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宣之治
는 信賞必罰
하고 綜核名實
注+[釋義]七制解云 相參錯爲綜이요 不虛拘爲核이라하야 政事文學法理之士 咸精其能
하고 至于技巧工匠器械
하야도 自元成間
으로 鮮能及之
하니 亦足以知吏稱其職
하고 民安其業也
라
遭値匈奴乖亂
하야 亡固存
注+[釋義]此句는 書仲虺文也라 有亡道者면 則推而滅之하고 有存道者면 則輔而固之니 今宣帝朝呼韓邪而固存之하고 走使遠遁焉이라 故로 此贊에 引仲虺誥語云이라하고 信(伸)威北夷
注+[釋義]一說에 謂恩信及威聲이 竝著于北夷라하니 單于慕義
하고 稽首稱藩
하야 功光祖宗
하고 業垂後嗣
라
可謂中興
하야 侔德殷宗周宣矣
注+[釋義]殷高宗, 周宣王은 皆中興之帝니 今宣帝之德이 可與侔齊矣라로다
民安其業已上은 是帝治術所致요 遭匈奴已下는 是遭時에 亦緣應之得策이라
觀班固論孝宣이 皆是로되 只侔德商周는 過許니 蓋較功比迹이면 頗類라
時擧傅納
注+[頭註]時는 是也니 於是時也에 選用賢者라 傅는 讀曰敷니 敷는 陳也니 有陳言者면 納而用之라하야 聽斷惟精
이라
柔遠能邇
하야 燀燿威靈
하니 龍荒朔幕(漠)
注+[頭註]龍荒은 卽龍城이라 西胡는 皆事龍神이라 故로 名大會處曰龍荒이라 幕은 卽沙漠也라이 莫不來庭
이라 丕顯祖烈
이 尙(丁)[於]有成
이라
孝宣承統에 纂修鴻業하고 講論六藝하고 招選茂異하야 而蕭望之, 梁丘賀, 夏侯勝, 韋玄成, 嚴彭祖, 尹更始는 以儒術進하고 劉向, 王褒는 以文章顯하며 將相則張安世, 趙充國, 魏相, 丙吉, 于定國, 杜延年이요 治民則黃霸, 王成, 龔遂, 鄭弘, 召信臣, 韓延壽, 尹翁歸, 趙廣漢, 嚴延年, 張敞之屬이 皆有功迹하야 見於〈後〉世하니 參其名臣컨대 亦其次也니라
秦始皇二世用之하야 以亡其國하고 趙高李斯用之하야 以亡其身하니 生乎秦之後면 可以戒矣어늘
而漢鼂錯復明申韓하야 佐景帝하야 更律令하고 削七國하야 天下亦幾於亡하야 〈甘蹈亡秦之轍而不顧焉이라〉
彼申韓之說이 其入人深하야 雖明君賢臣이라도 皆陷溺而不能出은 何也오
其令行禁止하고 奔走天下하야 誠足以稱快一時也일새라
樂其一時之快하야 而不暇顧其他日之害하니 此其說이 所以盛行於世歟인저
觀宣帝之爲君컨대 綜核名實하고 信賞必罰하야 其所以功光祖宗하고 業垂後嗣者는 蓋勵精之效요 初非申韓之功也라
至於用恭顯하야 而啓元帝之信宦者하고 貴許史하야 而啓成帝之任外戚하고 殺趙蓋韓楊하야 而啓哀帝之誅大臣하야
開三大釁하야 終以亡國하니 此豈非擇術不審之流弊乎아
故로 論其功하면 則爲中興之君이요 論其罪하면 則亦爲基禍之主하야 其功罪相半者는 蓋失於欲速而用申韓也라
然이나 其爲治는 乃曰王者必世而後仁이라하고 曰久於其道而天下化成이라하야
日計不足이나 月計有餘하야 其遲鈍迂闊이 每不若申韓之速은 獨何歟아
〈使聖人而不知此理耶인댄 是不智也요 使聖人知而不行耶인댄 是不仁也니 不仁不智가 豈所以爲聖人哉아〉
其擧事에 厭遲而惡鈍이 亦與人同也니 〈使有道於此하야 加頃刻之捷이면 則聖人已先爲之矣시리라〉
惟其原始要終하고 探端窮本하야 知吾道雖有歲月之遲나 而終成千百年之安하고 申韓雖有歲月之速이나 而終貽千百年之害라
由是論之하면 則莫速於聖人이요 莫遲於申韓이며 莫利於聖人이요 莫鈍於申韓하니 其理甚明이라
宣帝不知此理하고 反非太子用儒之諫하니 豈天未欲斯民見三代之治耶아
宣帝號尙嚴이어늘 而綱目에 書寬恤之政이 四니 詔有大父母父母喪이어든 勿徭하고 詔子匿父母, 妻匿夫, 孫匿大父母어든 皆勿治하고 令郡國으로 歲上繫囚호되 掠笞瘦死者는 以課殿最하고 詔年八十以上은 非誣告人이면 勿坐하니 謂非惻隱之發이 可乎아
信鳳凰, 惑碧鷄하고 而趙韓楊之死에 不免書殺하니 此는 綱目所以責賢者之備也니라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선제기宣帝紀〉 찬贊에 말하였다.
