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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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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章武元年이라 〈魏黃初二年이라
장무章武 원년元年(신축 221) - 나라 황초黃初 2년이다. -
蜀中 傳言호되 漢帝已遇害라하니 於是 漢中王 發喪制服하고 諡曰孝愍注+[頭註]在國遭亂曰愍이라皇帝라하고
지방의 전하는 말에 나라 헌제獻帝가 이미 살해되었다 하니, 이에 한중왕漢中王을 발표하고 상복喪服을 입고 헌제獻帝시호諡號효민孝愍注+[頭註]나라에서 난을 만난 것을 이라 한다. 皇帝라 하였다.
夏四月 漢中王 卽帝位於武擔之南注+[釋義]武擔山 在成都城北二百步[通鑑要解]此山在西北하니 蓋以在西北이라 就之以卽祚也하니라하야 大赦改元하고 以諸葛亮爲丞相하고 許靖爲司徒하다
여름 4월에 한중왕漢中王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注+[釋義]武擔山은 성도成都의 성 북쪽으로 200보 지점에 있다. [通鑑要解]이 은 서북쪽에 있으니, 건위乾位가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 에 나아가 즉조卽祚(卽位)한 것이다. 사면령을 크게 내리고 연호를 고쳤으며, 제갈량諸葛亮승상丞相으로 삼고 허정許靖사도司徒로 삼았다.
溫公曰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三代之前 海內萬國有民人社稷者 通謂之君이요 合萬國而君之하야 立法度, 班號令注+[頭註] 布也하야 而天下莫敢違者 乃謂之王이요 王德旣衰 彊大之國 能帥諸侯하야 以尊天子者 則謂之霸
삼대三代 이전에 온 천하 모든 나라의 인민人民사직社稷을 보유한 자를 통틀어 이라 일렀고, 모든 나라를 합하여 통치해서 법도法度를 세우고 호령號令을 반포注+[頭註]반포頒布함이다. 하여 천하天下가 감히 어기지 못하는 자라야 비로소 이라 일렀고, 이 이미 쇠한 뒤에 강대국强大國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서 천자天子를 높이는 것을 패자霸者라 일렀다.
自漢儒 推五德生勝注+[頭註]見周得火德注하야 以秦爲閏位注+[釋義]曰 秦本西戎이니 餘分閏位 不足繼周라하야 班固削而不取焉하니 周以(水)[木]而漢以火 宜矣라하니라 不得正王之位하니 如歲月之餘分爲閏也하야 在木火之間이라하야 霸而不王이라
나라의 유자儒者로부터 오행五行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이치注+[頭註]오덕생승五德生勝에 대한 설명은 주득화덕周得火德에 보인다.를 미루어 나라를 윤위閏位로 삼아注+[釋義]고색考索》에 이르기를 “나라는 본래 서융西戎이니 여분의 윤위閏位여서 나라를 계승할 수 없다 하여 반고班固가 삭제하고 취하지 않았으니, 나라는 목덕木德을 하고 나라는 화덕火德을 함이 당연하다.” 하였다. 정식으로 왕의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세월의 여분餘分이 윤달이 되는 것과 같다. 목덕木德화덕火德의 사이에 있다 하여 나라를 패자霸者로 여기고 으로 여기지 않았다.
於是 正閏之論 興矣
이에 정위正位윤위閏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及漢室顚覆 三國鼎峙注+[釋義]三國 漢, 魏, 吳 鼎峙 言三國如鼎之立也하고 晉氏失馭 五胡注+[釋義]謂漢劉元海 匈奴也 後趙石勒 羯也 前燕慕容廆 鮮卑也 前秦苻洪 氐也 後秦姚弋仲 羌也雲擾하며 宋, 魏以降으로 南北注+[釋義] 謂宋, 齊, 梁, 陳이요 謂後魏, 北齊, 後周也分治하야 各有國史하야 互相排黜注+[釋義]謂彼此貶斥也 이라
나라 황실皇室이 전복되자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대치하고,注+[釋義]삼국三國촉한蜀漢이고, 정치鼎峙는 세 나라가 솥발이 서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나라가 통치권을 상실하자 오호五胡注+[釋義]오호五胡유원해劉元海(劉淵)는 흉노족匈奴族이고, 후조後趙석륵石勒갈족羯族이고, 전연前燕모용외慕容廆선비족鮮卑族이고, 전진前秦부홍苻洪저족氐族이고, 후진後秦요익중姚弋仲강족羌族이다. 가 구름처럼 일어나 시끄러웠으며, 이후로는 남북南北注+[釋義]남조南朝을 이르고, 북조北朝후위後魏북제北齊후주後周를 이른다. 이 나뉘어 다스려져 각각 국사國史가 있어서 서로 배척하였다.注+[釋義]호상배출互相排黜은 피차간에 폄하하고 배척함을 이른다. 남조南朝에서는 북조北朝를 일러 삭로索虜라 하고, 북조北朝에서는 남조南朝를 일러 도이島夷라 하였다.
