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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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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永建二年이라
영건永建 2년(정묘 127)
南陽樊英 少有學行하야 名著海內
처음에 남양南陽번영樊英이 젊어서부터 학식과 행실이 있어서 이름이 해내海內에 드러났다.
隱於壺山之陽하야 州郡 前後禮請호되 不應하고 公卿 擧賢良方正有道호되 皆不行하고 安帝賜策書注+[頭註] 王言也 又通作冊이라 說文 符命也徵之호되 不赴러니
호산壺山 남쪽에 은둔하여 주군州郡에서 전후로 를 갖추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공경公卿들이 현량하고 방정하며 가 있다고 천거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안제安帝책서策書注+[頭註]의 말씀이고, 또 과 통용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부명符命(임금의 명령)이다.” 하였다. 를 내려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다.
是歲 帝復以策書玄纁注+[釋義]韻會〈注〉云 이라 土無正位하야 托位南方火 赤與黃爲纁이라으로 備禮徵英하야 待以師傅之禮하다
이 해에 황제가 다시 책서策書현훈玄纁注+[釋義]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이르기를 “현훈玄纁천지天地정색正色이다. 는 바른(정해진) 자리가 없어서 남방화南方火에 자리를 의탁한다. 적색赤色황색黃色이라 한다.” 하였다.으로 를 갖추어 번영樊英을 불러서 사부師傅로 대우하였다.
初被詔命 皆以爲必不降志라하더니
번영樊英이 처음에 조명詔命을 받자, 사람들은 모두 번영樊英이 반드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南郡王逸 素與英善이라 因與書호되 多引古譬諭하야 勸使就聘이러니 及後應對 無奇謀深策이라 談者以爲失望이러라
남군南郡왕일王逸은 평소 번영樊英과 친하였으므로 인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많이 옛날의 일을 끌어다 비유해서 빙문聘問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는데, 뒤에 〈황제에게〉 응대할 때에 기묘한 꾀와 깊은 계책이 없으니, 말하는 자들이 실망하였다.
河南張楷 與英俱徵이러니 謂英曰 天下 有二道하니 出與處也
하남河南장해張楷번영樊英과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번영樊英에게 이르기를 “천하에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나가서 벼슬함과 은둔함이다.
吾前以子之出 能輔是君也하고 濟斯民也라하더니
나는 전에 그대가 나아가면 이 군주를 보필하고 이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而子始以不訾之身注+[釋義] 與貲(同)[通]하니 不訾 言無訾量可以比之하니 貴重之極也으로 怒萬乘之主注+[通鑑要解]按樊英傳컨대 英初稱病이라 强輿入殿 猶不以禮屈한대 帝怒하니라[附註]英固辭不得하야 到京하야 〈强〉輿入殿 猶不以禮屈한대 帝怒曰 朕能生殺貴賤貧富어늘 君何以慢朕命 英曰 受命於天하니 生盡其命 天也 死不得其命 亦天也 陛下焉能生殺臣耶잇가라가 及其享受爵祿하야는 又不聞匡救之術하니 進退無所據로다
그대가 처음에 헤아릴 수 없이 귀한 몸注+[釋義]와 통하니, 부자不訾는 헤아려 견줄 수가 없음을 말하니, 귀중함이 지극한 것이다. 으로 만승萬乘의 군주를 노엽게 했다가注+[通鑑要解]번영전樊英傳〉을 살펴보건대 번영樊英이 처음에 병을 핑계 대었으므로 억지로 수레를 타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로 굽히지 않자, 황제가 노하였다.[附註]樊英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서울에 이르러서 억지로 수레를 타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로 굽히지 않자, 황제가 노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는 어찌 의 명령에 불경不敬하는가?” 하자, 번영樊英이 대답하기를 “하늘에서 을 받았으니, 살아서 그 목숨을 다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죽어서 그 목숨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을 살리고 죽이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작록爵祿을 누리고 받음에 미쳐서는 또 군주를 바로잡는 방법이 있단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거할 바가 없다.” 하였다.
