이 되었으니, 이것이 그 최고였다.
若侍從 則李嶠, 宋之問, 沈佺期, 王維 制冊則常袞, 楊炎, 陸贄, 權德輿, 王仲舒, 李德裕 言詩則杜甫, 李白, 元, 白居易, 劉禹錫이요 譎怪則李賀, 杜牧, 李商隱 皆卓然以所長으로 爲一世冠하니 其可尙已니라
황제를 시종侍從하면서 조명詔命을 받들어 수응酬應한 것은 이교李嶠송지문宋之問심전기沈佺期왕유王維이고, 제책문制冊文상곤常袞양염楊炎육지陸贄권덕여權德輿왕중서王仲舒이덕유李德裕이며, 로 말하면 두보杜甫이백李白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이고, 기이하고 괴탄怪誕함은 이하李賀두목杜牧이상은李商隱이니, 모두 우뚝히 소장所長을 가지고 한 세상의 으뜸이 되었으니, 참으로 가상할 만하다.”
소동파蘇東坡가 말하였다.
文起八代之衰注+[頭註] 以六經之文으로 爲諸儒倡이라 八代 謂東漢, 魏, 晉, 宋, 齊, 梁, 陳, 隋也 하고 道濟天下之溺注+[頭註]原道數十篇 皆奧衍宏深하야 與孟子相表裏하니 所以救濟人心之溺이니라 하며 忠犯人主之怒注+[頭註]憲宗迎佛骨 愈表諫也니라 하고 하니 此豈非參天地, 關盛衰하야 浩然而獨存者乎
문장文章팔대八代에 쇠퇴했던 것을 일으키고注+[頭註]한유韓愈육경六經의 글로 학자들의 창도倡導가 되었다. 팔대八代동한東漢를 이른다. 는 천하 사람들이 이단異端에 빠진 것을 구제하였으며,注+[頭註]한유韓愈가 지은 원도原道 수십 편은 내용이 모두 심오하고 넓어서 《맹자孟子》와 서로 표리가 되었으니, 이단異端에 빠진 인심人心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충성은 임금의 노여움을 범하였고注+[頭註]헌종憲宗이 부처의 유골遺骨을 맞이하자, 한유韓愈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간하였다. 용기는 삼군三軍의 장수를 빼앗았으니, 이 어찌 천지天地화육化育하는 에 참여되고 국운國運성쇠盛衰에 관계되어 호연浩然하고도 홀로 뛰어난 자가 아니겠는가.
蓋嘗論天人之辨하야 以謂 人無所不至로되 惟天 不容僞
내 일찍이 천리天理인사人事의 분별을 논하여 이르기를 ‘인사人事는 〈온갖 기교를 사용하여〉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나 오직 천리天理는 털끝만한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다.
智可以欺王公이로되 不可以欺 力可以得天下로되 不可以得匹夫匹婦之心이라
지혜로 왕공王公을 속일 수는 있으나 돼지와 물고기는 속이지 못하고, 힘으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평범한 필부匹夫필부匹婦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公之精誠 이로되하고 로되 而不能弭皇甫鎛, 李逢吉之謗注+[頭註]皇甫鎛, 李逢吉等 忌愈直하야 皆短之於帝하니라 하고 能信於南海之民하야 廟食百世로되 而不能使其身一日安於朝廷之上하니 蓋公之所能者 天也 其所不能者 人也니라
그러므로 의 정성이 형산衡山의 구름을 걷히게 할 수 있었으나 헌종憲宗의 의혹은 돌리지 못하였고, 악어의 포악함을 길들일 수 있었으나 황보박皇甫鎛이봉길李逢吉의 비방은注+[頭註]불능미황보박不能弭皇甫鎛 이방길지방불능미황보박李逄吉之謗不能弭皇甫鎛 이봉길지방李逢吉之謗:황보박皇甫鎛이봉길李逢吉 등이 한유韓愈의 강직함을 미워하여 모두 황제皇帝(憲宗)에게 한유韓愈의 단점을 들어 말하였다. 그치게 하지 못하였고, 남해南海의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아 백세토록 사당에서 제향하게 할 수 있었으나 자기 몸으로 하여금 단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하게 하지는 못하였으니, 이 능한 것은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능하지 못한 것은 인사人事였다.”
