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父偃이 說上曰 古者에 諸侯不過百里하야 彊弱之形이 易制러니 今諸侯或連城數十하야 地方千里라
緩則驕奢
하야 易爲淫亂
이요 急則阻其彊而合從
하야 以逆京師
하고 以法割削之
하면 則逆節
이 萌起
하니 是也
니이다
今諸侯子弟或十數而適(嫡)嗣代立하고 餘無尺地之封하니 則仁孝之道不宣이라
願陛下는 令諸侯로 得推恩하야 分子弟以地侯之면 彼人人이 喜得所願하리니
上以德施나 實分其國이니 不削而稍弱矣리이다 上이 從之하다
春正月에 詔曰 諸侯王이 或欲推私恩하야 分子弟邑이어든 令各條上하라
○ 軹人郭解
注+[釋義]軹는 河內邑이라 郭解는 字翁伯이라 解는 音蟹라는 關東大俠也
라
平生
注+[釋義]王氏曰 睚眦는 相嗔怒而見齒也라 又漢杜業傳에 報睚眦怨이라한대 註에 睚는 音崖니 擧眼也요 眦는 卽眥字니 目睚也니 言擧目相忤者를 亦報之라하야 殺人
이 甚衆
이러니 上
이 聞之
하고 下吏捕治
하야 遂族解
하다
漢書遊俠
注+[附註]輕死重氣하야 如荊軻, 豫讓之輩라 遊는 從也요 俠은 持也니 言結相從遊하야 行挾輔之事也라 荀悅曰 立氣勢하고 作威福하고 結私交하야 以立强於世를 謂之遊俠이라하니라傳序曰
周室旣微
에 桓, 文之後
로 大夫世權
하고 陪臣
注+[釋義]記曲禮에 列國之大夫自稱曰陪臣某라 註에 陪는 重也라[通鑑要解] 陪는 重也니 諸侯之臣은 於天子爲陪요 大夫之家臣은 於諸侯陪臣也라이 執命
이러니 陵夷
注+[通鑑要解]夷는 平也니 言頹替若丘陵之漸平也라至於戰國
하야 合從連衡(橫)
이라
繇是
로 列國公子
에 魏有信陵
注+[釋義]魏安釐王異母弟公子無忌를 封信陵君이라 按地志에 無信陵하니 或是鄕邑之名이라하고 趙有平原
注+[釋義]趙惠文王弟趙勝을 封平原君이라 括地志에 平原故城이 在德州平原縣東南이라하고 齊有孟嘗
注+[釋義]孟嘗은 田文也라 父嬰이 封於薛이러니 文襲父封而號曰孟嘗이라 或云諡라하나 非也라 嘗邑이 在薛城之南이라하고 楚有春申
注+[釋義]春申은 黃歇也라하니 皆藉王公之勢
하야 競爲游俠
하야 鷄鳴狗盜 無不賓禮
注+[釋義]王氏曰 孟嘗이 入秦한대 秦昭王이 欲殺之어늘 孟嘗이 使人抵昭王幸姬하야 求解러니 姬願得狐白裘라 時止一裘하야 已獻昭王이러니 有客乃夜爲狗하야 入秦藏中하야 盜裘以獻하야 獲免하고 卽馳去하다 夜半에 至函谷關하니 關法에 鷄鳴而出客이라 孟嘗이 恐昭王悔而追至러니 有客作鷄鳴而鷄盡鳴하야 得亡出關하니라하고 而趙相虞卿
은 棄國捐君
하야 以周窮交魏齊之厄
注+[釋義]虞卿은 史失其名하니 趙孝成王이 以爲上卿이라 故號焉이라 索隱曰 趙之虞 在河東하니 今河中府虞鄕縣이 是也라 魏齊는 虞卿之交也니 將爲范睢所殺이러니 卿周庇之하니 事在綱目周赧王五十六年이라하고 信陵無忌
는 竊符矯命
하야 戮將專師
하야 以赴平原之急
注+[釋義]秦兵圍趙어늘 趙相平原君이 告急於無忌한대 無忌因如姬以竊兵符하야 矯魏王之命하고 而令朱亥殺晉鄙하야 奪其兵救趙하야 秦兵以卻하고 而趙得全하니 事在周赧王五十七年이라하야 皆以取重諸侯
하고 顯名天下
라
而游談者 以四豪
로 爲稱首
注+[釋義]王氏曰 搤은 與扼通하고 腕은 與掔捥通이라 游俠傳에는 作搤掔하고 封禪書에는 扼捥自言이라 四豪는 卽信陵, 平原, 孟嘗, 春申也라라
於是에 背公死黨之議成하고 守職奉上之義廢矣러니 及至漢興에 禁網이 疏闊하야 未知匡改也라
是故
로 代相陳豨
注+[釋義]王氏曰 代國相也라는 從車千乘
이요 而吳濞
注+[釋義]高帝兄喜之子로 名濞이니 封吳王이라, 淮南
注+[釋義]高帝孫淮南王安也니 淮南厲王長之子라이 皆招賓客以千數
하고 外戚大臣
에 魏其
注+[釋義]王氏曰 孝文皇后從兄子竇嬰을 封魏其侯라, 武安
注+[釋義]孝景皇后同母弟田蚡을 封武安侯라之屬
이 競逐於京師
하고 布衣游俠
