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命晉大夫
注+[頭註]晉은 姬姓이니 侯爵이라 周成王이 封母弟叔虞於唐이러니 至于子燮하야 改國號曰晉이라하니 靜(靖)公은 乃叔虞之三十九世也라魏斯
注+[頭註]本姓姬니 周武王이 封公高於畢하니 於是에 以畢爲姓하다 晉獻公이 封苗裔畢萬於魏하니 從其國〈號〉하야 稱魏氏라 至六世魏舒하야 爲晉正卿하고 三世至斯라, 趙籍
注+[頭註]本嬴姓이니 周穆王이 封造父以趙城하니 由此爲趙氏라 至二十五世盾하야 始爲晉正卿하고 又六世에 至籍하니라, 韓虔
注+[頭註]姬姓이니 晉封武子於韓原이러니 至獻子하야 始從封爲姓이라 傳二世韓厥하야 爲晉正卿하고 又三世에 至虔하니라하야 爲諸侯
注+[原註]春秋之世에 晉有范氏, 中行氏, 智氏及韓, 魏, 趙하니 是爲六卿이라 後에 三家皆爲韓, 魏, 趙所滅하고 三分晉地而有之러니 至此에 始請命於天子하야 爲諸侯하니라하다
天子之職은 莫大於禮요 禮莫大於分이요 分莫大於名이라
夫以四海之廣과 兆民之衆으로 受制於一人하야 雖有絶倫之力과 高世之智라도 莫不奔走而服役者는 豈非以禮爲之紀綱哉아
是故로 天子統三公하고 三公率諸侯하고 諸侯制卿大夫하고 卿大夫治士庶人하야 貴以臨賤하고 賤以承貴하야 上之使下가 猶心腹之運手足과 根本之制枝葉하고 下之事上이 猶手足之衛心腹과 枝葉之庇本根이니 然後에 能上下相保하야 而國家治安이라
春秋에 抑諸侯하고 尊周室하야 王人雖微나 序於諸侯之上하니 以是로 見聖人於君臣之際에 未嘗不惓惓也라
非有桀紂之暴와 湯武之仁으로 人歸之, 天命之면 君臣之分을 當守節伏死而已矣라
夫禮
는 辨貴賤, 序親疎
하고 裁群物, 制庶事
하니 非名
이면 不著
요 非器
注+[頭註]名은 爵號也요 器는 車服也라면 不形
이라
名以命之하고 器以別之니 然後에 上下粲然有倫하니 此禮之大經也라
昔
에 仲叔于奚 有功於衛
러니 辭邑而請繁(鞶)纓
注+[釋義]은 馬鬣上飾이요 纓은 馬膺前飾이라[頭註]繁은 鞶同하니 今馬之大帶요 纓은 削革爲之니 諸侯之服이라한대 孔子以爲不如多與之邑
이라
惟器與名
은 不可以假人
이니 君之所司也
라 政亡
이면 라하시고
夫繁纓은 小物也로되 而孔子惜之하시고 正名은 細務也로되 而孔子先之는 誠以名器旣亂이면 則上下無以相(有)[保]故也라
綱紀散壞하야 下陵上替하야 諸侯專征하고 大夫擅政하야 禮之大體 什喪七八矣로되 文武之祀 猶緜緜相屬者는 蓋以周之子孫이 尙能守其名分故也라
昔
에 晉文公
이 有大功於王室
하고 請隧
注+[頭註]隧는 墓道也니 掘地通道하니 王之葬禮也요 諸侯懸棺而下라於襄王
한대 襄王不許曰 王章
注+[頭註]章은 表也니 所以表名天子與諸侯異物也라 周德雖衰나 天下未有代周之德者어늘 晉欲擬天子하니 是有二王이라也
니 未有代德而有二王
은 也
라
不然이면 叔父有地어늘 而隧又何請焉이리오한대 文公이 於是乎懼而不敢違라
是故
로 以周之地則不大於曹滕
이요 以周之民則不衆於
나
然歷數百年토록 宗主天下하야 雖以晉, 楚, 齊, 秦之彊으로도 不敢加兵者는 何哉오
至於季氏
注+[頭註]魯大夫니 世執國政하야 季平子逐昭公하고 季康子逐哀公이나 然終身北面하야 不敢簒國이라 孟孫, 仲孫, 季孫이 皆桓公之子니 是爲三桓이라之於魯
와 田常
注+[頭註]卽陳恒이니 溫公避國諱하야 改恒曰常이라 陳氏를 稱田氏하니 見下田和註라之於齊
와 白公
注+[頭註]見下二卷이라 白은 楚邑也니 楚僭稱王하야 邑宰皆僭稱公하니 勝其名也라 楚太子建之子也라之於楚
와 智伯
注+[頭註]智伯於晉大夫에 最强하야 攻晉出公하니 出公道死라 智伯欲幷晉而不敢하야 乃奉哀公驕立之하니라之於晉
에 는 豈其力不足而心不忍哉
아
今晉大夫 暴蔑其君하야 剖分晉國이어늘 天子旣不能討하고 又寵秩之하야 使列於諸侯하니 是는 區區之名分도 復不能守而幷棄之也니 先王之禮 於斯盡矣라
或者
는 以爲當是之時
하야 周室微弱
하고 三晉
注+[頭註]魏趙韓三家 共分晉地故로 曰三晉이라彊盛
하니 雖欲勿許
나 其可得乎
아하니 是
는 大不然
이라
夫三晉雖彊
이나 苟不顧天下之誅而犯義侵禮
면 則不請於天子而自立矣
요 不請於天子而自立
이면 則爲悖逆之臣
이니 天下
에 苟有桓文
注+[頭註]齊桓公은 小白이요 晉文公은 重耳니 皆霸諸侯也니라之君
이면 必奉禮義而征之
리라
今請於天子而天子許之하니 是는 受天子之命而爲諸侯也니 誰得而討之리오
故로 三晉之列於諸侯는 非三晉之壞禮라 乃天子自壞之也니라
初
에 趙簡子使尹鐸爲晉陽
한대 請曰 以爲繭絲乎
잇가 抑爲保障乎
잇가注+[原註]繭絲者는 指稅賦而言이요 保障者는 指藩籬而言이니 尹鐸之意 不在稅賦而在藩籬하니 此其所以保晉陽也라 簡子曰 保障哉
