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辰]〈周顯德三年이라
병진(956) - 나라 현덕顯德 3년이다.
○ 是歲 凡五國, 四鎭이라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이다. -
正月庚子 周世宗 下詔하고 親征淮南할새 命歸德節度使李重進하야 將兵先赴正陽하다
정월 경자일庚子日(6일)에 나라 세종世宗이 조서를 내리고 친히 회남淮南(南唐)을 정벌할 적에 귀덕절도사歸德節度使 이중진李重進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정양正陽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李谷(穀)注+[頭註] 綱目 作穀이라 以穀爲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하니 淮南 謂唐也 攻壽州호되 久不克이러니 唐劉彦貞注+[頭註]北面行營都部署 引兵救之어늘 李重進 度淮하야 逆戰於正陽東하야 大破之하고 斬彦貞하다
이곡李穀注+[頭註]’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으로 되어 있다. 이곡李穀회남도전군행영도부서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로 임명하니, 회남淮南남당南唐을 이른다. 수주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였는데, 나라(南唐)의 유언정劉彦貞注+[頭註]유언정劉彦貞북면행영도부서北面行營都部署이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자, 이중진李重進회수淮水를 건너 정양正陽의 동쪽에서 그를 맞아 싸워 크게 쳐부수고 유언정劉彦貞의 목을 베었다.
○ 是時 江淮久安하고 民不習戰하니 彦貞旣敗 唐人 大恐이라
이때 강회江淮 지방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으니, 유언정劉彦貞이 이미 패한 뒤에 남당南唐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皇甫暉, 姚鳳注+[頭註]皇甫暉 奉化節度使同平章事 姚鳳 常州團鍊使 退保淸流關이어늘
황보휘皇甫暉요봉姚鳳注+[頭註]황보휘皇甫暉봉화절도사奉化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이고, 요봉姚鳳상주단련사常州團鍊使이다. 후퇴하여 청류관淸流關을 지켰다.
丙辰 周世宗 至壽州城下하야 命諸軍하야 圍壽州하다
병진일丙辰日(22일)에 나라 세종世宗수주성壽州城 아래에 이르러서 제군諸軍에게 명해 수주성壽州城을 포위하게 하였다.
二月 世宗 命太祖皇帝하야 倍道襲淸流關하니 皇甫暉等 陳(陣)於山下하고 方與前鋒戰할새 太祖皇帝引兵出山後하니 暉等 大驚하야 走入滁州하야 欲斷橋自守
2월에 세종世宗태조황제太祖皇帝(趙匡胤)에게 명하여 행군속도를 배가해서 청류관淸流關을 습격하게 하니, 황보휘皇甫暉 등이 산 아래에 진을 치고 나라의 선봉부대와 싸울 적에 태조황제太祖皇帝가 군대를 거느리고 산 뒤로 나오니, 황보휘皇甫暉 등이 크게 놀라서 도망하여 저주滁州로 들어가 다리를 끊고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太祖皇帝躍馬麾兵하고 涉水하야 直抵城下하니 暉曰 人各爲其主 願容成列而戰하노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말에 뛰어올라 병기를 휘두르며 물을 건너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니, 황보휘皇甫暉가 말하기를 “사람은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니, 대열을 이루기를 기다린 뒤에 싸우기를 원한다.” 하였다.
太祖皇帝笑而許之하니 暉整衆而出이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웃으면서 허락하니, 황보휘皇甫暉가 무리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다.
宋太祖皇帝擁馬頸하고 突陳而入하야 大呼曰 吾止取皇甫暉 他人 非吾敵也라하고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말의 목을 끼고 진중陣中으로 돌진하여 들어가서 크게 고함치기를 “나는 다만 황보휘皇甫暉를 잡고자 할 뿐이요, 다른 사람은 나의 적수가 아니다.” 하고는
手劍擊暉中腦하야 生擒之하고 幷擒姚鳳하야 遂克滁州하다
손에 잡은 검으로 황보휘皇甫暉를 공격하여 그의 뇌를 맞혀 사로잡고 아울러 요봉姚鳳을 사로잡아 마침내 저주滁州를 함락시켰다.