에 劇孟
注+[釋義]姓名이라 洛陽人이니 亦以俠顯이라, 郭解之徒 馳騖
注+[通鑑要解]直騁曰馳요 亂馳曰騖라於閭閻
하야 權行州城
하고 力折公侯
하니
衆庶榮其名迹
하야 覬而慕之
하야 雖陷於刑辟
이나 自與殺身成名
하야 若季路, 仇牧
注+[釋義]王氏曰 衛有蒯聵之亂이러니 季路聞之하고 故入赴難하야 見孟黶한대 石乞이 以戈擊之하야 斷纓하니라 宋萬이 殺閔公이러니 仇牧이 聞之하고 趨至하야 手劍而叱之한대 萬이 臂擊仇牧하야 碎首하고 齒〈乎門闔〉하니라이 死而不悔
라
故
로 曾子曰
라하시니 非明主在上
하야 示之以好
하고 齊之以禮法
이면 民曷由知禁而反正乎
리오
주보언主父偃이 상上을 설득하기를 “옛날에 제후는 봉지封地가 백 리를 넘지 않아 강하고 약한 형세가 제재하기 쉬웠는데, 지금의 제후들은 혹 수십 개의 성읍을 연하고 있어서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그러므로 통제를 늦추면 교만하고 사치하여 음란한 짓을 하기가 쉽고, 급하게 하면 그 강함을 믿고 합종하여 경사京師(皇帝)에 거역하며, 법으로 땅을 떼어 내고 깎으면 반역하는 일이 싹터 일어나니, 지난날 조조鼂錯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들이 혹 십수 명인데, 적자嫡子만 왕위王位를 대신하여 서고 나머지는 한 자의 땅도 봉해줌이 없으니, 인자하고 효도하는 도道가 펴지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제후들로 하여금 은혜를 미루어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 후侯를 삼게 하시면 저들은 사람마다 소원을 얻음을 기뻐할 것입니다.
상上께서는 덕德을 베푸시나 실제로는 그 나라를 나누는 것이니, 땅(領地)을 깎지 않아도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봄 정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제후왕이 혹 사사로운 은혜를 미루어서 자제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주고자 하거든 각각 조목조목 적어 보고하도록 하라.
짐이 장차 살펴보고서 제후왕의 호칭을 정해 주겠다.” 하였다.
이에 번국藩國이 비로소 나누어지고 자제들이 모두 후侯가 되었다.
지현軹縣 사람
곽해郭解는
注+[釋義]지軹는 하내河內의 읍邑이다. 곽해郭解는 자字가 옹백翁伯이다. 해解는 음이 해이다. 관동關東의 큰 협객이었다.
평소 눈을 흘겨본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애자睚眦는 서로 성내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한서漢書》 〈두업전杜業傳〉에 ‘애자睚眦의 원한에 보복하였다.’ 하였는데, 주註에 ‘애睚는 음이 애이니 눈을 들어 쳐다보는 것이요, 자眦는 바로 자자眥字이니 눈가인 바, 눈을 들어 흘겨본 자에게 또한 보복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작은 원한에도 보복하여 사람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는데,
상上이 이 말을 듣고
옥리獄吏에게 내려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게 해서 마침내
곽해郭解의
삼족三族을 멸하였다.
