蕭王
이 北擊尤來, 大槍, 五
注+[釋義]槍은 梢也요 幡은 幟也라 更始初에 諸賊竝起하야 各以軍容强盛爲號라 故로 鐵脛, 大槍, 五幡三者에 幷尤來하여 四者는 皆賊之名也라於元氏
하야 追至北平
하야 連破之
注+[通鑑要解]元氏는 縣名이라 蕭王이 是年四月에 擊諸部하야 連破之라가 反爲所敗하고 歸保范陽하니 軍中不見王이라 或云已死라하니 諸將不知所爲러니 吳漢曰 卿曹努力하라 王兄子章及興이 在南陽하니 何憂無主리오한대 衆乃定이라 居數日에 王從范陽하야 悉破諸賊也하니라하다
○ 馮異, 寇恂
은 擊走朱鮪
注+[頭註]更始將으로 見上卷癸未年이라하고 吳漢
은 率耿弇, 景丹等十三將軍
하고 追尤來等
하야 斬首萬三千餘級
하니 賊
이 散入遼西, 遼東
이라가 爲烏桓, 貊人
의 所鈔(抄)擊略盡
注+[釋義]略은 取也라하다
○ 都護將軍賈復이 與五校로 戰於眞定이라가 復이 傷瘡甚이어늘 王이 大驚曰 我所以不令賈復別將者는 爲其輕敵也러니 果然失吾名將이로다
聞其婦有孕이라하니 生女耶인댄 我子娶之요 生男耶인댄 我女嫁之하야 不令其憂妻子也호리라
○ 還至中山
하니 諸將
이 請上
호되 王
이 不聽
하고 行至南平棘
注+[釋義]地志에 常山郡에 有平棘縣이라하야 諸將
이 固請之
호되 王
이 不許
라
耿純
이 進曰 天下士大夫 捐親戚, 棄土壤
하고 從大王於矢石之間者
는 其計固望
하야 以成其志耳
어늘
今大王이 留時逆衆하야 不正號位하시니 純은 恐士大夫望絶計窮이면 則有去歸之思하야 無爲久自苦也일까하노니
行至
注+[釋義]地志에 常山郡에 有鄗邑이라하니 光武於鄗南에 卽帝位하고 改曰高邑이라하야 召馮異
하야 問四方動靜
한대 異曰
必敗
라
會
에 儒生彊華
注+[釋義]姓名이니 光武同舍生也라 自關中
으로 奉赤伏符
注+[釋義]讖記之書曰符니 赤伏은 其符之名이라 漢德尙火하니 赤은 火色이라 伏은 藏也라來
하야 詣王
하니 曰 劉秀發兵捕不道
하니 四夷雲集하야 龍鬪野注+[釋義]龍鬪野는 謂群雄角力也니 易坤卦云 龍戰于野라하니라라 四七之際에 火爲主注+[釋義]王氏曰 四七은 二十八也라 自高祖로 至光武初起히 合二百二十八年이니 卽四七之際也라 或謂光武以二十八歲起兵이라 故云四七之際라 又二十八將도 亦應四七之數라 漢火德이라 故火爲主也라라하야늘
群臣
이 因復奏請
한대 六月
에 王
이 卽皇帝位于鄗南
注+[通鑑要解]設壇於鄗南千秋亭五城之陌이라하고 大赦
하다
更始는 雖庸才나 南面之君也요 光武는 雖豪傑이나 北面之臣也라
[史略 史評]愚謂更始雖君而柔懦無爲하고 遊燕無度하며 加以諸將暴橫하야 億兆離心하니 其亡을 可立而待也요
光武는 以帝室之冑로 才明勇略하야 中外屬心하니 苟不早正位號하야 以收衆望이면 則社稷爲他人有也 必矣니
蓋當此之時하야 社稷爲重이요 君爲輕하니 卽位於鄗南者는 所以爲社稷計也니 何叛之有哉리오
故로 綱目於其起兵也에 書興復帝室하고 於其卽位也에 書卽皇帝位하니 則其予之意를 可見矣니 學者宜玩心焉이니라
○
西向帝城
할새 以名爲群賊
이면 不可以久
라하야 乃立宗室劉盆子
