蜀中
이 傳言
호되 漢帝已遇害
라하니 於是
에 漢中王
이 發喪制服하고 諡曰孝愍
注+[頭註]在國遭亂曰愍이라皇帝
라하고
夏四月
에 漢中王
이 卽帝位於武擔之南
注+[釋義]武擔山은 在成都城北二百步라[通鑑要解]此山在西北하니 蓋以在西北이라 故로 就之以卽祚也하니라하야 大赦改元
하고 以諸葛亮爲丞相
하고 許靖爲司徒
하다
三代之前
에 海內萬國有民人社稷者
를 通謂之君
이요 合萬國而君之
하야 立法度, 班號令
注+[頭註]班은 布也라하야 而天下莫敢違者
를 乃謂之王
이요 王德旣衰
에 彊大之國
이 能帥諸侯
하야 以尊天子者
를 則謂之霸
라
自漢儒
로 推五德生勝
注+[頭註]見周得火德注라하야 以秦爲閏位
注+[釋義]曰 秦本西戎이니 餘分閏位라 不足繼周라하야 班固削而不取焉하니 周以(水)[木]而漢以火 宜矣라하니라 不得正王之位하니 如歲月之餘分爲閏也라하야 在木火之間
이라하야 霸而不王
이라
及漢室顚覆
에 三國鼎峙
注+[釋義]三國은 漢, 魏, 吳요 鼎峙는 言三國如鼎之立也라하고 晉氏失馭
에 五胡
注+[釋義]謂漢劉元海는 匈奴也요 後趙石勒은 羯也요 前燕慕容廆는 鮮卑也요 前秦苻洪은 氐也요 後秦姚弋仲은 羌也라雲擾
하며 宋, 魏以降
으로 南北
注+[釋義]南은 謂宋, 齊, 梁, 陳이요 北은 謂後魏, 北齊, 後周也라分治
하야 各有國史
하야 互相排黜
注+[釋義]謂彼此貶斥也라 라이라
朱氏代唐
注+[釋義]後梁朱晃受唐禪하니라에 四方幅裂
하고 朱
入汴
注+[釋義]後唐莊宗李存勖은 本姓朱邪氏니 入汴滅後梁이라 按朱邪는 處月之別種이니 西突厥苗裔라 本號朱邪니 世居金婆山之陽蒲類海東이라 其地有大磧하야 名沙陀하니 後因以沙陀爲號하고 以朱邪爲姓이라 唐憲宗時에 有朱邪盡忠이 始見於中國이러니 懿宗時에 賜姓李하고 名國昌하니 克用은 其子也라에 比之窮, 新
注+[釋義]窮은 謂后羿也니 簒國하야 自號有窮하고 新은 謂王莽이니 簒位하야 國號新室이라하야 運歷年紀
를 皆棄而不數
하니 此皆偏辭
요 非公論也
라
故
로 今此書
에 獨以周, 秦, 漢, 晉, 隋, 唐
으로 爲正統
하야 其後子孫
이 雖微弱播遷
注+[頭註]播散也라이나 猶承祖宗之業
하니 四方與之爭衡者
는 皆其故臣也
라
故로 全用天子之制以臨之하고 至於天下離析하야 本非君臣者는 皆以列國之制處之라
漢傳於魏而晉受之하고 晉傳於宋이러니 以至於陳而隋取之하고 唐傳於梁하야 以至於周而大宋承之라
故로 不得不取其年號하야 以紀其國之事요 非尊此而卑彼하야 有正閏之辨也라
昭烈之於漢
에 雖云中山靖王之後
라하나 而族屬疎遠
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
하니 亦猶南唐烈祖稱吳王恪後
注+[頭註]吳字는 恐誤하니 唐書에 吳王恪은 是太宗子也요 而建王恪이 乃憲宗子也라하야 是非難辨
이라
故不敢以光武及晉
注+[頭註]東晉이라元帝爲比
하야 使得紹漢氏之遺統也
로라
司馬氏以昭烈이 於中山靖王에 族屬疎遠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하야 是非難辨이라하야 遂抑之하야 不使得紹漢統하니 則未知其去取之意也라