溫公曰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古之君子 邦有道則仕하고 邦無道則隱하니 非君子之所欲也 人莫己知而道不得行하고 群邪共處而害將及身이라 深藏以避之
“옛날에 군자君子는 나라에 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가 없으면 은둔하였으니, 은둔함은 군자君子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가 행해지지 못하고 여러 간사한 사람들이 함께 처하여 가 자신에게 미치므로 깊이 숨어 피하는 것이다.
王者擧逸民注+[釋義]逸民者 節行超逸也 如俊民之義 非隱逸也하고 揚仄陋注+[釋義] 古側字 書曰 〈明〉明揚〈側〉陋라한대 明擧明人在〈側〉陋者 廣求賢也 蔡氏〈傳〉曰 側陋 謂微賤之人 固爲其有益於國家 非以徇世俗之耳目也
왕자王者일민逸民注+[釋義]일민逸民절행節行이 뛰어난 것이니, 준민俊民과 같은 뜻이고 은일隱逸의 뜻이 아니다. 을 천거하고 미천한 사람을 세상에 드러내는注+[釋義]고자古字이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덕이 밝은 사람을 밝히고 측루側陋한 이를 드날린다.” 하였는데, 에 “밝은 사람으로서 누추한 처지에 있는 이를 밝게 천거하는 것이니, 어진 이를 널리 찾는 것이다.” 하였다. 채침蔡沈에 이르기를 “측루側陋는 미천한 사람을 이른다.” 하였다. 것은 진실로 국가에 유익함이 있기 때문이요, 세속의 이목耳目을 따르려고 해서가 아니다.
是故 有道德足以尊主하고 智能足以庇民이요 被褐懷玉하야 深藏不市 則王者當盡禮以致之하고 屈體以下之하고 虛心以訪之하고 克己以從之 然後 能利澤施于四表하고 功烈格于上下
이 때문에 이 충분히 군주를 높일 수 있고 지혜와 재능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갈옷을 입고 을 품고서 깊이 숨어 나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왕자王者가 마땅히 를 다하여 초치招致하고 몸을 굽혀 낮추며 마음을 비워 묻고 사욕私慾을 이겨 따라야 하니, 그런 뒤에야 은택이 사표四表(四方)에 베풀어지고 공렬功烈상하上下(天地)에 이르는 것이다.
蓋取其道 不取其人이며 務其實이요 不務其名也
이는 를 취하고 사람을 취하지 않으며, 실제에 힘쓰고 이름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若乃孝弟著於家庭하고 行誼隆於鄕曲注+[頭註]曲者 里之一曲也 鄕里曰鄕曲이라하야 利不苟取하고 仕不苟進하야 潔己安分하야 優游卒歲 雖不足以尊主庇民이나 是亦淸修之吉士也
만약 효도와 우애가 가정에 드러나고 훌륭한 행실이 향곡鄕曲注+[頭註]의 한 이니, 향리鄕里향곡鄕曲이라 한다. 에 드높아 이익을 구차히 취하지 않고 벼슬에 구차히 나아가지 않아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분수에 편안하여 한가로이 놀며 한 해를 마친다면 비록 군주를 높이고 백성들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또한 깨끗이 닦는 선비이다.
