淮陰侯信이 稱病不從擊豨하고 陰使人至豨所하야 與通謀러니
其舍人弟
注+[釋義]舍人은 親近左右之通稱也라 其弟謝公著 嘗得罪於韓信이어늘 信欲殺之하니라 上變
하야 告信欲反
이어늘 呂后與蕭相國謀
하고 詐令人從上所來
하야 言 豨已得死
라하니 列侯群臣
이 皆賀
라
相國이 紿信曰 雖疾이나 彊入賀하라 信入이어늘 呂后使武士로 縛信斬之한대
信方斬에 曰 吾悔不用蒯徹之計하야 乃爲兒女子所詐하니 豈非天哉리오
世或以韓信爲首建大策
하야 與高祖
로 起漢中
하야 定
하고 分兵以北
하야 禽(擒)魏, 取代
하고 仆趙
注+[頭註]成安君陳餘 爲代王하니라 仆趙는 歇也라, 脅燕
하고 東擊齊而有之
하고 南滅楚垓下
하니 漢之所以得天下者
는 大抵皆信之功也
라
夫以盧綰
은 里閈舊恩
으로도 猶南面王燕
이어늘 信乃以列侯奉朝請
注+[頭註]朝는 朝謁이니 春朝曰朝요 秋朝曰請이니 言奉朝會請召而已라 上庚子年에 封信爲淮陰侯하니라하니 豈非高祖亦有負於信哉
아하나니
臣以爲高祖用詐謀하야 禽信於陳하니 言負則有之어니와
始에 漢與楚相距滎陽에 信滅齊하고 不還報而自王하며 其後에 漢追楚至固陵하야 與信期共攻楚로되 而信不至하니 當是之時하야 高祖固有取信之心矣나 顧力不能耳니
夫乘時以徼利者는 市井之志也요 酬功而報德者는 士君子之心也라
信이 以市井之志로 利其身하고 而以士君子之心으로 望於人이면 不亦難哉잇가
是故
로 太史公
注+[附註]司馬遷傳註에 百官表에 無太史公하고 談爲太史令耳니 遷이 尊其父稱公이라 又云 周制에 外史掌四方之志하야 布在諸侯國하니 其位上士라 皆在諸侯之卿上하니 秦亦有之라 故漢儀所云太史在丞相上이 謂此也라論之曰 假令韓信
이 學道謙讓
하야 不伐
注+[頭註]伐은 誇功이니 如伐木之伐이라 凡人矜其行能이면 乃所以自伐其能也라 故謂伐也라己功
하고 不矜其能
이런들
則庶幾哉라 於漢家勳에 可以比周召太公之徒하야 後世血食矣어늘
不務出此하고 而天下已集에 乃謀畔逆하니 夷滅宗族이 不亦宜乎아하니이다
迎陳之禮는 可以贖自王之釁이요 拒徹之意는 可以免失期之罪니 未有反計면 則當侯以次國이요 逆謀旣露라도 猶當宥其子孫이니 如此면 則漢祖 於記信之功과 討信之罪에 各盡其道而無負矣리라
上이 還洛陽하야 聞淮陰侯死하고 問呂后曰 信死에 亦何言고 后曰 信言恨不用蒯徹之計라하더이다
秦失其鹿
에 天下共逐之
注+[頭註]以鹿喩帝位라 太公六韜曰 取天下如逐鹿이라하니라하야 高材疾足者先得焉
이라
注+[頭註]跖作蹠하니 柳下惠之弟라 正義曰 蹠은 本黃帝時大盜名이니 下惠弟爲天下大盜故로 亦號盜跖하니라之狗吠堯
하니 堯非不仁
이언마는 狗固吠非其主
니
當是時하야 臣이 唯知韓信이요 非知陛下니이다 上曰 置之하라
○ 初에 上之擊陳豨也에 徵兵於梁이러니 梁王이 稱病하고 使將으로 將兵詣邯鄲이어늘 上怒하야 使人讓之하다
梁王이 恐하야 欲自往謝한대 其將扈輒이 勸王反이어늘 梁王이 不聽이러니
梁太僕이 得罪走漢하야 告梁王이 與扈輒謀反이라하다
於是
에 上
이 使使掩王
하야 囚之洛陽
하야 有司治
하니 反形
이 已具
注+[頭註]扈輒勸反이어늘 越不誅하니 是反形也라라
上
이 赦以爲庶人
하야 傳處蜀靑衣
注+[釋義]傳은 驛遞也니 謂轉轉相傳也하야 處之於蜀郡이라하다
西逢呂后從長安來하야 彭王이 爲呂后泣하야 自言無罪하고 願處故昌邑이어늘
呂后許諾하고 與俱東至洛陽하야 白上曰 彭王은 壯士라
呂后乃令其舍人
으로 告彭越復謀反
이라하야 夷越三族
하고 梟越首
注+[通鑑要解]梟首는 懸首也라 梟은 不孝鳥니 一名流離이라 少好而長醜하고 大則食其母라 說文에 夏至捕梟하야 磔之而曝하고 以頭掛木上하니 今謂掛首를 謂梟也라洛陽
