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丑]四年이라 〈趙光初十二年이요 後趙太和二年이라
正月
에 趙太子熙 帥百官
하야 奔上
하니 關中
이 大亂
이라
○ 二月
에 諸軍
이 攻石頭
할새 西軍
注+[通鑑要解]侃等諸軍이라이 獲蘇逸斬之
하다
한대 陶侃
이 笑曰
은 似不如是
라하니 導有慚色
이러라
溫嶠는 欲遷都豫章하고 三吳之豪는 欲都會稽하야 二論이 紛紜未決이어늘
司徒導曰 孫仲謀, 劉玄德
이 俱言建康
은 王者之宅
이라하니 古之帝王
이 不以豐儉
注+[通鑑要解]豐은 大也요 儉은 小也라移都
라
若農事不修
면 則樂土爲墟矣
요 且北寇游魂
注+[通鑑要解]言其遊散이라이 伺我之隙
하니 一旦示弱
하야 竄於蠻越
하야 求之望實
注+[通鑑要解]望은 聞望也요 實은 實事也라이면 懼非良計
니
今特宜鎭之以靜이면 群情自安이리이다 由是로 不復徙都하다
함화咸和 4년(기축 329) - 조趙나라 광초光初 12년이고, 후조後趙 태화太和 2년이다.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셋이다. -
정월에 조趙나라 태자太子 유희劉熙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상규上邽로 도망가니, 관중關中이 크게 혼란하였다.
장군 장영蔣英과 신서辛恕가 장안長安을 점거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 2월에
제군諸軍이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할 때에
서군西軍注+[通鑑要解]서군西軍은 도간陶侃 등의 제군諸軍이다. 이
소일蘇逸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여러 신하들이 황제를 뵙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고 벌줄 것을 청하였다.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석두성石頭城에 들어가서 옛 절節(깃발)을 가져오게 하자, 도간陶侃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무蘇武의 절節은 이와 같지 않을 듯하다.” 하니, 왕도王導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 이때에 궁궐이 다 불타서 건평원建平園을 궁궐로 삼았다.
온교溫嶠는 예장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고 삼오三吳의 호걸들은 회계會稽에 도읍하고자 해서 두 가지 의론이 분분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
손중모孫仲謀와
유현덕劉玄德이 모두 말하기를 ‘
건강建康은
왕자王者가 살 곳이다.’ 하였으니, 옛날
제왕帝王들은 부유하고 곤궁함
注+[通鑑要解]풍豐은 큼이요, 검儉은 작음이다. 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만일 본업本業(농사)에 힘쓰고 재용財用을 절약한다면 어찌 피폐함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농사가 닦여지지 않으면
낙토樂土가 빈 터가 될 것이요, 또 북쪽 오랑캐의 떠돌아다니는
혼魂注+[通鑑要解]유혼游魂은 떠돌아다니고 흩어진 무리를 이른다. 이 우리의 틈을 엿볼 것이니, 하루아침에 약함을 보이고 도망하여
만蠻,
월越(豫章과
회계會稽)에 이르러서 저들로 하여금 우리를 중하게 여겨 주기
注+[通鑑要解]망望은 명망이요, 실實은 실사實事(實際)이다. 를 구한다면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다.
이제 다만 마땅히 고요함으로써 진정하면 민심이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다시는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