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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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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四年이라
인수仁壽 4년(갑자 604)
正月 帝崩於大寶殿注+[附註]太子廣 弑帝于大寶殿而自立하야 遂殺故太子勇하니라 見忤於帝하니 獨孤后數稱廣賢하고 大臣用事者 廣皆傾心與交하야 無不稱其仁孝하니 遂決意廢立하다 獨孤皇后崩 帝以陳高祖女 爲夫人하야 有寵이러니 及帝寢疾 太子慮有不諱하야 爲書問楊素한대 素條錄事狀以報할새 宮人 誤送帝하니 帝大恚하니라 陳夫人 旦出라가 爲太子所逼이러니 拒之得免이라 上怪其神色하야 問故한대 夫人泫然曰 太子無禮하니이다 上恚抵床曰 畜生 何足付大事리오 獨孤誤我로다 兵部尙書柳述 黃門侍郞元巖 侍疾이러니 乃呼之曰 召我兒하라 述等 將呼太子한대 上曰 勇也니라 述等 爲勅書한대 楊素聞之하고 以白太子하고 矯詔하야 執述等繫獄하고 追東宮兵士帖하야 上臺宿衛하고 〈門〉禁出入하며 盡遣後宮就別室이러니 俄而上崩하다 陳夫人 聞變하고 戰慄失色이라 太子封小金合하야 遣賜夫人하니 夫人以爲鴆毒하야 懼甚發之하니 乃同心結也 夫人 恚而郤坐하야 不肯致謝한대 宮人 共逼拜之러니 其夜烝之하다 明日 乃發喪卽位하고 矯稱高祖之詔하야 賜勇死하고 縊殺之하니라 하다
정월에 황제가 대보전大寶殿에서 승하하였다.注+[附註]태자太子 양광楊廣(煬帝)이 대보전大寶殿에서 문제文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마침내 옛 태자太子양용楊勇을 죽였다. 양용楊勇문제文帝에게 미움을 받자 독고황후獨孤皇后가 자주 양광楊廣의 어짊을 칭찬하였고, 대신大臣으로서 용사用事하는 자들을 양광楊廣이 모두 마음을 기울여 교제해서 그의 인자함과 효성스러움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문제文帝가 마침내 양용楊勇을 폐하고 양광楊廣을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독고황후獨孤皇后가 죽자 문제文帝나라 고조高祖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삼아서 총애하였다. 문제文帝가 병들어 눕자 태자太子(楊廣)는 황제가 죽었을 경우를 염려하여 편지를 써서 양소楊素에게 물었다. 양소楊素가 일의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답장할 적에 궁인宮人이 잘못하여 편지를 황제에게 보내니, 황제가 보고 크게 노하였다. 진부인陳夫人이 아침에 나와 옷을 갈아입는 곳에 갔다가 태자太子에게 겁탈당할 뻔하였는데 항거하여 겁탈을 면할 수 있었다. 진부인陳夫人신색神色을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진부인陳夫人이 눈물을 흘리면서 “태자太子가 무례한 짓을 하였습니다.” 하니, 이 노하여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짐승 같은 놈에게 어찌 국가의 대사大事를 맡긴단 말인가. 독고후獨孤后가 나를 망쳤도다.” 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술柳述황문시랑黃門侍郞 원암元巖이 모시고 병을 간호하였는데, 마침내 이들을 불러 이르기를 “나의 아들을 부르라.” 하였다. 유술柳述 등이 태자太子 양광楊廣을 부르려 하자, 이 말하기를 “을 부르라.” 하니, 유술柳述 등이 칙서勅書를 만들었다. 양소楊素가 이 소식을 듣고 태자太子에게 아뢰고는 조명詔命을 사칭하여 유술柳述 등을 체포해서 에 가두고 동궁東宮병사첩兵士帖(軍籍)을 추후에 보내어 대성臺省에 올라가 숙위宿衛하게 하고 궁문의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후궁後宮을 모두 내보내 별실別室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얼마 후 이 죽었다. 진부인陳夫人은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워 사색이 되었는데, 태자太子가 작은 금합金盒을 봉하여 진부인陳夫人에게 하사하였다. 진부인陳夫人짐독鴆毒일 것이라고 여겨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꺼내보니 바로 사랑을 나타내는 동심결同心結이 들어 있었다. 진부인陳夫人이 노하여 등을 돌리고 앉아 치사致謝하려 하지 않자, 궁인宮人들이 모두 핍박하여 절하게 하였는데 그날 밤에 강제로 간통하였다. 다음 날 마침내 을 발표하고 즉위한 다음 고조高祖조서詔書라고 사칭하여 양용楊勇에게 사약을 내리고 목을 졸라 죽였다. 병사첩兵士帖군적軍籍이다.