自司馬氏로 至三國은 七百餘年이니 固不詳昭烈之世數어니와 而諸葛公은 去中山靖王이 才(纔)三百餘年이라
草廬
之時
에 卽稱昭烈爲帝室之冑
하니 豈憑虛無據而云爾耶
아
乃推獎荀彧하고 寬宥曹操하야 至謂操取天下於群盜요 非取之於漢室이라하고
而抑退漢之昭烈
하야 不少假借
하고 하니 亦獨何哉
아
按陳壽志하면 昭烈은 涿縣人이요 中山靖王勝之後라
勝子正
이 元狩六年
에 封涿縣陸城亭侯
러니 坐酎金
注+[頭註]見九卷이라失侯
하야 因家焉
하다
祖는 雄이요 父는 弘이니 生昭烈이라하야 其世次本末甚明이라
又按歐陽脩五代史
하면 載南唐世家
하니 李
은 徐州人
이라
世本微賤하고 父榮이 遇唐末之亂하야 不知所終이라
昪少孤어늘 楊行密이 養以爲子하고 又乞與徐溫하야 因冒姓徐라가 至簒吳之後하야 始復姓李하고 自言唐憲宗子建王恪之後라
及考通鑑
하면 則曰唐主欲祖吳王恪
이러니 或曰恪誅死
하니 不若祖鄭王元懿
注+[頭註]元懿는 唐太宗弟라라한대 唐主命有司
하야 考二王苗裔
하니
以吳王孫禕有功하고 禕子峴이 爲宰相이라하야 遂祖吳王하야 〈云〉自峴五世至父榮이라하니 其名이 率皆有司所撰이라
況諸葛이 一見昭烈에 首稱將軍帝室之冑하고 及後求救孫權에도 亦以豫州王室之冑로 對權稱之하니 亮은 固非妄言者也라
是以
로 張松之說劉璋
에도 且謂豫州使君之宗室
이요 而異時苻堅答苻融諫伐晉之語
에도 亦曰劉禪
注+[頭註]昭烈帝子라은 可非漢之遺祚
注+[頭註]祚는 福也라 與胙通하니 福之하야 使社稷之長曰胙라리오
然이나 亦爲中國所幷이라하니 然則昭烈之爲漢裔가 顯顯無疑하니 以之紹統이 夫復何說이리오
是年에 曹丕旣立일새 昭烈이 卽正位號하야 不使漢統墜地하니 深合事宜라
其與光武卽位于鄗하고 晉元卽位江左로 先後一轍이니 固非其他僭竊急於自帝者之比라
予故로 歷考巓末하야 詳而辨之하야 以告後之君子하고 亦使朱子秉筆之志로 暴白於天下耳라
故
로 備錄尹氏發明綱目之義于此
하야 以祛
注+[頭註]却也라學者之惑云
이라
立宗廟
하고 祫祭
注+[通鑑要解]祫은 胡夾切이니 大合祭라 三年一祫, 五年一禘하고 禘以夏四月, 祫以冬十月이라 禘之爲言은 諦也니 諦審昭穆尊卑之義요 祫者는 合也니 冬十月에 五穀成이라 故로 骨肉合飮食於太祖하니라高皇帝以下
하다
○ 五月
에 立夫人吳氏
注+[頭註]將軍懿之妹요 劉璋兄之瑁之妻라하야 爲皇后
하고 子禪
注+[頭註]甘皇后子也라爲皇太子
하다
○ 帝恥關羽之沒하야 將擊孫權할새 群臣諫者甚衆호되 帝皆不聽하다
羽는 善待卒伍而驕於士大夫하고 飛는 愛禮君子而不恤軍人하니
帝常戒飛曰 卿
이 刑殺旣過差
하고 又日鞭
健兒而令在左右
하니 此
는 取禍之道也
라호되 飛猶不
이러라
帝將伐孫權
할새 飛當率兵萬人
하고 自閬州
로 會江州
注+[釋義]括地志에 江州는 在巴子都之北하니 又峽州界라러니 臨發
에 其帳下張達, 范彊
이 殺飛
하고 以其首
로 順流奔孫權
이라
飛死矣
注+[頭註]噫는 恨聲이라 飛當自表어늘 而都督越次上之라 故로 知其必死也라라하니라
羽報效曹公
하고 飛義釋嚴顔
