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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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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天寶元年이라
천보天寶 원년元年(임오 742)
正月 分平盧하야 別爲節度하고 以安祿山으로 爲節度使하다
정월에 평로平盧를 나누어 따로 절도節度(藩鎭)를 만들고 안녹산安祿山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是時 天下聲敎注+[釋義] 謂風聲이요 謂敎化 林氏曰 振擧於此而遠者聞焉이라 故謂之聲이요 軌範於此而遠者效焉이라 故謂之敎 所被之州 三百三十一이요 之州八百이라
이때 조정의 성교聲敎注+[釋義]풍성風聲을 이르고, 교화敎化를 이른다.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여기에서 떨치고 일어나면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들으므로 이라 이르고, 여기에서 모범이 되면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본받으므로 (效)라 이른다.” 미친 가 331개이고, 기미羈縻가 800개였다.
〈自太宗平突厥 蠻夷稍稍內屬하니 卽其部落하야 列置州縣호되 大者爲都督府라하고 號爲羈縻하니 凡府州八百五十六이라
태종太宗돌궐突厥을 평정한 뒤로 만이蠻夷들이 점점 들어와 살면서 복종하자, 그들의 부락部落을 나누어 여러 주현州縣을 설치하되 큰 것을 도독부都督府라 하고 기미羈縻라 이름하니, 가 856개였다. ―
置十節度, 經略使하야 以備邊하니 曰安西, 曰北庭, 曰河西, 河東, 范陽, 平盧, 隴右, 劍南, 嶺南이요
10명의 절도사節度使경략사經略使를 두어 변방을 수비하니, 안서安西북정北庭하서河西하동河東범양范陽평로平盧농우隴右검남劍南영남嶺南이요,
又有長樂經略注+[頭註]長樂 郡名이라 하니 福州領之하고 東萊守捉注+[頭註]唐制 兵之戍邊者 大曰軍이요 小曰守捉이요 曰城曰鎭而總之者曰道 萊州領之하고 東牟守捉 登州領之하니
이외에 또 장락경략長樂經略이 있으니注+[頭註]장락長樂의 이름이다. 복주福州에서 이를 관할하고, 동래수착東萊守捉注+[頭註]나라 제도制度는 군대가 변경을 지키는 곳으로 비교적 큰 것을 이라 하고 작은 것을 수착守捉이라 하며, 그 아래에는 이 있으니, 이것을 총괄하는 것을 라 한다. 내주萊州에서 이를 관할하고, 동모수착東牟守捉등주登州에서 이를 관할하니,
凡鎭兵 四十九萬人이요 馬八萬餘匹이라
번진藩鎭의 병사가 49만 명이고 말이 8만여 필이었다.
開元之前 歲供邊兵衣糧費 不過二十萬이러니 天寶之後 邊將 奏益兵寖多하니 每歲 用衣千二十萬匹이요 糧百九十萬斛이라
개원開元 이전에는 해마다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의 옷과 양식을 공급하는 비용이 20만에 불과하였는데, 천보天寶 연간 이후에는 변방의 장수들이 아뢰어 늘린 병력이 점점 많아져서, 매년 들어가는 옷감이 1020만 필이고 양식이 190만 이었다.
公私勞費하야 民始困苦矣러라
조정과 백성들이 모두 수고롭고 허비하여 백성들이 처음으로 곤궁하고 괴로워하였다.
〈出通典〉
- 《통전通典》에 나옴 -
東萊呂氏曰
동래여씨東萊呂氏가 말하였다.
唐之制兵 其所以處內之制 何其曲盡이며 處外之制 何其疏戾也
나라가 병제兵制를 만들 적에 안에서 대처하는 제도는 어쩌면 그리도 곡진하며, 밖에서 대처하는 제도는 어쩌면 그리도 엉성하였는가.
人以爲府衛之法注+[頭註]府衛 諸衛府兵이니 見上卷이라 壞而後 有方鎭之兵이라하니 不知府衛之法成 而方鎭之形已具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위府衛의 법이注+[頭註]부위府衛는 여러 부병府兵이니, 해설이 상권上卷에 보인다. 파괴된 뒤에 방진方鎭의 군대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니, 부위府衛의 법이 이루어짐에 방진方鎭의 형세가 이미 갖추어졌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府衛壞於內而方鎭遂成於外하야 內兵不足以捍(外)[內]患하야 而至於外倚鎭兵하니 其來非一日之積矣
부위府衛가 안에서 파괴되자 방진方鎭이 마침내 밖에서 이루어져서, 안의 군대가 내환內患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밖으로 진병鎭兵에 의지함에 이르렀으니, 그 유래가 하루 사이에 누적된 것이 아니다.