인저 尹鐸
이 損其戶數
注+[釋義]謂減損戶數니 則賦稅輕하야 民力舒也라하다
簡子謂無恤曰 晉國
에 有難
이어든 而無以尹鐸爲少
注+[釋義]少는 輕之也니 重之曰多요 輕之曰少라하고 無以晉陽爲遠
하고 必以爲歸
라하더니
智伯이 悅하야 又求地於魏桓子한대 桓子復與之萬家之邑하니
智伯
이 又求蔡皐狼之地
注+[釋義]皐狼은 地名이니 屬趙邑이라 本春秋蔡地라 故曰蔡皐狼이라於趙襄子
注+[原註]無恤立하니 是爲趙襄子라한대 襄子弗與
하다
智伯
이 怒
하야 韓魏之甲
하고 以攻趙氏
하니 襄子將出曰 吾何走乎
아 從者曰 長子
注+[釋義]曰 長子는 周史辛甲所封이니 後爲趙邑하야 屬上黨이라 禮職方氏에 其川漳이라한대 註에 漳出長子라하니라近
하고 且城厚完
하니이다
襄子曰 民
力以完之
하고 又斃死以守之
면 其誰與我
리오 從者曰 邯鄲
注+[釋義]慈湖王氏曰 邯鄲은 趙地名이라 今磁州縣이니 在州北五十里하니 洛州肥鄕縣도 亦邯鄲地也라 有邯鄲山이 在東城下라之倉庫實
하니이다
襄子曰 浚民之膏澤하야 以實之하고 又因而殺之면 其誰與我리오
先主之所
也
요 尹鐸之所寬也
니 民必和矣
라하고 乃走晉陽
하다
三家以國人
으로 圍而灌之
하니 城不浸者三版
注+[釋義]慈湖王氏曰 浸은 當作沒이라 廣二尺曰版이라이요 沈竈産
호되 民無叛意
러라
趙襄子使張孟談으로 潛出見二子曰 臣聞脣亡則齒寒이라하니 今智伯이 帥韓魏而攻趙하니 趙亡則韓魏爲之次矣리라
襄子夜使人殺守隄之吏하고 而決水灌智伯軍하니 智伯軍이 救水而亂이어늘
韓魏翼而擊之하고 襄子將卒犯其前하야 大敗智伯之衆하고 遂殺智伯하고 盡滅智氏之族하다
夫才與德異어늘 而世俗이 莫之能辨하고 通謂之賢이라하니 此其所以失人也라
夫聰察彊毅之謂才
요 正直中和之謂德
이니 才者
는 德之資也
요 德者
는 才之
也
라
是故로 才德兼全을 謂之聖人이요 才德兼亡(無)를 謂之愚人이요 德勝才를 謂之君子요 才勝德을 謂之小人이니 凡取人之術은 苟不得聖人君子而與之인댄 與其得小人으론 不若得愚人이라
君子는 挾才以爲善하고 小人은 挾才以爲惡하나니 挾才以爲善者는 善無不至矣요 挾才以爲惡者는 惡亦無不至矣라
愚者는 雖欲爲不善이나 智不能周하고 力不能勝하니 譬之乳狗搏人하야 人得而制之어니와
小人은 智足以遂其姦하고 勇足以決其暴하니 是는 虎而翼者也니 其爲害 豈不多哉리오
自古昔以來로 國之亂臣과 家之敗子가 才有餘而德不足하야 以至於顚覆者多矣니 豈特智伯哉리오
○ 趙襄子漆智伯之頭
하야 以爲飮器
注+[釋義]慈湖王氏曰 曰 大宛傳에 匈奴破月하고 以其王頭爲飮器라 韋昭云 飮器는也라하고 晉灼云 飮器는 虎子屬也라하니라 今按 椑榼은 用以盛酒耳요 非用飮者라 晉以爲溲便器者는 以韓子呂氏春秋에 竝云 襄子漆智伯頭하야 爲溲杯故也라 〈顔〉師古引匈奴傳하야 謂爲飮酒器라하니 貴之也라 且死骨凶穢요 又惡人頭顱가 豈俎豆所宜乎아 晉灼釋爲溲便이라하니 蓋似之라러니
智伯之臣豫讓
이 欲爲之報仇
하야 乃詐爲刑人
注+[頭註]周禮大司寇에 凡萬民之有罪過而未於法者를 役諸司空이라한대 注에 使治百工之役也라하야 挾匕首
注+[釋義]匕는 音比라 說苑云 尺八劍也니 其頭類匕라 故名匕首라하고 入襄子宮中
하야 塗厠
이러니
豫讓
이 又漆身爲癩
注+[釋義]慈湖王氏曰 漆有毒하야 人近之則患瘡腫하야 若癩然이라 故讓漆身以變其容이라 癩는 惡疾也라하고 呑炭爲啞
注+[釋義]慈湖王氏曰 國策曰 豫讓乞食이러니 其妻曰 貌不似吾夫나 何其音似吾夫오한대 讓遂呑炭以變其音이라 啞는也니 通作瘂라하야 行乞於市
하니
其妻
는 不識也
로되 其友識之
하고 爲之泣曰 以子之才
로 臣事趙孟
注+[頭註]趙盾의 字孟故로 後世子孫이 皆曰趙孟이라이면 必得近幸
하리니 子乃爲所欲爲 顧不易耶
아
旣已委質爲臣
注+[釋義]委質은 委其體以事君이니 示必死節於其主也라이요 而又求殺之
면 是
는 二心也
라
凡吾所爲者極難耳나 然所以爲此者는 將以愧天下後世之爲人臣하야 懷二心者也로라
襄子出할새 豫讓이 伏於橋下러니 襄子至橋에 馬驚이어늘 索之하야 得豫讓하야 遂殺之하다
人問之曰 子嘗事范中行氏러니 智伯滅之로되 子不爲報讐하고 反臣事智伯이라가 今智伯死에 子何爲報之深也오
對曰 中行은 衆人畜我하니 我故衆人事之요 智伯은 國士遇我하니 我故國士報之라
故
로 此一豫讓也
로되 러니 已而
요 抗節致忠
하야 行出乎烈士
하니 皆人主使然也
니라
君子爲名譽而爲善이면 則其善이 必不誠이요 人臣爲利祿而效忠이면 則其忠이 必不盡이라
智伯無後矣하야 氣勢無所可倚矣요 富貴無所可求矣요 子孫無所可託矣어늘 而讓也 不忘國士之遇하고 以死報之하야 至再至三而愈篤하니 則無所爲而爲之者라