王者當褒優安養하야 俾遂其志하야 若孝昭之待韓福注+[附註]昭帝賜郡國所選有行義者涿郡韓福等五人帛五十匹하야 遣歸하고 詔曰 朕不勞以官職之事호리니 其務修孝悌하야 以敎鄕里하라하고 令郡縣으로 常以正月賜羊酒하고 其有不幸者어든 賜衣一襲하고 祀以中牢하다 光武之遇周黨하야 以勵廉恥, 美風俗 斯亦可矣 固不當如范升之詆毁注+[釋義]王氏曰 范升之詆毁 按光武時 韓歆 欲爲左氏春秋立博士한대 范升{之}曰 左氏不祖孔子하고 而出於丘明하니 無因得立이라하니 難者以太史公(名)[多]引左氏라한대 升又上太史公違戾五經하고 繆孔子言及左氏不(敢)[可]錄者三十一事하니라 又不可如張楷之責望注+[新增]愚按司馬公謂范升之詆毁者 謂范升之毁周黨也 이요 張楷之責望者 謂責樊英也 見上史本文이라 王氏謂范升之毁左氏及太史公이라하니 學者詳之
왕자王者가 마땅히 표창하고 우대하여 편안히 길러 그 뜻을 이루게 해서, 효소황제孝昭皇帝한복韓福을 대하고注+[附註]소제昭帝군국郡國에서 훌륭한 행실이 있다고 뽑은 탁군涿郡한복韓福 등 5명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여 돌아가게 하고 명하기를 “짐은 그대들에게 관직의 일로써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이니, 효제孝悌를 힘써 닦아서 향리鄕里를 교화하라.” 하고는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항상 정월正月에 양고기와 술을 내려 주게 하고, 불행히 죽은 자가 있으면 옷 한 벌을 하사하고 중뢰中牢로 제사하게 하였다. 광무제光武帝주당周黨을 대우하듯이 하여 염치廉恥를 장려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또한 옳으니, 진실로 범승范升처럼 훼방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범승范升의 훼방은 살펴보건대 광무제光武帝 때에 한흠韓歆이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위하여 박사博士를 세우려고 하자, 범승范升이 말하기를 ‘《좌씨춘추左氏春秋》는 공자孔子조종祖宗으로 삼지 않고 좌구명左丘明에게서 나왔으니, 이 때문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논란하는 자가 ‘태사공太史公이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많이 인용하였다.’고 말하자, 범승范升은 또 태사공太史公오경五經에 어긋난 것, 공자孔子의 말씀과 부합되지 않은 것 및 《좌씨춘추左氏春秋》 중에 기록해서는 안 되는 일 서른 한 가지를 올렸다.” 해서도 안 되고 또 장해張楷처럼 책망注+[新增]내가 살펴보건대 사마공司馬公이 말한 범승范升저훼詆毁라는 것은 범승范升주당周黨을 훼방한 것을 이르니 이 일은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5년에 있고, 장해張楷의 책망이라는 것은 번영樊英을 책망함을 이르니 위의 사서史書 본문本文에 보인다. 그런데 왕씨王氏범승范升좌씨左氏태사공太史公을 훼방한 것이라 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해서도 안 된다.
至於飾僞以邀注+[頭註]與要通이라하고 釣奇以警注+[頭註]綱目作驚이라하야 不食君祿而爭屠沽注+[頭註] 殺物也 賣也之利하고 不受小官而規卿相之位하야 名與實反하고 心與迹違하야는 斯乃華士, 少正卯之流注+[釋義]太公戮華士於齊하고 孔子誅少正卯於魯[附註]韓非子曰 太公封於齊하니 東海上 有任矞, 華士昆弟二人이어늘 太公殺之하다 周公急傳而問曰 二子皆賢人이어늘 殺之 何也 太公曰 是昆弟立議曰 不臣天子라하니 是望不得而臣也 不友諸侯라하니 是望不得而友也 耕而食之하고 掘而飮之하야 無求於人이라하니 是望不得而賞罰勸禁也 且聖人所以使之 非爵賞이면 則刑罰也어늘 今四者不足以使之 是以 誅之也로라 孔子爲魯相七日而誅少正卯하신대 門人問曰 夫少正卯 魯之聞人也어늘 夫子爲政而誅之하시니 得無失乎잇가 니라 其得免於聖人之誅 幸矣