하고 下詔有收視者
면 輒捕之
라하다
梁大夫
布
於齊
라가 還
하야 奏事越頭下
하고 祠(祀)而哭之
어늘 吏捕以聞
한대
上曰 何言고 布曰 方上之困於彭城하시고 敗滎陽成皐間에 王이 一顧與楚則漢破하고 與漢則楚破라
天下已定에 彭王이 剖符受封하야 亦欲傳之萬世러니
今陛下一徵兵에 彭王이 病不行이어늘 而陛下誅滅之하시니 臣은 恐功臣人人自危也하노이다
○ 陸賈時時前說稱詩書
注+[釋義]時時는 非一時也니 每於上前에 說論稱道詩書라한대 帝罵之曰 乃公
注+[釋義]高祖自謂也라이 居馬上得之
하니 安事詩書
리오
且湯武
는 逆取而順守之
注+[附註]湯武革命에 順天應人하니 未聞其取之逆也라 秦漢之際에 習亂旣久하야 遂以逆取順守로 爲當然하야 至倂與湯武而誣之하니 陸生之言이 其禍天下後世 豈淺哉아하시니 文武竝用
이 長久之術也
니이다
帝曰 試爲我著秦所以失天下와 吾所以得之者와 及古成敗之國하라
陸生
이 乃粗述存亡之徵
하야 凡著十二篇
하니 每奏一篇
에 帝未嘗不稱善
하고 號其書曰新語
注+[釋義]以高祖素未嘗聞此言이라 故曰新語라 太史公曰 余讀陸生新語하니 固當世之辯士也라하니라라하다
詔曰 聞王者는 莫高於周文이요 霸者는 莫高於齊桓이니 皆待賢人而成名이라
賢士大夫有肯從我游者
면 吾能尊顯之
하리니 御史
이 下郡守
하야 其有意稱明德者
어든 必身勸爲之駕
注+[原註]郡守身往勸勉하고 駕車遣之라[釋義] 身勸爲之駕者는 必須身親敦勸하야 自爲其駕車而遣之라하라
帝有疾臥禁中하야 詔戶者無得入하니 群臣絳灌等이 莫敢入이 十餘日이러니
樊噲排闥直入
注+[釋義]王氏曰 排는 推開也요 闥은 宮中小門이라한대 大臣
이 隨之
하니 上
이 獨枕一宦者臥
라
噲等이 見上流涕曰 始에 陛下與臣等으로 起豐沛, 定天下에 何其壯也러니
今天下已定
에 又何憊也
注+[原註]憊는 力極也라[釋義] 憊는 羸困也라잇고
且陛下
는 獨不見趙高之事
注+[釋義]王氏曰 秦皇崩時에 獨趙高與幸宦五六人知之러니 高遂詐爲詔하야 賜長子扶蘇死하니라乎
잇가 帝笑而起
하다
及彭越誅
에 醢其肉
注+[釋義]黥布傳注에 反者被誅면 爲醢하니 刑法志에 菹其骨肉이 是也라하야 以賜諸侯
하니 布大恐
하야 發兵反
하니라
汝陰侯滕公
注+[頭註]夏侯嬰也니 食邑汝陰縣하고 諡文侯라 初爲滕令하야 奉車라 故號滕公하니라이 召故楚令尹薛公問之
한대 令尹曰 是固當反
이니이다
往年
에 殺彭越
하고 前年
注+[釋義]亦與往年同也라에 殺韓信
하니 此三人者
는 同功一體之人也
라
對曰 使布出於上計면 山東은 非漢之有也요 出於中計면 勝敗之數를 未可知也요 出於下計면 陛下安枕而臥矣시리이다
上曰 何謂上計오 對曰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齊取魯하고 傳檄燕趙하야 固守其所면 山東은 非漢有也리이다
何謂中計오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韓取魏하야 據敖倉之粟하고 塞成皐之口면 勝敗之數를 未可知也리이다
何謂下計
오 東取吳
하고 西取下蔡
하고 歸重於越
注+[釋義]重은 輜重也니 歸之於越地라하고 身歸長沙
注+[頭註]布娶於長沙王故로 策其身歸長沙라면 陛下安枕而臥
하야 漢無事矣
리이다
布
는 故驪山之徒
注+[釋義]布初坐法黥論決하야 而徒役於驪山이라也
라 致萬乘之主
하니 皆爲身
이요 不顧後爲百姓萬世慮者也
라
淮陰, 彭越이 皆死하니 餘不足畏라하고 遂反하야 果如薛公之言하야 擊荊擊楚하고 引兵而西러라
진희陳豨의 군대가 마침내 패배하였다.