朱氏代唐注+[釋義]後梁朱晃受唐禪하니라 四方幅裂하고入汴注+[釋義]後唐莊宗李存勖 本姓朱邪氏 入汴滅後梁이라 按朱邪 處月之別種이니 西突厥苗裔 本號朱邪 世居金婆山之陽蒲類海東이라 其地有大磧하야 名沙陀하니 後因以沙陀爲號하고 以朱邪爲姓이라 唐憲宗時 有朱邪盡忠 始見於中國이러니 懿宗時 賜姓李하고 名國昌하니 克用 其子也 比之窮, 新注+[釋義] 謂后羿也 簒國하야 自號有窮하고 謂王莽이니 簒位하야 國號新室이라하야 運歷年紀 皆棄而不數하니 此皆偏辭 非公論也
주씨朱氏(朱全忠)가 나라를 대신하자注+[釋義]후량後梁주황朱晃(朱全忠)이 나라의 선양禪讓을 받았다. 사방이 분열되었고, 주사씨朱邪氏(李存勖)가 변경汴京에 들어오자注+[釋義]후당後唐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은 본래 주사씨朱邪氏이니, 변경汴京에 들어와 후량後梁을 멸망시켰다. 살펴보건대 주사朱邪처월處月별종別種이니 서돌궐족西突厥族의 후예이다. 본래 칭호가 주사朱邪이니, 대대로 금파산金婆山양포陽蒲 유해類海 동쪽에 거주하였다. 이 지역에는 큰 사막이 있어 이름을 사타沙陀라 하였는데, 뒤에 인하여 사타沙陀를 칭호로 삼고 주사朱邪으로 삼았다. 나라 헌종憲宗 때에 주사진충朱邪盡忠이 처음 중국에 출현하는데, 의종懿宗 때에 국성國姓이씨성李氏姓국창國昌이란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이극용李克用은 그의 아들이다. 옛날 나라를 찬탈한 유궁씨有窮氏나라를 찬탈한 왕망王莽나라注+[釋義]:후예后羿를 이르니 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유궁有窮이라 이름하였고, 나라는 왕망王莽을 이르니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실新室이라 하였다. 에 비유하여 역법曆法기년紀年을 모두 버리고 세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편벽된 말이요 공정한 의론이 아니다.
今此書 獨以周, 秦, 漢, 晉, 隋, 唐으로 爲正統하야 其後子孫 雖微弱播遷注+[頭註]播散也이나 猶承祖宗之業하니 四方與之爭衡者 皆其故臣也
그러므로 지금 이 책에서는 오직 나라‧나라‧나라‧나라‧나라‧나라만을 정통으로 삼아서 그 뒤의 자손들이 비록 미약하고 유리流離注+[頭註]파천播遷은 흩어짐이다. 하였으나 오히려 조종祖宗기업基業을 잇게 하였으니, 사방에서 이들과 더불어 우열優劣을 다투는 자들이 모두 옛 신하이기 때문이다.
全用天子之制以臨之하고 至於天下離析하야 本非君臣者 皆以列國之制處之
그러므로 완전히 천자天子의 제도를 써서 그들에게 임하였고, 천하가 분열되어서 본래 군신君臣 관계가 아닌 자에 있어서는 모두 열국列國의 제도로 대하였다.
이나 不可無歲時月日以事之先後
그러나 세시歲時(年과 사시四時)와 월일月日로써 일의 선후先後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漢傳於魏而晉受之하고 晉傳於宋이러니 以至於陳而隋取之하고 唐傳於梁하야 以至於周而大宋承之
나라가 나라에 전하여 나라가 받았고, 나라가 (南朝)나라에 전하였는데 나라에 이르러 나라가 취하였으며, 나라가 나라에 전하여 나라에 이르러서 대송大宋이 이어받았다.
