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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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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炎興元年이라 〈魏景元四年이요 吳永安六年이라
염흥炎興 원년元年(계미 263) - 나라 경원景元 4년이고, 나라 영안永安 6년이다.
○ 是歲 漢亡하니라
○ 이해에 나라(蜀漢)가 망하였다. -
魏欲大擧兵하야 入寇漢中할새 遣鄧艾하야 督三萬餘人하야 自狄道 甘松注+[頭註]地名이니 在諸羌中이라, 沓中하야 以連綴姜維하고 諸葛緖 督三萬餘人하야 自祁山으로 趣武街橋頭하야 絶維歸路하고 鍾會 統十萬餘衆하야 分從斜谷, 駱谷, 子午谷하야 趣漢中하고 以廷尉衛瓘으로 持節하야 監艾, 會軍事하다
가을에 나라가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한중漢中으로 쳐들어가고자 할 적에 등애鄧艾를 보내어 3만여 명을 독려하여 적도狄道로부터 감송甘松注+[頭註]감송甘松지명地名이니, 제강諸羌 안에 있다. 답중沓中으로 달려가 강유姜維를 옭아매게 하고, 제갈서諸葛緖는 3만여 명을 독려하여 기산祁山으로부터 무가武街교두橋頭로 달려가 강유姜維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고, 종회鍾會는 10여만 명의 군사를 통솔하여 나누어서 사곡斜谷낙곡駱谷자오곡子午谷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달려가게 하고, 정위廷尉위관衛瓘에게 을 잡고 등애鄧艾종회鍾會군사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 或以問劉寔曰 鍾, 鄧 其平蜀乎 寔曰 破蜀 必矣어니와 而皆不還하리라
○ 혹자가 유식劉寔에게 묻기를 “종회鍾會등애鄧艾을 평정하겠는가?” 하니, 유식劉寔이 말하기를 “은 틀림없이 격파하겠지만 두 사람 모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問其故한대 笑而不答이러라
이 그 이유를 묻자, 유식劉寔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 八月 魏軍 發洛陽하야 長驅而前注+[釋義]長驅 謂無禦之者 〈顔師古曰〉 猶言直進也하다
○ 8월에 나라 군대가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면서 전진하였다.注+[釋義]장구長驅는 막는 자가 없음을 이르니,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직진直進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維聞鍾會諸軍 已寇漢中하고 引兵하야 與廖化, 張翼, 董厥等으로 合兵守劍閣하야 以拒會하다
강유姜維종회鍾會의 여러 군대가 이미 한중漢中을 침략했다는 말을 듣고는 병력을 인솔하여 요화廖化장익張翼동궐董厥 등과 함께 병력을 합하여 검각劍閣을 지켜 종회鍾會를 막았다.
○ 姜維列營守劍閣하니 會攻之不能克하고 粮道險遠하야 欲引還이러니 鄧艾上言호되 漢兵 摧折하니 宜遂乘之
강유姜維가 진영을 나열하여 검각劍閣을 지키니, 종회鍾會가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군량을 수송하는 길도 험하고 멀어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려 하였는데, 등애鄧艾상언上言하기를 “나라 군대가 이미 꺾였으니, 마땅히 이때를 틈타 공격해야 합니다.
若從陰平由邪徑하야 經漢德陽亭하야 趣涪하야 出劍閣西百里하면 去成都三百餘里
만약 음평陰平에서 출발하여 샛길을 따라 나라 덕양정德陽亭을 지나 부현涪縣으로 달려가서 검각劍閣 서쪽으로 100리를 진출하면 성도成都와의 거리가 300여 리입니다.
奇兵 衝其腹心하야 出其不意하면 劍閣之守 必還赴涪하리니 則會方軌而進注+[釋義] 車轍也 方軌 言竝轍而進也 爾雅云 方舟者 倂兩(舟)[船]이라하니 則此軌亦兩也이요 劍閣之軍 不還이면 則應涪之兵 寡矣라하고
기병奇兵이 그 중심부로 쳐들어가서 예상치 못한 데로 나오면 검각劍閣의 수비 군대가 반드시 진로를 바꾸어 부현涪縣으로 달려갈 것이니, 이렇게 되면 종회鍾會의 군대는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전진注+[釋義]는 수레바퀴 자국이니, 방궤方軌는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전진함을 말한 것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방주方舟는 나란히 가는 두 척의 배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여기의 방궤方軌도 역시 둘인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검각劍閣의 군대가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부현涪縣에서 대응하는 병력이 적을 것입니다.” 하였다.