注+[原註]12년에 진희陳豨를 잡아 목을 베었다.
회음후淮陰侯한신韓信이 병을 칭탁하여 진희陳豨를 치는 상上을 따라가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진희陳豨의 처소에 이르러서 반란하는 계책을 공모하였다.
그
사인舍人의 아우가
注+[釋義]사인舍人은 좌우의 가까운 사람의 통칭이다. 그의 아우 사공저謝公著가 일찍이 한신韓信에게 죄를 짓자 한신韓信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고변告變하여
한신韓信이 배반하고자 한다고 고발하자,
여후呂后가
소상국蕭相國과 모의하고는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상上의 처소에서 온 것처럼 하여 ‘
진희陳豨가 이미 잡혀 죽었다.’고 말하게 하니,
열후列侯와
군신群臣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소상국蕭相國이 한신韓信을 속여 말하기를 “비록 질병이 있으나 억지로 들어가 축하하라.” 하였는데, 한신韓信이 들어오자 여후呂后가 무사武士로 하여금 한신韓信을 포박하게 하여 목을 베었다.
막 목을 베려 할 적에 한신韓信이 말하기를 “내가 후회스럽게도 괴철蒯徹의 계책을 쓰지 아니하여 마침내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천운天運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
한신韓信이 첫 번째로 큰 계책을 세워
고조高祖와 함께
한중漢中에서 일어나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군대를 나누어 북쪽으로 가서
위왕魏王을 사로잡고
대代나라를 점령하고
조趙나라를 쓰러뜨리고
注+[頭註]성안군成安君진여陳餘가 대왕代王이 되었다. 조趙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조왕趙王헐歇을 사로잡은 것이다.연燕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소유하고 남쪽으로
초楚나라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漢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은 대저 모두
한신韓信의 공로이다.
그가 괴철蒯徹의 말을 거절하고 고조高祖를 진陳 땅에서 맞이한 것을 보면 어찌 배반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진실로 직책을 잃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여 마침내 패역悖逆에 빠지게 된 것이다.
노관盧綰은 한 마을 사람이라는 옛 은혜 때문에 오히려
남면南面하여
연燕나라에 왕이 되었는데,
한신韓信은 마침내
열후列侯로서
조청朝請을 받들게 하였으니,
注+[頭註]조朝는 조알朝謁이니,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가을에 뵙는 것을 청請이라 하니, 조회와 부름을 받들 뿐임을 말한 것이다. 앞의 경자년庚子年에 한신韓信을 봉하여 회음후淮陰侯로 삼았다. 어찌
고조高祖가 또한
한신韓信을 저버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신臣이 생각하건대 고조高祖가 속임수를 써서 한신韓信을 진陳에서 사로잡았으니, 그를 저버렸다는 것은 그러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신韓信 또한 이것을 자취自取함이 있습니다.
처음에 한漢나라가 초楚나라와 형양滎陽에서 서로 대치할 적에 한신韓信은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와 보고하지 않고는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 한漢나라가 초楚나라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 한신韓信과 함께 초楚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한신韓信이 오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고조高祖가 진실로 한신韓信을 잡으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다만 힘이 불가능하였을 뿐입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이르러서는 한신韓信이 다시 무엇을 믿겠습니까.
때를 타서 이익을 바라는 것은 시정배市井輩의 마음이요, 공로에 보답하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은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입니다.