“
효선제孝宣帝의 정치는
상賞과
벌罰을 분명히 내리고
명名과
실實을 자세히 살펴서
注+[釋義]《칠제해七制解》에 이르기를 “서로 참착參錯(이리저리 참고하여 종합)하는 것을 종綜이라 하고, 괜히 구속하지 않음을 핵核이라 한다.” 하였다. 정사政事와
문학文學과
법리法理를 맡은 선비들이 모두 재능을 정밀하게 하였고,
기교技巧와
공장工匠의
기계器械에 이르러도 정밀하여
원제元帝와
성제成帝 연간에는 따라갈 수 있는 자가 드물었으니, 또한 관리들이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흉노匈奴가 서로
반목反目하고 혼란할 때를 만나서 망하려는 자를 밀쳐 쓰러뜨리고 보존하는 자를 견고히 하며
注+[釋義]이 구句는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의 글이다. 도道를 망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밀쳐 멸망시키고, 도道를 보존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서 견고하게 하니, 지금 선제宣帝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조회 오게 하여 보존하는 자를 견고히 해 주고 질지郅支를 패주시켜 멀리 숨게 하였으므로 이 찬贊에서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위엄을 북쪽 오랑캐들에게 펴니,
注+[釋義]일설一說에 “신의와 위엄이 북쪽 오랑캐들에게 함께 드러난 것이다.” 하였다.선우單于가
의義를 사모하고 머리를 조아려
번신藩臣을 칭해서
공功이
조종祖宗에 빛나고
업業이 후세에 드리워졌다.
‘나라를
중흥中興하여
덕德이
은殷나라의
고종高宗(武丁)과
주周나라의
선왕宣王에게 견줄 만하다.
注+[釋義]은殷나라 고종高宗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은 모두 쇠퇴한 나라를 중흥시킨 군주이니, 지금 선제宣帝의 덕德이 이들과 짝할 만한 것이다. ’고 이를 만하다.”
[新增]唐仲友가 〈반고班固의 찬贊에〉 평評하였다.
“ ‘민안기업民安其業’ 이상은 선제宣帝의 치도治道의 결과이고, ‘조치흉노遭値匈奴’ 이하는 좋은 때를 만남에 또한 때에 따라 대응하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살펴보건대 반고班固가 효선제孝宣帝를 논한 것이 모두 맞으나 다만 선제宣帝의 덕德이 상商나라 고종高宗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에게 짝할 만하다고 한 것은 지나치게 허여한 것이니, 공적만을 비교한다면 자못 비슷하다.
그러나 또한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으니, 애당초 이른바 덕德이라는 것이 없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서전敍傳〉에 선제宣帝를 칭술한 글에 말하였다.
“중종中宗은 밝고 밝아서 형명刑名을 공경히 사용하였다.
이 때에 어진 자를 들어 쓰고 말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받아들여서
注+[頭註]시時는 이것이니, 이때에 어진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다. 부傅는 부敷로 읽으니, 부敷는 아뢰는 것이니 말을 아뢰는 자가 있으면 받아들여 쓴 것이다. 다스리고 결단함에 정밀하였다.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여서 위엄이 빛나니,
흉노匈奴의
용성龍城과 사막 북쪽 지역
注+[頭註]용황龍荒은 곧 용성龍城이다. 서호西胡는 모두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크게 모인 곳을 이름하여 용황龍荒이라 하였다. 막幕은 사막이다. 이 모두 와서 복종하여 찬란한
조종祖宗의
공렬功烈이 이루어짐이 있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공손홍복식아관전公孫弘卜式兒寬傳〉 찬贊에 말하였다.
“효선제孝宣帝는 대통大統을 잇자 큰 기업基業을 닦고 또한 육경六經을 강론하며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오고 선발해서 소망지蕭望之와 양구하梁丘賀‧하후승夏侯勝‧위현성韋玄成‧엄팽조嚴彭祖‧윤경시尹更始는 유학儒學으로 등용되었고, 유향劉向과 왕포王褒는 문장文章으로 드러났으며, 장상將相으로는 장안세張安世‧조충국趙充國‧위상魏相‧병길丙吉‧우정국于定國‧두연년杜延年이었고, 백성을 잘 다스린 자로는 황패黃霸‧왕성王成‧공수龔遂‧정홍鄭弘‧소신신召信臣‧한연수韓延壽‧윤옹귀尹翁歸‧조광한趙廣漢‧엄연년嚴延年‧장창張敞 등이 모두 뛰어난 공적이 있어서 후세에 드러났으니, 이름난 신하들을 살펴보면 또한 그(武帝) 다음이라 할 것이다.”
“신한申韓(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이 후세에 해독을 끼침이 어쩌면 그리도 오래되었는가.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와 이세황제二世皇帝는 이것을 써서 나라를 망쳤고 조고趙高와 이사李斯는 이것을 써서 자신을 망쳤으니, 진秦나라 뒤에 태어난 자라면 이것을 경계로 삼을 만하였다.
