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6)

통감절요(6)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庚寅]四年
정관貞觀 4년(경인 630)
正月 李靖 帥驍騎三千하고 自馬邑으로 進屯惡陽嶺하야 夜襲定襄破之하다
정월正月이정李靖이 날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마읍馬邑으로부터 전진하여 악양령惡陽嶺에 주둔해서 밤에 정양군定襄郡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突厥頡利可汗 不意靖猝至注+[釋義] 忽至也 大驚이러니 又爲靖破於陰山注+[釋義]陰山 北戎之地 東西千餘里 草茂盛하고 多禽獸하니 匈奴依阻其中이러니 漢武克匈奴하고 置陰山縣하니라이라
돌궐突厥힐리가한頡利可汗은 뜻밖에 이정李靖이 갑자기 쳐들어오자注+[釋義]은 갑자기 이르는 것이다. 크게 놀랐는데, 또다시 이정李靖에게 음산陰山注+[釋義]음산陰山북융北戎 지역이니 동서로 천여 리이다. 풀이 무성하고 금수禽獸가 많으니 흉노匈奴가 그곳에 의지하였는데, 나라 무제武帝흉노匈奴를 점령하고 음산현陰山縣을 설치하였다. 에서 격파당하였다.
斬首萬餘級하고 俘男女十餘萬하며 斥地하야 自陰山으로 北至大漠하고 注+[釋義]後魏每戰克 欲天下聞知하야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하니라以聞이라
이정李靖이 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고 남녀 백성 10여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영토를 개척하여 음산陰山으로부터 북쪽으로 대막大漠에 이르고 노포露布注+[釋義]후위後魏가 전투에 이길 때마다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하여 그 사실을 비단에 적어 칠간漆竿 위에 세우고 노포露布라 이름하였다. 로 보고하였다.
擒頡利하야 送京師하니 漠南之地遂空하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니, 〈그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투항하여〉 사막沙漠 이남 지역이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出靖及突厥傳〉
- 《당서唐書》의 〈이정전李靖傳〉과 〈돌궐전突厥傳〉에 나옴 -
○ 三月 四夷君長 詣闕하야 請上爲天可汗이어늘 上曰 我爲大唐天子하니 又下行可汗事乎인저하니 群臣及四夷 皆稱萬歲
○ 3월에 사방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대궐에 나와서 천가한天可汗이라 부를 것을 청하자, 이 말하기를 “내가 대당大唐천자天子가 되었는데, 또 아래로 가한可汗의 일을 행한단 말인가?” 하니, 신하들과 사방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是後 以璽書 賜西北君長 皆稱天可汗이라하다
이후로 옥새玉璽가 찍힌 문서를 서북西北 지방의 군장君長에게 하사할 때에는 모두 천가한天可汗이라 칭하였다.
〈出本紀〉
- 《당서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에 나옴 -
[新增]范氏曰
[新增]范氏가 말하였다.
太宗 以萬乘之主 而兼爲夷狄之君하야 不恥其名而受其佞하야 事不師古하니 不足爲後世法也니라
태종太宗만승萬乘의 군주로서 겸하여 이적夷狄의 군주가 되어서 그 이름(天可汗)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첨함을 받아들여 일을 함에 옛것을 본받지 않았으니, 후세의 법이 될 수 없다.”
突厥頡利可汗 至長安이어늘 上御順天樓하야 盛陳文物하야 引見하고 詔館於太僕하고 厚廩食之注+[釋義] 去聲이니 以館館客也 太僕寺 掌廐牧輦輿之政하니라하다
돌궐突厥힐리가한頡利可汗장안長安에 오자, 순천문루順天門樓에 납시어 문물文物을 성대하게 진열하고서 힐리가한頡利可汗인견引見하고, 조명詔命을 내려 태복시太僕寺에 머물게 하고 많은 늠료廩料를 먹게 하였다.注+[釋義]거성去聲이니, 객관客館에 객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태복시太僕寺는 궁중의 마소를 기르는 일과 임금이 타는 수레에 관한 정사를 맡았다.
上皇 聞擒頡利하고 歎曰 하고 不能報러니 今我子能滅突厥하니 吾付託得人이라
상황上皇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 고조高祖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게 포위당하여 곤궁을 당하고 보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내 아들은 돌궐突厥을 멸망시켰으니 내가 나라를 맡김에 인물을 얻었다.