此非特可爲委質事人之法이라 無所爲而爲善은 雖大學之道라도 不過是也라
〈然이나 襄子知其如此而終殺之하니 何以爲人臣之勸哉아〉
文侯以卜子夏, 田子方
으로 爲師
하고 每過段干木
注+[頭註]老子之子宗이 爲魏將하야 封於段干하니 蓋因邑爲姓이라之廬
에 必式
注+[釋義]慈湖王氏曰 記曲禮篇에 尸必式이라한대 註에 小俛以禮之라 韻會註에 乘而俛首致恭曰式이니 義取憑軾也라 軾은 車前橫板이니 有所敬이면 則俯而憑之라 孔曰 古者에 車箱長四尺四寸이니 而三分之하야 前一後二라 橫一木하야 下去車牀三尺三寸을 謂之軾이요 軾上二尺二寸에 橫一木을 謂之이라 立乘은 平常則憑較하나니 若應爲敬이면 則落手隱下軾而頭得俯俛이라하니 四方賢士多歸之
注+[釋義]古帝王이 皆有師러니 戰國以來로 人君有師者 惟文侯라러라
命駕將適野한대 左右曰 今日에 飮酒樂하고 天又雨하니 君將安之잇고
文侯曰 吾與虞人
注+[頭註]守苑囿之吏也라 虞는也니 度知山林之大小及其所生也라期獵
하니 雖樂
이나 豈可無一會期
注+[頭註]昔與之期하니 今往會之요 罷之는 往告之以雨而罷獵이라哉
아하고 乃往
하야 身自罷之
하다
文侯使
羊
으로 伐中山
注+[釋義]狄都也라 索隱曰 今中山府是也라克之
하야 以封其子擊
하고
任座曰 君得中山하사 不以封君之弟하시고 而以封君之子하시니 何謂仁君이니잇고
次問翟璜
注+[釋義]翟은 按에 翟은 本音狄이니 後人姓 乃이라 璜은 音黃이라한대 對曰 仁君也
니이다
文侯曰 何以知之오 對曰 君仁則臣直이라하니 嚮者에 任座之言이 直이라
文侯悅하야 使翟璜으로 召任座而反之하고 親下堂迎之하야 以爲上客하니라
○ 子擊이 出할새 遭田子方於道하야 下車伏謁호되 子方이 不爲禮어늘 子擊이 怒하야 謂子方曰 富貴者驕人乎아 貧賤者驕人乎아
國君而驕人則失其國
하고 大夫而驕人則失其家
하나니 失其國者
는 未聞有以國待之者也
요 失其家者
는 也
로라
言不用, 行不合이면 則納履而去耳니 安往而不得貧賤哉리오 子擊이 乃謝之하다
夫富貴는 固不可驕人이어니와 貧賤亦豈驕人得이리오
蓋驕之一字는 雖以周公之聖으로도 尙不敢加之於身이라
如曰使驕且吝이면 其餘는 不足觀也已라하니 若子方이 豈可驕人乎아
子擊은 欲以勢驕人하고 子方은 却欲以學驕人하니 二者病則一般이라
田子方은 子夏門人이로되 歷於戰國하여 不免爲風聲氣習之所移라
其後에 子方之學이 流爲莊周하여 傲物輕世하니 皆從驕之一字失이니라
○ 文侯謂李克曰 先生이 嘗有言曰 家貧에 思賢妻하고 國亂에 思良相이라하니 今所置 非成則璜이니 二子何如오
對曰 居視其所親하며 富視其所與하며 達視其所擧하며 窮視其所不爲하며 貧視其所不取니 五者에 足以定之矣니이다
李克이 出한대 翟璜曰 君召卜相하시니 果誰爲之오 克曰 魏成이니라
璜
이 忿然曰 西河
注+[釋義]春秋晉地니 今太原府汾州是라守吳起
도 臣所進也
요
君
이 內以鄴爲憂
注+[附註]如河伯娶婦之類라 史記에 西門豹爲鄴令하니 三老廷掾이 歲斂民錢하야 爲河伯娶婦할새 巫行視小家女好者하면 聘取를 如嫁女하고 床席에 令女居上하야 浮之河中이라 豹呼河伯婦曰 是女不好라 煩大巫嫗하노니 爲入報河伯하고 更求好女하라하고 使吏卒抱巫嫗하야 投之河中하고 復以弟子投河中하야 凡三投에 豹曰 是皆不能白하니 煩三老入白之하라하고 復投三老하다 良久에 豹曰 欲使廷掾與豪長者로 趣(促)之하노라한대 皆叩頭流血이라 吏民大驚하니 自此로 不敢復言하니라어시늘 臣進西門豹
하고
君之子無傅
어늘 臣進屈侯鮒
注+[釋義]傅는 相也라 屈은 姓也요 名은 鮒라하니
克曰 魏成
은 食祿千鍾
注+[頭註]量名이라 釜十爲鍾이니 六斛四斗也라 十斗爲斛이요 釜는 六斗四升이라에 什
에 九
는 在外
하고 什
에 一
은 在內
라
是以
로 東得卜子夏, 田子方, 段干木
하니 此三人者
는 君皆師之
하시고 子所進五人
은 君皆臣之
하시니 子
得與魏成比也
리오
○ 吳起者
는 衛人
注+[頭註]衛는 姬姓이니 侯爵이라 武王同母弟〈封〉이 爲成王大司寇하야 食采於康이라 故로 成王이 封康叔於衛러니 傳四十二世하야 爲秦所廢하니라이라
仕於魯러니 齊人이 伐魯어늘 魯人이 欲以爲將호되 起取(娶)齊女하여 爲妻라 魯人이 疑之하니
或이 譖之魯侯曰 起始事曾參이라가 母死에 不奔喪이어늘 曾參이 絶之러니
且以魯國區區而有勝敵之名이면 則諸侯圖魯矣리이다한대 起恐得罪하야 聞魏文侯賢하고 乃往歸之하다
文侯問諸李克
한대 克曰 起
는 貪而好色
注+[釋義]慈湖王氏曰 索隱曰 李克言吳起貪이라하나 下文云 魏文侯知起廉平이라하고 又公叔之僕이 稱起節廉하니 豈前貪而後廉耶아 起家本千金이러니 破産求仕하니 今言貪은 非實貪也요 貪榮名耳니 母死不歸하고 殺妻求將이 是也라이나 然
