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冠後宮이러니 旣
正位宮闈注+[頭註]宮中之門也라에 愈自謙肅
하고 好讀書
하며 常衣大練하고 裙不加緣注+[通鑑要解]大練은 大帛이니 厚繒也라 緣은 衣也라이러라
朔望
에 諸姬主朝謁
할새 望見后袍衣疎麤
하고 以爲
이러니 就視
하고 乃笑
어늘 后曰 此繒
이 特宜染色故
로 用之耳
라하더라
○ 帝思中興功臣
하야 乃圖畫二十八將於南宮雲臺
할새 以鄧禹爲首
하고 次
는 馬成, 吳漢, 王梁, 賈復, 陳俊, 耿弇, 杜茂, 寇恂, 傅俊, 岑彭, 堅
, 馮異, 王霸, 朱祐, 任光,
遵, 李忠, 景丹, 萬脩,
延, 邳肜, 銚期, 劉植, 耿純, 臧宮, 馬武, 劉隆
이요 又益以王常, 李通, 竇融, 卓茂
하야 合三十二人
이라
馬援
은 以
椒房注+[頭註]皇后所居에 以椒和泥塗壁하니 取其溫暖而芳하고 又取其蕃實之義라之親이라하야 獨不與焉
하다
中興二十八將을 前世以爲上應二十八宿라하니 未之詳也라
然
이나 咸能
하야 奮其智勇
하야 稱爲佐命
하니 亦各智能之士也
라
議者多謂光武不以功臣任職이나 迹其深圖遠算하면 固將有以焉이라
降自秦漢으로 悉資戰力하고 至於翊扶王運하야도 皆武人崛起라
或崇以
之賞
하고 或任以阿衡
注+[頭註]阿는 倚요 衡은 平也라 商之官名이니 言天下之所倚平也라之地
하니 勢疑則隙生
하고 力侔則亂作
이라
光武監前車之失
하고 存矯
注+[頭註]正曲曰矯라枉之志
하야 雖寇鄧之高勳
과 耿賈之鴻烈
이라도 不過大縣數四
하고 所加特進朝請而已
라
觀其治平臨政, 稱職責咎하면 所謂導之以政, 齊之以禮者乎인저
故로 高秩厚禮로 允答元勳하고 峻文深憲으로 責成吏職하야 莫不以功名始終하고 延慶于後라
昔留侯以謂高祖悉用蕭曹故人
注+[頭註]張良曰 陛下起布衣하사 爲天子에 而所封은 皆蕭曹故人이니이다하고 郭伋亦譏南陽多顯
注+[頭註]南陽은 光武鄕也라 光武以伋爲幷州牧이러니 帝問以得失한대 伋曰 選補衆職인대 當簡天下賢俊이요 不宜專用南陽也이니이다하고 鄭興又戒功臣任職
하니
夫崇恩偏授는 易啓私溺之失이요 至公均被는 必廣招賢之路니 意者不其然乎아
[史略 史評]愚按 二十八將이 以爲相應二十八宿라하니 其理有無를 未可知나
然咸能抒其忠誠하고 奮其勇智하야 以成佐命之功하니 亦可謂名世者矣라
○ 鍾離意薦全椒長
注+[頭註]百官志에 萬戶以上爲令이요 減萬戶爲長이라劉平
이어늘 詔徵拜議郞
하다
平이 在全椒에 政有恩惠하야 民이 或增貲就賦하고 或減年從役이라
太守行部에 獄無繫囚하고 人自以得所하니 不知所問하야 唯班詔書而去러라
○ 帝性
이 褊
注+[頭註]與偏通하니 狹也라察
하야 好以耳目隱發爲明
注+[釋義]謂喜以耳聞目見하야 間密地發人陰私로 爲明이라하니 公卿大臣
이 數被詆毁
하고 近臣尙書以下 至見提
注+[釋義]提는 擲也요 曳는 拕也니 謂至見被提捉紐拽라라
嘗以事怒郞藥
注+[釋義]郞은 官名이니 掌宿衛라 姓藥이요 名崧이니 河內人이라하야 以杖
之
한대 崧
이 走入床下
어늘 帝怒甚
하야 疾言郞出
하니
崧乃曰 天子
는 穆穆
이요 諸侯
는 皇皇
注+[釋義]出記曲禮文하니라[通鑑要解]穆穆은 幽深和敬之貌요 皇皇은 壯盛顯明之貌라하니 未聞人君
이 自起撞郞
이니이다 帝乃赦之
하다
是時
에 朝廷
이 莫不悚慄