復何憂哉리오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上皇 召上與貴臣十餘人及諸王, 妃, 主하야 置酒凌煙閣할새 酒酣 上皇 自彈琵琶하고 起舞하고 公卿 迭起爲壽하야 逮夜而罷하다
상황上皇과 귀한 대신大臣 10여 명 및 여러 왕‧왕비‧공주를 불러 능연각凌煙閣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거나하게 취하자 상황上皇이 스스로 비파琵琶를 타고 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공경公卿들이 차례로 일어나 축수祝壽하는 잔을 올려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突厥旣亡 其部落 或北附薛延注+[附註]北狄種勅勒也 本傳 薛延陁者 先與薛種雜居러니 後滅延陁部而有之하고 號薛延陁 貞觀二年 遣使立薛延陁夷男하야 爲可汗한대 夷男 建牙於大漠之鬱督軍山이라하니 卽烏德鞬山也하고 或西奔西域이나 其降唐者 尙十萬口
돌궐突厥이 멸망한 뒤에 그 부락部落들이 혹은 북쪽으로 설연타薛延陁注+[附註]설연타薛延陁북적北狄종족種族칙륵勅勒이다. 《신당서新唐書》 〈회골전回鶻傳〉에 “설연타薛延陁는 예전에 의 종족과 섞여 살았는데, 뒤에 연타延陁의 부락을 멸망시켜 그 땅을 소유하고 설연타薛延陁라 이름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에 사신을 보내어 설연타薛延陁이남夷男(眞珠毗伽可汗)을 세워 가한可汗으로 삼았는데, 이남夷男대막大漠(고비 사막)의 울독군산鬱督軍山왕정王庭을 세웠다.” 하였으니, 울독군산鬱督軍山은 바로 오덕건산烏德鞬山이다. 에게 붙고 혹은 서쪽으로 서역西域으로 도망하였으나 나라에 항복한 자가 그래도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詔群臣하야 議區處之宜한대
이에 신하들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이들을 사의事宜에 맞게 구처區處(措處)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魏徵 以爲突厥 世爲寇盜하야 百姓之讐也러니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돌궐突厥은 대대로 침략하고 도둑질하여 백성의 원수였습니다.
今幸而破亡하니 陛下以其降附라하야 不忍盡殺인댄 宜縱之하야 使還故土 不可留之中國이니이다
지금 다행히 패망하였으니, 폐하께서 그들이 항복하고 귀부歸附했다 해서 차마 다 죽이지 못하신다면 마땅히 이들을 풀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고 중국中國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晉初 諸胡注+[頭註]與民雜居中國이어늘 郭欽, 江統 皆勸武帝하야 驅出塞外하야 以絶亂階라호되 武帝不從이러니
나라 초기에 여러 오랑캐들注+[頭註]나라 초기의 여러 오랑캐란 바로 오호五胡이다. 중국中國 백성들과 뒤섞여 중국中國에 살게 하였는데, 곽흠郭欽강통江統이 모두 무제武帝에게 오랑캐들을 변방 밖으로 몰아내어 난리의 계제階梯(발단)를 끊으라고 권하였으나 무제武帝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後二十餘年 , 洛之間 遂爲氈裘之域하니 前事之明鑑也니이다
그뒤 20여 년 만에 이수伊水낙수洛水 사이(洛陽)가 마침내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 오랑캐 지역이 되었으니, 이는 지나간 일로서 밝은 거울입니다.” 하였다.
彦博曰 王者之於萬物 地載하야 靡有所遺
온언박溫彦博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만물萬物에 대하여 하늘처럼 덮어주고 땅처럼 실어주어서 버리는 바가 있지 않습니다.
突厥 窮來歸我어늘 奈何棄之而不受乎
지금 돌궐突厥이 곤궁하여 우리에게 귀의해 왔는데, 어찌하여 이들을 버리고 받아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孔子曰 라하시니 若救其死亡하야 授以生業하고 敎之以禮義 數年之後 悉爲吾民이니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 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죽음을 구원하여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고 예의禮義를 가르친다면 몇 년 뒤에는 모두 우리 백성이 될 것입니다.
選其酋長하야 使入宿衛 畏威懷德하리니 何後患之有리잇고
추장酋長을 뽑아서 그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와 숙위宿衛하게 한다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을 생각할 것이니, 어찌 후환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卒用彦博策하야 處突厥降衆하야 東自幽州 西至靈州하며 分突利所統之地하야 爲四州하고 分頡利之地하야 爲六州하다
이 끝내 온언박溫彦博의 계책을 써서 돌궐突厥의 항복한 무리를 중원中原에 거처하게 하여 동쪽으로는 유주幽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영주靈州에 이르게 하였으며, 돌리가한突利可汗이 거느리던 지역을 나누어 네 를 만들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이 거느리던 지역을 나누어 여섯 를 만들었다.
其餘酋長至者 皆拜將軍中郞將하야 布列朝廷하니 五品已上 百餘人이라 殆與朝士相半이러라
그 밖에 추장酋長으로 온 자들은 모두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열하니, 5품 이상이 백여 명이어서 조사朝士와 거의 반반이 될 정도였다.
