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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1)

통감절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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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壬子]七年이라 〈秦莊襄王楚元, 楚十四, 燕六, 魏二十八, 趙十七, 韓二十四, 齊十六年이라
7년(임자 B.C.249) - 장양왕莊襄王 원년元年, 나라 14년, 나라 6년, 나라 28년, 나라 17년, 나라 24년, 나라 16년이다.
是歲 周亡이라
이 해에 나라가 망하였다. -
以呂不韋爲相國하야 封文信侯하다
나라가 여불위呂不韋상국相國으로 삼아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였다.
○ 東周君 與諸侯 謀伐秦이어늘 秦王 使相國呂不韋 帥師滅之하고 遷東周君於陽人聚注+[釋義]地理志云 河南梁縣 有陽人聚 括地志云 陽人故城 在汝州梁縣西四十里하니 周遂不祀하다
동주군東周君제후諸侯와 더불어 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자, 진왕秦王상국相國 여불위呂不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망시키고 동주군東周君양인취陽人聚로 옮기니,注+[釋義]양인취陽人聚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하남河南 양현梁縣양인취陽人聚가 있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양인陽人고성古城여주汝州 양현梁縣 서쪽 40리에 있다.” 하였다.나라가 마침내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周比亡 凡有七邑注+[釋義]徐廣曰 周比亡時 凡七縣이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 是也이러라
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개 고을을 소유하였다.注+[釋義]서광徐廣이 말하였다. “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이 있었으니, 하남河南, 낙양洛陽, 곡성穀城, 평음平陰, 언사偃師, , 구지緱氏가 이것이다.”
[新增]雙湖胡氏曰
[新增]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西都 自涇舟膠楚澤注+[頭註] 水名이니 在西周地 昭王 巡狩濟漢이러니 漢濱人 以膠膠舟하야 中流膠液하야 王溺死하니라 楚地하고 下堂見諸侯注+[頭註]平王東遷하야 都于洛邑한대 王室微弱하야 政由下하니 下堂見諸侯하니라 綱常陵遲하야 已爲春秋之漸이요 東都 自春秋已來 弱不可支로되 猶幸五霸注+[頭註]齊桓, 晉文, 秦穆, 宋襄, 楚莊이라挾天子하야 以令諸侯하야 尙寄空名於天下
서도西都(西周)는 경수涇水의 배가 나라의 못에서 아교가 녹아 침몰되고,注+[頭註]은 물 이름이니, 서주西周의 땅에 있다. 나라 소왕昭王순수巡狩하여 한수漢水를 건너가는데, 한수漢水 가에 있는 사람이 아교풀로 배를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중류에 이르러서 아교가 녹자 소왕昭王한수漢水에 빠져 죽었다. 한수漢水나라 땅이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제후를 만나 본 뒤로부터注+[頭註]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遷都하여 낙읍洛邑에 도읍하자, 왕실이 미약해져서 정사가 아랫사람에게서 나오니, 천자天子을 내려가 제후諸侯를 보게 되었다. 강상綱常이 침체되어 이미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조짐이 있었으며, 동도東都(東周)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미약하여 지탱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다행히 오패五霸注+[頭註]오패五霸나라 환공桓公, 나라 문공文公, 나라 목공穆公, 나라 양공襄公, 나라 장왕莊王이다.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여 천자天子라는 빈 칭호를 천하에 붙이고 있었다.
이나 繻葛倒懸注+[頭註]周桓王伐鄭한대 鄭與王戰于繻葛할새 射王中肩하니 易理猶倒懸也하야 已爲戰國之漸이요 戰國 首命韓趙魏爲諸侯하야 綱常之道盡矣
그러나 수갈繻葛注+[頭註]나라 환왕桓王나라를 정벌하자, 나라가 수갈繻葛에서 싸울 적에 왕을 쏘아 어깨를 맞혔으니, 이치를 거역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것이다. 싸움에서 군신간의 도리가 도치되어서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조짐이 되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먼저 를 명하여 제후로 삼아서 강상綱常가 다 없어졌다.