注+[附註]飛與諸葛亮으로 攻劉璋하야 破嚴顔生獲이라 飛呵顔曰 大軍至어늘 何以不降고 顔曰 卿等無狀하야 侵奪我州하니 我州는 但有斷頭將軍이요 無降將軍이니라 飛怒하야 令左右斫頭한대 顔色不變曰 斫頭면 便斫頭니 何爲怒耶아하니 飛壯而釋之하고 引爲賓客하니라하야 竝有國士之風
이라
然이나 羽剛而自矜하고 飛暴而無恩하야 以短取敗하니 理數之常也니라
七月에 帝自率諸軍하고 擊孫權하니 權이 以鎭西將軍陸遜으로 爲大都督하야 以拒之하다
○ 八月
에 吳孫權
이 遣使稱臣하고 卑辭奉章하야 幷送于禁等還
注+[頭註]己亥年에 操使曹仁討關羽할새 遣禁助仁이러니 禁降羽라 孫權擒羽하야 禁在吳러니 權稱藩魏하고 遣禁還이라하니
外有彊寇하야 衆心이 不安하고 又恐中國이 往乘其釁이라 故로 委地求降하야 一以却中國之兵하고 二以假中國之援하야 以彊其衆而疑敵人耳라
天下三分
에 中國
이 十有其八
하고 吳, 蜀
은 各保一州
注+[頭註]謂吳保揚, 蜀保益也라하야 阻山依水注+[頭註]阻는 恃也니 恃險自固라하니 有急相救면 此
는 小國之利也
어늘 今還自相攻
하니 天亡之也
라
宜大興師하야 徑渡江襲之하야 蜀攻其外하고 我襲其內면 吳之亡이 不出旬月矣리이다
吳亡則蜀孤하리니 若割吳之半하야 以與蜀이라도 蜀固不能久存이온 況蜀得其外하고 我得其內乎잇가
魏主曰 人이 稱臣降이어늘 而伐之면 疑天下欲來者心이니 不若且受吳降而襲蜀之後也라하고
遂受吳降
하고 遣太常邢貞
하야 奉策
注+[頭註]策은 與冊通하니 符命也라하야 卽
注+[頭註]就也니 就其所居而拜之也라拜孫權爲吳王
하고 加九錫
하다
貞이 入門에 不下車한대 張昭謂貞曰 夫禮無不敬이요 法無不行이어늘 而君이 敢自尊大하니 豈以江南寡弱하야 無方寸之刃乎아 貞卽下車하다
盛等이 不能爲國家하야 幷許洛, 呑巴蜀하고 而令吾君으로 與貞盟하니 不亦辱乎아하고 因涕泣橫流하니
貞이 聞之하고 謂其徒曰 江東將相이 如此하니 非久下人者也로다
魏主丕問咨曰 吳王은 何等主也오 對曰 聰明仁智雄略之主也니이다
魏主問其狀한대 對曰 納魯肅於凡品하니 是其聰也요 拔呂蒙於行陳하니 是其明也요
獲于禁而不害하니 是其仁也요 取荊州에 兵不血刃하니 是其智也요
據三州
注+[頭註]荊, 揚, 交也라하야 虎視於天下하니 是其雄也
요 屈身於陛下
하니 是其略也
니이다
咨曰 吳王은 浮江萬艘요 帶甲百萬이요 任賢使能하고 志存經略하야
雖有餘閑
하야 博覽書傳
하고 歷史籍
하야 采奇異
나 不效書生
尋章擿(摘)句而已
注+[頭註]魏主好文章이라 故로 咨以此譏之라니이다
丕曰 吳可征不(否)아 對曰 大國
은 有征伐之兵
하고 小國
은 有備禦之固
注+[通鑑要解]此二語는 本之管子하니라니이다
丕曰 吳難魏乎아 對曰 帶甲이 百萬이요 江漢爲池하니 何難之有리잇고
丕曰 吳如大夫者幾人고 對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이요 如臣之比는 車載斗量이라 不可勝數니이다
장무章武 원년元年(신축 221) - 위魏나라 황초黃初 2년이다. -
촉蜀 지방의 전하는 말에
한漢나라
헌제獻帝가 이미 살해되었다 하니, 이에
한중왕漢中王이
상喪을 발표하고
상복喪服을 입고
헌제獻帝의
시호諡號를
효민孝愍注+[頭註]나라에서 난을 만난 것을 민愍이라 한다. 皇帝라 하였다.