世宗 遣翰林學士竇儀하야 籍滁州注+[頭註] 音儻이니 金帛所藏이라 이러니 宋太祖皇帝遣親吏하야 取藏中絹한대
뒤에 세종世宗한림학사翰林學士 두의竇儀를 보내어 저주滁州 창고의 재물을注+[頭註]은 음이 (탕)이니, 황금과 비단을 보관하는 곳이다. 장부에 기재하게 하였는데,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심복인 관리를 보내어 창고 안에 있는 비단을 가져가려 하였다.
儀曰 公 初克城時 雖傾藏取之라도 無傷也어니와 今旣籍爲官物하니 非有詔書 不可得也니라
두의竇儀가 말하기를 “이 처음 성을 함락시켰을 때엔 비록 창고에 있는 물건을 모두 가져가더라도 나쁠 것이 없지만, 지금은 이미 장부에 기재하여 관청의 물건이 되었으니 황제의 조서가 있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다.” 하였다.
宋太祖皇帝由是 重儀하니라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이로 말미암아 두의竇儀를 소중히 여겼다.
○ 初 周劉詞遺表하야 薦其幕僚薊人趙普有才可用이러니 滁州平이어늘 范質 薦普爲滁州軍事判官한대
처음에 나라 유사劉詞가 죽을 때에 표문을 올려 그의 막료인 계주薊州 사람 조보趙普가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였는데, 마침 저주滁州가 평정되자 범질范質조보趙普를 천거하여 저주군사판관滁州軍事判官으로 임명하였다.
宋太祖皇帝與語悅之하니라
이에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조보趙普와 함께 말을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宋太祖皇帝 威名日盛이라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는 위엄과 명망이 날로 성하였다.
每臨陳注+[頭註]하니라 飾馬하고 仗鮮明하니 或曰 如此 爲敵所識이라한대 宋太祖皇帝曰 吾固欲其識之耳라하니라
매번 적진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반영繁纓으로注+[頭註]반영繁纓은 1에 보인다. 말을 꾸미고 투구와 의장을 선명하게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적들에게 인식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는 말하기를 “내 진실로 저들에게 인식되고자 한다.” 하였다.
○ 唐主兵屢敗하니 懼亡하야 乃遣鍾謨, 李德明注+[頭註]鍾謨 翰林學士戶部侍郞이요 李德明 工部侍郞文理院學士 하야 奉表稱臣하고 來請平注+[頭註] 和也 하다
당주唐主(李璟)는 남당南唐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자, 나라가 망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모鍾謨이덕명李德明注+[頭註]종모鍾謨한림학사翰林學士 호부시랑戶部侍郞이고, 이덕명李德明공부시랑工部侍郞 문리원학사文理院學士였다.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올려 을 칭하고 와서 화평을 청하였다.注+[頭註]평은 화평함이다.
謨, 德明 素辯口하니 周世宗 知其欲遊說注+[頭註]飾辨辭하고 設詐謀하야 馳逐於諸侯하야 以要時勢者 하고 盛陳甲兵而見之하야 曰 我非六國注+[頭註]戰國韓趙魏燕齊楚 愚主 豈汝口舌所能移邪
종모鍾謨이덕명李德明은 평소에 말을 잘하니, 나라 세종世宗은 이들이 유세하고자注+[頭註]말을 꾸미고 속임수를 써서 제후諸侯들을 쫓아 시세時勢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갑옷과 병기를 성대하게 진열하고 만나보며 말하기를 “나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육국六國注+[頭註]육국六國전국시대戰國時代, , , , , 나라이다.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니, 어찌 너희들의 입과 혀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可歸語汝主호되 來見朕하고 再拜謝過하면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군주에게 말하여 빨리 와서 짐을 만나 재배하고 사과하도록 하라.