한신韓信이 시정배의 마음으로 그 몸을 이롭게 하고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을 남에게 바란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注+[附註]《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의 주註에 “《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는 태사공太史公이 없고 사마담司馬談이 태사령太史令이 되었을 뿐이니, 사마천司馬遷이 그 아버지를 높여 공公이라고 칭한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주周나라 제도에 외사外史는 사방四方의 기록을 관장하여 제후국諸侯國에 널리 있으니, 그 지위가 상사上士이다. 모두 제후국諸侯國의 경卿 위에 있으니, 진秦나라에도 또한 있었다. 그러므로 《한관의漢官儀》에 이른바 ‘태사太史가 승상丞相의 위에 있다.’는 것은 이것을 이른다.” 하였다. 논평하기를 ‘가령
한신韓信이
도道를 배워 겸양해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注+[頭註]벌伐은 공로를 과시함이니, 나무를 벤다는 벌伐과 같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행실과 재능을 자랑하면 이는 바로 자신의 재능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벌伐이라 이른다.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았던들
거의 한漢나라의 공훈에 있어서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의 무리에 견주어지고 후세에 혈식血食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여기로 나오기를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종족을 멸함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한 것입니다.”
“공功과 과오를 마땅히 따져 상쇄하여야 하니, 한신韓信의 공功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陳 땅에서 고조高祖를 맞이한 예禮는 스스로 서서 왕이 된 잘못을 속죄할 수 있었고, 괴철蒯徹의 말을 거절한 뜻은 기한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있었으니, 배반할 계책이 있지 않았다면 작은 나라의 후侯로 봉해주었어야 하고, 역모逆謀가 이미 드러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자손을 용서해 주었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였다면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한신韓信의 공功을 기억함과 한신韓信의 죄를 토벌함에 있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저버림이 없었을 것이다.”
상上이 낙양洛陽으로 돌아와 회음후淮陰侯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여후呂后에게 묻기를 “한신韓信이 죽을 적에 또한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여후呂后가 대답하기를 “한신韓信이 괴철蒯徹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제齊나라에 명하여 괴철蒯徹을 체포하게 하니, 괴철蒯徹이 잡혀왔다.
상上이 말하기를 “네가 회음후淮陰侯에게 배반하도록 가르쳤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진秦나라가 그 사슴(帝位)을 잃자, 천하가 이를 함께 쫓아가서
注+[頭註]사슴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에 비유한 것이다.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에 이르기를 “천하를 취함은 사슴을 쫓는 것과 같다.” 하였다. 재주가 높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었습니다.
도척盜跖의
注+[頭註]척跖은 척蹠으로 쓰기도 하니, 유하혜柳下惠의 아우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척蹠은 본래 황제黃帝 때 큰 도둑의 이름이니, 유하혜柳下惠의 아우가 천하의 큰 도둑이 되었기 때문에 또한 도척盜跖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개가
요堯임금을 보고 짖으니,
요堯임금이
인仁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개는 진실로 그 주인이 아닌 자를 보면 짖는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신은 오직 한신韓信만을 알았고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上이 “놓아 주어라.” 하였다.
처음에 상上이 진희陳豨를 공격할 적에 양梁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는데, 양왕梁王(彭越)이 병을 칭탁하고 장수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한단邯鄲에 이르게 하니, 상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서 꾸짖었다.
양왕梁王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가서 사죄하고자 하자, 그 장수 호첩扈輒이 왕에게 배반할 것을 권하였으나 양왕梁王이 듣지 않았다.
양梁나라 태복太僕이 죄를 얻고 한漢나라로 도망가서 양왕梁王이 호첩扈輒과 모반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상上이
사자使者를 시켜 왕을 엄습하게 하여 그를
낙양洛陽에 가두고서
유사有司가
치죄治罪하니 배반하려 한 형상이 이미 갖추어졌다.
注+[頭註]호첩扈輒이 배반할 것을 권하였는데 팽월彭越이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배반한 형상이다.
상上이 사면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서
역마驛馬로
촉군蜀郡의
청의현靑衣縣에 처하게 하였다.
注+[釋義]전傳은 역참驛站이니, 파발마로 서로 전해서 촉군蜀郡에 처하게 한 것이다.
서쪽으로 가다가 장안長安에서 오는 여후呂后를 만나서, 팽왕彭王(彭越)이 여후呂后에게 울면서 스스로 무죄함을 말하고 옛 창읍昌邑에 처할 것을 원하였다.
여후呂后가 이를 허락하고 함께 동쪽으로 낙양洛陽에 와서 상上에게 아뢰기를 “팽왕彭王은 장사입니다.