蓋太宗 旣分天下爲十道하고 而以軍鎭城戍之兵으로 爲十二道하야 而置使處之하고 總之以都督者 此其爲已成之兆 特待時而張耳
태종太宗이 이미 천하를 나누어 10를 만들고 군진軍鎭성보城堡의 병력으로 12를 만들어서 使를 두어 처리하고 도독都督으로 총괄하게 한 것은 방진方鎭이 이미 이루어질 조짐이었으니, 다만 때를 기다려서 커진 것일 뿐이다.
以天下之極邊으로 爲天下之重鎭하고 而撫之以都督호되
천하의 지극히 먼 변경을 천하의 중진重鎭으로 삼고, 도독都督으로 이들을 어루만지게 하되
其品秩 與十六衛注+[頭註]見上卷乙丑年注將軍同하야 乃在六尙書之上하야 而與左右僕射爲一流하니
그 품계가 16注+[頭註]16는 해설이 상권上卷의 을축년(725) 에 보인다. 장군將軍과 같게 하여 마침내 육부六部(六曹)의 상서尙書 위에 있어서 우복야右僕射와 한 무리가 되게 하였으니,
所謂五大不在邊注+[附註]左昭十一年 이라한대 五大 之長也 專盛過節이면 則不可居邊境이요 如細弱不勝其任 亦不可居朝廷이라 五官之長 上古 金木水火土曰五官이니 此言外重內輕之患이라 者 果若是乎
이른바 ‘신분이 귀한 다섯 종류의 사람은 변방에 있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注+[附註]좌전左傳소공昭公 11년조에 “신분이 귀한 다섯 종류의 사람은 변방에 있게 하지 않고, 신분이 천한 다섯 종류의 사람은 조정에 있게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에 “오대五大오관五官의 우두머리이니 너무 성대하여 절도를 넘으면 변경에 거하게 해서는 안 되고, 가늘고 약하여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도 조정에 거하게 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오관五官상고上古 시대에 오관五官이라 하였으니, 현조씨玄鳥氏 같은 것도 다섯이 있었으며 또 오구五鳩오치五雉 따위이니, 이는 지방이 강하고 중앙이 약한 폐단을 말한 것이다. 과연 이와 같겠는가.
天寶之際 沿邊 置十節度經略使하야 凡鎭兵四十九萬이요 馬八萬餘匹이어늘 而安祿山 遂以范陽反하니 當是時하야 府兵之法 已再壞矣
천보天寶 연간에 연변沿邊에 10명의 절도경략사節度經略使를 두어 무릇 진병鎭兵이 49만 명이고 말이 8만여 필이었는데 안녹산安祿山이 마침내 범양范陽을 가지고 배반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부병府兵이 이미 두 번 파괴되었다.
其初壞也 張說 募兵補之하고 謂之 又其壞也 折衝注+[頭註]太宗 改統軍하야 爲折衝都尉하니라 諸府 無兵可交일새 李林甫遂停上下魚書注+[頭註]見下己丑年이라 唐世 之外 又有勅牒將之 名魚書 하고 但有兵額存耳하야 而六軍宿衛皆市人하야不復受甲注+[頭註] 兵志作能이라 하니
처음에 파괴된 것은 장열張說이 군대를 모집하여 보충하고 이것을 확기彍騎라 이른 데서였고, 또다시 파괴된 것은 여러 절충부折衝府注+[頭註]태종太宗통군統軍을 고쳐 절충도위折衝都尉라 하였다. 교대할 만한 군대가 없자, 이임보李林甫가 마침내 올리고 내리는 어부魚符칙서勅書를 정지하고注+[頭註]어서魚書는 뒤의 기축년己丑年(749)에 보인다. 나라 때에는 좌어左魚 외에 또 칙첩勅牒이 있어 이것을 받들었기 때문에 어서魚書라 한 것이다. 다만 군액軍額만 남겨 둠으로써 육군六軍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이 모두 시장 사람들이어서 다시는 무기를 받지 않은 데서였다.注+[頭註]’이 《신당서新唐書》 〈병지兵志〉에는 ‘’으로 되어 있다.
此二壞하야 掃地無餘
이 두 번의 파괴를 겪어 땅을 쓸어 낸 듯이 군대가 다 없어지게 되었다.