하야 爭爲嚴切
하야 以避誅責
호되 唯鍾離意獨敢諫爭
하야 封還詔書
하고 臣下過失
을 輒救解之
러라
○ 荊州刺史郭賀 官有殊政
이어늘 上
이 賜以三公之服黼黻
注+[釋義]黼는 音甫요 黻은 音弗이니 黼는 象斧形호되 白與黑相次하고 黻은 兩己相背호되 黑與靑相次하니라[頭註]黼는 斧니 取其斷이요 黻은 兩己相戾하니 取其辨이라冕旒
注+[頭註]飾이니 垂玉也라 天子十二旒요 上公九旒요 三公八旒요 侯伯七旒요 子男五旒요 王之大夫와 與諸侯之孤四旒니 垂皆過目은 所以蔽明也라하고 勅行部
에 去
帷
注+[原註]襜은 披衣也라[通鑑要解]襜帷는 以蔽前後者也니 今勅令巡行所部郡縣時에 可除之라하야 使百姓
으로 見其容服
하야 以章有德
하다
귀인貴人 마씨馬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으니, 황후皇后는 마원馬援의 딸이다.
후궁後宮 중에
덕德이 으뜸이었는데, 이미 황후
注+[頭註]궁위宮闈는 궁중宮中의 문이다. 의 자리에 오르자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엄숙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항상
대련大練(거친 명주)을 입고 치마에 선을 두르지 않았다.
注+[通鑑要解]常衣大練 군불가연裙不加緣:대련大練은 대백大帛이니, 거칠게 짜서 두터운 명주이다. 연緣은 옷의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는 것이다.
초하루와 보름에 여러 후궁後宮과 공주公主들이 뵐 적에 황후의 포의袍衣가 거칠고 굵은 것을 멀리서 보고는 기곡綺縠(무늬가 있는 얇고 고운 비단)이라고 여겼는데, 가까이 나아가서 보고는 마침내 웃자, 황후皇后가 말하기를 “이 비단이 다만 염색하기에 좋기 때문에 이것을 쓸 뿐이다.” 하였다.
○ 황제는 중흥中興한 공신功臣들을 생각하여 이에 장수 28명의 상象을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그리게 하였는데, 등우鄧禹를 으뜸으로 삼고, 다음은 마성馬成, 오한吳漢, 왕량王梁, 가복賈復, 진준陳俊, 경엄耿弇, 두무杜茂, 구순寇恂, 부준傅俊, 잠팽岑彭, 견심堅鐔, 풍이馮異, 왕패王霸, 주우朱祐, 임광任光, 제준祭遵, 이충李忠, 경단景丹, 만수萬脩, 개연蓋延, 비융邳肜, 요기銚期, 유식劉植, 경순耿純, 장궁臧宮, 마무馬武, 유융劉隆이요, 또 여기에 왕상王常, 이통李通, 두융竇融, 탁무卓茂를 더하여 모두 32명이었다.
- 《후한서後漢書 마무전馬武傳》 등의 논論에 나옴 -
마원馬援은
초방椒房注+[頭註]황후皇后의 처소에는 산초를 진흙에 섞어서 벽을 바르니, 따뜻하고 향기로움을 취한 것이고, 또 그 열매가 많이 열리므로 자녀子女를 많이 생육生育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의 친척이라 하여 홀로 참여되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 〈마무전馬武傳〉 등의 논論에 말하였다.