여름 4월에
한중왕漢中王이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注+[釋義]武擔山은 성도成都의 성 북쪽으로 200보 지점에 있다. [通鑑要解]이 산山은 서북쪽에 있으니, 건위乾位가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 산山에 나아가 즉조卽祚(卽位)한 것이다. 사면령을 크게 내리고 연호를 고쳤으며,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
삼대三代 이전에 온 천하 모든 나라의
인민人民과
사직社稷을 보유한 자를 통틀어
군君이라 일렀고, 모든 나라를 합하여 통치해서
법도法度를 세우고
호령號令을 반포
注+[頭註]반班은 반포頒布함이다. 하여
천하天下가 감히 어기지 못하는 자라야 비로소
왕王이라 일렀고,
왕王의
덕德이 이미 쇠한 뒤에
강대국强大國이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서
천자天子를 높이는 것을
패자霸者라 일렀다.
한漢나라의
유자儒者로부터
오행五行의
덕德이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이치
注+[頭註]오덕생승五德生勝에 대한 설명은 주득화덕周得火德의 주注에 보인다.를 미루어
진秦나라를
윤위閏位로 삼아
注+[釋義]《고색考索》에 이르기를 “진秦나라는 본래 서융西戎이니 여분의 윤위閏位여서 주周나라를 계승할 수 없다 하여 반고班固가 삭제하고 취하지 않았으니, 주周나라는 목덕木德을 하고 한漢나라는 화덕火德을 함이 당연하다.” 하였다. 정식으로 왕의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세월의 여분餘分이 윤달이 되는 것과 같다. 목덕木德과
화덕火德의 사이에 있다 하여
진秦나라를
패자霸者로 여기고
왕王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정위正位와 윤위閏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한漢나라
황실皇室이 전복되자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注+[釋義]삼국三國은 촉한蜀漢‧위魏‧오吳이고, 정치鼎峙는 세 나라가 솥발이 서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진晉나라가 통치권을 상실하자
오호五胡注+[釋義]오호五胡란 한漢의 유원해劉元海(劉淵)는 흉노족匈奴族이고,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은 갈족羯族이고,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는 선비족鮮卑族이고, 전진前秦의 부홍苻洪은 저족氐族이고, 후진後秦의 요익중姚弋仲은 강족羌族이다. 가 구름처럼 일어나 시끄러웠으며,
송宋‧
위魏 이후로는
남북南北注+[釋義]남조南朝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을 이르고, 북조北朝는 후위後魏‧북제北齊‧후주後周를 이른다. 이 나뉘어 다스려져 각각
국사國史가 있어서 서로 배척하였다.
注+[釋義]호상배출互相排黜은 피차간에 폄하하고 배척함을 이른다. 남조南朝에서는 북조北朝를 일러 삭로索虜라 하고, 북조北朝에서는 남조南朝를 일러 도이島夷라 하였다.
주씨朱氏(朱全忠)가
당唐나라를 대신하자
注+[釋義]후량後梁의 주황朱晃(朱全忠)이 당唐나라의 선양禪讓을 받았다. 사방이 분열되었고,
주사씨朱邪氏(李存勖)가
변경汴京에 들어오자
注+[釋義]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은 본래 성姓이 주사씨朱邪氏이니, 변경汴京에 들어와 후량後梁을 멸망시켰다. 살펴보건대 주사朱邪는 처월處月의 별종別種이니 서돌궐족西突厥族의 후예이다. 본래 칭호가 주사朱邪이니, 대대로 금파산金婆山의 양포陽蒲 유해類海 동쪽에 거주하였다. 이 지역에는 큰 사막이 있어 이름을 사타沙陀라 하였는데, 뒤에 인하여 사타沙陀를 칭호로 삼고 주사朱邪를 성姓으로 삼았다.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에 주사진충朱邪盡忠이 처음 중국에 출현하는데, 의종懿宗 때에 국성國姓인 이씨성李氏姓과 국창國昌이란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이극용李克用은 그의 아들이다. 옛날
하夏나라를 찬탈한
유궁씨有窮氏와
한漢나라를 찬탈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注+[釋義]窮 신新:궁窮은 후예后羿를 이르니 하夏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유궁有窮이라 이름하였고, 신新나라는 왕망王莽을 이르니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실新室이라 하였다. 에 비유하여
역법曆法과
기년紀年을 모두 버리고 세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편벽된 말이요 공정한 의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책에서는 오직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만을 정통으로 삼아서 그 뒤의 자손들이 비록 미약하고
유리流離注+[頭註]파천播遷은 흩어짐이다. 하였으나 오히려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잇게 하였으니, 사방에서 이들과 더불어