거짓을 꾸며 명예를 바라고注+[頭註]와 통한다. 기이함을 낚아 시속時俗을 놀라게 하여,注+[頭註]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으로 되어 있다. 군주의 녹봉을 먹지 않으면서 짐승을 도살하고 술 파는注+[頭註]는 짐승을 도살하는 것이고, 는 파는 것이다. 이익을 다투고, 작은 벼슬을 받지 않으면서 경상卿相의 지위를 엿보아, 이름이 실제와 위반되고 마음이 행적과 어긋남에 이르러서는 바로 화사華士소정묘少正卯의 부류注+[釋義]姜太公(呂尙, 여망呂望)은 화사華士나라에서 죽였고, 공자孔子소정묘少正卯나라에서 죽였다.[附註]韓非子가 말하였다. “태공太公나라에 봉하니, 동해東海 가에 임율任矞화사華士 형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태공太公이 이들을 죽였다. 주공周公이 급히 파발마를 보내어 묻기를 ‘두 사람은 모두 현인賢人인데 그들을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공太公이 대답하기를 ‘이들 형제는 의논을 세우기를 「天子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諸侯를 벗으로 삼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벗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내가 농사지어 먹고 내가 우물 파서 마셔서 남에게 구할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그를 상 주거나 벌 주어 권면하고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성인聖人이 사람을 부리는 것은 관작과 상이 아니면 형벌인데, 지금 네 가지로 이들을 부릴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이들을 죽인 것이다.’ 하였다.” 공자孔子나라 정승이 된 지 7일 만에 소정묘少正卯를 죽이자, 문인門人이 묻기를 “소정묘少正卯나라의 유명한 사람인데, 선생님께서 정사를 하시면서 그를 죽이셨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천하에 큰 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거슬려서 험한 것이요,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면서 견고한 것이요, 셋째는 말이 거짓되면서 변설辯說을 잘하는 것이요, 넷째는 기억이 추하면서 해박한 것이요, 다섯째는 잘못인 줄 알면서 윤색潤色하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군자의 죽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소정묘少正卯는 이 다섯 가지를 겸하여 소유했다.” 하였다. 이니, 성인聖人의 주벌을 면하는 것도 다행이다.
尙何聘召之有哉리오
오히려 어찌 초빙하여 부를 것이 있겠는가.”
又徵廣漢楊厚 江夏黃瓊하다
이때 또 광한廣漢양후楊厚강하江夏황경黃瓊을 불렀다.
厚旣至 豫陳漢有三百五十年之厄注+[附註]春秋命曆序曰 四百年之間 閉四門하고 聽外難하여 群異竝賊하고 官有孼臣하고 州有兵亂하야 五七弱하니 暴漸之效也라하니 朱均注 五七 三百五十歲 當順帝漸微하야 四方多逆賊也하야 以爲戒어늘 拜議郞하다
양후楊厚가 이르자 나라는 건국建國한 지 350년 후에 액운厄運注+[附註]춘추명력서春秋命曆序》에 이르기를 “400년 사이에 사방의 문을 닫고 외란外亂을 내버려 두어 여러 재이災異가 함께 일어나고, 관리 중에는 얼신孼臣(奸臣)이 있고 에는 병란이 일어나서 오칠五七에 약해지니, 포악함이 심해진 효험이다.” 하였는데, 주균朱均에 “오칠五七은 350년이니, 순제順帝 때에 점점 미약해져서 사방에 역적이 많았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하여 경계하였는데, 의랑議郞에 제수하였다.