“중흥中興한 28명의 장수를 전대前代에 이르기를 ‘위로 이십팔수二十八宿에 응한 것’이라고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풍운風雲의 기회를 만남에 감동해서 자신의 지혜와 용맹을 뽐내어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또한 각기 지혜 있고 능력 있는 인사人士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르기를 ‘광무제光武帝는 공신功臣에게 직책을 맡기지 않았다.’고 비평하나 그 심원한 도모와 계산을 생각해보면 진실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한시대秦漢時代 이후로는 천하天下를 쟁취爭取함에 모두 장수들의 전투하는 힘에 의지하였고, 왕운王運을 돕고 붙듦에 이르러서도 무인武人들이 우뚝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혹은
연성連城의
상賞으로 높이거나 혹은
아형阿衡注+[頭註]아阿는 의지함이요, 형衡은 균평함이다. 아형阿衡은 상商나라의 관직 이름이니, 천하天下가 의지하여 균평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의 지위를 맡기니, 세력이 대등하면 틈이 생기고 힘이 비슷하면 난이 일어난다.
소하蕭何와 번쾌樊噲도 오히려 포승줄에 묶였고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은 끝내 주륙誅戮을 당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이전의 잘못을 거울로 삼고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는
注+[頭註]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을 교矯라 한다. 뜻을 두어서, 비록
구순寇恂과
등우鄧禹의 높은
공훈功勳과
경엄耿弇과
가복賈復의 큰
공렬功烈로도
분토分土한 것이 큰 고을 서너 개에 불과하였고
가加한 것이
특진特進과
조청朝請뿐이었다.
치평治平하여 정사에 임하고 직책에 걸맞게 하여 허물을 책한 것을 살펴보면 이른바 ‘정사로써 인도하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품계와 후한 예禮로 원훈元勳에게 진실로 보답하고 준엄한 법으로 관리의 직책에 성공을 책임지게 해서 공명功名으로 시종始終을 마치고 경사가 후세에 뻗쳐 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옛날
유후留侯(張良)는 이르기를 ‘
고조高祖는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의 옛 친구를 다 등용하였다.’
注+[頭註]장량張良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포의布衣로 일어나 천자天子가 되셨는데, 봉해 준 사람은 모두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의 옛 친구입니다.” 하였다. 하였고,
곽급郭伋 또한
광무제光武帝의 고향인
남양南陽에 현달한 이가 많음을 비판하였고,
注+[頭註]남양南陽은 광무제光武帝의 고향이다. 광무제光武帝가 곽급郭伋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는데, 황제가 정사의 득실得失을 묻자 곽급郭伋이 말하기를 “여러 직책을 선발하여 보임補任하려 한다면 천하의 어질고 준걸스러운 사람을 가려 써야 하고, 오로지 남양南陽 사람만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정흥鄭興은 또
공신功臣에게 직책을 맡기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높은 은혜와 편벽된 제수除授는 사사로움에 빠지는 잘못을 열기가 쉽고, 지극히 공정하고 고르게 은혜를 입힘은 반드시 어진 이를 초치招致하는 길을 넓히게 되니, 생각건대 이것이 옳지 않겠는가.”
[史略 사평史評]내가 살펴보건대 “28명의 장수가 하늘의 28수宿와 서로 응한다.” 하였으니, 그 이치의 있고 없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충성을 펴고 용맹과 지혜를 뽐내서 좌명佐命의 공을 이루었으니, 또한 세상에 이름날 만한 자라고 이를 수 있다.
운대雲臺에 모습을 그려서 큰 공훈을 표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
종리의鍾離意가
전초장全椒長注+[頭註]《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만호萬戶 이상의 현縣은 영令이라 하고, 만호萬戶보다 적은 것은 장長이라 한다.” 하였다. 유평劉平을 천거하자,
조서詔書로
유평劉平을 불러
의랑議郞에 임명하였다.
