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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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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十三年이라
건무建武 13년(정유 37)
異國 有獻名馬者하니 日行千里하고 又獻寶劍하니 價直(値)百金이라
이때 이국異國에서 명마名馬를 올린 자가 있으니 하루에 천리 길을 갔고, 또 보검寶劍을 올리니 값어치가 백금百金이었다.
詔以劍賜騎士하고 馬駕鼓車注+[釋義]馬在軛中曰駕 天子車駕出이면 後有黃門鼓車 按鼓車 (駕)[載]鼓之車也하다
이 명령하여 기사騎士에게 하사하고 말은 고거鼓車(북을 싣고 다니는 수레)에 멍에하게 하였다.注+[釋義]말이 멍에 안에 있는 것을 라 한다. 천자天子거가車駕가 출행하면 황문黃門(宦官)의 고거鼓車가 뒤따라간다. 살펴보건대 고거鼓車는 북을 싣고 다니는 수레이다.
雅不喜聽音樂하고 手不持珠玉이러라
은 평소에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손에는 주옥珠玉을 잡지 않았다.
〈出循吏傳序〉
- 《후한서後漢書 순리전循吏傳에 나옴 -
嘗出獵이라가 車駕夜還이러니 上東門候注+[釋義]上東門 雒陽十二門이라 按十二支 每一方三門이니 上東者 寅方門也 每門候一人이니 秩六百石이라 屬城門校尉하니 司啓閉出入이라 郅惲 其姓名이라 拒關不開
이 일찍이 사냥을 나갔다가 거가車駕가 밤에 돌아왔는데, 상동문上東門문후門候(문지기)인 질운郅惲注+[釋義]상동문上東門낙양雒陽의 12 중의 하나이다. 살펴보건대 12가 있으니, 방위마다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상동문上東門인방寅方의 문이다. 문마다 문후門候 한 사람이 있으니, 품계가 6백 석이다. 성문교위城門校尉에 속하니, 성문을 열고 닫으며 출입하는 것을 관장한다. 질운郅惲은 그의 성명이다. 이 관문을 막고 열어 주지 않았다.
令從者 見面於門間한대 惲曰 火明遼遠이라하고 遂不受詔어늘 乃回하야 從中東門入注+[釋義]中東門 卯方也하다
종자從者로 하여금 문틈으로 얼굴을 보게 하였으나 질운郅惲은 말하기를 “불빛이 멀어 식별할 수가 없다.” 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받들지 않으므로 이 마침내 돌아서 중동문中東門으로 들어왔다.注+[釋義]중동문中東門묘방卯方이다.
明日 上書諫曰 昔 文王 不敢盤(般)于游田注+[頭註] 與般通하니 樂也하고 以萬民惟正之供이러시니
다음 날 질운郅惲상서上書하여 간하기를 “옛날에 문왕文王은 감히 유람과 사냥을 즐기지注+[頭註]과 통하니 즐거워하는 것이다. 않고 만민萬民들이 바르게 공양하는 것만 받으셨는데,
而陛下遠獵山林하야 夜以繼晝하시니 如社稷宗廟注+[頭註] 尊也 貌也 尊先祖貌也잇고
폐하께서는 멀리 산림山林에 사냥 나가서 밤으로써 낮을 이으시니, 사직社稷종묘宗廟注+[頭註]은 높이는 것이고 는 모습이니, 선조先祖의 모습을 높이는 것이다.를 어찌하시렵니까?” 하였다.
書奏 賜惲布百匹하고 貶中東門候하야 爲參封尉注+[釋義]參封 縣名이니 屬琅이라 主盜賊이라하다
글을 아뢰자, 질운郅惲에게 삼베 100을 하사하고 중동문中東門를 좌천시켜 참봉현參封縣注+[釋義]참봉參封의 이름이니, 낭야군琅邪郡에 속한다. 는 도적을 맡은 벼슬이다. 로 삼았다.
