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에 太后議欲立諸呂爲王하야 問右丞相陵한대 陵曰 高帝刑白馬盟曰 非劉氏而王이어든 天下共擊之라하시니 今王呂氏는 非約也로소이다
太后不說하야 問左丞相平과 太尉勃한대 對曰 高帝定天下하시고 王子弟하시니
罷朝
에 王陵
이 讓陳平, 絳侯曰 始與高帝
로 啑(歃)血盟
注+[釋義]啑血盟句絶이라 啑은 通作歃하니 註見周赧王五十七年歃血이라 [附註] 啑血盟者는 以血塗口旁曰歃血이니 與盟者各歃血하고 餘者瘞之라 故云歃이라 盟之用牲이 貴賤不同하야 天子用牛하고 諸侯犬하니 猳는 牡豕也요 大夫以下는 用鷄라 韻會에 共歃其血호되 主盟者執其牲耳하고 掘坎埋牲하야 加載書而埋之하나니 言使背盟者로 如此牲也라 載書는 謂盟載之書라에 諸君
이 不在邪
아
今高帝崩에 太后欲王呂氏어시늘 諸君이 縱欲阿意나 何面目으로 見高帝於地下乎아
陳平, 絳侯曰 於今에 面折廷爭은 臣不如君이요 全社稷, 定劉氏後는 君亦不如臣이니라 陵이 無以應이러라 〈出史記本紀〉
自已然論之면 王陵이 不如平勃이 固也나 使太后未崩하고 而平勃先死면 則如此言何오
且平勃이 何以知己之死 在太后之後하야 而全社稷定劉氏之功을 可必也아
太后有議에 陵不可라하고 平又不可라하고 勃又不可라하야 將相大臣이 皆不可라하면 太后亦安能獨行其意乎아
自是而後로 權歸呂氏하야 地震山崩하고 桃李冬華하고 星辰晝見하며 伊洛江漢水溢하야 流萬數千家하고 日食晝晦하니 人謀弗臧하야 感動天地라
陰盛陽微하야 漢祚幾易하니 他日平勃安劉之功은 僅足以贖王諸呂之罪耳라
先賢論之云 人臣之義는 當以王陵爲正이라하니 至哉라 言乎여
갑인(B.C.187) - 고황후여씨高皇后呂氏원년元年 -
겨울에 태후太后가 여씨呂氏를 세워 왕으로 삼고자 하여 우승상右丞相왕릉王陵에게 묻자, 왕릉王陵이 대답하기를 “고제高帝께서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기를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왕이 되거든 천하가 함께 이를 공격하라.’ 하셨으니, 이제 여씨呂氏를 왕으로 삼는 것은 약속한 내용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후太后가 기뻐하지 아니하여 좌승상左丞相진평陳平과 태위太尉주발周勃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고제高帝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봉하셨습니다.
지금 태후太后께서 제制를 칭하시니, 여씨呂氏를 왕으로 삼는다 해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태후太后가 기뻐하였다.
조회를 파하자,
왕릉王陵이
진평陳平과
강후絳侯(周勃)를 꾸짖기를 “처음
고제高帝와 피를 바르고 맹약할 적에
注+[釋義]잡혈맹啑血盟에서 구句를 뗀다. 잡啑은 삽歃과 통하니, 주周난왕赧王 57년年삽혈조歃血條에 주註가 보인다. [附註] 피를 바르고 맹세한다는 것은 피를 입가에 바르는 것을 삽혈歃血이라 하니, 맹세에 참여한 자가 각각 피를 바르고 남은 것은 땅에 묻기 때문에 삽歃이라고 이른 것이다. 맹세에 희생을 사용함은 신분의 귀천貴賤에 따라 똑같지 않아서 천자天子는 소를 사용하고, 제후諸侯는 개와 돼지[猳]를 사용하니 가猳는 수퇘지이고, 대부大夫 이하는 닭을 사용한다. 《운회韻會》에 그 피를 함께 바르되 맹약을 주관하는 자가 그 희생의 귀를 잡고 구덩이를 파서 희생을 묻고는 맹약한 글을 위에 올려놓고 묻으니, 맹약을 배반한 자로 하여금 이 희생과 같이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재서載書는 맹약하는 내용을 기재한 글을 이른다. 제군諸君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지금 고제高帝가 붕崩하심에 태후太后가 여씨呂氏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데, 제군諸君들이 비록 태후太后의 뜻에 아첨하고자 하나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제高帝를 뵙겠는가?” 하니,
진평陳平과 강후絳侯가 말하기를 “지금 태후太后의 면전에서 꺾고 조정에서 간쟁함은 신臣이 그대만 못하고, 사직社稷을 온전히 하고 유씨劉氏의 후손을 안정시킴은 그대가 또한 신臣만 못하다.” 하니, 왕릉王陵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 《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옴 -
“이연已然(결과)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왕릉王陵이 진평陳平과 주발周勃만 못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여후呂后가 죽지 않고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먼저 죽었다면 이 말을 어찌하겠는가.
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자신들이 태후太后보다 뒤에 죽어서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유씨劉氏를 안정시키는 공을 기필할 수 있을지 어찌 알았겠는가.
태후太后가 의논할 적에 왕릉王陵이 불가하다 하고 진평陳平도 불가하다 하고 주발周勃도 불가하다 하여 장상將相과 대신大臣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면 태후太后가 또한 어떻게 홀로 그 뜻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이 이후로(陳平과 주발周勃이 여후呂后를 찬동한 이후로) 권력이 여씨呂氏에게로 돌아가, 지진地震이 일어나고 산이 무너지며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겨울에 꽃이 피고 별이 대낮에 나타나며, 이수伊水‧낙수洛水‧강수江水‧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수천만 가호가 표류하고 일식日食이 일어나 낮에도 캄캄하였으니, 사람들의 계책이 좋지 못하여 천지를 동하게 한 것이다.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미약하여 한漢나라의 국운國運이 거의 바뀔 뻔하였으니, 후일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유씨劉氏를 안정시킨 공은 겨우 여씨呂氏를 왕 노릇 시킨 죄를 속죄하기에 족할 뿐이다.
선현이 이것을 논하여 이르기를 ‘인신人臣의 의리는 마땅히 왕릉王陵을 정도正道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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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고황후여씨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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