〈出突厥傳及政要〉
- 《당서唐書 돌궐전突厥傳》과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옴 -
范祖禹曰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하야 夷不亂華하니 所以辨族類, 別內外也
선왕先王의 제도에 융적戎狄황복荒服으로 삼아서 오랑캐가 중화中華와 뒤섞이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족류族類를 분별하고 내외內外를 구별한 것이다.
孔子美齊桓之功曰 라하시니 聖人之懲戎狄 如此
공자孔子나라 환공桓公을 찬미하여 말씀하기를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좌임左袵을 했을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융적戎狄을 징계함이 이와 같았다.
太宗 旣滅突厥하고 而引諸戎入中國하야 使殊俗醜類 與公卿大夫 雜處於朝廷이라
그런데 태종太宗돌궐突厥을 멸한 뒤에 여러 오랑캐들을 이끌어 중국中國으로 들어오게 해서 풍속이 다른 무리로 하여금 공경公卿, 대부大夫들과 함께 조정에서 뒤섞여 있게 하였다.
苟欲冠帶四夷하야 以誇示天下하야 而不知亂華亦甚矣
진실로 사이四夷에게 을 쓰고 띠를 매게 하여 천하에 과시하고자 해서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힘이 또한 심함을 알지 못하였다.
然則中國 幾何不胥而爲夷也리오
그렇다면 중국中國이 어찌 서로 빠져서 오랑캐가 되지 않겠는가.
是以 唐室 世有戎狄之亂하니 豈非太宗之所啓乎
이 때문에 나라 황실皇室이 대대로 융적戎狄이 있었으니, 어찌 태종太宗계도啓導한 것이 아니겠는가.”
林邑注+[釋義]南蠻國名이니 漢日南象林之地 在交州南千餘里하니라 獻火珠注+[頭註]大如鷄卵하고 圓白皎潔하니 光照數尺이라 狀如水精하니 日中 以艾藉珠 火燃이라러니 有司以其表辭不順이라하야 請討之한대 上曰 好戰者亡하나니 如隋煬帝, 頡利可汗 皆耳目所親見也
임읍林邑注+[釋義]임읍林邑남만南蠻의 나라 이름이니, 나라의 일남군日南郡 상림현象林縣 지역으로 교주交州 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화주火珠注+[頭註]화주火珠는 크기가 계란만 하고 둥글고 희며 깨끗하니, 광채가 몇 자 떨어진 곳까지 환하게 비춘다. 모양은 수정水精처럼 생겼는데, 한낮에 쑥을 구슬 밑에 깔아 놓으면 쑥에 불이 붙는다. 를 바쳤는데, 유사有司가 그 표문表文의 내용이 공순하지 않다 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자, 이 말하기를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망하는 법이니, 나라 양제煬帝힐리가한頡利可汗 같은 자들을 모두 귀와 눈으로 직접 보았다.
小國勝之不武어든 況未可必乎
작은 나라는 승리한다 해도 무용武勇이 되지 못하거든 더구나 승리를 기필할 수 없음에랴.
語言之間 何足介意리오
언어言語 사이의 하찮은 일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出政要〉
-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옴 -
○ 六月 發卒修洛陽宮하야 以備巡幸이러니
○ 6월에 병졸을 징발하여 낙양궁洛陽宮을 수리해서 순행巡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給事中張玄素 上書諫하야 以爲洛陽 未有巡幸之期어늘 而預修宮室하시니 非今日之急務니이다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글을 올려 간하기를 “낙양洛陽에는 아직 순행할 기약이 있지 않은데 미리 궁궐을 수리하게 하시니,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닙니다.
陛下初平洛陽 凡隋氏宮室之宏侈者 皆令毁之러시니 曾未十年 復加營繕하시니 何前日惡之而今日效之也닛고
폐하께서 처음 낙양洛陽을 평정했을 적에 나라의 웅장하고 사치한 궁실宮室들을 모두 부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제 10년이 못 되어서 다시 영선營繕을 하게 하시니, 어찌하여 지난날에는 미워하시고 오늘날에는 그것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且以今日財力 何如隋世잇고
또 오늘날의 재력財力나라 때와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陛下役瘡痍之人하야 襲亡隋之敝하시니 恐又甚於煬帝矣니이다
폐하께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부역시켜서 망한 나라의 병폐를 따르시니, 또 나라 양제煬帝보다도 더 심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上謂玄素曰 卿謂我不如煬帝라하니 何如桀, 紂 對曰 若此役不息이면 亦同歸于亂耳니이다
장현소張玄素에게 이르기를 “은 내가 나라 양제煬帝만 못하다고 하는데, 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니, 장현소張玄素가 대답하기를 “만약 이 부역을 그치지 않는다면 또한 그들과 똑같이 혼란함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하였다.