於是 外兵盛强하야 其反者以鎭兵하고 而討平之者 亦以鎭兵하야 居重輕之意 不復存矣
이에 밖에 있는 군대가 강성해져서 반란을 일으킨 것도 진병鎭兵으로써 하고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한 것도 진병鎭兵으로써 하여, 중한 곳(중앙)에 있으면서 가벼운 곳(지방)을 제어하는 뜻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今爲之說者曰 府兵變而爲彍騎라하니 則可謂彍騎變而爲藩鎭이니 特未之考爾니라
지금 나라 병제兵制가 세 번 변했다고 말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부병府兵이 변해 확기彍騎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확기彍騎가 변하여 번진藩鎭이 되었다.’고 이를 만하니, 다만 이것을 상고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三月 以長安令韋堅으로郡太守하야 領江淮租庸轉運使하다
3월에 장안령長安令 위견韋堅섬군태수陝郡太守로 삼아 강회조용전운사江淮租庸轉運使를 관장하게 하였다.
宇文融 旣敗注+[頭註]己巳年 有飛狀告融隱沒官錢하니 坐流巖州라가 道卒하니라 言利者稍息이러니 及楊愼矜 得幸하니 於是 韋堅, 王之徒 競以利進이러라
예전에 우문융宇文融이 실패한 뒤에注+[頭註]기사년己巳年(729)에 어떤 자가 익명匿名의 글을 올려 우문융宇文融이 관청의 돈을 은닉하였다고 고발하니, 우문융宇文融이 이로 인해 죄에 걸려서 암주巖州로 유배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관리 중에 이익을 말하는 자가 차츰 줄어들었는데, 양신긍楊愼矜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이에 위견韋堅왕홍王鉷의 무리들이 다투어 황제에게 이익에 관한 일을 올렸다.
百司 有事權注+[釋義] 作爭權이라[通鑑要解] 事權 謂所掌事務有權柄者 稍稍別置使以領之하니 舊官 充位而已
백사百司 중에 중요한 권한을 쥐고 있는 관사에서는注+[釋義]사권事權’이 사서史書에는 ‘쟁권爭權’으로 되어 있다. [通鑑要解]사권事權은 관장하는 사무에 중요한 권한이 있는 것을 이른다. 차츰차츰 관원을 따로 두어 재무財務를 주관하니, 옛 관원들은 그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爲吏 以幹敏稱이라
위견韋堅은 관리 노릇 함에 일을 잘 처리하고 민첩하다고 일컬어졌다.
使之督江淮租運이러니 歲增巨萬이어늘 上以爲能이라
이 그로 하여금 강회江淮조세租稅를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해마다 수입이 거만巨萬이나 증가하였으므로 이 재능이 있다고 여겼다.
擢任之하고 王鉷亦以善治租賦 爲戶部員外郞, 兼侍御史하다
그러므로 발탁하여 그를 임용하고, 왕홍王鉷 또한 조부租賦를 잘 다스린다고 여겨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겸시어사兼侍御史를 삼았다.
〈出本傳〉
- 《당서唐書 위견전韋堅傳》에 나옴 -
○ 李林甫爲相 凡才望功業 出己右어나 及爲上所厚하야 勢位將逼己者百計去之하고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이 되자, 무릇 재주와 명망과 공업功業이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에게 두터운 총애를 받아 세력과 지위가 장차 자신을 핍박하게 될 자는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제거하였고,
尤忌文學之士하야陽與之善이라가 啗以甘言而陰陷之하니
문학하는 선비들을 더욱 꺼려서 혹 겉으로는 그들과 잘 지내는 척하면서 감언이설로 꾀어 은밀히 모함하니,
世謂李林甫 口有蜜이요 腹有劍注+[通鑑要解]口有蜜 謂其言甘也 腹有劍 謂其志在害人也이라하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임보李林甫는 입속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 하였다.注+[通鑑要解]입속에 꿀이 있다는 것은 그의 말이 달콤함을 이르고, 뱃속에 칼이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사람을 해치는 데에 있음을 이른다.
〈出本傳〉
- 《당서唐書 이임보전李林甫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羈縻 : 기미
역주2 府衛之法 : 西魏에서 시작되어 北周와 隋나라를 거쳐서 唐나라 초기까지 실시된 兵農合一의 군사 제도인 府兵制를 가리킨다. 府兵이 돌아가면서 京師를 宿衛하였기 때문에 府兵을 府衛라 칭하였다. 均田의 농민 중 20세 이상인 장정을 뽑아 府兵으로 삼아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게 하고, 징발할 때에는 각자 병기와 식량을 휴대하게 하였으며, 정기적으로 京師에 宿衛하고 변경을 방수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10개 道에 634개의 府를 설치하고 명칭을 折衝府라 하였으며, 折衝都尉와 果毅都尉 등을 두어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折衝府는 府兵制의 기초가 된 것으로, 관내 농민의 징병과 훈련 따위를 맡아보던 지방의 軍部였다.
역주3 方鎭 : 兵權을 쥐고서 한 지방을 鎭守하는 軍의 長官을 가리킨다.
