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慕容垂自稱燕王하고 遣田山如鄴하야 告慕容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고 以弟德으로 爲車騎大將軍하야 封范陽王하고 帥衆二十餘萬하야 長驅向鄴하다
慕容農
이 起兵於列人
注+[附註]列人은 城名이라 垂至安陽하니 丕身自迎之하다 趙秋勸垂於座取丕하고 因據鄴起兵이로되 垂不從하다 丕謀襲擊垂러니 姜讓이 諫曰 垂叛形未著라한대 丕從之하고 館垂於鄴西하니 垂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翟斌叛이어늘 秦王堅이 驛書로 使垂討翟斌한대 石越이 言於丕曰 垂有興復舊業之志어늘 今復資之以兵이면 此爲虎傅(附)翼이니 請除之하소서 丕曰 淮南之敗에 垂侍衛乘輿하니 此功을 不可忘也니라 越退曰 公父子好爲小仁하고 不顧大計하니 終當爲人擒耳니라 丕遣苻飛龍하야 帥氐騎一千하야 爲之副하야 密計謀垂하다 垂聞丕, 飛龍謀하고 怒曰 吾盡忠於苻氏어늘 而彼專欲圖吾父子하니 雖欲已나 得乎아하고 乃募兵八千하야 夜襲飛龍殺之하고 遣人告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니 農等이 遂將數十騎하고 微服出鄴하야 奔列人하니라하니 衆至數萬
이라
長樂公丕 使石越로 將兵討之러니 農이 大敗秦兵하고 斬越하니 於是에 人情騷動하고 盜賊群起러라
垂至鄴하니 農이 引兵會之하야 進攻鄴이어늘 丕退守中城하다
○ 秦北地
注+[頭註]郡名也라長史慕容泓
이 聞燕王垂攻鄴
하고 亡奔關東
하야 收集鮮卑
하니 衆至數千
이라
○ 平陽太守慕容沖이 亦起兵於平陽하야 有衆二萬하다
○ 秦將姚萇
注+[原註]姚弋仲之子요 襄之弟라이 起兵於北地
하고 自稱後秦王
하다
○ 秦竇衝이 擊慕容沖于河東하야 大破之하니 沖이 奔慕容泓하다
進向長安이러니 六月에 泓의 謀臣高蓋 殺泓하고 立沖爲皇太弟하야 承制行事하고 置百官하다
○ 八月에 燕兵이 圍秦長樂公丕於鄴하니 鄴中이 芻粮俱盡하야 削松木飼馬라
必無降理
니 不如退屯新城
하야 開丕西歸之路
하야 以謝秦王疇昔之恩
注+[頭註]疇는 發語辭라 己巳年에 垂奔秦하니 秦王堅이 郊迎하야 以爲冠軍將軍하니라이라하고 乃解圍
하고 趨新城
하다
○ 太保安
注+[頭註]安은 謝安이라이 奏請
호되 乘苻氏傾敗
하야 開拓
注+[頭註]拓은 斥開也라中原
이라하야 以謝玄, 桓, 石虔等
으로 伐秦
하니 河南城堡
注+[通鑑要解]堡는 廣韻에 堡障은 小城也라하니라 皆來歸附
라
會
에 謝玄
이 遣劉牢之等
하야 據
注+[釋義]王氏曰 碻磝는 城名이라 然二字俱在五爻韻이요 又碻는 本作䂭라 按宋重修廣韻註하면 䂭는 口交反이요 磝는 五交反이라 䂭磝는 (成)[城]名이니 今濟州是라, 滑臺
注+[釋義]春秋鄭之廩延邑이니 後魏置東郡하고 又改滑州하니라러니 丕請救於玄
이어늘 玄
이 乃遣劉牢之
하야 率衆二萬
하야 救鄴
하고 丕告饑
어늘 玄
이 水陸運米二千斛以饋之
하다
태원太元 9년(갑신 384) -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이다.
○ 연燕(後燕) 세조世祖 모용수慕容垂의 원년元年이다.