〈出本傳〉
- 《후한서後漢書 질운전郅惲傳》에 나옴 -
大饗將士功臣하고 定封할새 鄧禹爲高密侯注+[釋義]齊地北海郡高密縣이니 在臨淄之東하니 今密州是하야 食四縣하고 李通爲固始侯注+[釋義]固始 卽固陵이라 本屬陳州러니 後改固始하니 今屬光州하고 賈復爲膠東侯注+[釋義]括地志 卽墨故城 在密州膠水縣東南六十里하니 卽膠東國이라하야 食六縣하고 餘皆有差하다
장병將兵공신功臣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고 봉읍封邑을 정할 때에 등우鄧禹고밀후高密侯注+[釋義]나라 땅 북해군北海郡고밀현高密縣이니 임치臨淄의 동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밀주密州가 이곳이다. 가 되어 4을 식읍으로 하고, 이통李通고시후固始侯注+[釋義]고시固始는 바로 고릉固陵이다. 본래 진주陳州에 속하였는데 뒤에 고시固始로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광주光州에 속한다. 가 되고 가복賈復교동후膠東侯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즉묵卽墨의 옛 밀주密州 교수현膠水縣 동남쪽 60리에 있었으니, 바로 교동국膠東國이다.” 하였다. 가 되어 6을 식읍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이 있었다.
帝在兵間久하야 厭武事하고 且知天下疲耗하야 思樂息肩하고 自隴, 蜀平後 非警急이면 未嘗復言軍旅러라
황제가 전쟁터에 오래 있어서 전쟁하는 일을 싫어하고, 또 천하가 피폐하고 소모하여 어깨를 쉴 것(평화)을 생각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 평정된 이후로 급한 경보가 아니면 일찍이 다시 군대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皇太子嘗問攻戰之事한대 帝曰 昔 하시니 非爾所及이라하니라
황태자가 일찍이 공격하고 전쟁하는 일을 묻자, 황제가 말하기를 “옛날 나라 영공靈公진법陣法을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出本紀〉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鄧禹, 賈復 知帝偃干戈, 修文德하며 不欲功臣擁衆京師하고 乃去甲兵하고 敦儒學하니 帝亦思念하고 欲完功臣爵土하야 不令以吏職爲過注+[通鑑要解]恐其以職事有過而失爵邑也하야 遂罷左右將軍官하니 耿弇等 亦上大將軍印綬하고 皆以列侯就第하니 加位特進奉朝請注+[釋義]春朝曰朝 秋朝曰請이니 言奉朝會請召而已이러라
등우鄧禹가복賈復은 황제가 전쟁을 종식하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공신功臣들이 경사京師에서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음을 알고는 마침내 갑병甲兵을 버리고 유학儒學을 돈독히 힘쓰니, 황제 또한 이것을 생각하고 공신功臣작위爵位토지土地를 완전히 보전하게 하고자 하여, 공신功臣들로 하여금 관리의 직책을 허물로 삼아 작읍爵邑을 잃지注+[通鑑要解]직사職事에 과실이 있어 작읍爵邑을 잃을까 걱정한 것이다. 않게 하려고 하여 마침내 좌우 장군의 관직을 파하니, 경엄耿弇 등이 또한 대장군大將軍인수印綬를 올리고 모두 열후列侯로서 집에 나아가니 특진特進의 지위를 가하고 조청朝請을 받들게 하였다.注+[釋義]봄에 조회하는 것을 라 하고, 가을에 조회하는 것을 이라 하니, 〈실무는 보지 않고〉 조회할 때에 초청하여 부르는 명령만 받들 뿐임을 말한 것이다.
〈出耿弇, 賈復傳〉
- 《후한서後漢書》 〈경엄전耿弇傳〉과 〈가복전賈復傳〉에 나옴 -
鄧禹內行淳備하야 有子十三人호되 하야 修整閨門하고 敎養子弟하니 皆可以爲後世法이요 資用國邑하야 不修産利러라
등우鄧禹내행內行(집안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고 구비하여 아들 13명이 있었는데, 각각 한 가지 경서經書를 전공하게 하여 규문閨門을 닦고 정돈하며 자제子弟교양敎養하니 모두 후세의 이 될 만하였으며, 본국本國식읍食邑에서 의뢰하여 쓰고 재산과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出禹傳〉
-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에 나옴-
賈復 爲人 剛毅方直하고 多大節이라
가복賈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굳세고 강직)하고 방직方直(바르고 곧음)하였으며,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큰 절개가 많았다.
旣還私第 闔門養威重이러니 朱祐等 薦復宜爲宰相이로되 帝方以吏事責三公注+[釋義]太尉公 掌四方兵事하고 司徒公 掌人民孝弟謙儉事하고 司空公 掌水土營城起邑浚溝洫修墳坊事이라 功臣 竝不用이라
이미 사제私第로 돌아오자 문을 닫고 위엄과 후중함을 길렀는데, 주우朱祐 등이 가복賈復을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이때 막 관리의 일을 삼공三公에게 책임지웠으므로注+[釋義]태위공太尉公은 사방의 군대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사도공司徒公인민人民들에게 효제孝悌와 겸양과 검소함을 가르치는 일을 관장하고, 사공공司空公수토水土을 경영하고 을 일으키며 도랑을 깊이 파고 제방堤防을 수리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공신功臣들이 모두 등용되지 않았다.