不得不取其年號하야 以紀其國之事 非尊此而卑彼하야 有正閏之辨也
그러므로 그 연호年號를 취하여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요,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정위正位윤위閏位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昭烈之於漢 雖云中山靖王之後라하나 而族屬疎遠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하니 亦猶南唐烈祖稱吳王恪後注+[頭註]吳字 恐誤하니 唐書 吳王恪 是太宗子也 而建王恪 乃憲宗子也하야 是非難辨이라
소열昭烈나라에 있어서는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나 족속族屬이 소원하여 그 대수代數명칭名稱지위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으니, 또한 남당南唐열조烈祖 이변李昪오왕吳王 이각李恪의 후손이라고 자칭自稱한 것注+[頭註]오자吳字오자誤字인 듯하니, 《당서唐書》에 오왕吳王 태종太宗의 아들이요, 건왕建王 이 바로 헌종憲宗의 아들이다. 과 같아서 시비是非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故不敢以光武及晉注+[頭註]東晉이라元帝爲比하야 使得紹漢氏之遺統也로라
그러므로 감히 동한東漢광무제光武帝서한西漢을 계승한 것과 동진東晉注+[頭註]동진東晉이다. 원제元帝서진西晉을 계승한 것에 비유하여 나라의 전통傳統을 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胡氏管見曰
호인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司馬氏以昭烈 於中山靖王 族屬疎遠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하야 是非難辨이라하야 遂抑之하야 不使得紹漢統하니 則未知其去取之意也
사마온공司馬溫公소열제昭烈帝중산정왕中山靖王에 있어서 족속族屬이 소원하여 그 대수代數명칭名稱지위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어 시비是非를 분별하기 어렵다고 해서 마침내 억제하여 나라의 대통大統을 이을 수 없게 하였으니, 그 거취去取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自司馬氏 至三國 七百餘年이니 固不詳昭烈之世數어니와 而諸葛公 去中山靖王 才(纔)三百餘年이라
사마온공司馬溫公으로부터 삼국三國까지는 700여 년이니 진실로 소열昭烈대수代數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제갈량諸葛亮중산정왕中山靖王과의 간격은 겨우 300여 년이다.
草廬之時 卽稱昭烈爲帝室之冑하니 豈憑虛無據而云爾耶
제갈량諸葛亮초려草廬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 곧바로 소열昭烈을 칭하여 황실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믿고 근거 없이 이렇게 말하였겠는가.
이로되 司馬氏尙係諸秦晉하야 不革而正之
진시황秦始皇으로 말하면 분명히 여불위呂不韋의 자식이고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소리小吏우금牛金의 소생임이 명백한데도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오히려 나라와 나라의 뒤를 잇게 하고 고쳐서 바로잡지 않았다.
乃推獎荀彧하고 寬宥曹操하야 至謂操取天下於群盜 非取之於漢室이라하고
그리고는 마침내 순욱荀彧을 추대하고 장려하며 조조曹操를 너그럽게 용서해서, 심지어는 조조曹操가 천하를 여러 도둑에게서 취하였고 나라 황실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하였으며,
而抑退漢之昭烈하야 不少假借하고 하니 亦獨何哉
나라 소열제昭烈帝를 억누르고 물리쳐서 조금도 봐주지 않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북쪽으로 나라를 정벌한 곳에는 ‘입구入寇’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유독 무슨 이유에서인가?”
[新增]尹氏曰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按陳壽志하면 昭烈 涿縣人이요 中山靖王勝之後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살펴보면 ‘소열昭烈탁현涿縣 사람이고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勝子正 元狩六年 封涿縣陸城亭侯러니 坐酎金注+[頭註]見九卷이라失侯하야 因家焉하다
유승劉勝의 아들 유정劉正원수元狩 6탁현涿縣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는데, 주금酎金注+[頭註]주금酎金에 대한 내용은 본서本書 9권의 무제武帝 원광元光 6년조年條(B.C.129)에 보인다.에 걸려 의 지위를 잃고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이요이니 生昭烈이라하야 其世次本末甚明이라
조부는 이고 부친은 이니 소열昭烈을 낳았다.’ 하여 그 세차世次본말本末이 매우 분명하다.
又按歐陽脩五代史하면 載南唐世家하니 徐州人이라
구양수歐陽脩의 《오대사五代史》를 살펴보면 〈남당세가南唐世家〉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이변李昪서주徐州 사람이다.
世本微賤하고 父榮 遇唐末之亂하야 不知所終이라
대대로 본래 미천하였고 아버지 이영李榮나라 말기의 난리를 만나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昪少孤어늘 楊行密 養以爲子하고 又乞與徐溫하야 因冒姓徐라가 至簒吳之後하야 始復姓李하고 自言唐憲宗子建王恪之後
이변李昪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양행밀楊行密이 길러 자식으로 삼았고, 또 서온徐溫에게 주어서 인하여 서씨徐氏 을 따르다가 땅을 찬탈한 뒤에 비로소 이씨李氏 을 회복하고는 스스로 나라 헌종憲宗의 아들인 건왕建王 의 후손이라 했다.’ 하였다.
及考通鑑하면 則曰唐主欲祖吳王恪이러니 或曰恪誅死하니 不若祖鄭王元懿注+[頭註]元懿 唐太宗弟라한대 唐主命有司하야 考二王苗裔하니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살펴보면 ‘당주唐主(南唐의 군주 이변李昪)가 오왕吳王 선조先祖로 삼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吳王 은 죄를 짓고 죽었으니, 정왕鄭王 원의元懿注+[頭註]원의元懿나라 태종太宗의 아우이다. 선조先祖로 삼는 것만 못하다.」하자, 당주唐主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두 의 후손들을 상고하게 하였는 바,
以吳王孫禕有功하고 禕子峴 爲宰相이라하야 遂祖吳王하야 〈云〉自峴五世至父榮이라하니 其名 率皆有司所撰이라
오왕吳王손자孫子 이 있고 의 아들 이 재상이 되었다 하여 마침내 오왕吳王을 선조로 삼아 으로부터 5대를 지나 아버지 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이름이 모두 유사有司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였다.