注+[頭註]高帝孫朱虛侯章之後로 在軍中하야 爲人牧羊이라하야 爲上將軍
注+[通鑑要解]故式侯萌이 有三子하니 恭, 茂, 盆子라 恭在長安하고 茂, 盆子는 留軍中하야 主牧羊이라 是時에 立將軍할새 求軍中景王後하야 得茂盆子及西安侯孝三人하다 崇이 乃以三札置(筒)[笥]中하고 書其一爲符曰上將軍이라하고 於鄭北에 設壇場하고 劉盆子等三人이 居中立하야 以年次로 探札이러니 盆子得符한대 諸將皆稱臣拜하니 盆子時年十五也라하다
○ 七月
에 帝
持節
하야 拜鄧禹爲大司徒
하고 封酇侯
注+[釋義]酇은 音贊이니 卽蕭何所封이니 屬南陽이라[通鑑要解]蕭何所封이니 蓋以禹功比於蕭何故로 封之라하니 禹時
에 二十四
러라
又議選大司空
할새 帝以赤伏符曰 王梁主衛作玄武
注+[通鑑要解]帝以野王은 衛之所屬이요 玄武는 水神之名이요 司空은 水土之官이라 故로 用(武)[梁]爲司空也라라하야 以野王令王梁爲大司空
하고 吳漢爲大司馬
하다
○ 初
에 更始以伏
爲平原太守
하니 時
에 天下兵起
호되 湛
이 獨晏然撫循百姓
이러니
門下督이 謀爲湛起兵이어늘 湛이 收斬之하니 於是에 吏民이 信向하야 平原一境이 賴湛以全이라
帝徵湛爲尙書하야 使典定舊制하고 又以鄧禹西征이라하야 拜湛爲司直하야 行大司徒事하니 車駕每出征伐에 常留鎭守러라
○ 九月에 赤眉入長安하니 更始走하고 將相이 皆降이어늘
考其卽位하면 南面立하야 朝群臣에 羞愧刮席하야 殊失人君之態러니 厥後에 委政趙萌하고 日夜飮宴하여 群臣이 欲見言事에 輒醉而不視朝하니
○ 初에 宛人卓茂 寬仁恭愛하고 恬淡樂道하야 雅實不爲華貌하고 行己在於淸濁之間하야 自束髮至白首히 與人未嘗有爭競하니 〈出東觀記 又茂傳〉 鄕黨故舊 雖行能이 與茂不同이라도 而皆愛慕欣欣焉이러라
哀, 平間
에 爲密
注+[釋義]北魏置高密郡하고 隋改密州하니라令
하야 視民如子
하야 擧善而敎
하고 口無惡言하니 吏民
이 親愛
하야 不忍欺之
러라
民
이 常(嘗)有言部亭長
注+[頭註]部는 謂所部也요 亭者는 停留니 行旅宿食處니 猶今之館驛也라 秦法에 十里一亭이요 亭置長하여 主督盜賊이라이 受其米肉遺者
어늘 茂曰 亭長
이 爲從汝求乎
아
茂曰 遺之而受어늘 何故言耶오 民曰 竊聞賢明之君은 使民不畏吏하고 吏不取民이라하니
今我畏吏라 是以遺之러니 吏旣卒受故로 來言耳니이다
茂曰 汝爲敝民
注+[釋義]敝民은 爲敝壞之民이라矣
로다
凡人이 所以群居不亂하야 異於禽獸者는 以有仁義禮愛하야 知相敬事也어늘 汝獨不欲修之하니寧能高飛遠走하야 不在人間耶아
吏顧不當乘威力彊求請耳니 亭長은 素善吏요 歲時遺之는 禮也니라
茂笑曰
律은 設大法이요 禮는 順人情이니 今我以禮敎汝
면 汝必無怨
어니와 以律治汝
면 汝何所措其手足乎
리오
一門之內에 小者는 可論이요 大者는 可殺也니 且歸念之하라
初
에 茂到縣
하야 有所廢置
하니 吏民
이 笑之
하고 隣城聞者 皆
注+[釋義]輕侮也라其不能
이라
河南郡
이 爲置守令
注+[通鑑要解]茂正爲令이어늘 郡復置守令하야 使與茂竝居也라호되 茂不爲嫌
하고 治事自若
이러니 數年
에 敎化大行
하야 道不拾遺