則無事矣어니와 不然이면 朕欲往觀金陵城하고 借府庫하야 以勞軍하노니 汝君臣 得無悔乎
이렇게 하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짐이 직접 가서 금릉성金陵城을 구경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을 빌어 군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너희 군주와 신하가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하였다.
謨, 德明 戰栗注+[頭註]恐懼貌 하야 不敢言하니라
이에 종모鍾謨이덕명李德明이 두려워 몸이 떨려서注+[頭註]전율戰栗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 唐主復使李德明, 孫晟注+[頭註]右僕射 으로 言於周世宗하야 請去帝號하고 割壽, 濠, 泗, 楚, 光, 海六州之地하고 仍歲輸金帛百萬하야 以求罷兵이로되
당주唐主가 다시 이덕명李德明손성孫晟으로 하여금注+[頭註]손성孫晟우복야右僕射이다. 나라 세종世宗에게 말하여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는 한편 수주壽州호주濠州사주泗州초주楚州광주光州해주海州 등 여섯 의 땅을 떼어 바치고, 이어서 해마다 황금과 비단 백만을 바쳐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世宗 以淮南之地已半爲周有하고 諸將捷奏日至라하야 欲盡得江北之地하야 不許
그러나 세종世宗회남淮南 땅의 절반이 이미 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제장諸將들의 승전보고가 날로 이른다 하여 강북江北 땅을 다 얻고자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德明 見周兵日進하고 奏稱호되 唐主不知陛下兵力如此之盛하니 願寬臣五日之誅하야 得歸白唐主 盡獻江北之地하리이다
이덕명李德明나라 군대가 날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세종世宗에게 아뢰기를 “당주唐主는 폐하의 병력이 이처럼 강성한지 알지 못하니, 바라건대 을 5일 동안만 정벌하지 말아서 으로 하여금 돌아가 당주唐主에게 아뢸 수 있게 해주신다면 강북江北의 땅을 모두 바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世宗 乃許之하고 賜唐主詔書하니 其略曰 但存帝號 何爽歲寒注+[頭註] 差也 言歲寒知松柏之後凋 此約不差也 許唐主自帝江南이라 이리오
세종世宗이 마침내 허락하고 당주唐主에게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단지 황제의 칭호를 보존한다면 역경에도 변치 않는 세한歲寒지조志操를 어찌 어기겠는가.注+[頭註]은 어긋나는 것이다.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마른다고 말한 것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당주唐主가 스스로 강남江南에서 황제 노릇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倘堅事大之心이면 終不迫人于險하리라 又曰 俟諸郡注+[頭註]江北諸郡이라 之悉來하야 卽大軍之立罷호리니
진실로 그대가 대국大國을 섬기려는 마음만 견고하다면 나는 끝내 사람을 험난한 데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러 注+[頭註]제군諸郡강북江北의 여러 이다. 다 바쳐 오기를 기다려서 당장 대군大軍을 철수하겠다.
言盡於此하고 更不煩云하노니 苟曰未然이면 請從玆絶하노라
말은 이에서 다하고 다시 번거롭게 말하고자 하지 않으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국교를 단절할 것을 청한다.” 하였다.
德明 稱世宗威德 及甲兵之强하고 勸唐主割江北之地한대 唐主大怒하야 斬德明於市하고 命齊主景達注+[頭註]唐主之弟 하야 將兵以拒周하다
이덕명李德明이 돌아가 세종世宗의 위엄과 덕망 및 군대의 강성함을 극구 말하고 당주唐主에게 강북江北의 땅을 떼어 바칠 것을 권하자, 당주唐主가 크게 노하여 시장에서 이덕명李德明의 목을 베고, 제주齊主 이경달李景達에게注+[頭註]이경달李景達당주唐主의 아우이다.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景達 將兵二萬하고 自瓜步注+[頭註]山名이라 濟江하야 距六合注+[頭註]縣名이라 二十餘里하야 設柵不進하니 諸將 欲擊之어늘 宋太祖皇帝曰 彼設柵自固 懼我也
이경달李景達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과보산瓜步山로부터注+[頭註]과보瓜步의 이름이다. 양자강을 건너 육합현六合縣에서注+[頭註]육합六合의 이름이다. 20여 리 떨어진 지점에 성책城柵을 만들고 전진하지 않으니, 나라의 제장諸將들이 이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말하기를 “저들이 성책城柵을 만들어 스스로 굳게 지킴은 우리를 두려워해서이다.