《
한서漢書》 〈
유협전서遊俠傳序〉에
注+[附註]유협遊俠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기개를 소중히 여겨 형가荊軻와 예양豫讓 같은 무리이다. 유遊는 종유從遊함이고 협俠은 잡아 줌이니, 맺어서 서로 종유從遊하여 잡아서 도와주는 일을 행함을 말한 것이다. 순열荀悅이 말하기를 “기세를 세우고 위엄과 복을 만들며, 사사로운 교분을 맺어 세상에 강하다고 알려진 사람을 유협遊俠이라 한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주周나라 왕실이 미약해지자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 이후로
대부大夫들이 대대로 권력을 잡고
배신陪臣(家臣)들이
注+[釋義]배신陪臣은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열국列國의 대부大夫가 자칭하기를 배신陪臣모某라 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배陪는 거듭함이다.” 하였다. [通鑑要解]배陪는 거듭함이니, 제후諸侯의 신하는 천자天子에게 배신陪臣이 되고, 대부大夫의 가신은 제후諸侯에게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다. 명령을 집행하였는데, 점점 쇠퇴하여
注+[通鑑要解]이夷는 평평함이니, 무너지고 침체함이 마치 구릉이 점점 평평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합종合縱하고
연형連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열국列國의
공자公子 중에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고,
注+[釋義]위魏나라 안희왕安釐王의 이모제異母弟인 공자公子무기無忌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하였다. 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신릉信陵이라는 곳이 없으니, 혹 향읍鄕邑의 이름인 듯하다.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있고,
注+[釋義]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아우 조승趙勝을 평원군平原君에 봉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평원平原의 옛 성이 덕주德州평원현平原縣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고,
注+[釋義]맹상孟嘗은 전문田文이다. 아버지 영嬰이 설읍薛邑에 봉해졌는데, 전문田文이 아버지의 봉지封地를 세습하고 이름하기를 맹상孟嘗이라 하였다. 혹자는 시호라고 하나 잘못이다. 상읍嘗邑이 설성薛城의 남쪽에 있다.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있었으니,
注+[釋義]춘신군春申君은 황헐黃歇이다. 이들은 모두
왕공王公의 권세를 빌려 다투어
유협遊俠을 하여서 닭 울음소리를 내고 개처럼 도둑질하는 자들도 손님으로 예우하지 않음이 없었고,
注+[釋義]鷄鳴狗盜 무불빈례無不賓禮: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맹상군孟嘗君이 진秦나라에 들어가자,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그를 죽이고자 하니, 맹상군孟嘗君이 사람을 시켜 소왕昭王의 총애하는 여자에게 찾아가서 풀어줄 것을 요구하자, 그 여자는 호백구狐白裘를 얻기를 원하였다. 이때 다만 호백구狐白裘가 하나뿐이어서 이미 소왕昭王에게 바치고 난 뒤였는데, 따라간 문객門客 가운데 밤에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어 진秦나라 창고 속에 들어가서 호백구狐白裘를 훔쳐와 바치고서 풀려나자 즉시 달아났다. 한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니, 관문關門의 법에 닭이 울어야만 손님을 내보냈다. 맹상군孟嘗君은 소왕昭王이 후회하고 추격해올까 두려워하였는데, 문객 가운데 닭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있어 닭울음소리를 흉내내자, 닭들이 모두 울어 관문關門을 나올 수 있었다.” 조趙나라 정승
우경虞卿은 나라를 버리고 군주를 버리면서 곤궁한 친구인
위제魏齊의 어려움을 구휼해 주었으며,
注+[釋義]趙相虞卿……魏齊之厄:우경虞卿은 역사책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니, 조趙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상경上卿으로 삼았으므로 우경虞卿이라 이름한 것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조趙나라의 우읍虞邑이 하동河東에 있으니, 지금의 하중부河中府우향현虞鄕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위제魏齊는 우경虞卿의 친구로 장차 범수范睢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우경虞卿이 구원하여 비호하였으니, 이 사실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주난왕周赧王 56년조에 나와 있다. 신릉군信陵君무기無忌는
병부兵符를 훔치고
왕명王命을 사칭해서 장수를 죽이고 군대를 마음대로 출동시켜
평원군平原君의 위급함에 달려가서,
注+[釋義]信陵無忌……以赴平原之急:진秦나라 군대가 조趙나라를 포위하자, 조趙나라 정승인 평원군平原君이 무기無忌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무기無忌가 여희如姬를 통해 병부兵符를 훔쳐서 위왕魏王의 명命을 사칭하고 주해朱亥로 하여금 장군 진비晉鄙를 살해하게 하여, 그 군대를 빼앗아 조趙나라를 구원해서 진秦나라 군대가 이 때문에 퇴각하고 조趙나라가 온전하게 되었으니, 이 사실이 앞의 주난왕周赧王 57년조年條에 나와 있다. 모두 제후들에게
중망重望을 취하였고 천하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돌아다니며 말하는 자들이 네 호걸을 으뜸으로 칭하였다.