이제 그를 촉蜀 지방으로 옮기면 이는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것이니, 마침내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여후呂后는 마침내
사인舍人을 시켜
팽월彭越이 다시 모반하였다고 고발하게 하여
팽월彭越의
삼족三族을 멸하고
팽월彭越의 머리를
낙양洛陽에
효시梟示한 다음,
注+[通鑑要解]효수梟首는 머리를 매다는 것이다. 올빼미는 불효하는 새이니, 일명 유리流離라고 하는데, 어려서는 예쁘나 자라서는 추하고 크면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하지夏至에 올빼미를 잡아서 살을 찢어 햇볕에 말리고 머리를 나무 위에 매달아 놓으므로 지금 머리를 매다는 것을 일러 효수梟首라 한다.” 하였다. 조서를 내려
팽월彭越의 시신을 거두어 살피는 자가 있으면 곧 체포하겠다고 하였다.
양梁나라 대부大夫인 난포欒布가 제齊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와 팽월彭越의 머리 아래에 일을 아뢰고 제사 하여 곡하니, 관리가 난포欒布를 체포하여 보고하였다.
상上이 난포欒布를 삶아 죽이고자 하니, 난포欒布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자, 난포欒布가 말하기를 “상上께서 팽성彭城에서 곤궁하시고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에서 패하였을 적에 팽왕彭王이 한 번 돌아보아 초楚나라에 가담하면 한漢나라가 격파되고, 한漢나라에 가담하면 초楚나라가 격파되었습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팽왕彭王이 부절符節을 나누어 봉작封爵을 받아서 또한 이를 만세에 물려주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한 번 군대를 징발함에 팽왕彭王이 병으로 가지 못하자 폐하께서 그를 죽이고 멸하시니, 신은 공신들이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길까 두렵습니다.
이제 팽왕彭王이 이미 죽었으니 신은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삶겨 죽임에 나아가겠습니다.” 하니, 상上이 마침내 난포欒布의 죄를 풀어주고 도위都尉로 임명하였다.
- 《사기史記》 〈팽월전彭越傳〉과 〈난포전欒布傳〉에 나옴 -
육가陸賈가 때때로
상上의 앞에서
시詩‧
서書를 말하고 일컫자,
注+[釋義]시시時時는 한때가 아니니, 상의 앞에서 말할 적마다 시詩‧서書를 일컬은 것이다. 황제가 꾸짖기를 “네 어르신이
注+[釋義]내공乃公은 고조高祖가 자신을 말한 것이다.마상馬上에 거하여 천하를 얻었으니, 어찌
시詩‧
서書를 일삼겠는가.” 하였다.
육가陸賈가 대답하기를 “마상馬上에서 얻으셨지만 어찌 마상馬上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또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역逆으로 취하여
순順으로 지켰으니,
注+[附註]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혁명革命할 적에 하늘을 순히 따르고 인심에 순응하였으니, 취하기를 역逆으로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즈음에는 난리에 익숙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어 마침내 역逆으로 취하고 순順으로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탕왕湯王과 무왕武王까지 함께 무함하였으니, 육생陸生의 말이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에 화를 끼침이 어찌 적겠는가.문文과
무武를 아울러 쓰는 것이 장구한 계책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시험 삼아 나를 위해서 진秦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은 이유 및 고금에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를 드러내어 밝히라.” 하였다.
육생陸生이 마침내
존망存亡의 징조를 대략 기술하여 모두 12
편篇을 저술하였는데, 한 편을 아뢸 때마다 황제가 좋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 책을 이름하기를 《
신어新語》라고 하였다.
注+[釋義]帝未嘗不稱善 호기서왈신어號其書曰新語 : 고조高祖가 평소에 이러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어新語》라고 한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내가 육생陸生의 《신어新語》를 읽어보니, 진실로 당세의 변사辯士였다.” 하였다.
“조칙을 내리기를 ‘내 들으니 왕자王者는 주周나라 문왕文王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패자霸者는 제齊나라 환공桓公보다 더 높은 이가 없는데, 모두 현인賢人을 기다려 이름을 이루었다고 한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로서 기꺼이 나를 따라 놀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높여 주고 현달하게 할 것이니,
어사중집법御史中執法은
군수郡守에게 하달하여
명덕明德에 걸맞게 하는 데에 뜻이 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몸소 권하고 위하여 수레를 태워 보내라.’