유평劉平이 전초현全椒縣에 있을 때에 정사에 은혜가 있어서 백성들이 혹 재물을 보태어 세금을 내고, 혹 나이를 줄여 부역에 종사하였다.
태수太守가 부部를 순행할 때에 옥獄에 갇힌 죄수가 없고 사람마다 제 살 곳을 얻었다고 여기니, 사문査問할 바를 알지 못하여 단지 조서만 반포하고 떠나갔다.
○ 황제의 성품이 편협하고
注+[頭註]편褊은 편偏과 통하니, 좁음이다. 세세히 살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남이 숨기는 것을 들추어냄을 총명으로 삼기를 좋아하니,
注+[釋義]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은밀한 곳을 엿보아 남이 감추고 있는 사사로운 일을 들추어내는 것을 총명으로 삼기 좋아함을 이른다. 공경公卿과
대신大臣들이 자주 꾸짖음과 훼방을 당하고 가까운 신하인
상서尙書 이하가 구타당하고 끌려 나가기까지 하였다.
注+[釋義]제提는 때리는 것이고 예曳는 끄는 것이니, 구타당하고 끌려 나가기까지 함을 이른다.
일찍이 일 때문에
낭관郞官인
약숭藥崧注+[釋義]낭郞은 관명官名이니, 숙위宿衛를 관장하였다. 성姓은 약藥이요 이름은 숭崧이니, 하내河內 사람이다. 에게 노하여 지팡이로 때리자
약숭藥崧이 침상 아래로 도망하였는데, 황제가 매우 노하여
낭郞은 나오라고 급히 말하니,
약숭藥崧이 이에 아뢰기를 “
천자天子는
목목穆穆하고
제후諸侯는
황황皇皇하였으니,
注+[釋義]天子穆穆 제후황황諸侯皇皇:[釋義]이 내용은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온다. [通鑑要解]穆穆은 그윽하고 깊고 화목하고 공경하는 모양이요, 황황皇皇은 웅장하고 현명顯明한 모양이다. 인군人君이 스스로 일어나
낭관郞官을 때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자, 황제가 이에 놓아주었다.
이때 조정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다투어 엄하고 박절하게 하여 주벌과 꾸짖음을 피하였는데, 오직 종리의鍾離意만은 홀로 과감하게 간쟁하여 자주 조서를 봉함하여 돌려보내고 신하의 과실을 번번이 구원하고 풀어 주었다.
○
형주자사荊州刺史 곽하郭賀가 벼슬에 특별한 공적이 있자,
상上이
삼공三公의 복식인
보불黼黻注+[釋義]黼는 음이 보이고 불黻은 음이 불이니, 보黼는 도끼의 모양을 형상하였는데 백색과 흑색이 서로 차례하여 있고, 불黻은 두 기자己字가 서로 등지고 있는데 흑색과 청색이 서로 차례하여 있다.[頭註]黼는 도끼 문양이니 결단력을 취한 것이고, 불黻은 두 기자己字가 서로 어긋난 문양이니 분별력을 취한 것이다. 과
면류관冕旒冠注+[頭註]면류冕旒는 관冠의 꾸밈이니 옥을 드리운 것이다. 천자天子는 12유旒이고, 상공上公은 9유旒이고, 삼공三公은 8유旒이고, 후侯와 백伯은 7유旒이고, 자子와 남男은 5유旒이고, 왕王(天子)의 대부大夫와 제후諸侯의 고孤는 4유旒이니, 술을 드리운 것이 모두 눈을 지나게 한 것은 밝음을 가리운 것이다. 을 하사하고
칙명勅命으로
부部(관할 지역)를 순행할 때에 수레의 휘장
注+[原註]襜은 피의披衣(옷을 몸 위에 걸치기만 하고 팔을 소매에 꿰지 않은 것)이다. [通鑑要解]襜帷는 수레의 앞뒤를 가리는 휘장이니, 지금 칙명으로 주州에 소속된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에 수레의 휘장을 제거하게 한 것이다. 을 제거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용모와 의복을 보게 하여 덕 있는 이를 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