上歎曰 吾思之不熟하야 乃至於是라하고 顧謂房玄齡曰 朕以洛陽土中으로 朝貢道均이라하야 意欲便民이라
이 감탄하기를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해서 마침내 이에 이르렀다.” 하고는 방현령房玄齡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낙양洛陽이 사방의 중앙이어서 조공朝貢하는 거리가 균등하다고 여겨, 마음에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使營之러니 今玄素所言 誠有理하니 宜卽爲之罷役하라
그러므로 궁궐을 경영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현소張玄素가 말한 것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즉시 부역을 중지하도록 하라.
後日 或以事至洛陽이면 雖露居라도 亦無傷也라하고 仍賜玄素綵二百匹注+[頭註] 繪帛也하다
후일에 혹 일이 있어 낙양洛陽에 이르게 되면 비록 노천에서 거처한다 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하고, 인하여 장현소張玄素에게 채백綵帛 200필注+[頭註]회백繪帛(그림(채색)이 있는 비단)이다. 을 하사하였다.
魏徵聞之하고 歎曰 張公論事 有回天之力하니 可謂仁人之言哉인저
위징魏徵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장공張公이 일을 논함에 황제의 마음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는 힘이 있으니, 어진 사람의 말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出玄素傳〉
- 《당서唐書 장현소전張玄素傳》에 나옴 -
○ 上問房玄齡, 蕭瑀曰 隋文帝 何如主也
방현령房玄齡소우蕭瑀에게 이르기를 “나라 문제文帝는 어떠한 군주君主인가?” 하니,
對曰 文帝勤於爲治하야 每臨朝 或至日昃하고 五品已上으로 引坐論事 衛士傳而食注+[原註] 蘇昆反이요 又千安反이라하니 雖性非仁厚 亦勵精之主也니이다
대답하기를 “문제文帝는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조회에 임할 때마다 혹은 해가 기울 때까지 정사를 보기도 하였고, 5품 이상의 관원을 나오게 하여 앉아서 정사政事를 의논할 적에 위사衛士를 시켜 음식을 날라오게 하여 먹었으니,注+[原註]은 蘇昆反(손)이요, 또 千安反(찬)이다. 비록 성품이 인후仁厚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쓴 군주입니다.” 하였다.
上曰 公得其一이요 未知其二로다
이 말하기를 “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文帝不明而喜察하니 不明則照有不通이요 喜察則多疑於物하야 事皆自決하고 不任群臣이니
문제文帝는 현명하지 못하면서 살피기를 좋아하였으니, 현명하지 못하면 비춤에 통달하지 못함이 있고 살피기를 좋아하면 남을 많이 의심하여 일을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신하들에게 맡기지 않게 된다.
天下至廣하고 一日萬機 雖復勞神苦形이나 豈能一一中理리오
천하天下는 지극히 넓고 군주는 하루에도 만기萬機가 있으니, 비록 다시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형체를 괴롭게 하더라도 어찌 하나하나 다 이치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群臣 旣知主意하야 唯取決受成하고 雖有愆違 莫能諫爭하니 此所以二世而亡也니라
신하들이 이미 군주의 뜻을 알고는 오직 군주가 결단한 것만 취하고 이루어진 명령만을 받아서 비록 군주가 잘못하고 사리에 위배되는 일이 있더라도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라가 두 만에 멸망한 이유이다.
朕則不然하야
은 그렇지 않다.
擇天下賢才하야 寘之百官注+[通鑑要解] 音至 與置同이라하야 使思天下之事하고 關由宰相하야 審熟便安然後 奏聞하야
천하天下의 어진 자와 재주 있는 자를 가려 백관百官에 두어서注+[通鑑要解]는 음이 지(치)이니, 와 같다. 그들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일이 재상宰相을 경유하여 편리함과 타당함을 자세히 살핀 뒤에 주달奏達하게 한다.
有功則賞하고 有罪則刑하니 誰敢不竭心力하야 以修職業이리오
그리하여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죄가 있으면 처벌하니, 누가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직무를 닦지 않겠는가.
何憂天下之不治乎 因勅百司호되 自今으로 詔勅行下 有未便者어든 皆應執奏하고 毋得阿從하야 不盡己意하라
어찌 천하天下가 다스려지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여러 관사官司에 명하기를 “지금부터 조칙詔勅을 행함에 편리하지 않은 것이 있거든 모두 마땅히 논집論執하여 아뢰도록 하고, 아첨하고 순종하여 자신의 뜻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貞觀政要〉
-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옴 -
范祖禹曰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書曰 元首明哉하면 股肱良哉하야 庶事康哉라하고 又曰 元首叢脞注+[頭註]叢脞 煩碎也하면 股肱惰哉하야 萬事라하니 此舜, 皐陶所以注+[頭註] 續也而相戒也
“《서경書經》에 ‘원수元首(군주)가 밝으면 고굉股肱(보필하는 신하)이 어질어서 여러가지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원수元首가 자질구레注+[頭註]총좌叢脞는 번다하고 자질구레한 것이다. 하면 고굉股肱이 태만해져서 만사가 폐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임금과 고요皐陶가 노래를 이어받아 불러서注+[頭註](갱)은 뒤이음이다. 서로 경계한 내용이다.