注+[釋義]言雖遺棄於道라도 人不拾之니 言其俗淳也라라
及王莽居攝에 以病免歸러니 上卽位에 先訪求茂하니 茂時七十餘라
甲申
에 詔曰 夫
名冠天下면 當受天下重賞이니 今以茂爲太傅
注+[通鑑要解]太傅는 位上公이니 絶席在三公之右也라하고 封褒德侯
하노라
光武卽位之初에 群雄競逐하야 四海鼎沸하니 彼摧堅陷敵之人과 權略詭辯之士가 方見重於世어늘 而獨能取忠厚之臣하고 旌循良之吏하야 拔於草萊之中하야 寘(置)諸群公之首하니 宜其光復舊物하고 享祚久長이니 蓋由知所先務而得其本原故也니라
○ 劉盆子
暴虐吏民
하야 百姓
이 不知所歸
러니 聞鄧禹乘勝獨克而師行有紀
注+[釋義]謂軍師之行이 有紀律이라하고 皆望風
하야 相携負
注+[釋義]携는 在手요 負는 在背也라以迎軍
하니 降者日以千數
라
禹所止
에 輒停車駐節
하야 以勞來之
注+[釋義]勞來는 謂慰勉而招延之也라하니 父老童穉注+[釋義]幼稚也니 與稚同이라垂髮戴白注+[釋義]垂髮은 謂小兒髮之垂者요 戴白은 謂老人頭戴白髮者라이 滿其車下
하야 莫不感悅
하니 於是
에 名震關西
라
今
에 吾衆
이 雖多
나 能戰者少
하며 前無可仰之
注+[釋義]積는 韻會에 訓聚也라[通鑑要解]仰은 猶恃也라하고 後無轉饋之資
어늘 赤眉新拔長安
하야 財穀充實
하니 鋒銳
를 未可當也
라
夫盜賊群居에 無終日之計하야 財穀이 雖多나 變故萬端이니 寧能堅守者也리오
上郡, 北地, 安定三郡이 土廣人稀하고 饒穀多畜하니 吾且休兵北道하고 就糧養士하야 以觀其敝면 乃可圖也라하고
於是
에 引軍北至栒邑
注+[釋義]地志에 在扶風이라하니 所到
에 諸營堡郡邑
이 皆開門歸附
러라
○ 初
에 成紀
注+[頭註]縣名이니 屬天水郡이라隗囂 起兵應漢
이어늘 更始徵囂
한대 囂至長安
이라가 後
에 逃歸天水
하야 復招聚其衆
하고 興修故業
하야 自稱西州上將軍
이라하니 士大夫避亂者 多歸囂
라
囂傾身引接
하야 爲
布衣交하야 以馬援, 班
之屬
으로 爲賓客
하니 由此
로 名震西州
하야 聞於山東
이러라
○ 馬援이 少時에 以家用不足이라하야 辭其兄況하고 欲就邊郡田牧이어늘 況曰 汝는 大才니 當晩成이라
遂之北地하야 田牧이러니 常謂賓客曰 丈夫爲志에 窮當益堅이요 老當益壯이라하더라
後有畜數千頭, 穀數萬斛
이러니 旣而嘆曰 凡殖
注+[釋義]興生財利曰殖이라財産
은 貴其能賑施也
니 否則
守錢虜耳
라하고 乃盡散於親舊
하다
聞隗囂好士하고 往從之한대 囂甚敬重하야 與決籌策이러라
소왕蕭王이 북쪽으로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注+[釋義]창槍은 창이고 번幡은 깃발이다. 경시更始 초기에 여러 적들이 함께 일어나서 각각 군대의 위용威容의 강성함을 가지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철경鐵脛(정강이가 쇠처럼 단단함), 대창大槍, 오번五幡 세 가지에 우래尤來까지 아울러 네 가지가 모두 적賊의 명칭이다. 을
원씨현元氏縣에서 공격하여
북평北平에서 따라잡아 연달아 격파하였다.
