詔進道成
, 大都督中外諸軍事, 太傅, 領揚州牧
하다
晉氏渡江
注+[頭註]元帝南遷이라以來
로 君弱臣彊
하야 禍亂相繼
하고 至于元興
注+[頭註]安帝라하야 而桓氏
注+[頭註]玄이라簒位
라
高祖
注+[頭註]劉裕라首唱大義
하고 糾合同志
하야 起於草萊之間
하야 奮臂一呼
에 凶黨瓦解
하야 遂梟靈寶
注+[原註]桓玄也라[頭註]玄字라之首
하고 奉迎乘輿
하야 再興王室
하니 厥功已不細矣
라
旣而
요 治兵誓衆
하야 經營四方
하야 揚旗東征
에 廣固
注+[頭註]南燕慕容德이 據廣固하니라橫潰
하고 卷甲南趨
에 盧循殄滅
하고 西上
에 하고 銳卒北驅
에 姚泓面縛
하야
遂汛掃
注+[頭註]汛은 洒也라伊, 洛
하고 修奉園陵
하야 震驚旃(氈)裘
注+[頭註]旃은 與氈通이라之心
하고 發舒華夏之氣
하니 南國之盛
이 未有過於斯時者也
라
然이나 區宇未一에 躋於天位하고 委棄秦雍하야 以資寇敵하야 使大功不成하니 惜哉라
文帝
注+[頭註]義隆이라勤於爲治
하고 子惠庶民
하니 足爲承平之良主
로되 而不量其力
하고 橫挑彊胡
하야 使師徒殲於河南
하고 代馬飮於江津
注+[頭註]代는 北魏也라이라
及其末路
하야는 狐疑不決
하야 卒成子禍
注+[頭註]子禍는 見殺於太子劭라하니 豈非文有餘而武不足耶
아
夫以孝武
注+[頭註]駿이라之驕淫
과 明帝
注+[頭註]彧이라之猜忌
로 得保首領
하야 以沒於牖下 幸矣
니 其何後之有
리오
晉氏渡江以來로 威靈不兢하니 戎狄橫騖하야 虎視中原일새
宋祖首興義兵하고 糾合同志하야 誅桓玄하야 討簒晉之賊하고 興復晉室하니 固自以爲大有功矣라하나
曾未幾時에 躬行簒奪하야 旣廢其主하고 復以兵守之라가 又逾月而弑之하니 視桓玄之禍하면 尤烈焉이라
旣而요 二子俱不得其死하고 傳之六主에 皆不壽終하니 豈無天道哉아
然이나 自宋以後로 姦人이 急於簒國하야 貪心愈銳에 不待再傳而亟取之라
如齊, 梁, 陳, 北朝以後로 諸君이 朝謀夕取者 比比而是也니 又可以驗世變之益衰와 人心之益薄矣니
무오(478) - 송宋나라 승명昇明 2년이고, 위魏나라 태화太和 2년이다. -
황제가 명하여 소도성蕭道成에게 가황월假黃鉞의 호칭을 가하고 대도독중외제군사大都督中外諸軍事‧태부太傅‧영양주목領揚州牧으로 올려 주었다.
“
진晉나라는
양자강揚子江을 건너온
注+[頭註]원제元帝가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옮겼다. 이후로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재앙과 난리가 서로 이어졌고,
안제安帝 원흥元興注+[頭註]원흥元興은 안제安帝의 연호이다. 연간에 이르러서는
환씨桓氏注+[頭註]환씨桓氏는 환현桓玄이다. 가 지위를 찬탈하였다.
송宋나라
고조高祖(劉裕)
注+[頭註]고조高祖는 유유劉裕이다. 가 제일 먼저
대의大義를 제창하고 동지들을 규합해서 초야의 사이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한번 고함치자 흉악한 역적의 무리가 와해되어 마침내
영보靈寶(桓玄)
注+[原註]靈寶는 환현桓玄이다.[頭註]靈寶는 환현桓玄의 자字이다. 의 머리를 효시하고 황제를 받들어 맞이해서
왕실王室을 다시 일으켰으니, 그 공이 이미 작지 않다.
이윽고 군대를 다스리고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사방四方을 경영해서
기치旗幟를 날리며 동쪽을 정벌하자
광고廣固(南燕)
注+[頭註]남연南燕의 모용덕慕容德이 광고廣固를 점거하였다. 가 궤멸되었고,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남쪽으로 달려가자
노순盧循이 멸망하였으며,
편사偏師를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가자
초종譙縱이 머리를 바쳤고, 정예병을 이끌고 북쪽을 정벌하자
요홍姚泓이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역을 깨끗이 소탕하고
注+[頭註]신汛은 물을 뿌려 씻는 것이다. 원릉園陵을 수리하고 받들어서 털가죽 옷을 입는 북방 오랑캐들
注+[頭註]전旃은 전氈과 통한다. 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중하中夏의 기풍을 발양하였으니,
남조南朝의 강성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구우區宇(海內)를 통일하기 전에 천자天子의 지위에 오르고 진옹秦雍 지역을 버려서 적을 도움으로써 큰 공업功業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석하다.
문제文帝(劉義隆)
注+[頭註]문제文帝는 유의륭劉義隆이다. 는 정사에 부지런하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충분히 태평성세의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제멋대로 강한 오랑캐에게 싸움을 걸어 군사들이
하남河南에서 죽고
대代 지방(北魏)
注+[頭註]대代는 북위北魏이다. 의 말이
강진江津에서 물을 마시게 만들었다.
말로에 이르러서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해서 끝내 자식에게 시해당하는 화
注+[頭註]자화子禍(자식의 화禍)는 태자太子 유소劉劭에게 시해당한 것을 이른다. 를 이루었으니, 아마도
문文은 유여하나
무武가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효무제孝武帝(劉駿)
注+[頭註]효무제孝武帝는 유준劉駿이다. 의 교만하고 음탕함과
명제明帝(劉彧)
注+[頭註]명제明帝는 유욱劉彧이다. 의 시기심으로 볼 때 목을 보전하고 창문 아래(正寢)에서 죽은 것만 해도 다행이니, 어찌 후손이 있겠는가.”
이상 송宋나라는 여덟 군주에 합하여 60년이다.
“진晉나라가 양자강을 건너온 이후로 국가의 위세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제멋대로 횡행하여 중원中原을 호시탐탐 노렸다.
이에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맨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환현桓玄을 죽여서 진晉나라를 찬탈한 역적을 토벌하고 진晉나라 황실을 부흥시켰으니, 진실로 크게 공이 있다고 자부할 만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직접 찬탈을 행하여 군주를 폐위한 뒤에 다시 군사로 지키게 하였다가 또다시 한 달이 지나자 그를 시해하였으니, 환현桓玄의 화禍에 비하면 더욱더 혹독하다.
이윽고 두 아들이 모두 제명에 죽지 못하였고, 여섯 군주에게 제위帝位를 전함에 모두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도天道가 없겠는가.
그러나 송宋나라 이후로는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찬탈하는 것을 급하게 여겨 탐내는 마음이 더욱 치열해져서 두 번 전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취하였다.
예컨대 제齊‧양梁‧진陳과 북조北朝 이후로는 여러 군주들이 아침에 도모하여 저녁에 취한 자가 즐비하였으니, 또 세상의 변화가 더욱 쇠퇴함과 인심人心이 더욱 박해짐을 징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