夫君以知人爲明하고 臣以任職爲良하나니
군주는 사람을 아는 것을 밝음으로 삼고, 신하는 직책을 맡음을 어짊으로 삼는다.
君知人이면 則賢者 得行其所學하고 臣任職이면 則不賢者 不得苟容於朝하니 此庶事所以康也
군주가 사람을 알면 어진 자가 배운 바를 행할 수 있고, 신하가 직책을 맡으면 어질지 못한 자가 구차히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니, 이는 여러 가지 일이 잘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若夫君行臣職이면 則叢脞矣 臣不任君之事 則惰矣 此萬事所以隳也
만약 군주가 신하의 직책을 행하면 자질구레하게 되고, 신하가 군주의 일을 맡지 않으면 태만하게 되니, 이는 온갖 일이 폐해지는 이유이다.
當舜之時하야 禹平水土하고 稷播百穀하야 土穀之事 舜不親也 契敷五敎하고 皐陶明五刑하야 敎刑之事 舜不治也 伯夷典禮하고 夔典樂하야 禮樂之事 舜不與也 益作虞하고 垂作共工하야 虞工之事 舜不知也
임금 때를 당하여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후직后稷백곡百穀을 파종해서 수토水土백곡百穀의 일을 임금이 직접 하지 않았고, 오교五敎(五倫의 가르침)를 펴고 고요皐陶오형五刑을 밝혀서 오교五敎오형五刑의 일을 임금이 다스리지 않았고, 백이伯夷를 맡고 는 음악을 맡아서 와 음악의 일을 임금이 관여하지 않았고, (山澤을 맡은 관원)가 되고 공공共工이 되어서 공공共工의 일을 임금이 알지 못하였다.
禹爲一相하야 總百官하고 自稷以下 分職以聽焉하니 君人者 如天運於上 而四時寒暑 各司其序어든 則不勞而萬物生矣
일상一相(으뜸 재상)이 되어서 백관百官을 총괄하고 으로부터 이하는 직책을 나누어 다스렸으니, 인군人君이란 천도天道가 위에서 운행함에 사시四時한서寒暑가 각각 그 차례를 맡으면 수고롭지 않고도 만물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君不可以不逸也 所治者大하고 所司者要也 臣不可以不勞也 所治者寡하고 所職者詳也일새라
군주는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되니 다스리는 바가 크고 맡은 바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신하는 수고롭지 않으면 안 되니 다스리는 바가 적고 맡은 직책이 상세하기 때문이다.
不明之君 不能知人故 務察而多疑하야 欲以一人之身으로 代百官之所爲하니 則雖聖智라도 亦日力不足矣
현명하지 못한 군주는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살핌에 힘쓰고 의심이 많아서 자기 한 사람의 몸으로써 백관百官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고자 하니, 이렇게 하면 비록 스럽고 지혜롭더라도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
其臣下 事無大小 皆歸之君하야 政有得失 不任其患하야 賢者不得行其志하고 而持祿之士 得以保其位하니 此天下所以不治也
그러므로 신하들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군주에게 책임을 돌려서 정사에 잘잘못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책임지지 아니하여, 어진 자는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없고 녹봉만 지키는 선비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으니, 이는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이다.
是以 隋文 勤而無功하고 太宗 逸而有成하니 不得其道 得其道故也니라
이 때문에 나라 문제文帝는 부지런했으나 공이 없었고 나라 태종太宗은 편안하였으나 이룸이 있었으니, 문제文帝는 그 를 얻지 못하였고 태종太宗은 그 를 얻었기 때문이다.”
할새 云 人五臟之系 咸附於背라하야늘 詔自今으로 毋得笞囚背하라하다
이 《명당침구서明堂鍼灸書》를 읽을 적에 여기에 이르기를 “사람은 오장五臟의 계통이 모두 등에 붙어 있다.”라고 하니,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지금부터는 죄수들의 등을 매질하지 말라.” 하였다.
[新增]胡氏曰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太宗誠有意於養民者也
태종太宗은 진실로 백성을 기르는 데에 뜻이 있는 자였다.