於是 七雄競彊하야 蘇秦張儀肆從橫之術하니 從者 猶知合六國以抗秦이로되 橫者 甘於事秦而不恥
이에 칠웅七雄이 강성함을 다투어 소진蘇秦장의張儀합종合縱연횡連橫의 술책을 펴니, 합종合縱하는 자들은 그래도 육국六國을 모아 나라에 항거할 줄을 알았으나, 연횡連橫하는 자들은 나라를 섬기는 것을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事秦者 固不知有周 抗秦者 不過自爲 亦豈復知有周哉
나라를 섬기는 자들은 진실로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나라에 대항하는 자들도 또한 자신을 위함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또한 어찌 다시 나라가 있음을 알았겠는가.
而周亡 亦無一能倡大義於天下하고 僅有魯仲連 義不帝秦하야 負當世高士重名이라
나라가 망하자 또한 대의大義를 천하에 제창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겨우 노중련魯仲連이 있어서 의리상 나라를 황제로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당대 고사高士의 두터운 명망名望을 지니게 되었다.
使當時之士 有如하고 當時之君 有如漢王三軍縞素하야 爲赧王하야 與東周君發喪하야 爲天下誅無道秦하야 名其爲賊이면 敵乃可服이리니 齊桓晉文之事 寧不可復見於今日이리오
만일 당시의 선비 중에 삼로三老동공董公한왕漢王(劉邦)을 가로막고 설득한 것과 같이 하고, 당시의 군주 중에 한왕漢王삼군三軍에게 소복을 입힌 것과 같이 하여, 난왕赧王을 위해 동주군東周君과 함께 발상發喪해서 천하를 위해 무도한 나라를 주벌하여 역적임을 분명히 밝혔으면 적이 비로소 굴복하였을 것이니, 나라 환공桓公나라 문공文公의 일을 어찌 다시 금일今日에 보지 못하였겠는가.
何計不出此하고 顧乃區區欲與秦鬪智角力이라가 卒之賓服恐後하야 以待滅亡之不暇하니 可痛也哉인저
어찌하여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고, 도리어 마침내 구구히 나라와 지혜를 다투고 힘을 겨루고자 하다가 끝내 복종함이 뒤늦을까 두려워하여 멸망함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하다.
又嘗合三代論之컨대 三代之王 有天下 一千九百六十九年이어늘 何聖賢之君無幾하야 夏有禹, 啓, 少康하고 商有成湯, 太甲, 太戊, 盤庚, 武丁하고 周有武王, 成王, 康王, 宣王이요 外無聞焉이라
또 일찍이 삼대三代를 합하여 논하건대, 삼대三代가 왕 노릇 함은 천하를 소유한 것이 1천 9백 69년이었는데,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몇 명이 못되어서 나라에는 우왕禹王소강少康이 있었고, 나라에는 성탕成湯태갑太甲태무太戊반경盤庚무정武丁이 있었고, 나라에는 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선왕宣王이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알려진 군주가 없다.
이나 後之言治者 以三代爲稱首하야 巍巍皇皇하야 卓冠千古하야 而莫及者 禹湯文武 以聖王之道 立經陳紀하고 創法定制
그러나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들은 삼대三代를 첫 번째로 칭하여, 드높고 위대하여 우뚝이 천고千古에 뛰어나서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우왕禹王성탕成湯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聖王로써 떳떳한 법칙을 세우고 기강을 펴며 법을 창건하고 제도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其尤卓卓然者 如井田封建學校兵師之要 靡不備具하고 而又固結之以仁하고 維持之以禮하야 端本洪源하야 自足與天無極이라
이 중에도 더욱 우뚝이 드러난 것은 정전井田, 봉건封建, 학교學校, 병사兵師와 같은 중요한 제도들이 자세히 구비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 으로 굳게 맺고 로 유지하여, 뿌리를 바로잡고 근원을 키워서 스스로 하늘과 더불어 무궁하게 한 것이다.
故其後世子孫 非有剛惡如桀紂幽厲之暴하고 非有柔惡如赧王之衰 皆足以世守之而勿失也 豈偶然哉
그러므로 후세의 자손들이 강악剛惡(剛이 함)함으로 걸왕桀王주왕紂王유왕幽王여왕厲王 같은 포악함이 있지 않고, 유악柔惡(柔가 함)함으로 난왕赧王과 같이 나약한 자가 있지 않으면 모두 충분히 대대로 지켜서 잃지 않은 것이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溫公歷年圖曰
온공溫公의 《역년도歷年圖》에 말하였다.