注+[原註]군수郡守가 몸소 가서 권면하고 수레를 태워 보내는 것이다. [釋義]신권위지가身勸爲之駕는 반드시 몸소 친히 권면하여 스스로 수레에 태워 보내는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병이 있어 금중禁中(宮中)에 누워서 문지기에게 명하여 입궐하지 못하게 하니, 여러 신하와 강후絳侯(周勃)‧관영灌嬰 등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 지가 십여 일이었다.
번쾌樊噲가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자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배排는 밀어젖혀 여는 것이고, 달闥은 궁중宮中의 작은 문門이다.”대신大臣들이 뒤따라 들어가니,
상上이 홀로 한
환자宦者를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樊噲 등이 상上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처음에 폐하께서 신들과 풍패豐沛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평정할 때에는 어쩌면 그리도 건장하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또 어쩌면 이리도 지치셨습니까.
注+[原註]비憊는 힘이 다한 것이다. [釋義]비憊는 지치고 고달픈 것이다.
또 폐하는 홀로
조고趙高의 일을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붕崩할 때에 오직 조고趙高와 총애하는 환관 5, 6명 만이 알았는데, 조고趙高가 마침내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만들어 장자長子부소扶蘇에게 내려 죽게 하였다.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니, 황제가 웃고 일어났다.
처음에 회음후淮陰侯가 죽자 회남왕淮南王경포黥布가 이미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팽월彭越이 죽자 그 살을 젓 담아
注+[釋義]《한서漢書》 〈경포전黥布傳〉의 주注에 “반역한 자가 주벌을 당하면 젓을 담는다. 《한서漢書》 〈형법지刑法志〉에 ‘그 골육骨肉을 젓 담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제후들에게 하사하니,
경포黥布가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였다.
상上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수자竪子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여음후汝陰侯등공滕公이
注+[頭註]등공滕公은 하후영夏侯嬰이니, 여음현汝陰縣을 식읍食邑으로 삼았고 시호가 문후文侯이다. 처음에 등령滕令이 되어서 수레를 받들었기 때문에 등공滕公이라 호칭한 것이다. 옛날
초楚나라
영윤令尹인
설공薛公을 불러 물으니,
영윤令尹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마땅히 배반할 만합니다.
지난해에
注+[釋義]전년前年은 또한 왕년往年과 같다.팽월彭越을 죽이고 그 전 해에
한신韓信을 죽였으니, 이 세 사람은
공功이 같고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의심하였기 때문에 배반한 것입니다.” 하였다.
등공滕公이 이를 상上에게 말하니, 상上이 마침내 설공薛公을 불러 묻자,
대답하기를 “만일 경포黥布가 상계上計에서 나온다면 산동山東은 한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고, 중계中計에서 나온다면 승패勝敗의 수數를 알 수 없으며, 하계下計에서 나온다면 폐하가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워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무엇을 상계上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동쪽으로 오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楚나라를 취하고, 제齊나라를 겸병하고 노魯나라를 점령하고,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에 격문檄文을 돌려 그곳을 굳게 지킨다면 산동 지방은 한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무엇을 중계中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동쪽으로 오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楚나라를 취하고, 한韓나라를 겸병하고 위魏나라를 점령하여 오창敖倉의 곡식을 점거하고 성고成皐의 어귀를 막는다면 승패勝敗의 수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무엇을
하계下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동쪽으로
오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하채下蔡를 취하고,
치중輜重을
월越 지방에 돌려보내고
注+[釋義]중重은 치중輜重이니, 치중輜重을 월越 지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자신은
장사長沙로 돌아간다면
注+[頭註]경포黥布가 장사왕長沙王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장사長沙로 돌아갈 것을 계책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우시어
한漢나라가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이번 경포黥布의 계책이 장차 어디로 나오겠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하계下計로 나올 것입니다.
경포黥布는 옛날
여산驪山에서 노역하던 무리로
注+[釋義]경포黥布가 처음에 법에 걸렸는데, 묵형墨刑으로 판결하여 여산驪山에서 부역에 종사하였다.만승萬乘의 군주가 되었으니, 모두 자신만을 위할 뿐 뒤를 돌아보아 백성과 만세를 위하여 생각할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계下計로 나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좋다.” 하고는 설공薛公을 천호千戶에 봉하고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경포黥布가 처음 배반할 적에 그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상上은 늙어서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고 회음후淮陰侯와 팽월彭越이 모두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배반하여 과연 설공薛公의 말대로 형荊나라와 초楚나라를 공격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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