此與昭烈 大相遼絶이라
이는 소열제昭烈帝와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況諸葛 一見昭烈 首稱將軍帝室之冑하고 及後求救孫權에도 亦以豫州王室之冑 對權稱之하니 固非妄言者也
더구나 제갈량諸葛亮이 한 번 소열제昭烈帝를 보자 맨 먼저 ‘장군은 황실皇室후손後孫’이라고 칭하였고, 뒤에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할 때에도 손권孫權을 대하여 ‘유예주劉豫州왕실王室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니, 제갈량諸葛亮은 진실로 함부로 말하는 자가 아니다.
是以 張松之說劉璋에도 且謂豫州使君之宗室이요 而異時苻堅答苻融諫伐晉之語에도 亦曰劉禪注+[頭註]昭烈帝子 可非漢之遺祚注+[頭註] 福也 與胙通하니 福之하야 使社稷之長曰胙리오
이 때문에 장송張松유장劉璋을 설득할 때에도 ‘유예주劉豫州사군使君종실宗室’이라고 말하였고, 다른 날에 부견苻堅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하는 부융苻融에게 대답한 말에 또한 이르기를 ‘유선劉禪注+[頭註]유선劉禪소열제昭烈帝(劉備)의 아들이다. 나라의 유조遺祚(後嗣)注+[頭註]는 복이다. 와 통하니, 복을 주어 사직社稷을 장구하게 하는 것을 라 한다.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나 亦爲中國所幷이라하니 然則昭烈之爲漢裔 顯顯無疑하니 以之紹統 夫復何說이리오
그러나 또한 중국中國에게 겸병당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소열昭烈나라 황실의 후손이 됨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는 바, 이로써 대통大統을 이음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是年 曹丕旣立일새 昭烈 卽正位號하야 不使漢統墜地하니 深合事宜
이 해에 조비曹丕가 즉위하자 소열昭烈이 곧바로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나라의 국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사리의 마땅함에 깊이 부합한다.
其與光武卽位于鄗하고 晉元卽位江左 先後一轍이니 固非其他僭竊急於自帝者之比
광무제光武帝에서 즉위하고 나라 원제元帝강좌江左에서 즉위한 것과 전후로 자취가 똑같으니, 진실로 기타의 참람하게 도둑질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함을 급하게 여긴 자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斯事 在綱目中 最其大者
이 일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가운데 가장 중대한 일이다.
予故 歷考巓末하야 詳而辨之하야 以告後之君子하고 亦使朱子秉筆之志 暴白於天下耳
나는 그러므로 전말顚末을 낱낱이 상고하고 자세히 분별하여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고하고, 또한 주자朱子가 붓을 잡아 기록한 뜻을 온 천하에 밝게 드러내는 바이다.”
備錄尹氏發明綱目之義于此하야 以祛注+[頭註]却也學者之惑云이라
나(劉剡)는 이 때문에 윤씨尹氏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뜻을 발명發明한 것을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여 배우는 자의 의혹을 제거注+[頭註]는 물리침이다. 하는 바이다.”
立宗廟하고 祫祭注+[通鑑要解] 胡夾切이니 大合祭 三年一祫, 五年一禘하고 禘以夏四月, 祫以冬十月이라 禘之爲言 諦也 諦審昭穆尊卑之義 祫者 合也 冬十月 五穀成이라 骨肉合飮食於太祖하니라高皇帝以下하다
종묘宗廟를 세우고 고황제高皇帝 이하에게 협제사祫祭祀注+[通鑑要解]은 음이 胡夾切(협)이니, 크게 합사合祀하는 것이다. 3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고 5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며, 제사는 여름 4월에 지내고 제사는 겨울 10월에 지낸다. 라는 말은 살핀다는 뜻이니 소목昭穆존비尊卑를 살핀다는 뜻이요, 은 합한다는 뜻이니 겨울 10월에는 오곡五穀이 성숙하였기 때문에 친족親族들이 태조太祖의 사당에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이다. 를 지냈다.
○ 五月 立夫人吳氏注+[頭註]將軍懿之妹 劉璋兄之瑁之妻하야 爲皇后하고 子禪注+[頭註]甘皇后子也爲皇太子하다
○ 5월에 부인 오씨吳氏注+[頭註]오씨吳氏장군將軍 오의吳懿의 누이이고, 유장劉璋의 형인 유모劉瑁이다. 를 세워 황후로 삼고, 아들 注+[頭註]유선劉禪감황후甘皇后가 낳은 아들이다. 을 황태자로 삼았다.
○ 帝恥關羽之沒하야 將擊孫權할새 群臣諫者甚衆호되 帝皆不聽하다
소열제昭烈帝관우關羽가 전사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장차 손권孫權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군신群臣들 중에 간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소열제昭烈帝는 모두 듣지 않았다.