注+[通鑑要解]원씨元氏는 현縣의 이름이다. 소왕蕭王이 이해 4월에 여러 부部를 공격하여 연달아 격파하다가 도리어 패배를 당하고는 범양范陽으로 돌아가 보전하였다. 군중軍中에서 왕王을 볼 수 없으므로 혹자가 이르기를 “왕王이 이미 죽었다.”고 하니, 제장諸將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오한吳漢이 말하기를 “경卿들은 노력努力하라. 왕王의 형兄의 아들인 유장劉章과 유흥劉興이 남양南陽에 있으니, 어찌 군주가 없음을 걱정하는가?” 하니, 무리들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며칠 뒤 왕王이 범양范陽으로부터 여러 적賊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
풍이馮異와
구순寇恂은
주유朱鮪注+[頭註]주유朱鮪는 경시更始의 장수로 상권上卷(15권) 계미년조癸未年條(23 경시원년更始元年)에 보인다. 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오한吳漢은
경엄耿弇과
경단景丹 등 13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우래尤來 등을 추격하여 1만 3천여 명의 수급을 베니, 적들이 흩어져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으로 들어갔다가
오환烏桓과
맥인貊人에게 습격당하여 모두 다 잡혔다.
注+[釋義]약略은 취함이다.
○ 도호장군都護將軍 가복賈復이 오교五校와 진정현眞定縣에서 싸우다가 가복賈復이 부상당하여 상처가 심했는데, 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가복賈復으로 하여금 별도로 군대를 거느리지 않게 한 것은 그가 적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과연 나의 명장名將을 잃었도다.
내 들으니 그의 부인이 임신했다 하니, 딸을 낳는다면 나의 아들을 장가보내고, 아들을 낳는다면 나의 딸을 시집보내어 그로 하여금 처자식을 걱정하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가복賈復이 얼마 후 상처가 나아서 뒤따라 계薊 땅에 이르니, 서로 만나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 돌아와
중산군中山郡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이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고, 행군하여
남평극南平棘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상산군常山郡에 평극현平棘縣이 있다.” 하였다.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순耿純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사대부士大夫(勇士와 대부大夫)들이 친척을 버리고 토양土壤(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대왕大王을 따르는 것은 그 계책(목적)이 진실로 용의 비늘을 붙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어서 그 뜻을 이루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대왕大王께서 시일을 지체하고 무리들의 마음을 거슬려 황제의 칭호와 지위를 바로잡지 않으시니, 저는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이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이 궁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두어 오랫동안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큰 무리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깊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생각하겠다.” 하였다.
행군하여
호읍鄗邑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상산군常山郡에 호읍鄗邑이 있다.” 하였으니, 광무제光武帝가 호읍鄗邑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고읍高邑으로 고쳤다. 에 이르러서
풍이馮異를 불러 사방의
동정動靜을 묻자,
풍이馮異가 대답하기를 “
경시更始(劉玄)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우려가 대왕에게 있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경순전耿純傳〉과 〈풍이전馮異傳〉에 나옴 -
이때 마침
유생儒生 강화彊華注+[釋義]강화彊華는 성명이니, 광무제光武帝의 동사생同舍生(學舍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다. 가
관중關中에서
적복부赤伏符注+[釋義]도참설圖讖說을 기록한 글을 부符라 하니, 적복赤伏은 부符의 이름이다. 한漢나라는 화덕火德을 숭상하니, 적赤은 불[火]의 색깔이다. 복伏은 감춘다는 뜻이다. 를 받들고 왕에게 찾아오니, 여기에 이르기를 “
유수劉秀가 군대를 내어
무도無道한 자를 토벌하니, 사방 오랑캐들이 구름처럼 모여
용龍이 들에서 싸우는데
注+[釋義]용이 들에서 싸운다는 것은 군웅群雄들이 힘을 겨룸을 이르니,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이르기를 “용이 들에서 싸운다.” 하였다. 사칠四七의 즈음에
화火가 주인이 된다.