耳目所接 其心 必在於民하니 禁笞囚背 亦可謂善推其所爲者矣로다
그러므로 귀와 눈으로 접할 때에 그 마음이 반드시 백성에게 있었으니, 죄수의 등을 매질하는 것을 금지한 일은 또한 그 하는 바를 잘 미루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刑法志曰
당서唐書》 〈형법지刑法志〉에 말하였다.
古之爲國者 後世 作爲刑書하야 惟恐不備하니 俾民之知所避也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일의 경중輕重을 헤아려서 결단하고 형법서刑法書(형벌 규정을 적어 놓은 책)를 쓰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들이 다투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해서이고, 후세에는 형법서刑法書를 만들어서 행여 구비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피할 바를 알게 하고자 해서이다.
其爲法雖殊 而用心則一하니 蓋欲民之無犯也
그 법을 만든 것은 비록 다르지만 마음씀은 똑같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으로써 인도하고 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으로 옮겨 가고 죄를 멀리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唐興 高祖入京師하야 約法十二條하고 及受禪 命劉文靜等하야 損益律令하고 武德二年 頒新格五十三條하다
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에 고조高祖경사京師에 들어가서 법을 간략히 하여 12조항을 만들었고, 선양禪讓을 받게 되자 유문정劉文靜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손익損益(加減)하게 하였으며, 무덕武德 2년(619)에는 신법新法 53개 조항을 반포하였다.
太宗卽位하야 詔房玄齡等하야 復定舊令한대 玄齡等 以爲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방현령房玄齡 등에게 명령하여 다시 옛 율령을 정하게 하자, 방현령房玄齡 등이 이르기를
肉刑旣廢하고 (令)[今]以笞杖徒流死 爲五刑이로되 而又刖足이면 是六刑也라하니 於是 除斷趾法하니라
육형肉刑은 이미 폐지되었고 이제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을 다섯 가지 형벌로 삼았으나 또다시 발을 벤다면 이는 여섯 가지 형벌입니다.’ 하니, 이에 발을 베는 법을 제거하였다.
太宗 嘗覽明堂針灸圖하니 見人之五臟 皆近背하야 針灸失所 則其害致死하고 歎曰
태종太宗이 일찍이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에 ‘사람의 오장五臟이 모두 등과 가까이 있어서 침구針灸할 때 제자리를 놓치면 그 폐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는 내용을 보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夫箠者 五刑之輕이요 死者 人之所重이니 安得犯至輕之刑하야 而或致死리오하고 遂詔하야 罪人無得鞭背
‘채찍질은 다섯 가지 형벌 중에 가벼운 것이고 죽음은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바이니, 어찌 지극히 가벼운 형벌을 범하여 혹 죽음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죄인의 등을 매질하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이나 法官爲戒하고 又不加罪하니 自是 吏法稍密이라
그러나 장온고張蘊古가 죽은 뒤로부터 법관法官들이 실출失出을 경계하고, 실입失入이 있는 경우에는 또 그 법관에게 죄를 가하지 않으니, 이로부터 옥리獄吏들의 법이 점점 치밀해졌다.
帝以問大理卿劉德威한대 對曰 律 失入 減三等하고 失出 減五等이어늘
황제가 이것을 대리경大理卿 유덕위劉德威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법률에 의하면 실입失入은 3등을 감하고, 실출失出은 5등을 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今失入無辜하고 而失出爲大罪 吏皆深文이니이다
그런데 지금 실입失入은 죄가 없고 실출失出은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옥리獄吏들이 다 문법文法(법조문)을 까다롭게 따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帝矍然하야 遂命失出入者 皆如律하니 自此 吏亦持平하니라
황제가 두려워하여(깜짝 놀라) 마침내 실출失出실입失入을 모두 법률대로 처벌하도록 명하니, 이로부터 옥리獄吏들이 또한 공평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太宗以英武定天下 然其天姿仁恕
태종太宗은 영특함과 용맹함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타고난 자질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初卽位 有勸以威刑肅天下者어늘 魏徵以爲不可라하고 因爲上하야 言王政本於仁恩하야 所以愛民厚俗之意한대 太宗 欣然納之
처음 즉위했을 때에 위엄과 형벌로써 천하를 엄숙히 할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위징魏徵이 이를 불가하다 하고, 인하여 을 위해 ‘왕정王政은 인자함과 은혜에 근본을 두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풍속을 후하게 해야 하는 뜻’을 말하니, 태종太宗이 흔연히 받아들였다.
遂以寬仁治天下하고 而於刑法 尤謹하니라
그리하여 태종太宗이 마침내 너그러움과 인자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형법에 더욱 신중하였다.”