우열優劣을 다투는 자들이 모두 옛 신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천자天子의 제도를 써서 그들에게 임하였고, 천하가 분열되어서 본래 군신君臣 관계가 아닌 자에 있어서는 모두 열국列國의 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세시歲時(年과 춘春‧하夏‧추秋‧동冬의 사시四時)와 월일月日로써 일의 선후先後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漢나라가 위魏나라에 전하여 진晉나라가 받았고, 진晉나라가 송宋(南朝)나라에 전하였는데 진陳나라에 이르러 수隋나라가 취하였으며, 당唐나라가 양梁나라에 전하여 주周나라에 이르러서 대송大宋이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그 연호年號를 취하여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요,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정위正位와 윤위閏位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소열昭烈이
한漢나라에 있어서는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나
족속族屬이 소원하여 그
대수代數와
명칭名稱과
지위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으니, 또한
남당南唐의
열조烈祖 이변李昪이
오왕吳王 이각李恪의 후손이라고
자칭自稱한 것
注+[頭註]오자吳字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당서唐書》에 오왕吳王 각恪은 태종太宗의 아들이요, 건왕建王 각恪이 바로 헌종憲宗의 아들이다. 과 같아서
시비是非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감히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서한西漢을 계승한 것과
동진東晉注+[頭註]진晉은 동진東晉이다. 의
원제元帝가
서진西晉을 계승한 것에 비유하여
한漢나라의
전통傳統을 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소열제昭烈帝가 중산정왕中山靖王에 있어서 족속族屬이 소원하여 그 대수代數와 명칭名稱과 지위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어 시비是非를 분별하기 어렵다고 해서 마침내 억제하여 한漢나라의 대통大統을 이을 수 없게 하였으니, 그 거취去取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사마온공司馬溫公으로부터 삼국三國까지는 700여 년이니 진실로 소열昭烈의 대수代數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제갈량諸葛亮과 중산정왕中山靖王과의 간격은 겨우 300여 년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초려草廬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 곧바로 소열昭烈을 칭하여 황실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믿고 근거 없이 이렇게 말하였겠는가.
진시황秦始皇으로 말하면 분명히 여불위呂不韋의 자식이고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는 소리小吏인 우금牛金의 소생임이 명백한데도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오히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뒤를 잇게 하고 고쳐서 바로잡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순욱荀彧을 추대하고 장려하며 조조曹操를 너그럽게 용서해서, 심지어는 조조曹操가 천하를 여러 도둑에게서 취하였고 한漢나라 황실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하였으며,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를 억누르고 물리쳐서 조금도 봐주지 않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북쪽으로 위魏나라를 정벌한 곳에는 ‘입구入寇’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유독 무슨 이유에서인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살펴보면 ‘소열昭烈은 탁현涿縣 사람이고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유승劉勝의 아들
유정劉正이
원수元狩 6
년年에
탁현涿縣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는데,
주금酎金注+[頭註]주금酎金에 대한 내용은 본서本書 9권의 무제武帝 원광元光 6년조年條(B.C.129)에 보인다.에 걸려
후侯의 지위를 잃고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조부는 웅雄이고 부친은 홍弘이니 소열昭烈을 낳았다.’ 하여 그 세차世次와 본말本末이 매우 분명하다.
또 구양수歐陽脩의 《오대사五代史》를 살펴보면 〈남당세가南唐世家〉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이변李昪은 서주徐州 사람이다.
대대로 본래 미천하였고 아버지 이영李榮은 당唐나라 말기의 난리를 만나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변李昪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양행밀楊行密이 길러 자식으로 삼았고, 또 서온徐溫에게 주어서 인하여 서씨徐氏 성姓을 따르다가 오吳 땅을 찬탈한 뒤에 비로소 이씨李氏 성姓을 회복하고는 스스로 당唐나라 헌종憲宗의 아들인 건왕建王 각恪의 후손이라 했다.’ 하였다.
