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7)

통감절요(7)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己丑]八載
천보天寶 8년(기축 749)
春二月 引百官하고 觀左藏하야 賜帛有差하다
봄 2월에 백관들을 거느리고 좌장左藏을 시찰한 다음 비단을 하사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是時 州縣 殷富注+[頭註] 盛也 하고 倉庫 積粟帛하야 動以萬計
이때에 이 매우 풍족하고注+[頭註]은 풍성함이다. 창고에 곡식과 비단이 쌓여 있어 번번이 만으로 헤아려졌다.
以國用豐衍이라 視金帛 如糞壤하야 賞賜貴寵之家 無有限極이러라
은 국가의 재용이 풍족하다고 여겼으므로 금전과 비단을 보기를 거름처럼 여겨서 권문귀족과 총애하는 집에 하사하는 것이 한도가 없었다.
〈出食貨志〉
- 《구당서舊唐書 식화지食貨志》에 나옴 -
○ 先是 折衝府皆有木契銅魚注+[頭註]唐制 符寶 卽掌符節하니 曰木契者 所以重鎭守, 愼出納이요 銅魚符者 所以起軍旅, 易守長이라 하야 朝廷徵發 下勅書契魚하면 都督, 郡府 參驗皆合然後 遣之러니 自募置彍騎 府兵 日益하야 死及逃亡者 有司不復點補하고注+[頭註]能負橐故하니 負千斤하고 日行三百里馬牛器械注+[頭註] 熬米也 耗散略盡이러라
이전에는 절충부折衝府에서 목계木契동어銅魚를 모두 소유하고 있어서注+[頭註]나라 제도에 부보符寶가 곧 부절符節을 관장하니, 목계木契진수鎭守를 소중히 하고 출납出納을 신중히 한 것이요, 동어부銅魚符는 군대를 일으키고 수장守長을 바꿀 때 사용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군대를 징발할 경우 칙서勅書목계木契동어銅魚를 내리면 도독都督군부郡府가 참고하여 목계木契동어銅魚를 징험해서 모두 부합한 뒤에야 병력을 보냈는데, 백성들을 모집하여 확기彍騎를 설치한 뒤로 부병府兵이 날이 갈수록 더욱 파괴되어 죽은 자와 도망한 자를 유사가 다시 점검하여 보충하지 않고, 낙타와注+[頭註]탁타橐駝가 전대를 잘 지기 때문에 탁타橐駝라고 이름하였으니, 천 근을 지고 하루에 300리를 간다. 마소와 기계(병기)와 양식이注+[頭註]는 볶은 쌀이다. 소모되고 흩어져 거의 다 없어졌다.
府兵 入宿衛者 謂之侍官하니 言其爲天子侍衛也
부병府兵으로서 들어와 숙위宿衛하는 자를 시관侍官이라 이르니, 이는 천자를 시위侍衛함을 말한다.
其後 本衛多以假人하야 役使 如奴隷注+[頭註] 賤稱이니 屬著於人者 人有五等하니 王臣公하고 公臣大夫하고 大夫臣士하고 士臣皂하고 皂臣輿 하니 長安人 羞之하야 至以相詬病注+[釋義] 音遘 詬病 猶恥辱也 하고
그런데 나중에는 본위本衛에서 대부분 사람을 빌려 노예처럼注+[頭註]는 천한 자의 칭호이니, 사람에게 속하여 따르는 자이다. 사람은 다섯 등급이 있으니, 의 신하는 이고, 의 신하는 대부大夫이고, 대부大夫의 신하는 이고, 의 신하는 이고, 의 신하는 輿이다. 사역하니, 장안長安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심지어는 서로 모욕하기까지 하였다.注+[釋義]는 음이 구이니, 후병詬病은 치욕과 같다.
其戍邊者 又多爲邊將苦使하야 하니 由是 應爲府兵者 皆逃匿이러니
변경에 수자리 간 자들은 또 대부분 변방의 장수에게 고통스럽게 사역당하여 그들이 죽으면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로 인해 모집에 응하여 부병府兵이 된 자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至是 無兵可交
그리하여 이때에 교대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五月 李林甫奏停折衝府上下魚書하니 是後 府兵 徒有官吏而已 其折衝, 果毅 又歷年不遷하니 士大夫亦恥爲之러라
5월에 이임보李林甫절충부折衝府에 오르내리는 동어銅魚칙서勅書를 정지하게 하니, 이후로 부병府兵은 단지 관리만 있을 뿐이었고, 절충도위折衝都尉과의도위果毅都尉군관軍官 또한 여러 해가 지나도 승진되지 않으니, 사대부들은 이러한 관직을 맡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其彍騎之法 天寶以後 稍亦變廢하야 應募者皆市井注+[附註]古者 二十畝爲一井하고 因爲市交易이라 稱市井이라 本由井田之中 交易爲市 國都之市 亦曰市井이라 一井八家 家有私田百畝 公田[八]十畝 餘二十畝 以爲井廬舍 言二十畝耳 負販注+[頭註] 買賤賣貴者 無賴子弟 未嘗習兵이라
확기彍騎천보天寶 연간 이후로 차츰 쇠퇴하고 폐지되어 응모하는 자가 모두 시정市井注+[附註]옛날에 20묘를 1이라 하고 인하여 시장을 만들어 교역하였다. 그러므로 시정市井이라 칭한 것이다. 본래 정전井田 가운데에 교역하여 시장을 만든 것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의 시장을 또한 시정市井이라 한다. 1은 8가호이니 가호마다 사전私田 100묘씩을 소유하였다. 공전公田은 80묘이니 나머지 20묘로 의 농막을 만들었으므로 20묘라 한 것이다. 등짐장사 하는注+[頭註]은 값이 싼 것은 사들이고 값이 비싼 것은 파는 자이다. 자들과 무뢰한 자제들이어서 일찍이 병기 운용을 익힌 적이 없었다.
承平日久하야 議者多謂中國兵 可銷라하니 於是 民間挾兵器者 有禁하고 子弟爲武官이면 父兄 擯而不齒注+[頭註] 斥也 列也, 錄也
이때 천하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중원中原병력兵力을 줄일 만하다.” 하니, 이에 민간에서 병기를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자제가 군관이 되면 부형들이 배척하고 끼워주지 않았다.注+[頭註]은 싫어하여 배척하는 것이다. 는 나열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猛將精兵 皆聚於西北邊하야 中國 無武備矣러라
용맹한 장수와 정예병들이 모두 서북쪽 변경에 모여서 중원에 무비武備가 없게 되었다.
〈出兵志〉
- 《당서唐書 병지兵志》에 나옴 -
역주
역주1 : 휴
역주2 橐駝 : 탁타
역주3 : 구
역주4 利其死而沒其財 : 則天武后 이후로 천하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자 府兵의 제도가 점점 무너져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백성들이 府兵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牛仙客이 재물을 모아 재상이 된 뒤로 邊將들이 이를 본받아 戍卒을 꾀어 비단을 府庫에 맡기게 하고 낮에는 苦役을 시키고 밤이면 地牢(땅굴)에 묶어두어 그들이 죽으면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니, 戍卒 중에 돌아온 자가 열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다.

통감절요(7)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