是時列侯 唯高密, 固始, 膠東三侯 與公卿으로 參議國家大事하야 恩遇甚厚러라
이때 열후列侯 중에 오직 고밀후高密侯(鄧禹)‧고시후固始侯(李通)‧교동후膠東侯(賈復)만이 공경公卿들과 함께 국가의 대사大事에 참여하여 의논해서 은혜와 예우가 매우 후하였다.
〈出復傳〉
- 《후한서後漢書 가복전賈復傳》에 나옴 -
帝雖制御功臣이나 而每能回容注+[通鑑要解] 曲也 謂曲法以容也하야 宥其少失하고 遠方貢珍甘 必先徧賜諸侯하야 而太官注+[頭註]百官志 掌御膳, 具酒果無餘
황제가 비록 공신功臣들을 제어하였으나 매번 너그러이 포용注+[通鑑要解]는 굽힘이니, 을 굽혀 용납해 줌을 이른다. 하여 작은 과실을 용서하였고, 먼 지방에서 진귀한 물건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면 반드시 먼저 제후들에게 두루 하사하여 태관太官注+[頭註]태관太官은 《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관장하고 주과酒果를 장만한다.” 하였다. 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皆保其福祿하야 無誅譴者러라
그러므로 공신功臣들이 모두 복록福祿을 보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견책을 받은 자가 없었다.
〈出馬武傳〉
- 《후한서後漢書 마무전馬武傳》에 나옴 -
朱黼曰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三公 所與共天位, 治天職, 代天工者也 惟其宜而已
삼공三公은 군주와 천위天位(지위)를 함께하고 천직天職(직책)을 다스리고 천공天工(일)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이니, 오직 마땅하게 할 뿐이다.
豈可以功臣而爲之區別也리오
어찌 공신功臣이라고 하여 구별한단 말인가.
太甲成康 所與圖回庶政者 皆鳴條牧野之士 惠, 文, 景, 武之世 所任爲執政者 皆高帝之故臣也
태갑太甲성왕成王강왕康王이 더불어 서정庶政을 바로잡을 것을 도모한 것은 모두 명조鳴條목야牧野에서 싸운 용사였고, 혜제惠帝문제文帝경제景帝무제武帝의 세대에 맡겨서 집정대신執政大臣으로 삼은 자는 모두 고제高帝의 옛 신하였다.
注+[釋義] 升自陑 地名이니 湯伐桀所 固不敢以望後世
광무제光武帝천자天子의 지위에 오를 때에〉注+[釋義]탕왕湯王 땅에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는 지명이니 탕왕湯王걸왕桀王을 정벌한 곳이다. 탕왕湯王을 보좌한 이윤伊尹무왕武王을 보좌한 강태공姜太公과 같은 정승은 진실로 감히 후세에 기대할 수가 없었다.
然販繒織薄(箔)之徒注+[釋義]謂周勃灌嬰也 亦足以安社稷而重朝廷하니 功臣任事 果亦何負於天下也哉
그러나 비단을 팔고 발을 짜는 무리들注+[釋義]비단을 팔고 발을 짜는 무리는 주발周勃관영灌嬰을 이른다. 도 충분히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고 조정朝廷을 중하게 할 수 있으니, 공신功臣이 정사를 맡음에 과연 또한 어찌 천하를 저버리겠는가.
平時專以健武自名者 雖不足以緝熙帝載 而寇鄧景賈之流 文足以緯國하고 智足以謀王하니 固皆公輔之器 經綸之才也어늘
운대雲臺에 얼굴이 그려진 여러 장수가 평소에 오로지 굳세고 힘센 것으로 스스로 이름이 난 자는 비록 황제의 일을 계속하여 밝힐 수 없었으나 구순寇恂등우鄧禹경단景丹가복賈復과 같은 무리들은 은 충분히 나라를 경륜하고 지혜는 충분히 왕자王者를 도모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모두 공보公輔의 그릇이요 천하를 경륜할 수 있는 인재였다.
乃以功臣이라하야 例擯不用 謂之何哉
그런데 도리어 공신功臣이라 하여 으레 물리치고 쓰지 않음을 뭐라고 이르겠는가.