遂自陰平으로 行無人之地七百餘里하야 鑿山通道하고 造作橋閣하니 山高谷深하야 至爲艱險하고 又糧運將匱하야 於危殆注+[通鑑要解] 際也 古濱字 近也
마침내 음평陰平에서 출발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700여 리를 행군하여 산을 뚫어 길을 내고 교각橋閣(棧道, 각도閣道)을 만드니, 산이 높고 골짝이 깊어서 지극히 어렵고 험하였으며, 또 운반해 놓은 군량이 떨어져 가서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注+[通鑑要解]은 가장자리이다. 고자古字이니 부근附近이다.
艾以氈自裹하야 轉而下한대 將士皆攀木緣崖하고 魚貫而進注+[釋義]謂若魚貫之連接而進也하다
등애鄧艾가 털방석으로 몸을 감싸고 굴러 내려가니, 장병들이 모두 나무를 부여잡고 벼랑을 따라 물고기 두름처럼 전진하였다.注+[釋義]어관이진魚貫而進은 물고기 두름처럼 연이어서 나아감을 이른다.
先登至江油注+[釋義]本廣漢郡剛氐道地 三國 魏得其地하야 置江油郡이라 〈西魏立龍州하니〉 今龍州 有江油縣이라하니 蜀守將馬邈이라
선발부대가 올라가 강유江油注+[釋義]강유江油는 본래 광한군廣漢郡 강저도剛氐道의 땅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나라가 이 땅을 점령하여 강유군江油郡을 설치하였다. 서위西魏용주龍州를 세우니, 지금 용주龍州강유현江油縣이 있다.에 이르니, 의 수비 장수인 마막馬邈이 항복하였다.
諸葛瞻 督諸軍하야 拒艾러니 艾大破之하고 斬瞻하다
제갈첨諸葛瞻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등애鄧艾를 막았는데, 등애鄧艾가 크게 격파하고 제갈첨諸葛瞻을 목 베었다.
○ 漢人 不意魏兵卒至하야 不爲城守調度注+[釋義]賦調用度也러니 聞艾已入平土하고 百姓 擾擾하야 皆迸山野注+[頭註] 散走也하니 不可禁制
나라 사람들은 나라 군대가 갑자기 이를 것을 생각지 못하여 을 지키고 조도調度注+[釋義]조도調度용도用度에 맞게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 하지 않았는데, 등애鄧艾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백성들이 소요하여 모두 산야山野로 달아나니,注+[頭註]은 흩어져 달아나는 것이다. 금지하고 제재할 수가 없었다.
譙周(詣)[請]降이어늘 乃遣使奉璽綬하고 詣艾降하니
초주譙周가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청하자, 마침내 사자를 보내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등애鄧艾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하였다.
北地王諶注+[頭註] 後主子也 怒曰 若理窮力屈하야 禍敗將及인댄 便當父子君臣 背城一戰하야 同死社稷하야 以見先帝可也어늘 奈何降乎잇가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注+[頭註]유심劉諶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이다. 이 노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치가 궁하고 힘이 다해서 화패禍敗가 장차 미치게 되었다면 곧 부자父子군신君臣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서 함께 사직社稷을 위해 죽어 지하에서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항복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帝不聽한대 哭於昭烈之廟하고 先殺妻子而後 自殺하다
황제가 듣지 않자, 유심劉諶소열황제昭烈皇帝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처자妻子를 먼저 죽인 뒤에 자살하였다.
艾至成都北하니 帝率太子諸王及群臣하고 面縛注+[釋義]縛手於背하고 而面向前也輿櫬注+[原註]輿 共擧也 空棺也 棺輿從之者 皆示其君將受死也하고 詣軍門降하다
등애鄧艾성도成都의 북쪽에 이르니, 황제가 태자와 제왕諸王 및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만 쳐든 채注+[釋義]면박面縛은 두 손은 등 뒤로 돌려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하는 것이다. 관을 함께 들고注+[原註]輿는 함께 드는 것이고 은 빈 관이니, 빈 관을 들고 따르는 것은 그 군주가 장차 죽임을 당할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 군문軍門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姜維得帝勅命하고 乃與廖化, 張翼. 董厥等으로 同詣會降하다
강유姜維가 황제의 칙명을 얻고 요화廖化장익張翼동궐董厥 등과 함께 종회鍾會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新增]尹氏曰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姜維身都注+[頭註] 居也將相하야 喪師蹙境하고 黃皓寵冠一時하야 殄民誤國이라가 漢祚顚覆 偸生苟免하고 至於死節之臣하야는 乃在傅僉注+[頭註]守關口하야 格鬪而死하니라, 諸葛瞻父子注+[頭註]瞻父亮이라及北地王諶而已
강유姜維는 장수와 정승을 도맡았으면서注+[頭註]는 거함이다. 군대를 잃고 국경을 위축시켰고, 황호黃皓는 한때 은총이 으뜸이었으면서 백성들을 해치고 나라를 그르치다가 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욕되이 살기를 꾀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하였으며, 충절忠節에 죽은 신하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부첨傅僉注+[頭註]부첨傅僉양안관陽安關 어귀를 수비하여 육박전을 벌이다가 죽었다. 제갈첨諸葛瞻 부자父子注+[頭註]제갈첨諸葛瞻의 아버지는 제갈량諸葛亮이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이 있을 뿐이었다.