이나 用兵
은 司馬
注+[釋義]田完之裔니 先爲齊大司馬라 故稱司馬穰苴라 所著書를 名司馬法이라라도 弗能過也
리이다
起之爲將에 與士卒最下者로 同衣食하며 臥不設席하고 行不騎乘하며 親裹贏糧하야 與士卒로 分勞苦러라
人曰 子卒也어늘 而將軍이 自吮其疽하니 何哭爲오 母曰 往年에 吳公이 吮其父하니 其父戰不旋踵하야 遂死於敵이러니
殺妻求將은 起未必是貪官爵이니 後便求爲將은 只緣起學得兵法精이라 便被他使作하야 求逞其技能이라
以此知人有知能
이 固善
이나 除是有技能後
에 能制得他住
注+[頭註]言能制技能하야 不爲所動이라하야 而不爲技能所使者尤善
이라
人言樂羊伐中山
할새 對使者
하야 食其子
注+[頭註]魏文侯遣樂羊으로 攻中山하니 時羊子在中山이라 中山君이 烹其子而遺之羹한대 羊啜之하고 攻拔中山하니라한대 文侯賞其功而疑其心
하고 易牙事齊威公
할새 公盡嘗天下異味
로되 獨未嘗人
이라
樂羊之食其子와 易牙之殺其子와 吳起之殺其妻가 皆是於其所厚者薄이라
凡人於所厚者厚之면 則人亦厚之하고 於所厚者薄之면 則人亦薄之하나니 是其初本欲求君之喜나 終反爲君之疑라
吳起爲人이 貪財好色이러니 及爲將하야는 則與士卒同甘苦하야 臥不設席하고 行不騎乘하니 是起前則貪, 後則廉也라
起非是後能廉也라 前之貪은 是貪財요 後之與士卒同甘苦는 乃是貪功名之心使之니라
今漁人이 以餌致魚하나니 非是肯捨餌也요 意在得魚也니 畢竟是貪心所使니라
처음으로
진晉나라
대부大夫注+[頭註]진晉은 희성姬姓이니 후작侯爵이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모제同母弟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하였는데, 자섭子燮에 이르러 국호를 진晉이라 고쳤다. 마지막 군주인 정공靖公은 바로 숙우叔虞의 39세손이다. 인
위사魏斯注+[頭註]위사魏斯는 본성本姓이 희姬이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공고公高를 필畢에 봉하니, 이에 필畢을 성姓으로 삼았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그의 후손인 필만畢萬을 위魏에 봉하니, 국호를 따라 위씨魏氏라 칭하였다. 6세손인 위서魏舒에 이르러 진晉나라 정경正卿이 되었고 3대에 위사魏斯에 이르렀다.‧
조적趙籍注+[頭註]조적趙籍은 본래 영성嬴姓이니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조보造父를 조성趙城에 봉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씨趙氏가 되었다. 25세손인 조돈趙盾에 이르러 비로소 진晉나라 정경正卿이 되었고 또 6대에 조적趙籍에 이르렀다.‧
한건韓虔注+[頭註]한건韓虔은 희성姬姓이니, 진晉나라가 무자武子를 한원韓原에 봉하였는데, 헌자獻子에 이르러 비로소 봉지封地를 따라 성姓으로 삼았다. 2대를 전하여 한궐韓厥에 이르러 진晉나라 정경正卿이 되었고 또 3대에 한건韓虔에 이르렀다. 을 명하여
제후諸侯로 삼았다.
注+[原註]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晉나라에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智氏와 한씨韓氏‧위씨魏氏‧조씨趙氏가 있었으니, 이를 육경六卿이라 하였다. 그 후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智氏〉 삼가三家가 모두 한씨韓氏‧위씨魏氏‧조씨趙氏에게 멸망당하고 한씨韓氏‧위씨魏氏‧조씨趙氏가 진晉나라 땅을 셋으로 나누어 소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천자天子에게 명을 청하여 제후諸侯가 된 것이다.
“천자天子의 직책은 예禮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예禮는 분分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분分은 명칭名稱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강紀綱이 이것이요, 무엇을 분分이라 이르는가?
군신君臣이 이것이요, 무엇을 명칭名稱이라 이르는가?