將至 李固以書逆遺之曰
황경黃瓊이 이르려 할 때에 이고李固가 편지를 미리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백이伯夷는 좁고 유하혜柳下惠는 공손하지 않다’ 하였으니, 백이伯夷처럼 하지도 않고 유하혜柳下惠처럼 하지도 않아서 의 중간에 있는 것은 성인聖人이 처신할 때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誠欲遂枕山棲谷하야 擬迹巢, 由인댄 斯亦可矣어니와 若當輔政濟民인댄 今其時也로다
진실로 산꼴짝에 은거하여 행적을 소보巢父허유許由에게 비견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 정사를 돕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自生民以來 善政少而亂俗多하니 必待堯舜之君인댄 此爲士行其志 終無時矣리라
생민生民이 있은 이래로 잘 다스리는 정사는 적고 어지러운 풍속이 많았으니, 반드시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기다리려고 한다면 이는 선비가 그 뜻을 행할 기회가 끝내 없을 것이다.
嘗聞하니 語曰 嶢者 易缺하고 皦者 易汚注+[釋義] 堅硬也 明白也 嶢嶢 太堅하야 易爲玷缺하고 皦皦 太白하야 易爲穢汚하니 卽虞詡所謂白璧不可爲也라하니 盛名之下 其實難副
내가 들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견고한 것은 망가지기 쉽고 깨끗한 것은 더럽혀지기 쉽다.’注+[釋義]는 견고함이고, 는 명백함이다. 요요嶢嶢는 너무 견고하여 망가지기 쉽고 교교皦皦는 너무 희어서 더럽혀지기 쉬우니, 우후虞詡의 이른바 ‘흰 구슬처럼 깨끗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으니, 높은 명성의 아래는 그 실제에 부응하기가 어렵다.
樊英 被徵初至 朝廷 設壇席하고 猶待神明하니 雖無大異 而言行所守 亦無所缺이어늘 而毁謗 布流하야 應時折減注+[頭註]言其名譽折減也 豈非觀聽望深注+[頭註]言其聲名之深盛하야 素動人之觀聽이라 所望者深也하고 聲名太盛乎
근래에 번영樊英이 처음 부름을 받고 오자 조정에서 단석壇席을 설치하고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하니, 비록 크게 특이한 점은 없었으나 말과 행실을 지키는 것은 또한 결함이 없었는데 훼방이 유포되어 시간의 추이推移에 따라 명성이 꺾이고 줄어들었으니,注+[頭註]그 명예가 꺾이고 줄어듦을 말한다. 이는 어찌 사람들이 보고 들음에 기대가 너무 컸고注+[頭註]명성이 깊고 성대하여 평소에 사람들의 보고 들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깊음을 말한 것이다. 명성이 너무 성대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是故 俗論 皆言處士純盜虛聲이라하니 願先生 弘此遠謀하야 令衆人歎服하야 一雪此言爾니라
이 때문에 시속時俗의 의논에 모두 말하기를 ‘처사處士들은 순전히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니, 원컨대 선생先生은 이 원대한 계책을 넓혀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여 이러한 말을 한 번 설욕하기 바란다.”
瓊至 拜議郞하야 稍遷尙書僕射하다
황경黃瓊이 이르자, 의랑議郞에 제수되고 차츰 옮겨 상서복야尙書僕射에 이르렀다.
昔隨父香하야 在臺閣注+[頭註]瓊父香 和帝時 爲尙書令이라하야 習見故事러니 及後居職 達練官曹하야 爭議朝堂하니 莫能抗奪注+[頭註]抗言以奪其議也이라
황경黃瓊이 옛날에 아버지 황향黃香을 따라 대각臺閣에 있으면서注+[頭註]황경黃瓊의 아버지 황향黃香화제和帝 때에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대각臺閣에 있었다. 고사故事를 익숙히 보았는데, 뒤에 관직에 있게 되자 관청의 여러 의 일에 밝고 익숙하여 조당朝堂에서 다투고 의논하니, 누구도 감히 맞서서 말하여 의논을 가로막는注+[頭註]맞서서 말하여 그 의논을 가로막는 것이다. 자가 없었다.
數上疏言事 頗采用之하니라
자주 글을 올려 일을 아뢰니, 이 자못 그 말을 채용하였다.
李固 郃之子也
이고李固이합李郃의 아들이다.