周自平王東遷으로 日以衰微하고 至於戰國하야는 又分而爲二하야 其土地人民 不足以比彊國之大夫
나라는 평왕平王동천東遷(東都인 낙읍洛邑으로 천도遷都)한 뒤로부터 날마다 쇠약해졌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또 나뉘어 둘이 되어서 그 토지土地인민人民이 강대국의 대부大夫에도 비견되지 못하였다.
이나 天下猶尊而事之하야 以爲共主하야 守文武之宗祧하야 綿綿然久而不絶하니 其故 何哉
그러나 천하가 오히려 나라를 높여 섬겨서 공주共主라 하여, 문왕文王무왕武王종묘宗廟를 지켜 면면綿綿히 이어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으니, 그 연고는 어째서인가?
植本固而發源深也일새라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고 나오는 근원이 깊기 때문이었다.
昔周之興也 禮以爲本하고 仁以爲源이라
옛날 나라가 일어날 때에 로써 뿌리를 삼고 으로써 근원을 삼았다.
自后稷以來 至於文武成康 其講禮也備矣 其施仁也深矣
후직后稷으로부터 이래로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에 이르기까지 를 강론함이 구비되었고 을 베풂이 깊었다.
民習於耳目하고 浹於骨髓하야 雖後世微弱이나 其民將有陵慢之心이면 則畏先王之禮而不敢爲하고 將有離散之心이면 則思先王之仁而不忍去하니 此其所以享國長久之道也
백성들이 귀와 눈에 익숙하고 골수에 젖어 들어서 비록 후세가 미약하였으나 그 백성들이 장차 능멸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게 되면 선왕先王를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고, 장차 이반離反할 마음이 있게 되면 선왕先王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향유하기를 장구하게 한 방도이다.
不然이면 以區區數邑으로 處於七暴國之間하야 一日不可存이어든 況於數十年乎
그렇지 않다면 구구한 몇 고을을 가지고 포악한 일곱 나라의 사이에 처하여 단 하루도 보존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수십 년을 보존함에 있어서이겠는가.”
〈歷年圖 乃溫公未作通鑑之前 先進此圖하니
- 《역년도歷年圖》는 바로 온공溫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하기 전에 먼저 이 《역년도歷年圖》를 올렸는 바,
歷述古今治亂호되 於一代之終 則立一論하야 以斷其興亡하니 後倣此하니라
고금古今의 다스려짐과 혼란함을 차례로 서술하되 한 왕조가 끝날 때에는 한 의론議論을 세워서 흥망興亡을 결단하였으니, 뒤도 이와 같다. -
右周 三十七王이니 幷東周君이라
이상 나라는 37왕이니, 동주군東周君까지 넣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살펴보면 무왕武王 기묘년己卯年에서 시작하여 동주군東周君 임자년壬子年에 이르기까지 총 873년이다.
[新增]愚按 南宮氏曰 作史者 〈司馬氏〉 當於莊襄元年東周旣滅 方書周亡하고 然後進秦하야 使接周統이요
내(胡一桂의 《사찬통요史纂通要》)가 살펴보건대, 남궁씨南宮氏(南宮靖一)가 말하기를 “역사책을 지은 자(司馬光을 가리킴)가 마땅히 장양왕莊襄王 원년元年동주東周가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나라가 망한 것을 쓰고 그런 뒤에 나라를 올려서 나라의 계통을 이었어야 하고,
於莊襄終年呂政嗣位 特書秦亡하고 然後正其姓氏하야 別爲後秦이니 斯實錄矣
장양왕莊襄王의 마지막 해에 여정呂政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한 것을 특별히 쓰고 그런 뒤에 성씨姓氏를 바로잡아 별도로 후진後秦이라고 했어야 하니,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진실한 기록이다.” 하였다.