高祖性嚴重하야 令行禁止하고 勤於政事하야 每旦聽朝하야 日昃忘倦하고 雖嗇於財注+[通鑑要解] 慳也, 愛也 至於賞賜有功하야는 卽無所愛하고 將士戰沒이면 必加優賞하고 仍遣使者하야 勞問其家하며 愛養百姓하야 勸課農桑하고 輕徭薄賦하며
고조高祖(文帝 양견楊堅)는 성품이 엄격하고 신중하여 명령하면 행해지고 금지하면 중지되었으며, 정사에 부지런하여 매양 날이 새면 정사를 다스려서 해가 기울도록 피곤한 줄 몰랐으며, 비록 재물에 인색注+[通鑑要解]은 인색하고 아끼는 것이다. 하였으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하사할 때에는 곧 아까워하는 바가 없었으며, 장병이 싸우다가 죽으면 반드시 우대하는 상을 내리고 아울러 사자使者를 보내서 전사戰死한 자의 집안을 위로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서 농사와 양잠養蠶을 권장하고 요역徭役과 세금을 경감하였다.
其自奉養 務爲儉素하야 乘輿服御物故敝者 隨令補用하고 自非享宴이면 所食 不過一肉이요 後宮 皆服澣濯之衣하니
자기 몸을 기름에 검소함을 힘써서 승여乘輿와 의복과 사용하는 물건이 오래 써서 해진 것을 그때마다 기워 쓰게 하였고, 만일 연향宴享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먹는 것이 한 가지 고기 반찬에 불과하였으며, 후궁들은 모두 세탁한 옷을 입게 하였다.
天下化之하야 開皇, 仁壽之間 大夫率衣絹布하고 不服羅綺하며 裝帶不過銅鐵骨角이요 無金玉之飾이라
이에 천하가 교화되어서 개황開皇인수仁壽 연간에 대부大夫들이 모두 명주와 삼베로 지은 옷을 입고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지 않았으며, 장식과 띠는 구리와 철과 뼈와 뿔에 불과하였고 금과 옥의 장식이 없었다.
衣食滋殖하고 倉庫盈溢이라
이 때문에 국가의 의식衣食이 점차 불어나고 창고가 가득 넘쳤다.
受禪之初 民戶不滿四百萬이러니 末年 踰八百九十萬이로되 獨冀州已一百萬戶
문제文帝선양禪讓 받던 초기에는 민호民戶가 채 400만 호가 못 되었는데, 인수仁壽 말년에는 890만 호가 넘었고 기주冀州만 해도 이미 100만 호였다.
이나 猜忍苛察하고 信受讒言하야 功臣故舊 無始終保全者 乃至子弟하야도 皆如仇敵하니 此其所短也러라
그러나 문제文帝는 성품이 시기하고 잔인하고 까다롭게 살피며 아첨하는 말을 믿고 받아들여서 공신功臣고구故舊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한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자제子弟들에 대해서도 모두 원수와 적처럼 여겼으니, 이는 모두 그의 단점이다.