車騎將軍張飛 雄壯威猛 亞於關羽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비張飛웅장雄壯함과 위엄과 용맹이 관우關羽의 다음이었다.
善待卒伍而驕於士大夫하고 愛禮君子而不恤軍人하니
관우關羽사졸士卒들을 잘 대우하였으나 사대부士大夫에게는 교만하였고, 장비張飛군자君子를 사랑하고 예우하였으나 사졸士卒들을 돌보지 않으니,
帝常戒飛曰 卿 刑殺旣過差하고 又日鞭健兒而令在左右하니 取禍之道라호되 飛猶不이러라
소열제昭烈帝가 항상 장비張飛에게 훈계하기를 “은 형벌하여 죽임이 지나치고 또 날마다 건장한 군사들을 매질하고는 그들을 좌우의 측근에 있게 하니, 이는 를 취하는 길이다.” 하였으나 장비張飛는 오히려 고치지 않았다.
帝將伐孫權할새 飛當率兵萬人하고 自閬州 會江州注+[釋義]括地志 江州 在巴子都之北하니 又峽州界러니 臨發 其帳下張達, 范彊 殺飛하고 以其首 順流奔孫權이라
소열제昭烈帝가 장차 손권孫權을 정벌하려 할 적에 장비張飛가 병졸 만 명을 인솔하고 낭주閬州로부터 강주江州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강주江州파자도巴子都의 북쪽에 있으니, 또 협주峽州의 경계이다.” 하였다.에 이르러 모이기로 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임하여 장비張飛 막하幕下에 있던 장달張達범강范彊장비張飛를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가지고 물길을 따라 손권孫權에게 달려가 투항하였다.
帝聞飛營都督有表하고 曰 噫
소열제昭烈帝장비張飛 군영의 도독都督표문表文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이르기를 “아!
飛死矣注+[頭註] 恨聲이라 飛當自表어늘 而都督越次上之 知其必死也라하니라
장비張飛가 죽었구나.”注+[頭註]는 한탄하는 소리이다. 장비張飛가 직접 표문表文을 올려야 하는데, 도독都督이 서열을 건너뛰어 표문表文을 올렸으므로 유비劉備장비張飛가 반드시 죽었음을 안 것이다. 하였다.
陳壽評曰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關羽張飛 皆稱萬人之敵하니 爲世虎臣이라
관우關羽장비張飛는 모두 만인萬人을 대적할 수 있다고 일컬어졌으니, 세상의 용맹한 신하였다.
羽報效曹公하고 飛義釋嚴顔注+[附註]飛與諸葛亮으로 攻劉璋하야 破嚴顔生獲이라 飛呵顔曰 大軍至어늘 何以不降 顔曰 卿等無狀하야 侵奪我州하니 我州 但有斷頭將軍이요 無降將軍이니라 飛怒하야 令左右斫頭한대 顔色不變曰 斫頭 便斫頭 何爲怒耶아하니 飛壯而釋之하고 引爲賓客하니라하야 竝有國士之風이라
관우關羽조공曹公(曹操)에게 보답하였고 장비張飛는 의롭게 엄안嚴顔注+[附註]장비張飛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유장劉璋을 공격하여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장비張飛엄안嚴顔을 꾸짖기를 “대군大軍이 왔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는가?” 하니, 엄안嚴顔이 말하기를 “들이 무상無狀(형편없는)한 짓을 하여 우리 를 침탈하였으니, 우리 는 다만 단두장군斷頭將軍(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한 장군)만이 있을 뿐이요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 하였다. 장비張飛가 노하여 좌우 사람들로 하여금 작두로 머리를 베게 하자, 엄안嚴顔은 낯빛을 바꾸지 않으며 말하기를 “머리를 자르려면 곧바로 머리를 자르면 되었지 어찌 노여워하는가?” 하였다. 장비張飛는 그를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는 인도하여 빈객으로 삼았다. 을 풀어 주어 모두 국사國士풍도風度가 있었다.
이나 羽剛而自矜하고 飛暴而無恩하야 以短取敗하니 理數之常也니라
그러나 관우關羽강퍅剛愎하고 스스로 과시하였고 장비張飛는 포악하고 은혜가 없어서 이러한 단점 때문에 실패를 취하였으니, 이는 이치와 운수에 당연한 것이다.”
七月 帝自率諸軍하고 擊孫權하니 以鎭西將軍陸遜으로 爲大都督하야 以拒之하다
7월에 황제가 직접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손권孫權을 공격하니, 손권孫權진서장군鎭西將軍 육손陸遜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막게 하였다.