또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살펴보면 ‘
당주唐主(南唐의 군주
이변李昪)가
오왕吳王 각恪을
선조先祖로 삼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吳王
각恪은 죄를 짓고 죽었으니,
정왕鄭王 원의元懿注+[頭註]원의元懿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아우이다. 를
선조先祖로 삼는 것만 못하다.」하자,
당주唐主가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두
왕王의 후손들을 상고하게 하였는 바,
오왕吳王의 손자孫子 의禕가 공功이 있고 의禕의 아들 현峴이 재상이 되었다 하여 마침내 오왕吳王을 선조로 삼아 현峴으로부터 5대를 지나 아버지 영榮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이름이 모두 유사有司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였다.
이는 소열제昭烈帝와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구나 제갈량諸葛亮이 한 번 소열제昭烈帝를 보자 맨 먼저 ‘장군은 황실皇室의 후손後孫’이라고 칭하였고, 뒤에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할 때에도 손권孫權을 대하여 ‘유예주劉豫州는 왕실王室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니, 제갈량諸葛亮은 진실로 함부로 말하는 자가 아니다.
이 때문에
장송張松이
유장劉璋을 설득할 때에도 ‘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종실宗室’이라고 말하였고, 다른 날에
부견苻堅이
진晉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간諫하는
부융苻融에게 대답한 말에 또한 이르기를 ‘
유선劉禪注+[頭註]유선劉禪은 소열제昭烈帝(劉備)의 아들이다. 은
한漢나라의
유조遺祚(後嗣)
注+[頭註]조祚는 복이다. 조胙와 통하니, 복을 주어 사직社稷을 장구하게 하는 것을 조胙라 한다.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중국中國에게 겸병당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소열昭烈이 한漢나라 황실의 후손이 됨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는 바, 이로써 대통大統을 이음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해에 조비曹丕가 즉위하자 소열昭烈이 곧바로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한漢나라의 국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사리의 마땅함에 깊이 부합한다.
광무제光武帝가 호鄗에서 즉위하고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강좌江左에서 즉위한 것과 전후로 자취가 똑같으니, 진실로 기타의 참람하게 도둑질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함을 급하게 여긴 자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일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가운데 가장 중대한 일이다.
나는 그러므로 전말顚末을 낱낱이 상고하고 자세히 분별하여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고하고, 또한 주자朱子가 붓을 잡아 기록한 뜻을 온 천하에 밝게 드러내는 바이다.”
나(劉剡)는 이 때문에
윤씨尹氏가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뜻을
발명發明한 것을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여 배우는 자의 의혹을 제거
注+[頭註]거祛는 물리침이다. 하는 바이다.”
종묘宗廟를 세우고
고황제高皇帝 이하에게
협제사祫祭祀注+[通鑑要解]협祫은 음이 胡夾切(협)이니, 크게 합사合祀하는 것이다. 3년에 한 번 협祫제사를 지내고 5년에 한 번 체禘제사를 지내며, 체禘제사는 여름 4월에 지내고 협祫제사는 겨울 10월에 지낸다. 체禘라는 말은 살핀다는 뜻이니 소목昭穆의 존비尊卑를 살핀다는 뜻이요, 협祫은 합한다는 뜻이니 겨울 10월에는 오곡五穀이 성숙하였기 때문에 친족親族들이 태조太祖의 사당에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이다. 를 지냈다.
○ 5월에 부인
오씨吳氏注+[頭註]오씨吳氏는 장군將軍 오의吳懿의 누이이고, 유장劉璋의 형인 유모劉瑁의 처妻이다. 를 세워 황후로 삼고, 아들
선禪注+[頭註]유선劉禪은 감황후甘皇后가 낳은 아들이다. 을 황태자로 삼았다.
○ 소열제昭烈帝가 관우關羽가 전사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장차 손권孫權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군신群臣들 중에 간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소열제昭烈帝는 모두 듣지 않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비張飛는 웅장雄壯함과 위엄과 용맹이 관우關羽의 다음이었다.