注+[釋義]四七之際 화위주火爲主: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사칠四七은 28이다. 고조高祖로부터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기병起兵할 때까지가 합하여 228년이니, 이것이 바로 사칠四七의 즈음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광무제光武帝가 28세에 기병起兵하였기 때문에 사칠四七의 즈음이라 했다.’ 한다. 또 28명의 장수도 또한 사칠四七의 수數에 응한다. 한漢나라는 화덕火德이기 때문에 화火가 주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로 인하여 다시 주청하자, 6월에 왕이
호읍鄗邑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注+[通鑑要解]호읍鄗邑의 남쪽 천추정千秋亭 오성五城의 경계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연호를 바꾸고
대사大赦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경시更始는 비록 용렬한 재주이나 남면南面한 군주였고, 광무제光武帝는 비록 호걸이었으나 북면北面한 신하였다.
경시更始가 망하기 전에 광무제光武帝가 먼저 즉위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배반한 것이다.”
[史略 사평史評]내가 생각건대 경시更始가 비록 군주였으나 나약하여 무슨 일을 하지 못하였고 놀고 잔치하여 법도가 없었으며, 겸하여 여러 장수들이 횡포를 부려 억조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그 망함을 서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광무제光武帝는 황실皇室의 후손으로 재주와 지혜와 용략勇略이 있어서 중외中外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갔으니, 만일 일찍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여러 사람의 희망을 거두지 않는다면 사직社稷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사직社稷은 중하고 군주는 가벼우니, 호읍鄗邑의 남쪽에서 즉위한 것은 사직社稷을 위한 계책이었으니, 무슨 배반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광무제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황실을 다시 일으켰다고 썼고, 즉위했을 때에는 황제에 즉위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 허여한 뜻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적미赤眉가 서쪽으로
제성帝城(長安)을 향할 때에 이름을 여러
적賊이라 하면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해서 마침내
종실宗室인
유분자劉盆子注+[頭註]유분자劉盆子는 고제高帝의 손자인 주허후朱虛侯(景王) 장章의 후손으로, 군중軍中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남을 위하여 양羊을 길렀다. 를 세워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注+[通鑑要解]예전에 식후式侯였던 유맹劉萌은 세 아들이 있었으니 공恭, 무茂, 분자盆子이다. 공恭은 장안長安에 있고 무茂과 분자盆子는 군중軍中에 남아서 양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이때 장군將軍을 세우려고 할 적에 경왕景王(朱虛侯 유장劉章)의 후손을 군중軍中에서 찾아 무茂와 분자盆子 및 서안후西安侯 효孝 세 사람을 얻었다. 번숭樊崇이 마침내 세 개의 간찰簡札을 상자 속에 넣고 그중 하나에 ‘상장군上將軍’이라는 신표信標를 써서 정鄭나라 북쪽에 단장壇場을 설치하고 유분자劉盆子 등 세 사람이 가운데에 서서 나이 순서대로 간찰簡札을 뽑게 하였는데, 유분자劉盆子가 상장군上將軍이라 쓴 신표를 얻으니, 제장諸將들이 모두 신하라 칭하고 절을 하였는 바, 유분자劉盆子는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 7월에 황제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등우鄧禹를 임명하여
대사도大司徒로 삼고
찬후酇侯注+[釋義]酇은 음이 찬이니 바로 소하蕭何를 봉한 곳이니, 남양南陽에 속하였다. [通鑑要解]酇은 소하蕭何를 봉한 곳이니, 등우鄧禹의 공功이 소하蕭何에게 비할 만하기 때문에 이곳에 봉한 것이다. 에 봉하니,
등우鄧禹가 이때 24세였다.
또
대사공大司空을 뽑을 것을 의논할 적에 황제가
적복부赤伏符에 “
왕량王梁이
위衛 지방을 주장하여
현무玄武가 된다.”