○ 八月 吳孫權 遣使稱臣하고 卑辭奉章하야 幷送于禁等還注+[頭註]己亥年 操使曹仁討關羽할새 遣禁助仁이러니 禁降羽 孫權擒羽하야 禁在吳러니 權稱藩魏하고 遣禁還이라하니
○ 8월에 나라 손권孫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라 칭하고 언사言辭를 낮추어 주장奏章을 올리면서 우금于禁 등을 함께 보내어 나라로 돌려보내었다.注+[頭註]기해년(建安 24년)에 조조曹操조인曹仁으로 하여금 관우關羽를 토벌하게 하면서 우금于禁을 보내어 조인曹仁을 돕게 하였는데, 우금于禁관우關羽에게 패하여 항복하였다. 손권孫權관우關羽를 사로잡아 우금于禁나라에 있었는데, 손권孫權나라에 번신藩臣을 칭하고 우금于禁나라로 돌려보내었다.
朝臣 皆賀호되 劉曄 獨曰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유엽劉曄만은 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無故來降하니 必內有急이라
손권孫權이 까닭 없이 와서 항복하니, 반드시 국내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前襲殺關羽하니 劉備必大興師伐之
손권孫權이 지난번에 관우關羽를 기습하여 죽였으니, 유비劉備가 반드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 정벌할 것입니다.
外有彊寇하야 衆心 不安하고 又恐中國 往乘其釁이라 委地求降하야 一以却中國之兵하고 二以假中國之援하야 以彊其衆而疑敵人耳
손권孫權은 밖에 강한 적이 있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또 중국中國(우리나라)이 가서 그 틈을 타 공격할까 두렵기 때문에 땅을 바치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한편으로는 중국中國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中國의 원조를 빌어서 그들의 무리를 강하게 하여 적들을 의심하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天下三分 中國 十有其八하고 吳, 蜀 各保一州注+[頭註]謂吳保揚, 蜀保益也하야 阻山依水注+[頭註] 恃也 恃險自固하니 有急相救 小國之利也어늘 今還自相攻하니 天亡之也
천하가 셋으로 나누어짐에 중국中國이 열에 여덟을 소유하고 은 각각 한 를 보전하여注+[頭註]각각 한 를 보전하였다는 것은 나라는 양주揚州를 보전하고, 촉한蜀漢익주益州를 보전함을 이른다. 산수山水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니,注+[頭註]는 믿음이니, 험고한 지형을 믿고 스스로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구원한다면 이는 약소국에게 유리할 터인데, 이제 도리어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니 하늘이 이들을 멸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宜大興師하야 徑渡江襲之하야 蜀攻其外하고 我襲其內 吳之亡 不出旬月矣리이다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 기습하여 은 그 밖을 공격하고 우리는 그 안을 기습한다면 나라의 멸망은 열흘 내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吳亡則蜀孤하리니 若割吳之半하야 以與蜀이라도 蜀固不能久存이온 況蜀得其外하고 我得其內乎잇가
나라가 망하면 이 고립될 것이니, 만약 나라의 절반을 떼어 에 준다 하더라도 은 본래 오래 보존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은 그 밖(吳나라의 변두리 지역)을 얻고 우리는 그 안(吳나라의 수도)을 얻음에 있어서겠습니까.”
魏主曰 人 稱臣降이어늘 而伐之 疑天下欲來者心이니 不若且受吳降而襲蜀之後也라하고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신하라고 칭하고 항복하는데 그를 정벌한다면 천하에 귀부歸附하려는 자들의 마음을 의심하게 할 것이니, 우선 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의 후미를 습격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遂受吳降하고 遣太常邢貞하야 奉策注+[頭註] 與冊通하니 符命也하야注+[頭註]就也 就其所居而拜之也拜孫權爲吳王하고 加九錫하다
마침내 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태상太常 형정邢貞을 보내어 책명策命注+[頭註]과 통하니, 부명符命(황제의 명령)이다. 을 받들고 가서注+[頭註]은 나아감이니, 그 처소에 나아가 임명하는 것이다. 손권孫權을 임명하여 오왕吳王으로 삼고 구석九錫가사加賜하였다.
邢貞 至吳 吳王 出都亭候貞이러라
형정邢貞나라에 이르자, 오왕吳王도정都亭으로 나와 형정邢貞을 맞이하였다.
入門 不下車한대 張昭謂貞曰 夫禮無不敬이요 法無不行이어늘 而君 敢自尊大하니 豈以江南寡弱하야 無方寸之刃乎 貞卽下車하다
형정邢貞이 문에 들어가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장소張昭형정邢貞에게 이르기를 “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은 행하지 않음이 없는데, 이 감히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어찌 우리 강남江南이 적고 약하여 한 치의 칼날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형정邢貞이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中郞將徐盛 忿憤하야 顧謂同列曰
중랑장中郞將 서성徐盛은 분하고 원통하여 동렬同列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盛等 不能爲國家하야 幷許洛, 呑巴蜀하고 而令吾君으로 與貞盟하니 不亦辱乎아하고 因涕泣橫流하니
“우리들이 나라를 위하여 허도許都낙양洛陽을 겸병하고 을 병탄하지 못하여 우리 군주로 하여금 형정邢貞과 맹세하게 하니, 치욕스럽지 않은가.” 하고는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니,
聞之하고 謂其徒曰 江東將相 如此하니 非久下人者也로다
형정邢貞이 이 말을 듣고 그의 무리에게 이르기를 “강동江東의 장수와 정승이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하였다.