○ 후진後秦 태조太祖 요장姚萇의 백작白雀 원년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새로운 대국大國이 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셋이다. -
정월正月에 모용수慕容垂가 연왕燕王이라 자칭하고 전산田山을 보내어 업성鄴城에 가서 모용농慕容農 등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고, 아우 모용덕慕容德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삼아 범양왕范陽王에 봉하고 20여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기세를 몰아 업성鄴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모용농慕容農이
열인성列人城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注+[附註]열인列人은 성城의 이름이다. 모용수慕容垂가 안양安陽에 이르니, 부비苻丕가 몸소 그를 맞이하였다. 조추趙秋가 모용수慕容垂에게 그 자리에서 부비苻丕를 죽이고 인하여 업성鄴城을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모용수慕容垂가 따르지 않았다. 부비苻丕가 모용수慕容垂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강양姜讓이 간하기를 “모용수慕容垂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자, 부비苻丕가 그 말을 따르고 모용수慕容垂에게 업성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니, 모용수慕容垂가 은밀히 연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함께 연燕나라의 국통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적빈翟斌이 배반하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파발을 띄워 모용수慕容垂로 하여금 적빈翟斌을 토벌하게 하였다. 석월石越이 부비苻丕에게 말하기를 “모용수慕容垂가 옛 기업基業을 흥복하려는 뜻이 있는데, 이제 다시 군대를 빌려 준다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입니다. 제거하십시오.” 하니, 부비苻丕가 말하기를 “회남淮南의 패전에 모용수慕容垂가 승여乘輿를 호위하였으니, 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석월石越이 물러 나와 말하기를 “공公의 부자父子가 작은 인仁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으니, 끝내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부비苻丕가 부비룡苻飛龍을 보내어 저족氐族의 기병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모용수慕容垂의 부장副將이 되게 하여 은밀히 모용수慕容垂를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부비苻丕와 부비룡苻飛龍이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모용수慕容垂가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부씨苻氏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부자父子를 도모하고자 하니, 내 비록 그만두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8천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밤에 부비룡苻飛龍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모용농慕容農 등에게 알려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니, 모용농慕容農 등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미복微服 차림으로 업성鄴城을 나와 열인성列人城으로 달려 왔다.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장악공長樂公 부비苻丕가 석월石越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모용농慕容農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용농慕容農이 진秦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석월石越의 목을 베니, 이에 인심이 동요하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났다.
모용수慕容垂가 업성鄴城에 이르자 모용농慕容農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서 업성鄴城으로 진격하니, 부비苻丕가 후퇴하여 중성中城을 지켰다.
○
진秦나라
북지北地注+[頭註]북지北地는 군郡의 이름이다. 長史
모용홍慕容泓이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업성鄴城을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관동關東으로 도망하여
선비족鮮卑族을 수합하니,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 평양태수平陽太守 모용충慕容沖이 또한 평양平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
진秦나라 장수
요장姚萇注+[原註]요장姚萇은 요익중姚弋仲의 아들이고 요양姚襄의 아우이다. 이
북지北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후진왕後秦王이라 자칭하였다.
○ 진秦나라 두충竇衝이 모용충慕容沖을 하동河東에서 공격하여 대파하니, 모용충慕容沖이 모용홍慕容泓에게로 달아났다.
모용홍慕容泓의 병력이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전진하여 장안長安으로 향하였는데, 6월에 모용홍慕容泓의 모신謀臣인 고개高蓋가 모용홍慕容泓을 죽이고 모용충慕容沖을 세워 황태제皇太弟로 삼아서 제制를 받들어 정사를 행하고 백관百官을 설치하였다.
○ 8월에 연燕나라 군대가 진秦나라 장악공長樂公 부비苻丕를 업성鄴城에서 포위하니, 업성鄴城 안의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소나무를 벗겨 말을 먹일 지경에 이르렀다.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제장諸將에게 이르기를 “부비苻丕는 곤궁한 적이다.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후퇴하여
신성新城에 주둔해서
부비苻丕가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어
진왕秦王의 옛 은혜
注+[頭註]주疇는 발어사發語辭이다. 기사년己巳年(369)에 모용수慕容垂가 진秦나라로 도망쳐 오니,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교외郊外에서 맞이하여 그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았다. 에 사례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신성新城으로 달려갔다.
○
태보太保 사안謝安注+[頭註]안安은 사안謝安이다. 이 주청하기를 “
부씨苻氏가 형세가 기울어 패한 틈을 타서
중원中原을 개척
注+[頭註]탁拓은 물리쳐서 개간하는 것이다. 해야 한다.”고 하여
사현謝玄과
사환謝桓과
석건石虔 등을 데리고 가서
진秦나라를 치니,
하남河南의
성보城堡注+[通鑑要解]보堡는 《광운廣韻》에 “보장堡障은 작은 성城이다.” 하였다. 가 모두 와서
귀부歸附하였다.
사현謝玄이 진릉태수晉陵太守 등념지滕恬之를 보내서 황하를 건너 여양黎陽을 점거하였다.
○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업성鄴城을 포위하니, 부비苻丕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침
사현謝玄이
유뇌지劉牢之 등을 보내
확오碻磝注+[釋義]왕씨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확오碻磝는 성城의 이름이다. 그러나 확碻와 오磝 두 글자가 모두 오효五爻(요)의 운韻에 있으며, 또 확碻는 본래 䂭字로 되어 있다. 송宋나라에서 중수重修한 《광운廣韻》의 주註를 살펴보면 교䂭는 口交反(교)이고 오磝는 五交反(요)이다. 교오䂭磝는 성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제주濟州가 이곳이다.” 하였다. 와
활대성滑臺城注+[釋義]활대滑臺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의 늠연읍廩延邑이니, 후위後魏가 동군東郡을 설치하고 또 활주滑州로 고쳤다. 을 점거하였는데,
부비苻丕가
사현謝玄에게 구원을 청하자
사현謝玄이 마침내
유뇌지劉牢之를 보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업성鄴城을 구원하게 하였으며,
부비苻丕가 굶주림을 고하자
사현謝玄이
수륙水陸으로 쌀 2천
곡斛을 운반하여 공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