今乃不然하야 東周未滅 遽進昭襄之秦하고 呂政嗣位로되 猶冒嬴秦之姓하야 於周則絶之如恐其不亟하고 於秦則進之如恐其不多하야 好惡不公하고 是非逆置하니 其諸謂之何哉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동주東周가 멸망하기 전에 갑자기 소양왕昭襄王나라를 올리고, 여정呂政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대로 영진嬴秦을 무릅써서, 나라에 있어서는 끊어버리기를 행여 빨리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올리기를 행여 많이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해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도치되었으니 이를 일러 뭐라고 하겠는가.
秦自孝公以來 累世窺周하야 一念僭竊이라가 至莊襄하야 百有餘年 東周始滅하니 彼固謂嬴氏之業 可傳之不墜러니 未幾 呂政立而嬴氏之秦 已亡이라
나라는 효공孝公 이래로 여러 대 동안 나라 왕실을 엿보아 한결같이 참람하고 도둑질할 것을 생각하다가 장양왕莊襄王에 이르러 백여 년 만에 동주東周가 비로소 멸망하자, 저들은 진실로 영씨嬴氏기업基業이 길이 전해져 실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여정呂政이 즉위하자 영씨嬴氏나라가 이미 망하였다.
嗚呼 赧王入秦之後 歷七年而東周如線之緖尙存이러니 莊襄取周之餘才(纔)三載 而柏翳注+[頭註]書 稱이라 周平王 封伯益之裔襄公於秦하니라數百年之宗祀遽滅注+[原註]襄公始封諸侯 至莊襄甲寅 五百七十年이라이라
아, 난왕赧王나라로 들어간 후에 7년이 지나도록 동주東周의 실낱같은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었는데, 장양왕莊襄王나라를 취한 뒤로 겨우 3년 만에 백예柏翳注+[頭註]백예柏翳를 《서경書經》에는 백익伯益이라 칭하였다. 나라 평왕平王백익伯益의 후손인 양공襄公나라에 봉하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종사宗祀가 마침내 멸망하였다.注+[原註]양공襄公을 처음 제후로 봉한 뒤로부터 장양왕莊襄王 갑인년까지 570년이다.
孟子曰 殺人之父 人亦殺其父하고 殺人之兄이면 人亦殺其兄이라하시니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형을 죽인다.”라고 하였으니,
天道好還하야 福善禍淫 無毫髮爽이어늘 而世之窺覦僭竊于人之國者 每迷而不悟하니 悲夫
천도天道는 돌려주기를 좋아하여 선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려줌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는데, 세상에 남의 나라를 엿보고 도둑질하는 자들은 매양 어두워 깨닫지 못하니, 슬프다.
역주
역주1 繻葛倒懸 : 繻葛은 鄭나라의 地名으로 魯나라 桓公 5년 가을에 蔡‧衛‧陳이 周王을 따라 鄭나라를 치자, 鄭伯이 繻葛에서 맞아 싸워서 周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는데, 繻葛의 싸움에서 鄭나라의 祝聃이 桓王의 어깨를 쏘아 맞추기까지 하였다.
역주2 [譯註]三老董公之遮說 : 뒤의 4권 병신(B.C.205)에 보이는 내용으로 당시 楚나라의 項羽가 義帝를 시해하자, 新城의 三老인 董公이 漢나라 劉邦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義帝를 위해 군사들에게 素服(상복)을 입히고 義帝를 시해한 項羽를 토벌하시오.”라고 권하였다. 이에 劉邦은 그의 말을 따라 義帝를 시해하였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제후들을 거느리고 項羽를 토벌할 수 있었다.
역주3 [譯註]右周……該八百七十三年 : 東周의 기록은 《史記》에도 자세하지 않다. 요약하면 周나라의 天子인 赧王이 西周君인 武公에게 더부살이하였는데, 赧王이 秦나라에 항복하고 西周 역시 秦나라에 멸망당하였으며 東周는 그보다 7년 후에 역시 秦나라에 멸망당하였다.
역주4 伯益 : 옛날 堯舜의 신하로, 舜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들을 길들였으며, 공로가 있어 嬴氏姓을 받았는데, 이가 바로 秦나라의 始祖이다.《史記 卷五 秦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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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자] 7년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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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자] 7년 95

통감절요(1)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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