사해四海의 넓음과 억조億兆 백성百姓의 많음을 가지고 군주君主 한 사람에게 통제를 받아서 비록 절륜한 힘과 세상의 뛰어난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군주를 위해 분주히 달려가서 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어찌 예禮를 기강으로 삼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천자天子는 삼공三公을 통솔하고 삼공三公은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제후諸侯는 경대부卿大夫를 통제하고 경대부卿大夫는 사서인士庶人을 다스려서,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임하고 천한 사람으로서 귀한 사람을 받들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심복心腹이 수족手足을 운용하고 근본根本이 지엽枝葉을 통제하듯이 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수족手足이 심복心腹을 호위하고 지엽枝葉이 본근本根을 비호하듯이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보호하여 국가가 다스려지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의 직책은 예禮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문왕文王이 《주역周易》을 서술할 때에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첫머리로 삼았는데, 공자孔子가 말씀을 달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정해지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진열되니 귀貴와 천賤이 자리가 정해졌다.” 하셨으니, 군신君臣의 지위는 하늘과 땅이 뒤바뀔 수 없음과 같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춘추春秋》에 제후諸侯를 억제하고 주周나라 왕실을 높여서 천자국天子國의 사람은 비록 미천하나 제후諸侯의 위에 서열하였으니, 이로써 성인聖人(孔子)이 군신君臣의 사이에 있어 일찍이 권권惓惓하지 않음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걸桀‧주紂의 포악함과 탕湯‧무武의 인仁으로 사람들이 귀의하고 하늘이 명命을 내림이 있지 않으면 군신간君臣間의 분수는 마땅히 절개를 지켜 죽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禮는 분分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예禮는
귀천貴賤을 분별하고
친소親疎를 서열하고 온갖 물건을 재단하고 여러 가지 일을 제재하니, 명칭이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기물이 아니면
注+[頭註]명名은 작호爵號이고, 기器는 수레와 의복이다. 나타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명칭으로써 명명하고 기물로써 구별하니, 이렇게 한 뒤에 상하上下가 찬란하게 차례가 있게 되니, 이것이 예禮의 큰 법이다.
명칭과 기물이 이미 없어지면 예禮가 어떻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위衛나라에 큰 공이 있었는데 고을을 사양하고 제후가 사용하는
반영繁纓을 요청하자,
注+[釋義]繁은 말 갈기 위의 장식이고, 영纓은 말 가슴 앞의 장식이다. [頭註]繁은 반鞶과 같으니 지금 말의 큰 띠이고, 영纓은 가죽을 깎아 만드니 제후諸侯가 사용하는 복식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남에게 빌려줄 수가 없으니, 군주가 맡은 것이니 〈명칭과 기물을 주는 것은 정권을 주는 것과 같다.〉 정사가 망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한다.” 하였으며,
위衛나라 군주가 공자孔子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하려 하자, 공자孔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시어 말씀하기를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手足을 둘 곳이 없다.” 하였다.
반영繁纓은 작은 물건인데도 공자孔子가 그에게 주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은 하찮은 일인데도 공자孔子가 이것을 우선하신 것은 진실로 명칭과 기물이 이미 혼란하면 상하上下가 서로 보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分은 명칭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아,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덕德을 잃음에 주周나라 도道(정치)가 날로 쇠하였다.
기강紀綱이 흩어지고 무너져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하여 제후諸侯가 제멋대로 정벌征伐하고 대부大夫들이 정사를 천단擅斷하여 예禮의 대체大體가 10에 7, 8이 없어졌으나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제사가 아직도 면면히 서로 이어진 것은 주周나라 자손들이 아직도 그 명칭名稱과 분分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옛날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왕실에 큰 공이 있고서
양왕襄王에게
수隧를 내려줄 것을 청하자,
注+[頭註]수隧는 무덤으로 통하는 길이니, 땅을 파 길을 내는 것으로 천자天子의 장례이며, 제후諸侯는 관棺을 매달아 하관下棺한다. 양왕襄王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왕장王章(天子의
예법禮法)이니,
注+[頭註]장章은 표시하는 것이니,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물건이 다름을 표시하여 밝히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덕德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하에 아직 주周나라의 덕德을 대신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은데 진晉나라가 천자天子에게 견주고자 하였으니, 이는 두 왕王이 있는 것이다. 덕德을 대신한 자가 있지 않은데 두
왕王(天子)이 있는 것은 또한 숙부께서도 싫어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다면 숙부는 영토를 소유한 제후인데 수隧를 또 어찌하여 청하는가?” 하니, 문공文公이 이에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주周나라의 영토를 가지고 말하면 조曹나라와 등滕나라보다 크지 않았고, 주周나라의 백성을 가지고 말하면 주邾나라와 거莒나라보다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천하의 종주宗主가 되어서 비록 진晉‧초楚‧제齊‧진秦의 강함으로도 감히 침공을 가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다만 명칭名稱과 분分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계씨季氏가
注+[頭註]계씨季氏는 노魯나라 대부大夫이니, 대대로 국정國政을 잡아 계평자季平子(季孫意如)가 소공昭公을 축출하고 계강자季康子(季孫肥)가 애공哀公을 축출하였으나 종신토록 신하로서 북면北面하여 감히 노魯나라를 찬탈하지 못하였다. 맹손孟孫‧중손仲孫‧계손季孫은 모두 환공桓公의 아들이니, 이를 삼환三桓이라 한다. 노魯나라에 있어서와
전상田常이
注+[頭註]전상田常은 바로 진항陳恒이니, 온공溫公이 국휘國諱를 피하여 항恒을 고쳐 상常이라 하였다. 진씨陳氏를 전씨田氏라 칭하였으니, 뒤의 안왕安王 11년(경인 B.C.391) 전화田和 주註에 보인다. 제齊나라에 있어서와
백공白公이
注+[頭註]뒤의 2권에 보인다. 백白은 초楚나라 고을이니 초楚나라가 참람하여 왕王이라고 칭하자 읍재邑宰들이 모두 참람하여 공公이라고 칭하였으니, 승勝은 그 이름인 바, 초楚나라 태자太子 건建의 아들이다. 초楚나라에 있어서와
지백智伯이
注+[頭註]智伯이 진晉나라 대부大夫 중에 가장 강하여 진晉나라 출공出公을 공격하니, 출공出公이 도중에 죽었다. 지백智伯이 진晉나라를 겸병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하지 못하여 마침내 애공哀公 교驕를 받들어 세웠다. 진晉나라에 있어서는 그 세력이 모두 충분히 군주를 쫓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끝내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은 어찌 그 힘이 부족하고 마음이 차마 하지 못해서였겠는가.