역주4 十六衛 : 《新唐書》 〈百官志〉에 “8衛에는 모두 左‧右가 있어서 左衛와 右衛, 左驍衛와 右驍衛, 左武衛와 右武衛, 左威衛와 右威衛, 左領軍衛와 右領軍衛, 左金吾衛와 右金吾衛, 左監門衛와 右監門衛, 左千牛衛와 右千牛衛이니, 모두 16衛이다.”라고 하였다. 16衛 중에서 左衛와 右衛, 左驍衛와 右驍衛, 左武衛와 右武衛, 左威衛와 右威衛, 左領軍衛와 右領軍衛, 左金吾衛와 右金吾衛 등 12衛는 각각 府兵을 통솔하고, 左監門衛와 右監門衛, 左千牛衛와 右千牛衛 등 4衛는 府兵을 통솔하지 않았다.
역주5 五大不在邊 五細不在廷 : 五大는 신분이 존귀한 다섯 종류의 사람을 이르는 바, 太子 및 太子의 同母弟와 임금의 총애를 받는 公子 및 公孫과 여러 대에 걸쳐 正卿이 된 사람 등을 말한다. 五細는 신분이 천한 다섯 종류의 사람을 이르는 바, 천하면서도 귀한 사람을 방해하는 자, 어리면서도 나이 많은 사람을 능멸하는 자, 사이가 멀면서도 친근한 자를 이간시키는 자, 새로운 사람이면서도 오래된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자, 작은 사람이면서도 큰 사람인 체하는 자 등을 말한다.
역주6 五官 : 《禮記》 〈曲禮〉에 “天子의 五官은 司徒, 司馬, 司空, 司士, 司寇이다.” 하였다.
역주7 如玄鳥氏亦有五 又五鳩五雉之類 : 옛날 少昊金天氏는 즉위할 때에 봉황새가 이르렀다 하여 새로써 관직명을 삼았다. 玄鳥氏는 제비이니, 이와 같은 관원이 다섯 가지가 있음을 이르는 바, 冊曆을 맡은 鳳鳥氏, 春分과 秋分을 맡은 玄鳥氏, 冬至와 夏至를 맡은 伯鳥氏, 立春과 立夏를 맡은 靑鳥氏, 立秋와 立冬을 맡은 丹鳥氏이다. 五鳩는 司徒인 祝鳩氏, 司馬인 雎鳩氏, 司空인 鳲鳩氏, 司寇인 爽鳩氏, 司士인 鶻鳩氏이며, 五雉는 다섯 가지 工正(工人을 맡은 관원)으로 西方을 맡은 鷷雉, 東方을 맡은 鶅雉, 南方을 맡은 翟雉, 北方을 맡은 鵗雉, 伊水와 洛水의 남쪽을 맡은 翬雉인 바, 이 내용이 《春秋左傳》 昭公 17年條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8 彍騎 : 당나라 宿衛兵의 명칭으로 唐 玄宗 開元 11년(723)에 서울을 宿衛하던 府兵들이 대거 도망하자, 재상 張說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근방의 府兵과 白丁들을 선발 모집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해마다 두 달만 숙위하면 出征과 鎭守를 위해 변경으로 나가는 부담을 면제해 주었는데, 開元 13년에 府兵을 彍騎라고 개칭하였다.
역주9 左魚 : 左魚符의 약칭으로 물고기 모양으로 된 符契의 왼쪽인데, 당나라 때 魚符를 두 조각으로 갈라 왼쪽은 부임하는 수령에게 주고 오른쪽은 그 고을의 창고에 보관해 두어 수령이 당도하면 왼쪽의 것을 창고의 오른쪽 것과 맞추어보아 진짜 수령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삼았다.
역주10 : 경
역주11 : 어
역주12 唐兵三變 : 《新唐書》 〈兵志〉에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200여 년 동안 兵制가 세 번 변하였으니, 처음에 융성했을 때에는 府兵이 있었고, 府兵이 뒤에 폐해지자 彍騎가 있었고, 彍騎가 또 폐해지자 方鎭의 군병이 융성하였다.[蓋唐有天下二百餘年 而兵之大勢三變 其始盛時有府兵 府兵後廢而爲彍騎 彍騎又廢 而方鎭之兵盛矣]”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당나라의 兵制가 세 번 변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부터 수도 방위를 위해 禁軍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折衝府를 설치하고 국경에는 方鎭을 설치하여, 각 지역에 따라 군제를 달리하였다. 이후 점차 府兵制가 무너지면서 玄宗 때 張說의 건의로 禁軍의 정예화를 위해 募兵制로 전환한 것이 彍騎이고, 국경에만 있던 진이 점차 내륙의 지방까지 확대되고 절도사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자 方鎭의 군병이 융성하게 되었다.
역주13 : 섬
역주14 : 홍

통감절요(7)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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