注+[通鑑要解]광무제光武帝가 야왕野王은 위衛의 땅이고 현무玄武는 수신水神의 이름이고 사공司空은 수토水土를 맡은 관직이므로 왕량王梁을 사공司空으로 삼은 것이다. 는 내용이 있다 해서
야왕령野王令인
왕량王梁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삼고,
오한吳漢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 처음에 경시更始가 복담伏湛을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삼으니, 이때 천하에 병란이 일어났으나 복담伏湛만은 홀로 편안히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문하에 있는 독督이 복담伏湛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자 복담伏湛이 거두어 목을 베니, 이에 관리와 백성들이 믿고 향하여 평원平原 한 고을이 복담伏湛을 힘입어 온전하였다.
황제가 복담伏湛을 불러 상서尙書로 삼아서 옛 제도를 주관하여 정하게 하고, 또 등우鄧禹가 서쪽으로 정벌 갔다 하여 복담伏湛을 사직司直으로 임명해서 대사도大司徒의 일을 행하게 하니, 거가車駕(天子)가 나가서 정벌할 때마다 복담伏湛이 항상 남아 진무鎭撫하고 지켰다.
○ 9월에 적미赤眉가 장안長安으로 들어가니, 경시更始가 달아나고 장상將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명하여 경시更始를 봉하여 회양왕淮陽王으로 삼았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와 〈유현전劉玄傳〉에 나옴.
경시更始는 뒤에 적미赤眉에게 살해당하였다. -
“경시更始(劉玄)는 한漢나라의 종실宗室이었으나 나약한 재주로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하였을 때를 살펴보면 남면南面하여 서서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서 자리를 만지작거려 자못 임금의 태도를 잃었는데, 그 후에 정사를 조맹趙萌에게 맡기고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여 신하들이 뵙고 정사를 말하려 하면 그때마다 술에 취하여 조회를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미 황제의 자리를 얻었으나 또 잃은 것이다.”
○ 처음에 완宛 땅 사람 탁무卓茂가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사랑하며 성정性情이 편안하고 담박하며 도道를 좋아해서, 바르고 진실하여 화려한 외모에 치중하지 않고 몸가짐이 청탁淸濁의 사이에 있어서 총각 때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일찍이 경쟁하는 일이 없으니, -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나오고, 또 《후한서後漢書 탁무전卓茂傳》에도 나옴 - 향당鄕黨의 오래된 벗들이 비록 행실과 재능이 탁무卓茂와 똑같지 않더라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사모하여 기뻐하였다.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때에
밀현密縣注+[釋義]북위北魏에서는 고밀군高密郡을 두고 수隋나라에서는 밀주密州로 고쳤다. 의
영令이 되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여겨서
선善한 사람을 들어 가르치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여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백성이 일찍이
부部(屬縣)의
정장亭長注+[頭註]부部는 관할하는 부문部門을 이르고, 정亭은 가다가 멈추어 머무르는 것이니, 여행객들이 숙식宿食하는 곳으로 지금의 관역館驛과 같다. 진秦나라 법法에 10리里마다 1정亭이 있고 정亭에는 장長을 두어 도적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자신이 뇌물로 준 쌀과 고기를 받아먹었다고 말하자,
탁무卓茂가 말하기를 “
정장亭長이 너에게 요구하였느냐?
아니면 네가 일이 있어서 청탁하였는데 받았느냐?
아니면 평소에 은혜로운 뜻으로 주었느냐?”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가서 그냥 주었습니다.” 하였다.
탁무卓茂가 말하기를 “주어서 받았는데, 무슨 이유로 나에게 말하는가?”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관리가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관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물건을 준 것인데, 관리가 끝내 받았기 때문에 와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탁무卓茂가 말하기를 “너는 〈
예의禮義를〉 파괴하는 백성이다.
注+[釋義]폐민敝民은 예의禮義를 피폐하게 하고 파괴하는 백성이다.
무릇 사람이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어지럽지 않아서 금수와 다른 까닭은 인의仁義와 예禮와 사랑이 있어서 서로 공경하고 섬길 줄 알기 때문인데 너만 홀로 이것을 닦으려 하지 않으니, 어찌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에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리는 다만 위엄과 힘을 이용하여 억지로 요구하거나 청하지 않을 뿐이니, 정장亭長은 평소 선량한 관리이고 세시歲時에 선물을 주는 것은 예禮이다.” 하였다.