二月 李愬, 田弘正 屢敗李師道兵하다
2월에 이소李愬전홍정田弘正이 여러 번 이사도李師道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師道聞官軍侵逼하고 發民治州城塹注+[釋義] 音運이라 七艶反으로 坑也 遶城水 하야 修守備할새 役及婦人하니 益懼且怨이라
이사도李師道는 관군이 침입하여 핍박한다는 말을 듣고는 백성을 징발하여 운주鄆州의 성과 참호를 수리해서注+[釋義]이다. 칠염반七艶反(참)으로 구덩이이니, 성을 두르고 있는 물(해자)이다. 수비할 적에 부역이 부인들에게까지 미치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하고 원망하였다.
都知兵馬使劉悟 勒兵捕師道하야 與其二子斬之하야 函首送弘正營한대 弘正 大喜하야 露布以聞하니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劉悟가 군대를 무장하여 이사도李師道를 체포해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베어 머리를 함에 담아 전홍정田弘正의 군영으로 보내니, 전홍정田弘正이 크게 기뻐하여 노포露布로 조정에 아뢰었다.
淄靑等十二州皆平하다
그리하여 등 12개 가 모두 평정되었다.
自廣德注+[頭註]代宗年號 以來 垂六十年 藩鎭跋扈하야 河南北三十餘州 自除官吏하고 不供貢賦러니 至是하야 盡遵朝廷約束이러라
광덕廣德 연간注+[頭註]광덕廣德대종代宗의 연호이다. 이래로 60년이 되도록 번진藩鎭발호跋扈하여 하남河南하북河北의 30여 가 자기들 스스로 관리들을 제수하고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조정의 법령을 따랐다.
上命楊注+[頭註]兵部侍郞이니 音烏 하야 分李師道地하니 於陵 按圖籍하야 視土地遠邇하고 計士馬衆寡하고 校倉庫虛實하야 分爲三道注+[頭註]鄆曹漢爲一道 淄靑齊登萊爲二道也 하니 從之하다
양오릉楊於陵에게 명하여注+[頭註]양오릉楊於陵병부시랑兵部侍郞이니, 는 음이 오이다. 이사도李師道의 땅을 나누게 하니, 양오릉楊於陵이 지도와 호적을 살펴보아 토지의 멀고 가까움을 살피고 군사와 말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고 창고의 비고 충실함을 비교해서 나누어 세 를 만드니,注+[頭註]운주鄆州조주曹州한주漢州가 한 이고, 치주淄州청주靑州제주齊州등주登州내주萊州가 두 이다.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出藩鎭傳〉
- 《신당서新唐書 번진치청횡해藩鎭淄靑橫海》에 나옴 -
○ 裴度纂述蔡鄆用兵以來 上之憂勤機略하야 因侍宴獻之하다
배도裴度채주蔡州운주鄆州용병用兵한 이래로 이 나라를 근심하고 정사에 부지런한 기모機謀지략智略을 편찬하여 모시고 잔치할 때를 틈타서 올렸다.
○ 橫海節度使烏重胤호되
횡해절도사橫海節度使 오중윤烏重胤이 아뢰기를
河朔藩鎭 所以能旅拒朝命注+[頭註] 衆也 六十餘年者 由州縣各置鎭將領事하고 收刺史縣令之權하야 自作威福이니
하삭河朔번진藩鎭이 무리지어 함께 조정의 명령에 항거하기를注+[頭註]는 무리이다. 60여 년이나 한 까닭은 주현州縣에 각각 진장鎭將영사領事를 두고 자사刺史현령縣令의 권한을 빼앗아서 자기들 스스로 위엄과 복을 내렸기(형벌을 내리고 관리를 임용하였기) 때문이니,
曏使刺史各得行其職이면 則雖有姦雄如安史 必不能以一州獨反也리이다
지난날 가령 자사刺史가 각각 자기 직책을 수행하게 했다면 비록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과 같은 간웅姦雄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를 가지고 홀로 배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臣所領德, 棣, 景三州 已擧牒하야 各還刺史職事하고 應在州兵 竝令刺史領之하니이다
신이 관할하고 있는 덕주德州체주棣州경주景州에는 이미 공문公文을 보내어 각각 자사刺史의 직무를 그들에게 돌려주었고, 각 에 있어야 할 의 병사들은 모두 자사刺史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夏四月호되 諸道節度, 都團練, 都防禦, 經略等使所統 竝令刺史領之하라하다
여름 4월에 황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여러 도의 절도사節度使, 도단련사都團練使, 도방어사都防禦使, 경략사經略使 등이 통솔하고 있는 지군支郡을 모두 자사刺史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라.” 하였다.