是時 鄧艾孤軍深入하니 使漢之君臣 能竭力死守 未必遽爾滅亡이어늘
이때에 등애鄧艾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이 침입하였으니, 만일 촉한蜀漢의 군주와 신하가 힘을 다하여 결사적으로 지켰다면 반드시 대번에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帝禪庸才 旣不知國君死社稷之義하고 譙周諸人 又輕以其國予賊하니 其視諶同死社稷之言 與夫哭於昭烈之廟而死之節하면 曾犬彘之不若이라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용렬한 재주라서 이미 국군國君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고, 초주譙周 등 여러 사람들은 또 자기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유심劉諶사직社稷을 위해 함께 죽자는 말과 소열제昭烈帝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죽은 절개에 비하면 일찍이 개돼지만도 못한 것이다.
嗚呼
아!
諶雖已死 其言 至今凜凜猶有生氣
유심劉諶은 비록 이미 죽었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도 늠름하여 오히려 생기가 있다.
禪之有子如此로되 而不能聽用其言하니 可謂上愧乃父하고 下愧乃子矣
유선劉禪은 이처럼 훌륭한 자식을 두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자기 아버지에게 부끄럽고 아래로는 자기 자식에게 부끄럽다고 이를 만하다.
슬프다!”
[史略 史評]愚按 天意不回하야 漢祚傾覆하니 當是之時하야 降賊貪生 如姜維者 非一人이어늘
[史略 사평史評]내(劉剡)가 살펴보건대 하늘의 뜻이 돌아오지 않아서 나라의 국운國運이 기우니, 이때를 당하여 적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탐하기를 강유姜維와 같이 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而諸葛瞻父子 獨能冒犯鋒刃하고 視死如歸하니 雖其資質有過人者 而亦家法之有自也
그런데 제갈첨諸葛瞻 부자父子는 홀로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겼으니, 비록 그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또한 가법家法유래由來한 바가 있는 것이다.
忠武公 可謂有子有孫矣로다
충무공忠武公(諸葛亮)은 훌륭한 아들이 있고 훌륭한 손자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嗚呼
아!
其忠烈之風 至今凜凜猶有生氣하니 彼爲臣不死忠而偸生一時者 視瞻尙 寧無愧乎
제갈첨諸葛瞻제갈상諸葛尙은 비록 죽었으나 그 충렬忠烈유풍流風이 지금까지도 늠름凜凜하여 아직도 생기가 있으니, 저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위해 죽지 않고 구차하게 한때의 목숨을 구걸하여 살기를 꾀한 자들은 제갈첨諸葛瞻제갈상諸葛尙을 볼 때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史略 史評]史斷曰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後主才雖中下 然建興之初 猶能委任賢相하고 抗衡强國하야 今年 하고 明年 屯漢中하고 明年 出散關하고 又明年 攻武都陰平이라
후주後主는 재주가 비록 였으나 건흥建興 초기에는 오히려 어진 정승에게 국정國政을 맡겨 강한 적에게 대항할 수 있어서, 금년에 네 을 정벌하고 명년明年한중漢中에 주둔하고 명년明年산관散關으로 출동하고 또 명년明年무도武都음평陰平을 공격하였다.
是以 國富兵强하야 征伐四克이러니 迨殞星告變 賢相云亡이라
이 때문에 국가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여 정벌함에 사방으로 이겼는데, 별이 떨어져 변고를 알리자 어진 정승이 사망하였다.
於是 姜維産禍하고專權하니 雖無緣崖之寇라도 其能久有國哉
이에 강유姜維화란禍亂을 만들어내고 환관宦官들이 권력을 전횡하니, 비록 벼랑을 타고 올라오는 적이 없다 한들 어찌 오랫동안 나라를 보유할 수 있었겠는가.