관우關羽는 사졸士卒들을 잘 대우하였으나 사대부士大夫에게는 교만하였고, 장비張飛는 군자君子를 사랑하고 예우하였으나 사졸士卒들을 돌보지 않으니,
소열제昭烈帝가 항상 장비張飛에게 훈계하기를 “경卿은 형벌하여 죽임이 지나치고 또 날마다 건장한 군사들을 매질하고는 그들을 좌우의 측근에 있게 하니, 이는 화禍를 취하는 길이다.” 하였으나 장비張飛는 오히려 고치지 않았다.
소열제昭烈帝가 장차
손권孫權을 정벌하려 할 적에
장비張飛가 병졸 만 명을 인솔하고
낭주閬州로부터
강주江州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강주江州는 파자도巴子都의 북쪽에 있으니, 또 협주峽州의 경계이다.” 하였다.에 이르러 모이기로 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임하여
장비張飛 막하幕下에 있던
장달張達과
범강范彊이
장비張飛를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가지고 물길을 따라
손권孫權에게 달려가 투항하였다.
소열제昭烈帝는 장비張飛 군영의 도독都督이 표문表文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이르기를 “아!
장비張飛가 죽었구나.”
注+[頭註]희噫는 한탄하는 소리이다. 장비張飛가 직접 표문表文을 올려야 하는데, 도독都督이 서열을 건너뛰어 표문表文을 올렸으므로 유비劉備는 장비張飛가 반드시 죽었음을 안 것이다. 하였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평評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모두 만인萬人을 대적할 수 있다고 일컬어졌으니, 세상의 용맹한 신하였다.
관우關羽는
조공曹公(曹操)에게 보답하였고
장비張飛는 의롭게
엄안嚴顔注+[附註]장비張飛는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유장劉璋을 공격하여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장비張飛가 엄안嚴顔을 꾸짖기를 “대군大軍이 왔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는가?” 하니, 엄안嚴顔이 말하기를 “경卿들이 무상無狀(형편없는)한 짓을 하여 우리 주州를 침탈하였으니, 우리 주州는 다만 단두장군斷頭將軍(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한 장군)만이 있을 뿐이요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 하였다. 장비張飛가 노하여 좌우 사람들로 하여금 작두로 머리를 베게 하자, 엄안嚴顔은 낯빛을 바꾸지 않으며 말하기를 “머리를 자르려면 곧바로 머리를 자르면 되었지 어찌 노여워하는가?” 하였다. 장비張飛는 그를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는 인도하여 빈객으로 삼았다. 을 풀어 주어 모두
국사國士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關羽는 강퍅剛愎하고 스스로 과시하였고 장비張飛는 포악하고 은혜가 없어서 이러한 단점 때문에 실패를 취하였으니, 이는 이치와 운수에 당연한 것이다.”
7월에 황제가 직접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손권孫權을 공격하니, 손권孫權이 진서장군鎭西將軍 육손陸遜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막게 하였다.
○ 8월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라 칭하고
언사言辭를 낮추어
주장奏章을 올리면서
우금于禁 등을 함께 보내어
위魏나라로 돌려보내었다.
注+[頭註]기해년(建安 24년)에 조조曹操가 조인曹仁으로 하여금 관우關羽를 토벌하게 하면서 우금于禁을 보내어 조인曹仁을 돕게 하였는데, 우금于禁이 관우關羽에게 패하여 항복하였다. 손권孫權이 관우關羽를 사로잡아 우금于禁이 오吳나라에 있었는데, 손권孫權이 위魏나라에 번신藩臣을 칭하고 우금于禁을 위魏나라로 돌려보내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유엽劉曄만은 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권孫權이 까닭 없이 와서 항복하니, 반드시 국내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손권孫權이 지난번에 관우關羽를 기습하여 죽였으니, 유비劉備가 반드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 정벌할 것입니다.