自至德注+[頭註]肅宗年號 以來 節度使權重하야 所統諸州 各置鎭兵하고 以大將主之하야 暴橫爲患이라
지덕至德 연간注+[頭註]지덕至德숙종肅宗의 연호이다. 이래로 절도사節度使의 권한이 커져서 통솔하고 있는 여러 에 각각 진병鎭兵을 설치하고 대장大將(節度使)으로 통솔하였는데, 횡포를 자행하여 우환이 되었다.
重胤論之러니 其後 河北諸鎭 惟(淮)[橫]海注+[頭註]資治及綱目 竝作橫海 最爲順命하니 由重胤處置得宜故也러라
그러므로 오중윤烏重胤이 이것을 논하였는데, 그 후에 하북河北의 여러 중에 오직 횡해진橫海鎭注+[頭註]회해淮海’는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모두 ‘횡해橫海’로 되어 있다. 가장 조정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니, 이는 오중윤烏重胤의 처치가 마땅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出重胤傳〉
- 《구당서舊唐書 오중윤전烏重胤傳》에 나옴 -
○ 裴度在相位하야 知無不言하니 皇甫鎛之黨 陰擠之注+[原註] 排也 어늘
배도裴度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황보박皇甫鎛의 무리가 은밀히 그를 배척하였다.注+[原註]는 배제하는 것이다.
詔度하야 以門下侍郞同平章事 充河東節度使하다
이에 황제가 명하여 배도裴度문하시랑門下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에 충당하였다.
○ 上 問宰相호되 玄宗之政 先理而後亂 何也
재상宰相에게 묻기를 “현종玄宗의 정사가 먼저는 잘 다스려지고 뒤에는 어지러운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崔群 對曰 玄宗 用姚崇, 宋璟, 盧懷愼, 蘇, 韓休, 張九齡則理하고 用宇文融, 李林甫, 楊國忠則亂이라
최군崔群이 대답하기를 “현종玄宗요숭姚崇송경宋璟노회신盧懷愼소정蘇頲한휴韓休장구령張九齡을 등용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졌고, 우문융宇文融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을 등용하면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用人得失 所繫非輕이니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잘하고 잘못함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人皆以天寶十四年安祿山反으로 爲亂之始라호되 獨以開元二十四年罷張九齡相하고 專任李林甫 此理亂之所分也라하노니
사람들은 모두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한 것을 난의 시초로 말하지만, 신은 홀로 개원開元 24년(736)에 장구령張九齡을 재상에서 파직하고 이임보李林甫에게 오로지 정사를 맡긴 것을 치란治亂의 분기점으로 여깁니다.
願陛下 以開元初爲法하고 以天寶末爲戒하시면 乃社稷無疆之福이니이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개원開元의 초기를 법으로 삼으시고 천보天寶의 끝을 경계로 삼으시면 바로 사직社稷의 무궁한 복일 것입니다.” 하였다.
皇甫鎛 深恨之러라
이에 황보박皇甫鎛최군崔群에게 깊이 원한을 품었다.
〈出群傳〉
- 《구당서舊唐書 최군전崔群傳》에 나옴 -
[新增]范氏曰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崔群之言 豈徒有激而云哉
최군崔群의 말이 어찌 다만 격하여 말한 것일 뿐이겠는가.
其可謂至言矣 聖人復起사도 不能易也시리라
참으로 지극히 훌륭한 말이라고 이를 만하니, 성인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李絳傳曰
신당서新唐書》 〈이강열전李絳列傳〉에 말하였다.
帝問호되 玄宗 開元時致治라가 天寶則亂하니 何一君而相反耶 李絳曰 治生於憂危하고 亂生於放肆니이다
헌종憲宗이 묻기를 ‘현종玄宗개원開元 연간에는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였다가 천보天寶 연간에는 혼란하였으니, 어찌하여 한 군주이면서 이처럼 상반되었는가?’ 하니, 이강李絳이 말하기를 ‘다스림은 군주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김에서 생겨나고 혼란함은 군주가 방자함에서 생겨납니다.
玄宗 嘗歷試官守하야 知人之艱難이라
현종玄宗이 일찍이 관수官守를 차례로 경험해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알았습니다.