이것은 바로 명칭名稱을 범하고 분分을 범하여 천하天下가 함께 토벌討伐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지금 진晉나라 대부大夫가 그 군주를 업신여기고 무시하여 진晉나라를 쪼개어 차지하였는데, 천자天子가 이미 토벌하지 못하고 또 은총으로 품계品階를 높여서 제후에 나열하게 하였으니, 이는 구구한 명칭名稱과 분分마저도 다시 지키지 못하여 함께 버린 것이니, 선왕先王의 예禮가 이때에 다 없어졌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주周나라 왕실은
미약微弱하고
삼진三晉(
한韓‧
위魏‧
조趙)은
注+[頭註]위魏‧조趙‧한韓 삼가三家가 함께 진晉나라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삼진三晉이라 한 것이다. 강성强盛하였으니, 〈
천자天子가〉 비록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이는 크게 옳지 않다.
삼진三晉이 비록 강성하나 만일 천하의 토벌을 개의치 않고
예의禮義를 침범하였다면
천자天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을 것이요,
천자天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다면
패역悖逆의
신하臣下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만일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과
注+[頭註]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이름이 소백小白이고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이름이 중이重耳이니, 모두 제후諸侯의 패자霸者이다. 같은 군주가 있다면 반드시
예의禮義를 받들어 정벌할 것이다.
이제 천자天子에게 청하여 천자天子가 허락하였으니, 이는 천자天子의 명령을 받고서 제후諸侯가 된 것이니, 누가 그들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진三晉이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른 것은 삼진三晉이 예禮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천자天子가 스스로 파괴한 것이다.”
처음에
조간자趙簡子(趙鞅)가
윤탁尹鐸으로 하여금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자,
윤탁尹鐸이 청하기를 “
견사繭絲를 하오리까, 아니면
보장保障을 하오리까?”
注+[原註]견사繭絲는 부세賦稅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보장保障은 울타리(보호 장벽)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윤탁尹鐸의 뜻이 부세賦稅에 있지 않고 울타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진양晉陽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니,
간자簡子가 말하기를 “
보장保障을 하라.” 하였으므로
윤탁尹鐸이 그 호구수를 줄였다.
注+[釋義]손기호수損其戶數는 호구수戶口數를 감소減少함을 이르니, 이렇게 하면 세금이 가벼워져서 백성들의 힘이 펴진다.
간자簡子가 아들
무휼無恤에게 이르기를 “
진晉나라에
난難이 있거든 너는
윤탁尹鐸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注+[釋義]소少는 가볍게(하찮게) 여김이니, 중하게(훌륭하게) 여김을 다多라 하고 가볍게 여김을 소少라 한다. 진양晉陽을 멀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그곳을 의귀처로 삼아라.” 하였다.
지선자智宣子(智申)가 죽고 지양자智襄子(智瑤)가 정사를 하게 되자, 지양자智襄子가 한강자韓康子(韓虎)에게 땅을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니, 강자康子가 만 가호의 고을을 주었다.
지백智伯(智襄子)이 기뻐하여 또다시 위환자魏桓子(魏駒)에게 땅을 요구하자, 환자桓子가 또다시 만 가호의 고을을 주었다.
지백智伯이 또다시
채蔡나라
고랑皐狼의 땅을
注+[釋義]고랑皐狼은 지명이니, 조씨趙氏의 고을에 속하였다. 본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채蔡나라 땅이었으므로 채蔡나라 고랑皐狼이라 한 것이다. 조양자趙襄子(無恤)에게
注+[原註]〈조간자趙簡子가 죽고〉 무휼無恤이 즉위하니, 이가 조양자趙襄子이다. 요구하였으나
양자襄子가 주지 않았다.
지백智伯이 노하여
한씨韓氏‧
위씨魏氏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씨趙氏를 공격하니,
양자襄子가 장차 도성을 나가려 하면서 말하기를 “내 어디로 달아나야 하겠는가?” 하니, 수행하는 자가 말하기를 “
장자長子(지명)가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장자長子는 주周나라 사관史官인 신갑辛甲의 봉지封地이니, 뒤에 조씨趙氏의 고을이 되어 상당上黨에 속하였다.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이곳 냇물을 장漳이라 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장수漳水는 장자長子에서 나온다.’ 하였다.” 가깝고 또
성城이 튼튼하고 완전합니다.” 하였다.
양자襄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성城을 완전히 하고 또 죽음으로써
성城을 지키게 하면 그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하니, 수행하는 자가 말하기를 “
한단邯鄲의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한단邯鄲은 조趙나라 지명이다. 지금 자주현磁州縣이니, 주州의 북쪽 50리 지점에 있는 바, 낙주洛州의 비향현肥鄕縣도 한단邯鄲의 땅이다. 한단산邯鄲山이 동성東城의 아래에 있다.” 창고가 충실합니다.” 하였다.
양자襄子가 말하기를 “백성의 피와 땀을 짜내어 창고를 충실하게 하고 또 이로 인하여 백성들을 죽게 한다면 그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선주先主(簡子)께서 부탁한 바이고 윤탁尹鐸이 너그러운 정사를 베푼 곳이니, 백성들이 반드시 화목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진양晉陽으로 도망하였다.