[史略 史評]史斷曰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나라 문제文帝(楊堅)는 우문씨宇文氏이성지친異姓之親으로서 나라 군주로부터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명령을 받고는 기회를 틈타 재앙을 요행으로 여겨서 마침내 나라의 정권을 도둑질하였다.
及旣平陳 方得進承正統하야 躬節儉하고 平徭賦하며 每旦視朝하야 日昃忘倦하고 雖嗇貨財 不吝賞賜하며 乘輿四出하야 路逢上表者 必止輦親問하고 分遣行人하야 采訪吏治得失 民間疾苦하야 罔不垂意
그리하여 나라를 평정하고 난 뒤에 바야흐로 정통正統을 이어서, 몸소 근검절약을 행하고 부역과 세금을 공평히 하며, 매일 아침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아 해가 기울도록 피로함을 잊었고, 비록 재물을 아꼈으나 상을 줄 때에는 인색하지 않았으며, 수레를 타고 사방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표문表文을 올리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을 멈추고 직접 물었으며, 사자使者들을 지방에 나누어 파견하여 지방 관리들의 잘잘못과 민간民間의 고통을 탐문하여 유념하지 않음이 없었다.
當是時하야 百姓繁庶하고 衣食豊衍하며 突厥室韋 靺鞨林邑 高昌女國 莫不入貢하니 可謂盛矣
이때를 당하여 백성들이 많고 의식衣食이 풍족하였으며, 돌궐突厥실위室韋말갈靺鞨임읍林邑고창高昌여국女國이 모두 조공을 바치니, 강성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이나 帝素不學하고 而又濟之以刻薄之資
그러나 문제文帝는 평소에 학문을 하지 않았고, 또 각박한 자질로써 일을 이루었다.
是以 而不悅詩書하고 하며
이 때문에 오로지 작은 술수術數에 맡기고 시서詩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학교學校를 없애고 불상佛像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甚者 하고 하야 而父子之恩滅하고 하야 中夜不返하야 而夫婦之道乖하고 囚勇於東宮하고 하야 而兄弟之倫亂하고 하고 하야 元勳宿將 誅黜殆盡하야 而君臣之義 莫有存焉이라
심지어는 참소하는 말을 듣고 태자太子 양용楊勇을 폐하고 작은 과실 때문에 진왕秦王 양준楊俊을 죽여서 부자간父子間의 은혜가 끊어지고, 독고황후獨孤皇后에게 제재를 받아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부부간夫婦間가 어그러지고, 양용楊勇동궁東宮에 가두고 아마阿麽(楊廣)에게 맡겨 관장하게 해서 형제간兄弟間의 윤리가 어지러워지고, 이군재李君才를 죽이고 우경칙虞慶則을 죽여서 큰 공을 세운 옛 장수들이 주륙당하거나 퇴출당하여 거의 다 없어져서 군신간君臣間의 의리가 보존되지 못하였다.
由是 大禍遽興하야 身亦不保하니 哀哉
이로 말미암아 큰 가 대번에 일어나서 자기 몸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역주
역주1 更衣 : 옷을 갈아 입거나 휴식하는 곳을 가리킨다. 一說에는 更衣가 옛날에 대소변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 하여 廁間을 가리킨다고 한다.
역주2 兵士帖 軍籍也 : 附註에는 兵士帖을 軍籍이라고 하였으나, 胡三省의 注에는“帖은 裨將이다. 煬帝가 太子 勇을 시기하여 막은 것이니, 東宮을 宿衛하는 자 중에 용맹하고 힘이 센 자를 臺省으로 보내어 제거한 것이다.[帖 裨也 帝之猜防太子勇也 屛去東宮宿衛之勇健者]”라고 하여 “東宮의 兵士와 裨將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려 臺省으로 올라가 宿衛하게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역주3 隋文……遂竊周鼎 : 楊堅은 아버지 楊忠의 작위를 세습하여 隋國公이 되어 周나라에 벼슬하였다. 딸이 周나라 宣帝(宇文贇)의 皇后가 되었으므로 宇文氏의 異姓之親이라 한 것이다. 楊堅은 周나라 大象 2년(580)에 靜帝를 보필하여 세우고 左大丞相으로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다가 그 다음 해에 靜帝를 폐출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隋라 고쳤다.