臨御初 任〈用〉姚崇, 宋璟하야 礪(勵)精聽納이라
그리하여 즉위 초기에는 요숭姚崇송경宋璟을 등용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간언을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左右前後皆正人也러니 洎林甫國忠得君하야는 專引傾邪之人하야 分總要劇이라
그러므로 좌우전후가 모두 올바른 사람들이었는데, 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이 군주의 신임을 얻음에 미쳐서는 오로지 남을 모함하고 간사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중요한 자리를 나누어 총괄하게 하였습니다.
於是 上不聞直言하야 嗜欲日滋하니 內則盜臣注+[頭註]若楊愼矜, 韋堅, 王珙之徒 勸以興利하고 外則武夫注+[頭註]若王忠嗣之輩 誘以開邊하야 天下騷動이라
이에 현종玄宗이 정직한 말을 듣지 못하여 기욕嗜欲이 날로 불어나니, 안으로는 도둑질하는 신하가注+[頭註]도둑질하는 신하는 양신긍楊愼矜, 위견韋堅, 왕공王珙과 같은 무리이다. 이익을 늘리는 것으로 권하고, 밖으로는 무부武夫들이注+[頭註]무부武夫왕충사王忠嗣와 같은 무리이다. 변경을 개척하는 것으로 유혹하여 천하가 소란하였습니다.
祿山 乘隙而奮하니 此皆小人啓導從(縱)逸而驕
그러므로 안녹산安祿山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소인小人들이 방종하고 안일하여 교만해지도록 계도하였기 때문입니다.
繫人主所行하니 無常治 亦無常亂也니이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함은 인주人主가 행하는 바에 달려 있으니, 항상 다스려짐도 없고 또한 항상 혼란함도 없습니다.’ 하였다.”
服柳泌藥하고 日加躁渴하다
유필柳泌가 조제한 단약丹藥을 먹고 조급증과 갈증이 날로 더해졌다.
역주
역주1 餓死臺城 : 臺城은 南北朝 시대 天子의 宮城을 가리킨다. 粱武帝는 同泰寺를 대성 안에 짓고, 7층의 大佛閣을 세워 국고를 낭비하다가 백성의 원망을 샀다. 후에 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臺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그곳에서 굶어 죽었다.
역주2 : 현
역주3 : 곤
역주4 度牒 : 出家하여 승려가 된 사람에게 일정한 補償을 받고 내주는 신분 증명서이다.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관청으로부터 도첩을 받도록 규제하였는데, 이는 국가에 대하여 身役의 의무를 지고 있는 백성들이 함부로 승려가 될 경우, 부역 인구가 크게 줄어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취하여진 조치이다.
역주5 : 예
역주6 古之諸侯……進弔 : 《禮記》 〈檀弓 下〉에 “임금이 신하의 喪에 임했을 때에는 무당과 祝官이 복숭아 나무로 辟除를 하고 갈대비로 쓸며, 小臣이 창을 잡는 것은 죽은 자를 싫어해서이니, 산 자와 다르게 하는 것이다.[君臨臣喪 以巫祝桃茢 執戈 惡之也 所以異於生也]”라고 보이는데, 《禮記集說》의 註에 “무당은 복숭아 나무를 잡고 祝官은 갈대 빗자루를 잡고 小臣이 창을 잡는 것은 그 흉하고 간사한 기운이 있어 싫어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물건을 가지고 물리치고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7 : 경
역주8 空有 : 空과 有로, 평등과 차별, 實體와 假象처럼 논리상 상반되는 두 개념을 이르는 말이다.
역주9 楊墨之學 : 楊墨은 전국시대 思想家인 楊朱와 墨翟을 이른다. 楊朱는 義를 강조하여 자신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爲我說을 주장하였으며, 墨翟은 仁을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야 한다는 兼愛說을 주장하였는데, 뒤에 이들 사상의 병폐가 심화되자, 孟子는 楊朱의 爲我說을 無君의 가르침이라 비판하였고, 墨翟의 兼愛說을 無父의 가르침이라고 비판하였다.
역주10 凡非毁聖人而譏薄禮敎 嬰之書則然 : 晏嬰은 춘추 시대 齊나라의 大夫로 靈公, 莊公, 景公을 섬겼으며 節儉과 力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景公이 일찍이 孔子에게 政事를 물어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尼谿의 田地를 孔子에게 봉해 주려고 하자, 晏嬰이 儒者는 말만 번지르르하고 법도에 맞지 않고 거만하다 하면서 이를 극력 반대하여 孔子를 등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후인들이 그의 行事와 諫言을 모아 《晏子春秋》를 지었다.