삼가三家(韓,
위魏,
지智)가 온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진양성晉陽城을 포위하고 물을 대니,
성城이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이 세
판版뿐이고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침浸은 마땅히 몰沒이 되어야 한다. 너비(높이)가 두 자인 것을 판版이라 한다.” 부엌이 오랫동안 물에 잠겨 개구리가 새끼를 쳤으나 백성들은 배반할 뜻이 없었다.
조양자趙襄子가 장맹담張孟談을 시켜 몰래 나가 이자二子(魏桓子와 한강자韓康子)를 만나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하였으니, 지금 지백智伯이 한씨韓氏와 위씨魏氏의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조씨趙氏를 공격하니, 조씨趙氏가 망하고 나면 한씨韓氏와 위씨魏氏가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자二子가 마침내 은밀히 장맹담張孟談과 약속하고는 날짜를 기약하고 장맹담張孟談을 보내었다.
조양자趙襄子가 밤에 사람을 시켜 제방을 지키는 관리를 죽이고 물을 터서 지백智伯의 군중軍中에 대니, 지백智伯의 군사들이 물에서 헤어나오느라 혼란하였다.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는 좌우에서 공격하고 조양자趙襄子는 병졸을 거느리고 그 앞을 막아 지백智伯의 무리(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마침내 지백智伯을 죽이고 지씨智氏의 종족을 모두 멸하였다.
“지백智伯이 망한 것은 재주가 덕德을 이겼기 때문이다.
재주와 덕德은 다른데 세속 사람들이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어질다 하니, 이것이 사람을 잃는 까닭이다.
총명聰明하고 강의彊毅함을 재주라 하고, 정직正直하고 중화中和함을 덕德이라 하니, 재주는 덕德의 재료요 덕德은 재주의 우두머리이다.
이 때문에 재주와 덕德이 겸하여 온전한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재주와 덕德이 겸하여 없는 것을 우인愚人이라 하고 덕德이 재주를 이긴 것을 군자君子라 하고 재주가 덕德을 이긴 것을 소인小人이라 이르니, 무릇 사람을 취하는 방법은 만일 성인聖人과 군자君子를 얻어 더불지 못할진댄 소인小人을 얻기보다는 우인愚人을 얻는 것이 낫다.
군자君子는 재주를 간직하여 선善을 하고 소인小人은 재주를 간직하여 악惡을 하니, 재주를 간직하여 선善을 하는 자는 선善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고 재주를 간직하여 악惡을 하는 자는 악惡함이 또한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어리석은 자는 비록 불선不善을 하고자 하나 지혜가 주밀하지 못하고 힘이 감당해 내지 못하니, 이는 비유하면 어린 강아지가 사람을 치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러나 소인小人은 지혜가 충분히 그 간악함을 이룰 수 있고 용맹이 충분히 그 포악함을 결행할 수 있으니, 이는 비유하면 범이 날개를 단 것과 같으니 그 해로움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나라의 난신亂臣과 집안의 패자敗子가 재주는 넉넉하고 덕德은 부족하여 전복顚覆함에 이른 자가 많았으니, 어찌 다만 지백智伯뿐이겠는가.”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의 머리에 옻칠하여
음기飮器를 만들었다.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대완전大宛傳〉에 이르기를 「匈奴가 월지月氏를 쳐부수고 그 왕의 머리로 음기飮器를 만들었다.」 하였는데, 위소韋昭는 이르기를 「飮器는 비합椑榼(둥근 합)이다.」 하였고, 진작晉灼은 이르기를 「飮器는 호자虎子의 등속等屬이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비합椑榼은 술을 담는 데 사용하는 기물이고 마시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진작晉灼이 수편기溲便器(소변기)라고 말한 것은 《한비자韓非子》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모두 양자襄子가 지백智伯의 머리에 옻을 칠하여 오줌그릇을 만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흉노전匈奴傳〉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술을 마시는 그릇이다.’ 하였으니, 이를 귀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또 죽은 자의 해골은 흉하고 더러우며, 또 악한 사람의 두개골이 어찌 조두俎豆에 합당한 것이겠는가. 진작晉灼이 수편기溲便器라고 풀이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옳은 듯하다.”
지백智伯의 신하
예양豫讓이
지백智伯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해서, 마침내 거짓으로
형인刑人처럼 위장하여
注+[頭註]형인刑人은 《주례周禮》 〈대사구大司寇〉에 “모든 만민萬民으로서 죄과罪過가 있으나 법에 걸리지 않은 자를 사공司空에서 일을 시킨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백공百工의 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비수匕首(단검)를
注+[釋義]비匕는 음音이 비이다. 《설원說苑》에 “1척 8촌의 검劍이니, 그 머리 부분이 숟가락[匕]과 유사하므로 이름을 비수匕首라 했다.” 하였다. 지니고
양자襄子의 궁중에 들어가 측간에 흙을 바르고 있었다.
양자襄子가 측간으로 가다가 마음이 섬뜩하므로 수색하여 예양豫讓을 잡았다.
좌우左右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니, 양자襄子가 말하기를 “의사義士이다.
