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이라
蒙驁
注+[釋義]齊人이니 蒙武之父요 蒙恬之祖也라師伐魏
하니 魏師
敗
라
魏王
이 患之
하야 乃使人請信陵君
注+[釋義]卽公子無忌也라於趙
한대 信陵君
이 畏得罪
하야 不肯還
이라
이 見信陵君
하고 曰 公子所重於諸侯者
는 徒以有魏也
라
今魏急而公子不恤
이라가 一旦
에 秦人
이 克大梁
注+[釋義]魏地라 按魏有小梁이라 故以大梁別之라하고 夷先王之宗廟
면 公子何面目立天下乎
잇가
語未畢에 信陵君이 色變하야 趣(促)駕還魏하니 魏王이 持信陵君而泣하고 以爲上將軍하다
信陵君이 使人求援於諸侯한대 諸侯聞信陵君復爲魏將하고 皆遣兵救魏하니
信陵君
이 率五國之師
하야 敗蒙驁於河外
注+[釋義]謂陝華二州也라 河外者는 河南岸也니 魏州地라하다
從橫之說이 固皆詭術이나 然爲從者는 實六國之利也라
然이나 無忌一旦爲魏將에 五國이 助之하야 大破秦軍하니 況於其初에 能以信義相親하여 幷力西向이면 則秦雖强暴나 安得而亡之哉아
其子政
이 立
注+[原註]時政生十三年矣라 ○ 潁濱蘇轍이 嘗謂六國未亡에 而嬴氏先亡이라하니 信哉라 言乎여하야 封相國呂不韋
하야 爲文信侯
하고 라하다
不韋能以其子로 爲秦王之子하니 豈不能疾去二君하야 以其子爲王哉아
七國이 莫强於秦이요 亦莫强於六國이로되 秦은 用遠交近攻之策하야 卒以蠶食天下하고 六國은 爲謀不固하며 齊獨坐視五國之亡하고 自謂得計라가 同歸于盡하니 吁라
秦이 非强也라 詐有餘也요 六國이 非弱也라 智不足也니 使智足以燭秦之詐하고 信足以結六國之交하고 義足以尊周而爲之主면 雖族秦하여 求吾所大欲이라도 可也어늘 奈何其不然하고
갑인(B.C.247) - 진秦나라 3년, 초楚나라 16년, 연燕나라 8년, 위魏나라 30년, 조趙나라 19년, 한韓나라 26년, 제齊나라 18년이다.
○ 이 해에 진秦나라가 망하고 여정呂政이 대신하였다. -
몽오蒙驁가
注+[釋義]몽오蒙驁는 제齊나라 사람이니, 몽무蒙武의 아버지이고 몽념蒙恬의 조부이다. 군대를 이끌고
위魏나라를 정벌하니,
위魏나라 군대가 자주 패하였다.
위왕魏王이 근심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조趙나라에 있는
신릉군信陵君(公子
무기無忌)을 청하니,
注+[釋義]신릉군信陵君은 바로 공자公子 무기無忌이다.신릉군信陵君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이 신릉군信陵君을 만나 말하기를 “공자公子께서 제후諸侯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다만 위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위魏나라가 급한데
공자公子가 돌보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진秦나라 사람들이
대량大梁을 이기고
注+[釋義]대량大梁은 위魏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위魏나라에 소량小梁이 있기 때문에 대량大梁이라 하여 구별한 것이다. 선왕先王의
종묘宗廟를 부순다면
공자公子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말을 마치기 전에 신릉군信陵君이 낯빛이 변해서 수레를 재촉하여 위魏나라로 돌아오니, 위왕魏王이 신릉군信陵君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신릉군信陵君이 사람을 시켜 제후諸侯들에게 구원을 청하니, 제후諸侯들이 신릉군信陵君이 다시 위魏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대를 보내어 위魏나라를 구원하였다.
신릉군信陵君이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하외河外에서
몽오蒙驁를 패배시켰다.
注+[釋義]하외河外는 섬주陝州와 화주華州 두 주州를 이른다. 하외河外는 황하黃河의 남쪽 기슭이니, 위주魏州 땅이다.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의 내용이 진실로 모두 속이는 술책이나, 육국六國이 합종合從하는 것은 실로 육국六國의 이익이었다.
무기無忌의 때를 당해서는 육국六國이 더욱 진秦나라를 버텨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기無忌가 하루아침에 위魏나라 장수가 되자, 다섯 나라가 도와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니, 하물며 육국六國이 처음에 신의로써 서로 친하여 힘을 합해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향하였더라면 진秦나라가 비록 강하고 포악하나 어떻게 육국六國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육국六國을 멸망시킨 것은 육국六國 자신이고 진秦나라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5월에 진왕秦王이 죽으니, 즉위한 지 3년이었다.
그 아들
정政이 즉위해서
注+[原註]이때 정政이 태어난 지 13년이었다. ○ 영빈潁濱 소철蘇轍이 일찍이 이르기를 “육국六國이 멸망하기 전에 영씨嬴氏가 먼저 망하였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다. 상국相國 여불위呂不韋를 봉하여
문신후文信侯로 삼고
중부仲父라 칭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자기 자식을 진왕秦王의 자식으로 삼았으니, 어찌 속히 두 인군人君을 제거하여 자기 자식을 왕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요컨대 효문왕孝文王과 장양왕莊襄王은 여불위呂不韋의 시해에 죽은 것이다.”
[史略 사평史評]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칠국七國은 진秦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고 또한 육국六國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으나, 진秦나라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을 써서 끝내 천하를 잠식하였고, 육국六國은 계책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제齊나라는 오국五國이 망하는 것을 단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여겼다가 똑같이 멸망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진秦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가 유여有餘해서였고, 육국六國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해서였으니, 만일 지혜가 진秦나라의 속임수를 환히 알 수 있고 믿음이 육국六國의 교제를 공고히 할 수 있고 의리義理가 천자국인 주周나라를 높여 종주宗主로 삼을 수 있었더라면 비록 진秦나라를 멸망시켜 자신들이 크게 원하는 바를 구하더라도 가능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고는 손쓸 새도 없이 전복하고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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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진3, 초16, 연8, 위30, 조19, 한26, 제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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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진3, 초16, 연8, 위30, 조19, 한26, 제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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