역주11 正元貞元也 : 宋나라 仁宗의 휘가 禎이므로 피휘하였는바, 禎과 음이 유사한 徵은 證으로, 貞은 正으로 바꿔 썼다. 그러므로 貞元을 正元이라 한 것이다.
역주12 愈遂以六經之文……剗僞以眞 : 後漢 이래 辭賦가 유행하면서 모든 문체가 騈儷文 일색으로 변하자, 韓愈는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六經과 《孟子》‧《莊子》‧《史記》 등의 古文體를 쓸 것을 주장하여 문체를 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주13 : 완
역주14 汪洋 : 文章의 義理가 깊고 넓으며, 氣勢가 渾厚하고 雄健함을 이른다.
역주15 : 치
역주16 其道蓋自比孟軻……爲未醇 : 韓愈의 讀荀에 “孟子는 순수하고 순수한 자이고, 荀子와 揚子는 크게는 순수하나 약간의 瑕疵가 있다.[孟氏醇乎醇者也 荀與揚大醇而小疵]”라고 보인다.
역주17 : 투
역주18 婾末 : 비루하고 쇠퇴한 풍속을 가리킨다.
역주19 : 겁
역주20 : 연
역주21 : 력
역주22 : 알
역주23 酬奉 : 옛날에 詔命을 받들어 응대하여 지은 詩文을 가리킨다.
역주24 : 진
역주25 江左 : 揚子江의 동쪽 지역을 이르는 말로, 東晉과 南朝의 宋‧齊‧梁‧陳은 모두 양자강 동쪽 지역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이 다섯 왕조 및 다스렸던 지역을 가리켜 江左라 하였다. 그러나 南朝 사람들은 오직 東晉을 가리켜 江左라고 한다.
역주26 蘇東坡曰 : 이 내용은 蘇東坡의 潮州韓文公廟碑에 보인다.
역주27 勇奪三軍之帥 : 당나라 穆宗 長慶 元年(821)에 鎭州에서 王庭湊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韓愈가 병부시랑으로 명을 받들고 가서 宣撫하여 굴복시킨 일을 이른다.
역주28 豚魚 : 《周易》 中孚卦에 “中孚는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 미치면 길하다.[中孚 豚魚 吉]”라고 보이는 바, 돼지는 조급하고 물고기는 어두워 물건 중에 감동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역주29 能開衡山之雲 : 韓愈가 일찍이 衡山에 올라 衡嶽廟를 배알하려 할 적에 때마침 가을장마가 들어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정성으로 기도하자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말끔히 갰다고 한다. 이 내용은 韓愈의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詩에 보인다.
역주30 不能回憲宗之惑 : 당나라 憲宗이 佛骨을 禁中에 맞아들인 것의 부당함을 극간하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된 것을 이른다.
역주31 能馴鱷魚之暴 : 韓愈가 潮州刺史로 부임하였는데, 그곳의 惡溪에 악어가 살고 있어 백성들이 기르는 가축을 해쳐서 백성들이 이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이에 韓愈가 祭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는데, 그날 저녁에 바로 악계에 폭풍이 불고 천둥이 치더니, 수일 후에는 그곳의 물이 다 마르고 악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이로부터 악어의 폐해를 면하게 되었다 한다.
역주32 不能弭皇甫鎛 李逢吉之謗 : 韓愈가 潮州刺史로 부임한 뒤에 表文을 올려 사죄하니, 憲宗이 다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皇甫鎛에게 참소당하여 袁州刺史로 옮겼다. 穆宗 長慶 3년(823)에 재상 李逢吉이 御史中丞 李紳과 불화하였는데, 李逢吉은 마침내 韓愈를 京兆尹 兼御史大夫로 삼아 李紳과 충돌하게 하고는 韓愈와 李紳 두 사람은 서로 화합할 수 없다고 참소하고 모두 파면하여 韓愈를 兵部侍郞으로 옮기고 李紳을 江西觀察使로 내보냈다.
역주33 : 운
역주34 : 오
역주35 旅拒 : 무리를 모아서 항거하는 것이다.
역주36 支郡 : 唐나라 말부터 五代時代까지 각 節度使가 한 지방에 할거하고 몇 州를 겸하여 점령하는 것을 支郡이라고 칭하였다.
역주37 : 정

통감절요(8)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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