내가 삼가 그를 피할 뿐이다.” 하고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예양豫讓이 또다시 몸에 옻을 칠하여 문둥이처럼 꾸미고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기를 “옻에는 독이 있어서 사람이 옻을 가까이하면 살이 헐고 종기가 나서 마치 문둥이와 같다. 그러므로 예양豫讓이 자기 몸에 옻칠을 하여 그 모습을 바꾼 것이다.” 하였다. 라癩는 나쁜 병이다. 달군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서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기를 “《전국책戰國策》에 이르기를 ‘예양豫讓이 걸식乞食을 하였는데, 그 아내가 〈보고〉 말하기를 「모습은 우리 남편과 같지 않으나 어쩌면 그리도 음성音聲이 우리 남편과 같은가?」 하자, 예양豫讓이 마침내 불에 달군 숯을 삼켜 그 음성을 바꾸었다.’ 했다.” 하였다. 아啞는 벙어리이니 아瘂와 통한다. 시장을 다니며 구걸하니,
그의 아내는 몰라보았으나 그의 친구가 알아보고는 그를 위하여 울며 말하기를 “자네의 높은 재주를 가지고 신하가 되어
조맹趙孟을 섬기면
注+[頭註]조돈趙盾의 자字가 맹孟이었기 때문에 그 후 후세의 자손들이 모두 조맹趙孟이라 하였다. 반드시 가까이하고 총애함을 얻을 것이니, 자네가 그때에 비로소 하고 싶은 바(복수)를 하는 것이 도리어 쉽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마침내 스스로 고생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예양豫讓이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고
注+[釋義]위질委質은 그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반드시 군주를 위하여 충절忠節을 다해 죽을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 또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무릇 내가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나 이것을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에 남의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양자襄子가 외출할 때에 예양豫讓이 다리 아래에 엎드려 있었는데, 양자襄子가 다리에 이르자 말이 놀라므로 수색하여 예양豫讓을 잡아서 마침내 죽였다.
“예양豫讓이 반드시 양자襄子에게 보복하려 하여 다섯 번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그대가 일찍이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를 섬겼었는데 지백智伯이 그를 멸망시켰으나 그대는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신하가 되어 지백智伯을 섬기다가 지금 지백智伯이 죽자 그대가 지백智伯을 위하여 원수를 갚기를 이처럼 심하게 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예양豫讓이 대답하기를 ‘중행씨中行氏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으므로 나도 그를 보통 사람으로 섬긴 것이요, 지백智伯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였으므로 나도 국사國士로서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똑같은 예양豫讓인데 예전에는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겨서 행실이 개 돼지와 같다가 얼마 후에는 절개를 높이고 충성을 바쳐서 열사烈士의 행실을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주人主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인군人君된 자가 예禮로써 신하를 대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씨胡氏(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군자君子가 명예를 위하여 선善을 행하면 그 선善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하고, 인신人臣이 이익과 녹봉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면 그 충성이 반드시 극진하지 못하다.
지백智伯이 후손이 없어서 의지할 만한 기세가 없고, 구할 만한 부귀가 없고, 부탁할 만한 후손이 없었는데, 예양豫讓이 국사國士로 대우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을 바쳐 원수를 갚으려 하여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러 더욱 돈독히 하였으니, 이는 위한 바가 없이 한 자이다.
그러므로 〈조양자趙襄子가〉 ‘진실로 의사義士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다만 몸을 바쳐 남(군주)을 섬기는 법法이 될 뿐만 아니라, 위한 바가 없이 선善을 행함은 비록 대학大學의 도道라 하더라도 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양자趙襄子가 이와 같음을 알면서도 끝내 예양豫讓을 죽였으니, 어떻게 인신人臣을 권면할 수 있겠는가.”
위사魏斯는 환자桓子의 손자이니, 이가 문후文侯이다.
문후文侯가
복자하卜子夏와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삼고 매번
단간목段干木의
注+[頭註]노자老子의 아들 종宗이 위魏나라 장수가 되어서 단간읍段干邑에 봉해지니, 고을의 이름을 따라서 단간段干을 성姓으로 삼았다. 집을 지날 때에 반드시 경례하니,
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 ‘시동尸童에게 반드시 경례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조금 고개를 숙여서 예禮한다.’ 하였다. 《운회韻會》의 주註에 ‘수레를 타고서 고개를 숙여 공경의 뜻을 나타냄을 식式이라 하니, 뜻은 식軾에 기댐을 취한 것이다. 식軾은 수레 앞에 가로댄 판자이니, 공경할 대상이 있으면 여기에 몸을 구부려 의지한다.’ 하였다. 공씨孔氏(孔穎達)는 말하기를 ‘옛날에 수레의 상자는 길이가 4척 4촌이니, 이것을 3등분 하여 앞이 1할이고 뒤가 2할이다. 한 나무를 가로대어 아래로 수레의 상牀과 3척 3촌 떨어져 있는 것을 식軾이라 이르고, 식軾 위의 2척 2촌이 되는 곳에 한 나무를 가로댄 것을 교較이라 이른다. 서서 수레를 탈 경우 평상시에는 교較에 기대는데, 만약 마땅히 공경해야 할 대상이면 손을 내려 식軾 밑에 숨겨 머리가 숙여지게 한다.’ 하였다.”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注+[釋義]옛날 제왕帝王들은 모두 스승이 있었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로 임금 중에 스승을 둔 자는 오직 문후文侯뿐이다.
문후文侯가 여러 신하들과 술을 마셔 즐기는데 하늘에서 비가 왔다.
문후文侯가 수레에 멍에를 매도록 명하여 장차 들로 가려 하자,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 술을 마셔 즐겁고 또 비가 오는데, 군주께서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하였다.
문후文侯는 말하기를 “내
우인虞人과
注+[頭註]우인虞人은 원유苑囿를 지키는 관리이다. 우虞는 헤아림이니, 산림山林의 크고 작음과 여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헤아려 아는 것이다. 사냥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비록 즐거우나 어찌 한 번 모이기로 한 약속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注+[頭註]회기會期는 옛날에 그(虞人)와 더불어 기약하였으니 이제 가서 만나는 것이요, 파지罷之는 비 때문에 사냥을 파함을 가서 고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가서 몸소 직접 약속을 파하였다.
문후文侯가
악양樂羊으로 하여금
중산中山을 정벌하게 하여
注+[釋義]중산中山은 적狄의 도읍都邑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지금 중산부中山府가 이곳이다.” 하였다. 이기고서 그 아들
격擊을 봉하였다.
문후文侯가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나는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모두들 대답하기를 “어진 군주입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