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尙書令左雄
이 上疏曰 昔
에 宣帝 以爲吏
變易則下不安業
하고 久於其事則民服敎化
라하야
其有政治者를 輒以璽書勉勵하야 增秩賜金이라가 公卿缺이어든 則以次用之라
是以
로 吏稱其職하고 民安其業하야 漢世良吏 於玆爲盛
이러니 今典城百里
에 轉動無常
하니 各懷一切注+[釋義]王氏曰 也니 猶言權時也라하야 莫慮長久라
臣愚는 以爲守相長吏 惠和有顯效者어든 可就增秩하고 勿移徙하소서
帝感其言하야 復申無故去官之禁하니 而宦官이 不便이라
雄又上言
호되 孔子曰 四十
에 不惑
이라하시고 禮稱彊仕
注+[釋義]禮曲禮曰 四十〈曰〉彊이니 而仕라하니라라하니
請自今
으로 孝廉
이 年不滿四十
이어든 不得察擧
하고 若有茂才異行
이 如顔淵, 子奇
어든 自可不拘年齒
注+[頭註]男子는 八月生齒하야 八歲而齔이요 女子는 七月生齒하야 七歲而齔하니 是壽之數也라 齔은 音襯이니 毁齒也라니이다 帝從之
하다
臺郞
이 詰之
한대 對曰 詔書曰 有如顔回, 子奇
注+[釋義]齊人也라 劉向新序曰 子奇年十八에 齊君使主東阿한대 阿縣大化라어든 不拘年齒
라하니 是故
로 本郡
이 以臣充選
이라한대 郞不能屈
이러니
左雄이 詰之曰 昔에 顔回는 聞一知十하니 孝廉은 聞一知幾耶아 淑이 無以對어늘 乃罷却之하고 郡守坐免하다
然이나 雄이 公直精明하야 能審覈眞僞하야 決志行之하니라
頃之오 胡廣이 出爲濟陰太守하야 與諸郡守十餘人으로 皆坐謬擧免黜호되 唯汝南陳蕃과 永川李膺과 下邳陳球等三十餘人이 得拜郞中하니 自是로 牧守畏慄하야 莫敢輕擧라
迄于永嘉
注+[頭註]帝子沖帝年號라히 察選
이 淸平
하야 多得其人
이러라
古者四十而仕는 非謂仕必是年也요 特擧其大限하야 以爲言耳라
且顔淵子奇는 曠代一有어늘 而欲以斯爲格이면 不亦偏乎아
帝引公卿所擧敦樸之士하야 使之對策한대 李固對曰 陛下之有尙書는 猶天之有北斗也니 斗爲天喉舌이요 尙書亦爲陛下喉舌이라
斗
는 斟酌
注+[通鑑要解]天文志曰 斗爲帝車하야 運乎四時하고 臨制四方하니 分陰陽, 建四時, 均五行, 移節度, 定諸紀가 皆繫於斗라元氣
하야 運平四時
하고 尙書
는 出納王命하야 敷政四海하니 權尊勢重
하야 責之所歸
라
귀인貴人 양씨梁氏注+[頭註]양씨梁氏는 양상梁商의 딸이다. 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다.
○ 상서령尙書令 좌웅左雄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날 선제宣帝께서 ‘관리(守令)를 자주 바꾸면 아랫사람들이 생업生業에 편안하지 못하고 관리가 그 일을 오래 맡으면 백성들이 교화에 복종한다.’ 하여,
정사가 잘 다스려진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친서親書로 권면하고 장려하여 품계를 올려 주고 금金을 하사하였다가 공경公卿 중에 결원이 있으면 차례로 등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생업生業에 편안하여
한대漢代의 어진 관리가 이때에 성하였는데, 지금
백리百里의
성읍城邑(지방 고을)을 맡아 관리가 됨에 변동함이 심하여 일정함이 없으니, 각각 구차한 마음을 품어서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일절一切은 구차함이니, 임시로 미봉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수상守相(郡守와 국상國相)과 장리長吏(令長) 중에 은혜롭고 온화하여 드러난 공효가 있는 자는 품계를 올려 주고 옮기지 마소서.”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연고 없이 관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금령禁令을 다시 펴니, 환관宦官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좌웅左雄이 또
상언上言하기를 “
공자孔子는 ‘40세에 의혹하지 않았다.’ 하였고, 《
예기禮記》에는 ‘40세를
강彊이라 하니, 벼슬한다.’