백성이 말하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법률에 무슨 연고로 이것을 금합니까?” 하니,
탁무卓茂가 웃으며 말하기를 “법률은 큰 법法(강령)을 베풀어 놓은 것이고 예禮는 인정人情을 따르는 것이니, 지금 내가 예禮로써 너를 가르치면 네가 반드시 원망과 미움이 없겠지만 법률로써 너를 다스리면 네가 어디에 수족을 두겠느냐.
한 청사廳舍(동일한 종류의 일) 안에서 작은 잘못은 죄를 논할 수 있고 큰 잘못은 죽일 수 있으니, 우선 돌아가 생각하라.” 하였다.
처음에
탁무卓茂가
현縣에 이르러 폐지하고 새로 설치하는 바가 있자, 관리와 백성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그를 비웃고, 이웃
성城의 듣는 자들도 모두 그의 무능함을 비웃었다.
注+[釋義]치嗤는 경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
탁무卓茂가 수령으로 있는데〉
하남군河南郡에서 다시 수령을 두었으나
注+[通鑑要解]탁무卓茂가 바로 수령으로 있는데, 하남군河南郡에서 다시 수령을 두어 탁무卓茂와 한 곳에 함께 거하게 한 것이다. 탁무卓茂는 혐의하지 않고 일을 다스리기를 예전과 똑같이 하였는데 몇 년 만에 교화가 크게 행해져 길에 버려진 물건을 사람들이 줍지 않게 되었다.
注+[釋義]비록 길에 물건이 버려져 있더라도 사람들이 줍지 않는 것이니, 풍속이 순후함을 말한 것이다.
경부京部의 승丞으로 승진하니 밀현密縣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따랐다.
왕망王莽이 거섭居攝할 때에 병으로 면직하고 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상上이 즉위하자 맨 먼저 탁무卓茂를 찾아 구하니, 탁무卓茂가 이때 70여 세였다.
갑신일甲申日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이름이 천하에 으뜸이면 마땅히 천하의 중한 상을 받아야 하니, 지금
탁무卓茂를
태부太傅로 삼고
注+[通鑑要解]태부太傅는 지위가 상공上公이니, 자리를 띄워 삼공三公의 위에 있었다. 포덕후褒德侯로 봉한다.”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선善한 이를 들어 쓰고 능하지 못한 이를 가르치면 백성들이 권면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순舜임금이 고요皐陶를 등용하고 탕湯임금이 이윤伊尹을 등용함에 불인不仁한 자가 멀어진 것이니, 이는 덕德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한 초기에 군웅群雄들이 각축角逐을 벌여 온 천하가 솥 안에 끓는 물처럼 떠들썩하였으니, 저 견고한 적진敵陣을 꺾고 적을 무찌르는 사람과 권모술수와 궤변詭辯을 늘어놓는 선비가 막 세상에 소중하게 여겨졌을 터인데, 광무제光武帝가 홀로 충후忠厚한 신하를 취하고 순량循良한 관리를 표창해서 초야에서 선발하여 여러 공公의 위에 두었으니, 예부터 내려오는 물건(漢나라 왕실王室)을 광복光復하여 국조國祚(國統)를 장구하게 누린 것이 마땅하니, 이는 먼저 힘쓸 바를 알아서 그 본원本原을 얻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낙양洛陽을 포위하자, 주유朱鮪가 나와 항복하였다.
10월에 거가車駕가 낙양洛陽에 들어가서 남궁南宮에 행차하였고, 마침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유분자劉盆子가 관리와 백성들을 자주 포악하게 대하여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알지 못했는데,
등우鄧禹가 승세를 타고 홀로 이기며 군사들이
기율紀律이 있다
注+[釋義]사행유기師行有紀는 군사들의 행렬이 기율紀律이 있음을 이른다. 는 말을 듣고는 모두 명망을 듣고 사모하여 서로 물건을 손에 들고 등에 짊어지고
注+[釋義]휴携는 짐이 손에 있는 것이고, 부負는 짐이 등에 있는 것이다. 와서 군대를 위로하니, 항복하는 자가 날마다 천 명으로 헤아려졌다.