손권孫權은 밖에 강한 적이 있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또 중국中國(우리나라)이 가서 그 틈을 타 공격할까 두렵기 때문에 땅을 바치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한편으로는 중국中國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中國의 원조를 빌어서 그들의 무리를 강하게 하여 적들을 의심하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천하가 셋으로 나누어짐에
중국中國이 열에 여덟을 소유하고
오吳와
촉蜀은 각각 한
주州를 보전하여
注+[頭註]각각 한 주州를 보전하였다는 것은 오吳나라는 양주揚州를 보전하고, 촉한蜀漢은 익주益州를 보전함을 이른다. 산수山水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니,
注+[頭註]조阻는 믿음이니, 험고한 지형을 믿고 스스로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구원한다면 이는 약소국에게 유리할 터인데, 이제 도리어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니 하늘이 이들을 멸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 기습하여 촉蜀은 그 밖을 공격하고 우리는 그 안을 기습한다면 오吳나라의 멸망은 열흘 내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吳나라가 망하면 촉蜀이 고립될 것이니, 만약 오吳나라의 절반을 떼어 촉蜀에 준다 하더라도 촉蜀은 본래 오래 보존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촉蜀은 그 밖(吳나라의 변두리 지역)을 얻고 우리는 그 안(吳나라의 수도)을 얻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신하라고 칭하고 항복하는데 그를 정벌한다면 천하에 귀부歸附하려는 자들의 마음을 의심하게 할 것이니, 우선 오吳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촉蜀의 후미를 습격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오吳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태상太常 형정邢貞을 보내어
책명策命注+[頭註]책策은 책冊과 통하니, 부명符命(황제의 명령)이다. 을 받들고 가서
注+[頭註]즉卽은 나아감이니, 그 처소에 나아가 임명하는 것이다. 손권孫權을 임명하여
오왕吳王으로 삼고
구석九錫을
가사加賜하였다.
형정邢貞이 오吳나라에 이르자, 오왕吳王이 도정都亭으로 나와 형정邢貞을 맞이하였다.
형정邢貞이 문에 들어가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장소張昭가 형정邢貞에게 이르기를 “예禮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법法은 행하지 않음이 없는데, 군君이 감히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어찌 우리 강남江南이 적고 약하여 한 치의 칼날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형정邢貞이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중랑장中郞將 서성徐盛은 분하고 원통하여 동렬同列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들이 나라를 위하여 허도許都와 낙양洛陽을 겸병하고 파巴와 촉蜀을 병탄하지 못하여 우리 군주로 하여금 형정邢貞과 맹세하게 하니, 치욕스럽지 않은가.” 하고는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니,
형정邢貞이 이 말을 듣고 그의 무리에게 이르기를 “강동江東의 장수와 정승이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하였다.
-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서성전徐盛傳》 에 나옴 -
오주吳主가 중대부中大夫 조자趙咨를 위魏나라에 보내어 들어가 사례하게 하였다.
위주魏主 조비曹丕가 조자趙咨에게 묻기를 “오왕吳王은 어떤 군주인가?” 하니,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혜롭고 영웅스럽고 지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하였다.
위주魏主가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노숙魯肅을 보통 사람 중에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귀가 밝음이요, 여몽呂蒙을 항오行伍에서 발탁하였으니 이는 총명함이요,
우금于禁을 사로잡고도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함이요, 형주荊州를 취할 적에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지혜로움이요,
삼주三州注+[頭註]삼주三州는 형주荊州‧양주揚州‧교주交州이다. 를 점거하여 천하를 범처럼 노려보고 있으니 이는 영웅스러움이요, 폐하에게 몸을 굽히니 이는 지략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오왕吳王이 자못 학문을 아는가?” 하니,
조자趙咨가 대답하기를 “오왕吳王은 강에 떠 있는 배가 만 척이고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며,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리며, 뜻이 사방을 경략經略함에 있어서
비록 여가에 서책을 널리 보고
사적史籍을 섭렵하여 기이한
정화精華를 채택하나
서생書生들이
장章을 찾고
문구文句를 따다가 쓰는
注+[頭註]위주魏主가 문장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조자趙咨가 이 말로써 기롱한 것이다. 것은 본받지 않습니다.” 하였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
오吳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
대국大國은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소국小國은 수비하는 견고함이 있습니다.”
注+[通鑑要解]大國有征伐之兵 소국유비어지고小國有備禦之固:이 두 마디 말은 《관자管子》에서 근본한 것이다. 하였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오吳나라가 위魏나라를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고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를 참호로 삼으니, 어찌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조비曹丕가 말하기를 “오吳나라에 대부大夫(趙咨)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명하여 특별히 통달한 자가 8, 90명이요, 신과 같은 무리는 수레로 싣고 말[斗]로 헤아릴 정도여서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