注+[釋義]《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40세를 강彊이라 하니, 벼슬한다.” 하였다. 하였으니,
청컨대 지금부터
효렴孝廉이 나이가 만 40세가 못 되면 살펴서 천거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뛰어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안연顔淵(顔回)과
자기子奇 같은 이가 있으면 나이
注+[頭註]남자男子는 8개월에 이가 나서 8세에 이를 갈고, 여자女子는 7개월에 이가 나서 7세에 이를 가니, 이것이 수명壽命의 수數이다. 츤齔은 음이 친(츤)이니 이를 가는 것이다. 에 구애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오랜 뒤에 광릉廣陵에서 효렴孝廉으로 천거된 서숙徐淑이 나이가 40이 못 되었다.
대臺의
낭관郎官이 이를 힐문하자, 대답하기를 “
조서詔書에 ‘
안회顔回와
자기子奇注+[釋義]자기子奇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에 이르기를 “자기子奇는 나이 18세에 제齊나라 임금이 동아東阿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아현阿縣이 크게 교화되었다.” 하였다. 같은 이가 있으면 나이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본군本郡에서
신臣을 선발하여 충당한 것입니다.” 하니,
낭관郞官이
서숙徐淑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좌웅左雄이 힐문하기를 “옛날에 안회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는데, 효렴孝廉은 하나를 들으면 몇이나 아는가?” 하니, 서숙徐淑이 대답하지 못하므로 마침내 파하여 물리치고, 그를 천거한 군수郡守도 이 일에 걸려 면직되었다.
그러나 좌웅左雄은 공정하고 정직하고 정밀하고 밝아 진위眞僞를 살펴서 결심하고 실행하였다.
얼마 후 호광胡廣이 제음태수濟陰太守로 나가서 여러 군郡의 군수郡守 10여 명과 함께 모두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에 걸려 면직되었으나 오직 여남汝南의 진번陳蕃과 영천永川의 이응李膺과 하비下邳의 진구陳球 등 30여 명은 낭중郞中에 제수되니, 이로부터 목수牧守(郡縣의 장관長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볍게 천거하지 못하였다.
영가永嘉注+[頭註]영가永嘉는 황제(順帝)의 아들 충제沖帝의 연호이다. 年間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선발함이 깨끗하고 공평하여 훌륭한 인물을 많이 얻었다.
“옛날에 40세에 벼슬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이 나이에 벼슬하였음을 이른 것이 아니요, 다만 큰 한계를 들어서 말하였을 뿐이다.
또 안연顔淵과 자기子奇는 세상에 드문 분인데, 이것을 가지고 격식을 삼고자 한다면 편벽되지 않겠는가.”
○ 낙양洛陽의 선덕정宣德亭이 땅이 갈라져서 길이가 85장丈이나 되었다.
황제가 공경公卿들이 돈후하고 질박하다고 천거한 선비들을 인견引見하여 대책對策을 말하게 하자, 이고李固가 대답하기를 “폐하에게 상서尙書가 있음은 하늘에 북두성이 있는 것과 같으니, 북두성은 하늘의 후설喉舌이 되고 상서尙書는 또한 폐하의 후설喉舌이 됩니다.
북두성은
원기元氣를 알맞게 조절하여
注+[通鑑要解]《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에 이르기를 “북두성北斗星은 상제上帝의 수레가 되어 사시四時에 운행하고 사방四方을 제어하니, 음양陰陽을 나누고 사시四時를 세우며 오행五行을 고르게 하고 절도節度(節候)를 바꾸며 여러 기강을 정하는 것이 모두 북두성에 달려 있다.” 하였다. 사시四時를 고르게 하고
상서尙書는
왕명王命을 출납하여
사해四海에 정사를 펴니, 권세가 높고 세력이 중하여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는 곳입니다.
마땅히 훌륭한 사람을 살펴 가려서 성스러운 정사를 돕게 하소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