등우鄧禹는 머무는 곳마다 수레를 정지하고
절節을 멈추어(세워) 백성들을 위로하고 오게 하니,
注+[釋義]노래勞來는 위로하고 권면하여 불러서 맞이함을 이른다. 부로父老과 어린아이들,
注+[釋義]치穉는 어린 것이니, 치자稚字와 같다.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아이들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
注+[釋義]수발垂髮은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소아小兒를 이르고, 대백戴白은 머리에 백발을 이고 있는 노인老人을 이른다. 이 그 수레 아래에 가득히 모여서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에 명성이
관서關西(長安) 지방에 진동하였다.
여러 장수와 호걸들이 모두 등우鄧禹에게 곧바로 장안長安을 공격할 것을 권하자, 등우鄧禹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많으나 싸울 수 있는 자가 적으며, 앞에는 믿을 만한 저축
注+[釋義]자積(자)는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취聚라고 훈訓하였다. [通鑑要解]仰은 시恃와 같다. 이 없고 뒤에는 실어다가 먹일 만한 물자가 없는데,
적미赤眉는 새로
장안長安을 함락하여 재물과 곡식이 충실하니,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저 도적들이 모여 삶에 장구한 계책이 없어서 재물과 곡식이 비록 많으나 변고가 수없이 많을 것이니, 어찌 이것을 굳게 지킬 수 있는 자이겠는가.
상군上郡, 북지北地, 안정安定 세 군郡은 토지가 넓고 인민이 적으며 곡식이 풍부하고 가축이 많으니, 내 우선 이 북쪽 지역에서 군대를 휴식시키고 양식을 가져다가 군사들을 기르면서 저들의 피폐함을 살핀다면 이에 도모할 수 있다.” 하고,
이에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순읍栒邑注+[釋義]순읍栒邑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부풍군扶風郡에 있다.” 하였다. 에 이르니, 이르는 곳마다 여러
군영軍營과
보루堡壘와
군읍郡邑들이 모두 성문을 열고 귀순하였다.
○ 처음에
성기현成紀縣注+[頭註]성기成紀는 현縣의 이름이니 천수군天水郡에 속하였다. 의
외효隗囂가 군대를 일으켜
한漢나라에 호응하자,
경시更始가
외효隗囂를 불렀는데
외효隗囂가
장안長安에 이르렀다가 뒤에 도망하여
천수天水로 돌아가서 다시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옛 기반을 일으켜 닦아서 스스로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이라 칭하니,
삼보三輔 지방의 피난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외효隗囂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외효隗囂가 힘을 다해 선비들을 맞이하여 대접해서 포의布衣의 사귐을 맺어 마원馬援과 반표班彪 등을 빈객으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서주西州에 진동하여 산동山東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 마원馬援이 젊었을 때에 집에 재용財用이 부족하다 하여 그 형 마황馬況을 하직하고 변방 고을에 나아가 농사와 목축을 하고자 하니, 마황馬況이 말하기를 “너는 큰 재목이니, 마땅히 늦게 이루어질 것이다.
훌륭한 공인工人은 다듬지 않은 거친 옥석玉石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법이니, 우선 너 좋을대로 하라.” 하였다.
마원馬援이 마침내 북지北地에 가서 농사짓고 목축을 하였는데, 항상 빈객들에게 이르기를 “대장부가 뜻을 세울 때에는 곤궁할수록 더욱 견고하고, 늙을수록 더욱 건장해야 한다.” 하였다.
뒤에 수천 마리의 가축과 수만
곡斛의 곡식을 소유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무릇 재산을 늘리는
注+[釋義]재물을 경영하여 이익을 내는 것을 식殖이라 한다. 것은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베푸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그렇지 않으면 돈만 지키는 노예일 뿐이다.” 하고는, 이에 친구들에게 재물을 다 흩어 주었다.
외효隗囂가 선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마원馬援이 찾아가 따르자, 외효隗囂가 매우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겨서 그와 함께 계책을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