注+[釋義]搤腕……爲稱首: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액搤은 액扼과 통하고 완腕은 견掔, 완捥과 통한다. 《한서漢書》 〈유협전遊俠傳〉에는 ‘액견搤掔’으로 되어 있고,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스스로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네 호걸은 바로 신릉군信陵君, 평원군平原君, 맹상군孟嘗君, 춘신군春申君이다.”
이에 공의公義를 버리고 당여黨與를 위하여 죽는 의론이 이루어지고, 직책을 지키고 윗사람을 받드는 의리가 없어졌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남에 이르러 법망이 엉성해서 이것을 바로잡아 고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대국代國의 정승인
진희陳豨는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대상代相은 대국代國의 정승이다.” 따르는 수레가
천승千乘이었고,
오왕吳王비濞와
注+[釋義]오비吳濞는 고제高帝의 형인 희喜의 아들로 이름이 비濞이니,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회남왕淮南王안安이
注+[釋義]회남왕淮南王은 고제高帝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안安이니, 회남여왕淮南厲王장長의 아들이다. 모두 빈객을 초청한 것이 천으로 헤아려졌으며, 외척의 대신 중에
위기후魏其侯(竇嬰)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효문황후孝文皇后의 종형從兄의 아들 두영竇嬰을 위기후魏其侯에 봉하였다.” 무안후武安侯(田蚡)의
注+[釋義]효경황후孝景皇后의 동모제同母弟인 전분田蚡을 무안후武安侯에 봉하였다. 무리가
경사京師에서 서로 경쟁하였고,
포의布衣의
유협遊俠 중에
극맹劇孟과
注+[釋義]극맹劇孟은 성명이다. 낙양洛陽 사람이니, 또한 유협遊俠으로 알려졌다. 곽해郭解의 무리가
여염閭閻에 내달려서
注+[通鑑要解]곧게 달리는 것을 치馳라 하고, 어지럽게 달리는 것을 무騖라 한다. 권력이
주성州城에 행해지고 힘이
공후公侯들을 꺾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이름과 행적을 영화롭게 여겨 바라보고 사모해서 비록 형벌을 당하여 죽임에 빠지더라도 스스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여 마치
계로季路와
구목仇牧이
注+[釋義]季路, 구목仇牧: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위衛나라에 괴외蒯聵의 난亂이 있었는데, 계로季路가 이 말을 듣고 난에 달려가서 맹염孟黶을 만나 보자, 석걸石乞이 자로子路를 창으로 공격하여 갓끈을 끊었다. 송宋나라 남궁만南宮萬이 민공閔公을 시해하였는데, 〈송宋나라 대부大夫인〉 구목仇牧이 이 말을 듣고 달려가서 손에 검을 잡고 꾸짖으니, 남궁만南宮萬이 팔로 구목仇牧을 쳐서 머리가 부서지고 이가 빠져 문짝에 박혔다.” 죽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윗사람이 그 도道를 잃어 백성들이 흩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명왕明王이 위에 있으면서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을 보여주며 예법禮法으로써 가지런하게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금할 줄을 알아 바름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1
[갑인] 2년
2
[갑인] 2년
438
3
[갑인] 2년
97
4
[갑인] 2년
79
5
[갑인] 2년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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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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