〈孫權傳註〉
-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서성전徐盛傳》 에 나옴 -
吳主遣中大夫趙咨入謝하니
오주吳主중대부中大夫 조자趙咨나라에 보내어 들어가 사례하게 하였다.
魏主丕問咨曰 吳王 何等主也 對曰 聰明仁智雄略之主也니이다
위주魏主 조비曹丕조자趙咨에게 묻기를 “오왕吳王은 어떤 군주인가?” 하니,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혜롭고 영웅스럽고 지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하였다.
魏主問其狀한대 對曰 納魯肅於凡品하니 是其聰也 拔呂蒙於行陳하니 是其明也
위주魏主가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노숙魯肅을 보통 사람 중에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귀가 밝음이요, 여몽呂蒙항오行伍에서 발탁하였으니 이는 총명함이요,
獲于禁而不害하니 是其仁也 取荊州 兵不血刃하니 是其智也
우금于禁을 사로잡고도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함이요, 형주荊州를 취할 적에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지혜로움이요,
據三州注+[頭註]荊, 揚, 交也하야 虎視於天下하니 是其雄也 屈身於陛下하니 是其略也니이다
삼주三州注+[頭註]삼주三州형주荊州양주揚州교주交州이다. 를 점거하여 천하를 범처럼 노려보고 있으니 이는 영웅스러움이요, 폐하에게 몸을 굽히니 이는 지략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丕曰 吳王頗知學乎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오왕吳王이 자못 학문을 아는가?” 하니,
咨曰 吳王 浮江萬艘 帶甲百萬이요 任賢使能하고 志存經略하야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오왕吳王은 강에 떠 있는 배가 만 척이고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며,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리며, 뜻이 사방을 경략經略함에 있어서
雖有餘閑하야 博覽書傳하고 歷史籍하야 采奇異 不效書生尋章擿(摘)句而已注+[頭註]魏主好文章이라 咨以此譏之니이다
비록 여가에 서책을 널리 보고 사적史籍을 섭렵하여 기이한 정화精華를 채택하나 서생書生들이 을 찾고 문구文句를 따다가 쓰는注+[頭註]위주魏主가 문장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조자趙咨가 이 말로써 기롱한 것이다. 것은 본받지 않습니다.” 하였다.
丕曰 吳可征不(否)아 對曰 大國 有征伐之兵하고 小國 有備禦之固注+[通鑑要解]此二語 本之管子하니라니이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국大國은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소국小國은 수비하는 견고함이 있습니다.”注+[通鑑要解]大國有征伐之兵 소국유비어지고小國有備禦之固:이 두 마디 말은 《관자管子》에서 근본한 것이다. 하였다.
丕曰 吳難魏乎 對曰 帶甲 百萬이요 江漢爲池하니 何難之有리잇고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나라가 나라를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고 양자강揚子江한수漢水를 참호로 삼으니, 어찌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丕曰 吳如大夫者幾人 對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이요 如臣之比 車載斗量이라 不可勝數니이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나라에 대부大夫(趙咨)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명하여 특별히 통달한 자가 8, 90명이요, 신과 같은 무리는 수레로 싣고 말[斗]로 헤아릴 정도여서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역주
역주1 乾位 : 乾卦는 文王 後天에 있어 西北方인 바, 乾은 군주를 상징하므로 成都의 서북쪽에 있는 武擔山에서 즉위한 것이다.
역주2 五德生勝 : 金‧木‧水‧火‧土를 일러 五德이라 하고 生勝은 相生과 相剋을 아울러 이른 말로, 이에 대한 설명은 본서 3권 始皇帝 26년(경진 B.C.221) 周得火德의 注에 보인다.
역주3 考索 : 《群書考索》의 줄임말로 보이나 위의 내용이 《群書考索》에 보이지 않는다.