緜竹之戰 臣死於君하고 成都之降 子死於父하야 勢窮力蹙 束手就縛而漢亡矣 可悲也夫인저
면죽緜竹의 전투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위하여 죽고 성도成都의 항복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어서, 형세가 곤궁하고 힘이 위축되어 할 수 없이 손을 뒤로 묶고 나아가 항복하자 나라가 망하였으니, 슬퍼할 만하다.”
右漢 昭烈及後皇帝禪 共四十三年이라
이상 나라는 소열제昭烈帝로부터 후황제後皇帝 유선劉禪까지 모두 43년이다.
歷年圖曰
역년도歷年圖》에 말하였다.
昭烈 以敗亡之餘 羈旅漢南이로되 而能屈體英傑하고 要結同志하야 摧沮勍敵하야 因敗爲功하고 顚沛之際 不忘德義하니 美矣
소열昭烈은 패망한 뒤에 한수漢水 남쪽에 나그네로 의탁하고 있었지만 영웅들에게 몸을 굽히고 동지同志들과 결탁해서 강한 적을 꺾고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었으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위급한 때에도 덕과 의리를 잊지 않았으니, 훌륭하다.
劉璋昧弱이어늘 侮而兼之注+[頭註] 兼弱攻昧하며 取亂侮亡이라하니라하야 遂奄有巴蜀하야 君臨一隅
유장劉璋이 어둡고 약하였는데 그를 해치고 겸병하여注+[頭註]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약한 자를 겸병하고 어두운 자를 공격하며, 어지러운 자를 취하고 망하는 자를 상하게 한다.” 하였다. 마침내 파촉巴蜀을 소유해서 한 지방에 군림하였다.
安樂公注+[頭註]魏封漢帝禪하야 爲安樂公이라 材雖下中이나 然委任賢相하야 抗衡中國이러니 及姜黃用事하야는 而面縛爲虜하니 宜矣
안악공安樂公 유선劉禪注+[頭註]나라가 나라 황제 유선劉禪을 봉하여 안악공安樂公으로 삼았다. 은 재주가 비록 이었으나 어진 정승(諸葛亮)에게 위임하여 중국中國과 겨루었는데, 강유姜維황호黃皓용사用事함에 미쳐서는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만 내놓고서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으니, 당연하다.”
○ 漢 二十六帝 合四百六十九年이라
나라는 26에 합하여 469년이다.
魏之攻蜀也 吳人 或謂襄陽張悌曰 司馬氏得政以來 大難 屢作注+[頭註]邵陵厲公芳嘉平元年 王淩叛하고 高貴鄕公髦正元元年 毌丘儉叛하고 甘露二年 諸葛誕叛하니라하야 百姓 未服이어늘 今又勞力遠征하니 敗於不暇
나라가 을 공격할 때에 나라 사람이 혹 양양襄陽 장제張悌에게 이르기를 “사마씨司馬氏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큰 난리가 여러 번 일어나서注+[頭註]소릉여공邵陵厲公 조방曹芳가평嘉平 원년元年(249)에 왕릉王淩이 배반하고,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정원正元 원년元年(254)에 관구검毌丘儉이 배반하고, 감로甘露 2년(257)에 제갈탄諸葛誕이 배반하였다.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데, 이제 또다시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여 멀리 정벌하니 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何以能克이리오 悌曰 不然하다
어떻게 승리하겠는가?” 하니, 장제張悌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曹操雖功蓋中夏 民畏其威而不懷其德 丕, 叡承之하야 刑繁役重이라
조조曹操는 비록 중하中夏를 뒤덮었으나 백성들이 위엄만 두려워하고 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으며, 조비曹丕조예曹叡가 그 뒤를 이어서 형벌이 번거롭고 부역이 무거웠다.
司馬懿父子 除其煩苛而布其平惠하고 爲之謀主而救其疾苦하니
그러나 사마의司馬懿 부자父子는 번거롭고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고 공평함과 은혜를 베풀며, 모주謀主가 되어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원하였다.
淮南 三叛注+[頭註]三叛 卽王淩, 毌丘儉, 諸葛誕擧兵也이나 而腹心不擾하고 曹髦之死 四方不動이라
이 때문에 회남淮南 지방이 세 번 배반하였으나注+[頭註]세 번 배반하였다는 것은 왕릉王淩, 관구검毌丘儉, 제갈탄諸葛誕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복심腹心이 흔들리지 않았고, 조모曹髦가 죽음에 사방이 동요하지 않았다.