今吾衆 不滿二千하니 若往擊之 則彼見吾衆寡矣
지금 우리의 병력이 채 2천 명이 되지 못하니, 만약 가서 공격한다면 저들은 우리의 병력이 적음을 알게 될 것이다.
不如俟其來而擊之하니 破之必矣리라
저들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居數日 唐出兵趣(趨)六合이어늘 宋太祖皇帝 奮擊大破之하야 殺獲近五千人호되 餘衆 尙萬餘
며칠 있다가 나라가 출병出兵하여 육합현六合縣으로 진출하자,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분발하여 공격해서 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5천 명에 가까웠으나 남은 무리가 아직도 만여 명이었다.
走渡江하야 爭舟溺死者甚衆하니 於是 唐之精卒 盡矣러라
이들이 도망하여 강을 건너느라 배를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 때문에 나라 정예병이 다 없어졌다.
是戰也 士卒有不致力者어늘 宋太祖皇帝陽(佯)爲督戰하야 以劍斫其皮笠이라가 明日 徧閱皮笠하고 有劍跡者數十人 皆斬之하니 由是 部兵 莫敢不盡死하니라
이 전투에서 사졸들 가운데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있자,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거짓으로 독전督戰하는 체하면서 검으로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졸의 피립皮笠을 찍어 두었다가 다음날 피립皮笠을 살펴보고 검으로 찍은 흔적이 있는 자 수십 명을 모두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부하部下 병사들이 감히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 周以太祖皇帝 爲定國節度使注+[通鑑要解]定國軍 卽同州匡國軍也 太祖登極이어늘 避御名하야 始改爲定國軍이러니 史亦因以後所改軍號書之也 兼殿前都指揮使하다
나라가 태조황제太祖皇帝(趙匡胤)를 정국절도사定國節度使注+[通鑑要解]정국군定國軍은 바로 동주광국군同州匡國軍이다. 태조太祖등극登極하자 어명御名을 피하여 비로소 정국군定國軍이라고 고쳤는데, 역사책에도 이로 인해 이후로는 군호軍號를 고쳐서 쓴 것이다. 겸전전도지휘사兼殿前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역주
역주1 : 탕
역주2 : 반
역주3 見一卷 : 繁纓에 대한 註는 1권 맨앞 溫公의 史評에 보인다. 繁은 본래 鞶으로 말갈기 위의 장식이고 纓은 말 가슴 앞의 장식인데, 繁纓은 제후의 말에만 꾸밀 수 있는 장식이다. 春秋時代에 衛侯가 齊나라를 공격하여 新築에서 싸웠는데, 仲叔于奚가 孫桓子를 구원하여 살려주었다. 衛侯가 고을을 상으로 내렸으나 仲叔于奚는 이것을 사양하고 제후라야 쓸 수 있는 曲縣과 繁纓을 갖추고 조회할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孔子는 이 말을 듣고 “애석하구나!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이 맡은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曲縣은 三面에 악기를 설치한 수레이다. 이 내용은 《春秋左傳》 成公 2年條에 보인다.
역주4 : 개
역주5 : 극
역주6 歲寒 :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지는 것으로, 孔子는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마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하였는바, 이는 사람의 의지가 굳어 아무리 험난한 경우를 만나도 志節을 변치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