역주4 南謂北爲索虜 北謂南爲島夷 : 索虜의 索은 辮髮을 가리키는 바, 북방 사람들이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요, 島夷는 섬 오랑캐라는 뜻으로 동남쪽은 바닷가에 가까워 지대가 낮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역주5 : 야
역주6 : 지
역주7 南唐烈祖稱吳王恪後 : 《資治通鑑考異》에 “《周世宗實錄》과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李昪이 唐 玄宗의 여섯째 아들인 永王 璘의 후예이다.’ 하였고, 《江南錄》에는 ‘憲宗의 여덟째 아들인 建王 恪의 玄孫이다.’ 하였고, 李昊의 《蜀後主實錄》에는 ‘唐나라의 皇子인 薛王 知柔가 嶺南節度使가 되어 관청에서 죽었는데, 그 아들 知誥가 江淮 지방에 유리하다가 마침내 徐溫의 養子가 되었다.’ 하였고, 《吳越備史》에는 ‘李昪은 본래 潘氏로 湖州 安吉 사람이다. 아버지가 安吉砦의 장수로 있었는데, 吳나라 장수 李神福이 衣錦軍을 공격하기 위하여 湖州를 지나다가 李昪을 사로잡아 데리고 와서 노예로 삼았다. 徐溫이 일찍이 李神福을 방문하였는데, 李昪의 근실하고 친후함을 좋아하여 養子로 삼았다. 당시 圖讖에 「東海의 잉어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설이 있었는 바, 李昪이 처음에 李神福을 섬기다가 뒤에 徐溫에게 귀의하였으므로 李氏 姓을 따라 圖讖說에 응했다.’ 하였다. 劉恕는 말하기를 ‘李昪은……진실로 李氏가 아니다.……李昪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난리를 만나서 그 先祖를 모른다.’ 했다.[考異曰 周世宗實錄及薛史稱昪唐玄宗第六子永王璘苗裔 江南錄云 憲宗第八子建王恪之玄孫 李昊蜀後主實錄云 唐嗣薛王知柔爲嶺南節度使 卒於官 其子知誥流落江淮 遂爲徐溫養子 吳越備史云 昪本潘氏 湖州安吉人 父爲安吉砦將 吳將李神福攻衣錦軍 過湖州 虜昪歸 爲僕隸 徐溫嘗過神福 愛其謹厚 求爲養子 以讖云 東海鯉魚飛上天 昪始事神福 後歸溫 故冒李氏以應讖 劉恕以爲昪……固非李氏……昪少孤遭亂 莫知其祖系]” 하였다.
역주8 傾蓋 : 수레를 멈추고 日傘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우연히 한 번 보고 서로 친해짐을 이른다. 孔子가 길을 가다가 程本을 만나 수레의 덮개를 젖히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역주9 秦始皇……顯著小吏牛金所生 : 秦始皇의 아버지 莊襄王이 趙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呂不韋의 애첩을 얻어서 始皇을 낳았는 바, 실은 呂不韋의 아들이라 하며, 睿는 晉 元帝의 이름인데, 어머니 夏侯氏가 牛氏와 간통하여 元帝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 《晉書》에 “옛날 玄石圖에 소가 말을 계승[牛繼馬後]하는 像이 있으므로 宣帝(司馬懿)가 牛氏를 매우 꺼린 나머지 〈장수인 牛金을 살해하기 위하여〉 마침내 두 개의 통에 주둥이가 하나로 된 술병을 만들어 한쪽에는 좋은 술, 한쪽에는 毒酒를 각기 담아 놓았다가 자신은 좋은 술을 먼저 마시고 독주로 牛金을 鴆殺하였다. 그러나 恭妃(宣帝의 손자인 恭王의 비) 夏侯氏가 끝내 小吏인 牛氏와 간통하여 元帝를 낳았으니, 또한 符驗(징험)이 있었다.[初 玄石圖有牛繼馬後故 宣帝深忌牛氏 遂爲二榼共一口以貯酒焉 帝先飮佳者 而以毒酒鴆其將牛金 而恭王妃夏侯氏 竟通小吏牛氏而生元帝 亦有符云]” 하였다.
역주10 於孔明北伐 以入寇書之 : 昭烈帝 劉備가 죽고 劉禪이 즉위하자 諸葛亮은 魏나라로 出征하였다. 이를 두고 陳壽의 《三國志》에 ‘諸葛亮入寇’라고 썼는데, 司馬光의 《資治通鑑》에도 이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썼으니, 이것은 魏나라에 正統을 준 것이다.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는 蜀漢에 正統을 주어 諸葛亮이 군대를 일으킨 경우에는 “魏나라를 정벌했다.[伐魏]”고 고쳐 쓰고 魏나라 군대가 국경을 침범한 경우에는 “入寇”라고 고쳐 썼다.
역주11 酎金 : 漢나라 제도에 정월 초하루 아침에 술을 만들어서 8월에 비로소 익으면 이름을 酎라 하니, 酎라는 말은 醇酒라는 뜻이다. 武帝는 순주를 宗廟에 바치고 인하여 순주를 맛보면서 諸侯들을 사당 안에 모으고 金을 바쳐 제사를 돕게 하였으니, 이른바 酎金이란 것이다. 황제는 제후왕들이 올린 금을 살펴보고서 조금이라도 斤兩에 차이가 있거나, 혹 金의 색깔이 나쁘면 王은 작위를 삭탈하고 諸侯는 나라를 멸망시켰다.
역주12 : 변
역주13 : 本書를 增校한 劉剡이 자신을 낮추어 칭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4 : 과
역주15 : 전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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