少好學하야 常改易姓名하고 杖策驅하야 負笈從師注+[釋義]負笈 負書箱也 說文 驢上負也라하니 猶今人爲木牀跨驢背하야 以負載物也 古人多言負笈하니 謂自負之하야 不遠千里하야 究覽墳籍하야 爲世大儒하니라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이 성명姓名을 바꾸고는 채찍을 잡고 나귀를 몰아 책 상자를 지고 스승을 따라서注+[釋義]부급負笈은 책 상자를 지는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笈)은 나귀 위에 싣는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나무 평상을 만들어 나귀 등에 걸쳐서 물건을 지거나 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옛사람들은 대부분 부급負笈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짊어짐을 이른다. 천리 길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서적을 두루 보아 세상의 큰 학자가 되었다.
每到太學 密入公府하야 定省注+[通鑑要解] 昏定而晨省이라하니 安其牀衽이요 問其安否如何父母하야 不令同業諸生으로 知其爲郃子也러라
언제나 태학太學에 이르면 남모르게 공부公府에 들어가 부모의 안부를 살펴,注+[通鑑要解]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날이 저물면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핀다.” 하였으니, 은 요와 자리를 펴서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은 안부가 어떠한지를 묻는 것이다. 함께 학문하는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합李郃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玄纁者 天地之正色 : 玄은 옅은 검정색으로 하늘의 색깔이고, 纁은 주황색으로 땅의 색깔이라 한다.
역주2 事在光武建武五年 : 建武 5년에 光武帝가 處士인 太原의 周黨과 會稽의 嚴光 등을 불러 京師에 이르게 하니, 周黨이 들어와 뵐 적에 엎드리기만 하고 拜謁하지 않고는 스스로 뜻한 바를 지키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博士 范升이 아뢰기를 “삼가 보니, 太原의 周黨과 東海의 王良과 山陽의 王成 등이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使者가 세 번이나 초빙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에 오르고, 섬돌에 미쳐 조정에서 뵐 적에 周黨은 禮로 자신을 굽히지 않아 엎드리기만 하고 拜謁하지 않았으며, 교만하고 사나워 동시에 함께 가버렸습니다. 周黨 등은 文은 義理를 부연하지 못하고 武는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하면서 화려한 명예를 취하여 거의 三公의 지위에 올랐으니, 신은 원컨대 그들과 雲臺의 아래에 앉아서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를 考試해서 저들의 말이 신의 말과 다를 경우에는 신이 허망한 죄를 받을 것이요, 만일 제 말대로 저들이 감히 헛된 이름을 사사로이 도둑질하여 上에게 과시하고 높아지기를 구한 것이라면 저들은 모두 크게 不敬한 것입니다.” 하였다.
역주3 孔子曰……而少正卯兼有之 : 少正卯는 春秋時代 魯나라 大夫로 少正은 官名인바 副官이란 뜻이다. 이 내용은 《孔子家語》 〈始誅篇〉에 보인다.
역주4 君子謂……柳下惠不恭 : 《孟子》 〈公孫丑 上〉에 “伯夷는 좁고 柳下惠는 不恭하니, 좁음과 불공함은 君子가 행하지 않는다.[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라고 보인다.
역주5 不夷不惠 可否之間 : 伯夷는 너무 깨끗하여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였고 柳下惠는 淸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화합하였다. 《論語》 〈微子〉에 孔子는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伯夷와 叔齊일 것이다.[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 하였고, 柳下惠와 少連을 평하되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의리(조리)에 맞으며 행실이 올바른 思慮에 맞았다.[謂柳下惠少連 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 하고는 “나는 이와 달라서 可한 것도 없고 不可한 것도 없다.[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하였다.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것은 평소 어느 한 가지만을 주장하지 않고 時宜에 맞게 행동함을 이르는 바, 可否之間이란 無可無不可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6 : 요
역주7 : 교
역주8 : 려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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