夫天下權柄 必有所歸 人主聰明 必有所寄
천하의 권병權柄은 반드시 돌아가는 곳이 있고 인주人主총명聰明은 반드시 맡기는 바가 있는 것이다.
光武不任大臣하야 而體統已失하니 所以後世托孤之際 不免政歸房闥注+[頭註]章帝后竇氏, 和帝母梁氏, 殤帝母鄧氏, 安帝后閻氏, 順帝后梁氏 皆以太后臨朝이라
광무제光武帝대신大臣에게 맡기지 아니하여 체통體統을 이미 잃었으니, 이 때문에 후세에 고아孤兒(어린 군주)를 부탁할 때에 정사가 방달房闥(宮中의 내전內殿)에 돌아감注+[頭註]장제章帝후비后妃두씨竇氏, 화제和帝모후母后양씨梁氏, 상제殤帝모후母后등씨鄧氏, 안제安帝후비后妃염씨閻氏, 순제順帝후비后妃양씨梁氏가 모두 태후太后로서 조정에 임어臨御하였다. 을 면치 못한 것이다.
終漢之世토록 朝廷之權 不在母后則在外戚注+[頭註]章帝時竇憲, 和帝時梁竦, 順帝時梁冀하고 不在外戚則在宦官注+[頭註]和帝時鄭衆, 順帝時孫程王康等 皆爲列侯하니 是爲十九侯 桓帝時單超, 徐璜, 具瑗, 左琯, 唐衡等 是爲五侯하고 不在宦官則在武將注+[頭註]靈帝時董卓袁紹 獻帝時山東曹操袁術等이라 起兵討卓하니 漢隨以亡이라하야 而漢隨以亡하니 豈非造端之不審耶
그리하여 나라 세대를 마치도록 조정의 권력이 모후母后에게 있지 않으면 외척外戚注+[頭註]외척外戚장제章帝 때의 두헌竇憲, 화제和帝 때의 양송梁竦, 순제順帝 때의 양기梁冀이다. 에게 있고 외척에게 있지 않으면 환관宦官注+[頭註]환관宦官화제和帝 때의 정중鄭衆, 순제順帝 때의 손정孫程왕강王康 등이 모두 열후列侯가 되었으니 바로 이들이 십구후十九侯이고, 환제桓帝 때의 선초單超서황徐璜구원具瑗좌관左琯당형唐衡 등이 바로 이들이 오후五侯이다. 에게 있고 환관에게 있지 않으면 무장武將注+[頭註]무장武將영제靈帝 때의 동탁董卓원소袁紹, 헌제獻帝 때에 산동山東조조曹操원술袁術 등이다. 이들이 군대를 일으켜 동탁董卓을 토벌하였는데, 나라도 따라서 망하였다. 에게 있어 나라가 따라서 망하였으니, 어찌 처음에 단서를 만듦에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兵革 旣息하니 天下少事하야 文書 務從簡寡하야 至乃十存一焉이러라
이때 병란이 이미 종식되니, 천하에 일이 적어서 각종 문서와 조발調發하고 요역徭役할 때에 되도록 간략하고 적음을 따라서 마침내 열에 하나가 남는 데에 이르렀다.
〈出本紀〉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역주
역주1 郅惲 : 질운
역주2 中東門 : 《資治通鑑》에는 中東門이 東中門으로 되어 있다. 12支 가운데 亥‧子‧丑은 북쪽, 寅‧卯‧辰은 동쪽, 巳‧午‧未는 남쪽, 申‧酉‧戌은 서쪽인 바, 子는 正北, 卯는 正東, 午는 正南, 酉는 正西이므로 이들 네 방위에는 中字를 붙이고 이들보다 앞에 있으면 上, 뒤에 있으면 下를 붙인 것이다.
역주3 : 야
역주4 衛靈公問陳 孔子不對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에 보인다.
역주5 各使守一藝 : 袁宏의 《後漢紀》에 이르기를 “각각 한 가지 經書에 통달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
역주6 : 이
역주7 鷹揚之相 : 姜太公 呂尙을 이른다. 《詩經》 〈大雅 大明〉에 “太師인 尙父(姜太公)가 때로 매가 날듯 하였다.[維師尙父 時維鷹揚]” 하였다.
역주8 雲臺諸將 : 雲臺는 後漢 때 洛陽의 南宮에 있는 臺閣으로, 明帝가 光武帝 때의 공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鄧禹 등 28명의 초상을 雲臺에 그려 놓았는 바, 이후로 功臣閣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역주9 調役 : 군대와 군량을 징발하는 것과 徭役을 가리킨다.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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