諸宰相 侍宴할새 上謂王珪曰 卿 識鑑精通하고 復善談論하니 玄齡以下 卿宜悉加品藻注+[頭註]定其差品及文質 如衣裳之加藻火黼黻也하고
여러 재상들이 을 모시고 잔치할 적에 왕규王珪에게 이르기를 “은 식견과 조감照鑑이 정통하고 여기에 담론까지 잘하니, 방현령房玄齡 이하의 재상들을 이 모두 품평品評注+[頭註]품조品藻품급品級(人品의 등급)과 문질文質을 정하는 것을 마치 의상衣裳(官服)에 마름‧불‧의 무늬를 그리거나 수놓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을 가하라.
且自謂與數子何如
또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몇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對曰 孜孜奉國하야 知無不爲 臣不如房玄齡이요
대답하기를 “부지런히 국사를 봉행하여 아는 것을 하지 않음이 없음은 신이 방현령房玄齡만 못하고,
才兼文武하야 出將入相 臣不如李靖이요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하여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는 것은 이정李靖만 못하고,
敷奏詳明하야 出納惟允 臣不如溫彦博이요
아뢰기를 자세하고 분명히 하여 출납을 공정하게 함은 신이 온언박溫彦博만 못하고,
處煩治劇注+[頭註] 艱也하야 衆務畢擧 臣不如戴冑
번거로운 것을 처리하고 어려운 일을 다스려서注+[頭註]은 어려움이다. 모든 사무를 다 거행함은 신이 대주戴冑만 못하고,
恥君不及堯, 하야 以諫諍爲己任 臣不如魏徵이어니와
자신이 섬기는 군주가 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간쟁을 자신의 임무로 삼음은 신이 위징魏徵만 못합니다.
至於激濁注+[頭註] 水礙也 孟子 激而行之 可使在山이라하니라揚淸하고 嫉惡好善하야는 臣於數子 亦有微長이니이다
그러나 탁류濁流를 쳐 내고注+[頭註]은 물이 막힌 것이니, 《맹자孟子》 〈고자告子 〉에 “물을 하여 흘러가게 하면 에 있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청류淸流를 옹호하며 을 미워하고 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신이 이 몇 사람에 비하여 또한 약간 낫습니다.” 하였다.
上深以爲然하고 衆亦服其確論注+[釋義] 克角反이니 言其論堅하야 不可破也이러라
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고 사람들 또한 확실한 의논注+[釋義]극각반克角反(각, 확)이니, 확론確論은 의론이 확고하여 깨뜨릴 수 없음을 말한다.이라고 탄복하였다.
〈出本傳〉
- 《당서唐書 왕규전王珪傳》에 나옴 -
○ 上之初卽位也 常(嘗)與群臣으로 語及敎化할새 上曰 今承大亂之後하니 恐斯民未易化也로라 魏徵對曰 不然하니이다
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일찍이 여러 신하들과 교화敎化를 언급하였는데, 이 말하기를 “지금 큰 난리의 뒤를 이었으니 이 백성들이 쉽게 교화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久安之民 驕佚하니 驕佚則難敎하고 經亂之民 愁苦하니 愁苦則易化
오랫동안 편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탕하니 교만하고 방탕하면 교화시키기 어려우며, 난리를 겪은 백성들은 근심하고 괴로워하니 근심하고 괴로워하면 교화시키기가 쉽습니다.
비유하면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 되기가 쉽고 목마른 자에게는 음료 되기가 쉬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深然之어늘 封德彛非之曰 三代以還으로 人漸澆訛注+[原註] 堅堯反이요 五禾反이니 謬也
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으나 봉덕이封德彛가 비난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습니다.注+[原註]는 堅堯反(교)이고 는 五禾反(와)이니, 요와澆訛는 잘못된 것이다.
秦任法律하고 漢雜霸道하니 蓋欲化而不能이니
이 때문에 나라는 법률에 맡겼고 나라는 패도霸道를 섞어 썼으니, 이는 교화시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것입니다.
豈能之而不欲耶잇가
어찌 할 수 있는데도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魏徵 書生이라 未識時務하니 若信其虛論이면 必敗國家하리이다
위징魏徵서생書生이라서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니, 만약 그의 헛된 의론을 믿으신다면 반드시 국가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였다.
