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燕尙書悅壽
注+[頭註]姓名也라 開門納晉師
하니 超與左右數十騎
로 踰城
하야 突圍出走
어늘 追獲之
하다
裕忿廣固久不下하야 欲阬之하고 以妻女賞將士러니 韓範諫曰 晉室南遷에 中原鼎沸라
士民이 無援하야 彊則附之하니 旣爲君臣이면 必須爲之盡力이라
今王師弔伐
이어늘 而盡阬之
注+[頭註]阬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阬而殺之라면 使安所歸乎
잇가
竊恐西北之人
이 無復來蘇之望
注+[釋義]書曰 徯我后하노니 后來하시면 其蘇라한대 蔡傳曰 蘇는 復生也니 謂后來면 我其復生也라矣
일까하노이다 裕改容謝之
라
然
이나 猶斬王公以下三千人
하고 沒入家口萬餘
하고 夷其城隍
注+[釋義]夷는 平之也요 城隍은 外塹也라 有水曰池요 無水曰隍이라하고 送超詣建康
하야 斬之
하다
晉自濟江以來
로 威靈不競
하니 戎狄橫
하야 虎噬中原
이라
劉裕始以王師
로 翦平東夏
어늘 不於此際
에 旌禮賢俊
하고 慰撫疲民
하야 宣愷悌之風
하고 滌殘穢之政
하야 使群士嚮風
하고 遺黎企踵
하고 而更恣行屠戮
하야 以快忿心
하니 迹其施設
하면 曾苻, 姚
注+[頭註]苻堅與姚萇이라之不如
라
宜其不能蕩壹四海하야 成莫大之業이니 豈非雖有智勇이나 而無仁義하야 使之然哉아
初
에 徐道覆
이 聞劉裕北伐
하고 勸盧循
注+[頭註]徐道覆은 廣州刺史盧循之妹夫也요 循은 乃孫恩之黨而恩之妹夫也니 見上己亥年이라하야 乘虛襲建康
하니 循
이 從之
하다
朝廷
이 急徵劉裕
하니 裕方議留鎭下邳
하야 經營司, 雍
注+[頭註]二州名이니 司州는 洛陽이요 雍州는 長安이라이러니 會得詔書
하고 引兵還
할새 以船載輜重
하고 自帥精銳步歸
라
至山陽
하야 聞何無忌敗死
注+[頭註]無忌引兵討盧循이라가 遇道覆하야 戰敗死之라하고 慮京邑失守
하야 兼行하다
○ 五月에 劉毅與循으로 戰于桑落(州)[洲]하야 毅兵이 大敗라
裕謂將佐曰 賊이 若於新亭直進이면 其鋒을 不可當이니 宜且迴避어니와 若回泊西岸이면 此成擒爾니라
十二月
에 帥衆軍
하고 齊力擊循
하니 循兵
이 大敗
라
走趣豫章
이라가 收散卒
하야 徑還
注+[頭註]番는 音波라하다
의희義熙 6년(경술 410) - 진秦나라 홍시弘始 12년이요, 위魏나라 영흥永興 2년이다.
대국大國이 둘이요 소국小國이 여섯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
남연南燕의
상서尙書 열수悅壽注+[頭註]열수悅壽는 성명姓名이다. 가 성문을 열고
진晉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모용초慕容超가 좌우에서 따르던
기병騎兵 수십 명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했는데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유유劉裕는 광고廣固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서 성 안의 병사들을 묻어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진晉나라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는데, 한범韓範이 간하기를 “진晉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중원中原이 물 끓듯 소란하였습니다.
선비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든 강대하면 그에게 귀부歸附한 것이니, 이미 군신간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구족舊族(예부터 내려온 지체 높은 집안)이요, 선제先帝의 유민遺民들입니다.
지금
왕王의 군대가 죄 있는 자를 정벌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모조리 묻어 죽인다면
注+[頭註]갱阬은 구덩이(참호)이고 빠지는 것이니,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이른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서북西北 사람들이 다시는 의로운 군대가 와서 소생하게 해줄 것이라 희망
注+[釋義]《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소생할 것이다.” 하였는데, 채씨蔡氏의 전傳에 이르기를 “소蘇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다시 살아남을 이른다.” 하였다. 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유유劉裕가 낯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왕공王公 이하 관원 3천 명을 목 베고 그들의
가속家屬 1만여 명을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고
광고廣固의
성황城隍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
注+[釋義]이夷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요, 성황城隍은 바깥 참호이다. 물이 있는 곳을 지池라 하고 물이 없는 곳을 황隍이라 한다. 모용초慕容超를
건강建康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진晉나라가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온 뒤로부터 국가의 위세威勢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범처럼 중원中原을 집어 삼켰다.
유유劉裕가 처음에
왕王의 군대로
동하東夏(齊나라 지역)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때에 어진 이와 준걸스런 이를 표창하고 예우하며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여, 화락한 풍속을 펴며 잔학하고 더러운 정사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풍문風聞만 듣고도 향하게 하고 오랑캐의 통치하에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발돋움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는 도리어 살육을 자행하여 분한 마음을 쾌하게 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일찍이
부씨苻氏와
요씨姚氏注+[頭註]부苻와 요姚는 전진前秦의 부견苻堅과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이다. 만도 못하다.
그가 사해四海를 통일하여 위대한 기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당연하니, 지모와 용맹은 있었으나 인의仁義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
서도복徐道覆이
유유劉裕가 북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노순盧循에게 권하여
注+[頭註]서도복徐道覆은 광주자사廣州刺史 노순盧循의 매부妹夫이고, 노순盧循은 바로 손은孫恩의 당黨이면서 손은孫恩의 매부妹夫이니, 앞의 기해년조己亥年條(399)에 보인다. 빈틈을 타서
건강建康을 습격하게 하니,
노순盧循이 그 말을 따랐다.
조정朝廷에서 급히
유유劉裕를 부르니,
유유劉裕가 막
하비下邳에 주둔해서
사주司州와
옹주雍州注+[頭註]사주司州와 옹주雍州는 두 주州의 이름이니, 사주司州는 낙양洛陽이고 옹주雍州는 장안長安이다. 를 경영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서詔書를 받게 되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올 적에 배에다
치중輜重을 싣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보로 돌아왔다.
산양山陽에 이르러
하무기何無忌가 패전하여 죽었다
注+[頭註]하무기何無忌가 군대를 이끌고 노순盧循을 토벌하다가 서도복徐道覆을 만나 전투에 패하여 죽었다. 는 말을 듣고
경읍京邑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해서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였다.
○ 5월에 유의劉毅가 노순盧循과 상락주桑落洲에서 싸워 유의劉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을축일乙丑日(14일)에 노순盧循이 회구淮口에 이르니, 중외中外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유유劉裕가 장수와 보좌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만약 신정新亭에서 곧바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의 예봉銳鋒(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해낼 수 없으니 마땅히 우선 회피해야 하겠지만, 만약 진로를 바꾸어 서안西岸에 정박한다면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하였다.
12월에 유유劉裕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노순盧循을 공격하니, 노순盧循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도망하여
예장豫章으로 향했다가 흩어진 군대를 수합하여 곧바로
번우番禺注+[頭註]번番는 음이 파이다. 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