그런데 한漢나라 조조鼂錯는 다시 신한申韓의 법法을 밝혀서 경제景帝를 보좌하여 율령律令을 바꾸고 일곱 제후국의 땅을 깎아 천하天下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러 멸망한 진秦나라의 전철前轍을 따르고 돌아보지 않았다.
조조鼂錯의 뒤에 태어난 자들이 거듭 경계할 만하였다.
그러나 선제宣帝는 다시 《신자申子》의 〈군신편君臣篇〉을 보기 좋아하여 등용한 사람이 대부분 법조문을 따지는 옥리獄吏였다.
그러므로 형명刑名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려서 조조鼂錯의 잘못된 전철前轍을 다시 밟고 돌아보지 않았다.
저 신한申韓의 학설이 사람에게 들어감이 깊어서 비록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라도 여기에 빠져 벗어나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명령하면 명령이 행해지고 금하면 금령이 그쳐지며 천하 사람들을 분주히 달리게 해서 진실로 한때에 상쾌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때의 상쾌함을 좋아하여 후일의 폐해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학설이 세상에 성행하는 이유일 것이다.
선제宣帝가 임금 노릇 한 것을 살펴보건대 명名과 실實을 자세히 살피고 상賞과 벌罰을 분명히 내려서 공功이 조종祖宗에 빛나고 업業이 후세에 전해진 것은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한 효험이었고 애당초 신한申韓의 학설의 공功이 아니었다.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을 등용하여 원제元帝가 환관宦官을 믿는 길을 열어 주었고, 외척인 허씨許氏와 사씨史氏를 귀하게 만들어 성제成帝가 외척에게 정권을 맡기는 길을 열어 놓았고, 조광한趙廣漢‧합관요蓋寬饒‧한연수韓延壽‧양운楊惲을 죽여서 애제哀帝가 대신大臣을 죽이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세 가지 큰 잘못을 열어 놓아 끝내 이 때문에 나라를 멸망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학술學術을 선택함에 자세히 살피지 못한 유폐流弊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공功을 논하면 중흥中興의 군주가 되었고, 그 죄를 논하면 또한 화禍를 열어 놓은 군주가 되어서 공功과 죄罪가 서로 반반씩이니, 이는 속히 하고자 하여 신한申韓의 학설을 쓴 데에서 잘못된 것이다.
옛날 성인聖人들도 더딘 것이 신속한 것만 못하고 무딘 것이 예리한 것만 못한 줄을 아셨다.
그러나 정치를 함은 마침내 말씀하기를 ‘왕자王者가 있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인仁해진다.’ 하였고, 말씀하기를 ‘그 도道를 오래하여야 천하天下가 교화敎化되어 이루어진다.’ 하여,
날로 계산하면 부족하나 달로 계산하면 유여하여, 더디고 둔하고 오활함이 매양 신한申韓의 신속함만 못함은 유독 어째서인가?
만일 성인聖人이 이 이치를 알지 못하셨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만일 성인聖人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셨다면 이는 인仁하지 못한 것이니, 인仁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어찌 성인聖人이 되는 소이所以이겠는가.
이는 성인聖人의 일을 생각함이 지극히 정밀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聖人도 일을 할 때에 더딘 것을 싫어하고 무딘 것을 싫어함이 일반인과 같았으니, 만일 여기에 도道가 있어서 삽시간에 속히 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이미 먼저 하셨을 것이다.
다만 시작을 근원하고 종終을 맞추어 보며 단서와 근본을 탐구하여, 우리 도道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끝내 천백년千百年의 편안함을 이루고,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는 비록 시간의 빠름이 있지만 끝내 천백년千百年의 폐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셨다.
이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성인聖人보다 더 신속한 것이 없고 신한申韓보다 더 더딘 것이 없으며, 성인聖人보다 더 예리한 것이 없고 신한申韓보다 더 무딘 것이 없으니,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하다.
그런데 선제宣帝는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선비를 등용해야 한다는 태자太子의 간언을 비난하였으니, 아마 하늘이 이 백성들로 하여금 삼대三代의 정치를 보게 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보다.”
“선제宣帝는 엄함을 숭상했다고 이름났으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너그럽게 구휼한 정사를 기록한 것이 네 가지이니, 조부모와 부모의 상喪이 있으면 부역시키지 말게 하였고, 자식이 부모를 숨겨 주고 아내가 남편을 숨겨 주고 손자가 조부모를 숨겨 주었으면 모두 죄를 다스리지 말게 하였고,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해마다 죄수를 보고하되 죄수를 매질하여 병들어 죽게 한 자는 고과考課에 최하등의 성적을 매기게 하였고, 80세 이상인 사람은 무고誣告한 사람이 아니면 연좌시키지 말게 하였으니,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봉황새를 믿고 벽계碧鷄의 신神에 미혹되고 조광한趙廣漢‧한연수韓延壽‧양운楊惲의 죽음에 살殺이라고 씀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현자賢者에게 모든 일을 완비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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