任賢使能하야 各盡其心하니 其根本固矣 奸計立矣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려서 각각 그 마음을 다하니, 근본이 견고해지자 간사한 계책이 성립되었다.
今蜀 閹宦專朝注+[頭註]閹宦 黃皓也 國無政令하니 因危而伐이면 殆無不克이라
그런데 이제 은 환관注+[頭註]환관은 황호黃皓이다. 이 조정을 독점하여 나라에 정령政令이 없으니 위태로운 틈을 타서 정벌하면 아마도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아!
彼之得志 我之憂也라한대
저(司馬懿)가 뜻을 얻음이 바로 우리의 걱정이다.” 하였다.
吳人 笑其言이러니 至是乃服하니라
나라 사람들이 그의 말을 비웃었었는데, 이 망한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승복하였다.
○ 鄧艾以書言於晉公昭曰
등애鄧艾가 편지로 진공晉公 사마소司馬昭에게 말하기를
兵有先聲後實하니 今因平蜀之勢하야
“군대는 먼저 소문을 퍼뜨리고 뒤에 실제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以乘吳 吳人 震恐하리니 席卷之時也
이제 을 평정한 형세를 인하여 나라를 정벌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니, 석권席卷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나 大擧之後 將士疲勞하야 不可便用이니
그러나 크게 군대를 일으킨 뒤여서 장병들이 피로하여 곧바로 쓸 수가 없습니다.
且徐緩之하야 留隴右兵二萬人 蜀兵二萬人하야 하야 爲軍農要用하고 竝作舟船하야 預爲順流之事 然後發使하야 告以利害 吳必歸化하리니 可不征而定也리이다
우선 서서히 늦춰 주어서 농우隴右의 병력 2만 명과 지방의 병력 2만 명을 남겨 두어 소금을 굽고 쇠를 주조하는 일을 일으켜 군사와 농사의 요긴한 비용으로 삼고, 아울러 배를 만들어서 강을 따라 내려가 나라를 공격할 일을 미리 준비한 다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해利害로써 타이르면 나라가 반드시 귀화歸化할 것이니,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今宜厚劉禪하야 以致孫休注+[頭註]孫休 吳主姓名이라 封禪爲扶風王하야 以顯歸命之寵하노이다
지금 유선劉禪을 후대해서 손휴孫休注+[頭註]손휴孫休오주吳主성명姓名이다.를 오게 해야 할 것이니, 유선劉禪을 봉하여 부풍왕扶風王으로 삼아서 명령에 귀순한 은총을 드러내소서.” 하였다.
昭使監軍衛瓘으로 喩艾호되 事當須報 不宜輒行이니라 艾重言注+[頭註] 猶難也라하니
사마소司馬昭감군監軍 위관衛瓘을 시켜 등애鄧艾를 타이르기를 “이 일은 반드시 회답을 기다려야 할 것이요, 곧바로 행해서는 안 된다.” 하니, 등애鄧艾가 신중히注+[頭註](신중함)과 같다.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부大夫가 국경을 나가서 사직社稷을 평안히 하고 국가國家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하였습니다.
今吳未賓하야 勢與蜀連하니 不可拘常以失事機라한대
지금 나라가 복종하지 아니하여 형세가 과 연결되니, 상규常規에 구애되어 사기事機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鍾會內有異志하야 乃與瓘으로 密白艾有反狀하다
종회鍾會가 마음속에 딴 뜻이 있어서 마침내 등애鄧艾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있다고 위관衛瓘과 함께 은밀히 보고하였다.
역주
역주1 : 추
역주2 : 빈
역주3 : 퇴
역주4 瞻尙雖死 : 諸葛尙은 諸葛瞻의 아들이다. 諸葛瞻은 字가 思遠으로, 緜竹의 싸움에서 鄧艾의 使者를 베어 죽이고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 37세였다. 또 諸葛尙은 “父子가 나라의 후중한 은혜를 받고서 능히 黃皓를 베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탄식하고, 魏나라 군사에게 달려들어서 죽었다.
역주5 征四郡 : 四郡은 益州, 永昌, 牂柯, 越巂이다.
역주6 : 시
역주7 煮鹽興冶 : 四川省에는 鹽井이 있어 대량으로 소금을 만들 수 있고, 또 銀‧銅‧鐵이 나와 쇠를 주조할 수 있었다.
역주8 春秋之義……專之可也 : 이 내용은 《春秋公羊傳》 莊公 19년조에 보인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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