역주4 專任小數 : 小數는 작은 術數로 信義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權謀術數를 행함을 이른다.
역주5 廢除學校 : 隋나라 文帝는 太學과 四門學 및 州縣의 학교를 폐지하였는 바, 臣僚들이 간해도 따르지 않았다.
역주6 禁毁佛像 : 隋나라 文帝는 만년에 佛道와 鬼神을 좋아하였다. 初年에는 백성들이 出家하도록 허락하고 돈을 거두어 佛像을 조성하여 民間의 佛書가 六經보다 백배나 많았다.
역주7 以讒言廢太子勇 : 楊廣(煬帝)이 獨孤后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太子(楊勇)가 저를 죽이고자 합니다.” 하니, 獨孤后가 크게 노하여 太子를 폐위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楊廣과 獨孤后는 楊素와 함께 太子를 무고하여 폐위하였다.
역주8 以小過殺秦王俊 : 秦王 楊俊이 사치하다는 이유로 책망을 당하고는 분하고 두려워 죽었다.
역주9 爲獨孤所制 單騎出走 : 獨孤后는 질투가 심하여 後宮들이 감히 나아가 황제를 모시지 못하였다. 尉遲逈의 孫女가 容色이 아름다웠는데 祖父의 죄로 인하여 籍沒되어 궁중에 들어오니 文帝가 총애하였다. 文帝가 조회를 보러 간 사이에 獨孤后가 몰래 그녀를 죽이니, 황제가 이 때문에 크게 노하여 혼자 말을 타고 샛길을 따라 달려서 산골짝으로 20여 리를 들어갔다. 高熲과 楊素 등이 뒤쫓아 와서 말을 잡고 간절히 간하니, 文帝의 마음이 다소 풀려 한밤중에야 궁궐로 돌아왔는데, 獨孤后가 대궐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文帝가 이르자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역주10 付阿麽掌之 : 阿麽는 楊廣의 어릴 때 이름이다.
역주11 殺李君才 : 隋나라 文帝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니, 尙書左僕射 高熲과 治事侍御史 柳彧 등이 간하기를 “朝堂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요, 殿廷은 형벌을 가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으나 文帝가 받아들이지 않자, 高熲 등이 朝堂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文帝가 領左右都督 田元에게 묻기를 “나의 刑杖이 너무 무거운가?” 하니 田元이 대답하기를 “너무 무겁습니다.” 하였다. 文帝가 그 이유를 물으니, 田元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하기를 “폐하의 刑杖은 손가락 굵기만 한데 이것으로 30대를 때리면 일반 刑杖으로 수백 대를 때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죽는 것입니다.” 하니, 文帝가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殿內에 명하여 刑杖을 제거하게 하였는데, 뒤에 楚州行參軍 李君才가 文帝에게 상언하기를 “上께서 高熲을 총애함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니, 文帝가 크게 노하여 刑杖을 가하도록 명하였으나 殿內에 刑杖이 없자 마침내 말채찍으로 매질하여 그를 죽였다. 이로부터 殿內에 다시 刑杖을 시행하게 되었다.
역주12 戮虞慶則 : 虞慶則이 李世賢을 토벌할 때에 그의 처남인 趙什住를 隨府長史로 삼았는데, 趙什住가 虞慶則의 愛妾과 사통하고는 이 사실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마침내 虞慶則이 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퍼뜨렸다. 文帝가 이 말을 듣고는 虞慶則을 매우 박대하였으며, 虞慶則이 돌아오는 도중에 趙什住를 보내어 京師에 달려가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趙什住가 기회를 엿보아 虞慶則이 모반하려 한다고 무고하니, 상이 有司에게 회부하여 虞慶則이 마침내 죄에 걸려 죽었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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