徵曰 五帝, 三王 不易民而化하야 行帝道而帝하고 行王道而王하니 顧所行如何耳니이다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오제五帝삼왕三王이 백성을 바꾸지 않고 교화시켜서 오제五帝를 행하면 오제五帝의 백성이 되었고 삼왕三王를 행하면 삼왕三王의 백성이 되었으니, 다만 행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黃帝征하고 誅九黎하고 湯放桀하고 武王伐紂하야 皆能身致太平하니 豈非承大亂之後耶잇가
옛날에 황제黃帝치우蚩尤를 정벌하고 전욱顓頊구려九黎를 토벌하고 임금은 을 추방하고 무왕武王를 정벌하여 모두 몸소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으니, 어찌 큰 난리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若謂古人淳樸하야 漸致澆訛인댄 則至于今日하야는 當悉化爲鬼魅注+[頭註] 老物之精也 人面鬼身四足이요 好惑人하니 山林異氣所生이라리니 人主安得而治之릿고 卒從徵言하다
만약 옛사람은 순박했었는데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모두 변화하여 귀신과 도깨비注+[頭註]는 오래된 물건의 정령이다. 사람의 얼굴에 귀신의 몸이고 발이 네 개이다. 사람을 홀리기를 좋아하니, 산림의 이상한 기운이 낳은 것이다. 가 되었어야 할 것이니, 군주君主가 어떻게 이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 끝내 위징魏徵의 말을 따랐다.
元年 關中飢하야 米斗直(値)絹一匹이요 二年 天下蝗하고 三年 大水호되 勤而撫之하니 民雖東西就食이나 未嘗嗟怨이러니
즉위한 원년元年에는 관중關中 지방이 흉년이 들어서 쌀 한 말의 값이 비단 한 필이었고, 2에는 천하天下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고, 3에는 큰 홍수가 있었으나 이 부지런히 위무하니 백성들이 비록 동쪽과 서쪽으로 가서 먹었으나 일찍이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是歲 天下大注+[頭註] 熟也하야 流散者 咸歸鄕里하고 米斗不過三, 四錢이요 終歲斷死刑 纔二十九人이라
그런데 이해에 천하에 크게 풍년이 들어서注+[頭註]은 익음이다.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이 모두 향리鄕里로 돌아오고 쌀 한 말의 값이 3, 4에 불과하였으며, 일 년 동안 사형死刑을 판결한 것이 겨우 29명이었다.
東至于海하고 南及 皆外戶不閉하며 行旅不齎糧하고 取給於道路焉이러라
동쪽으로는 동해東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오령五嶺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깥문을 닫지 않았으며, 여행자들이 양식을 휴대하지 않고 도로에서 공급받았다.
帝謂群臣曰 此 魏徵勸我行仁義하야 旣效矣
황제皇帝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위징魏徵이 나에게 인의仁義를 행하도록 권하여 이미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봉덕이封德彛가 이미 죽어 그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出魏徵傳及諫錄〉
- 《당서唐書 위징전魏徵傳》과 《위정공간록魏鄭公諫錄》에 나옴 -
致堂管見曰
치당致堂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封倫注+[頭註] 名也 德彛言三代以還으로 人漸澆訛라하니 未爲甚失이어늘 魏徵 言若果澆訛難化 當爲鬼魅라하니 則非也
봉륜封倫(封德彛)注+[頭註]은 이름이고 덕이德彛이다. 이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크게 잘못한 말이 아닌데,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만일 과연 경박해지고 속여서 교화시키기 어렵다면 마땅히 귀신과 도깨비가 되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已來觀之하면 三代之時 固不及唐虞之世 周之文勝 又不如虞夏之質이라
서계書契(文字)가 있은 이후로 관찰해보면 삼대三代 시대는 진실로 시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나라의 이 우세함은 또 의 질박함만 못하였다.
兩漢風俗 豈敢望周 而唐之風俗 又安能及漢邪
양한兩漢의 풍속이 어찌 감히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겠으며, 나라의 풍속이 또 어찌 나라에 미칠 수 있겠는가.
若謂民常淳朴하야 無有澆訛라하면 則結繩之治 可以易約劑注+[附註] 大市以質하고 小市以劑라한대 爲之(卷)[券]하야 藏之也 兩書一札이니 同而別之 長曰質이요 短曰劑 土鼓之樂 리라
만약 백성들이 항상 순박해서 경박하고 속임이 없다고 말한다면 결승結繩의 정치가 약자約劑(文券)注+[附註]주례周禮》 〈지관地官 사시司市〉에 “대시大市에는 을 쓰고 소시小市에는 를 쓴다.” 하였는데, 에 “문권文券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다. 두 문서가 한 통이니 똑같이 써서 나눈다.” 하였고, 《주례周禮》 〈소재小宰에 “긴 것을 이라 하고 짧은 것을 라 한다.” 하였다. 를 바꿀 수 있고, 토고土鼓(흙으로 빚은 북)의 음악이 사죽絲竹(관현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要之컨대 一治一亂 天下之大數也 亂極人少 則氣厚而人淳하고 治極人夥 則氣漓而人澆
요컨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함은 천하의 큰 운수運數이니, 혼란함이 극에 달하고 사람이 적으면 기운이 후하여 사람들이 순박해지고, 다스려짐이 지극하고 사람이 많으면 기운이 박하여 사람들이 경박해진다.
蓋或二三百歲 或五六百歲 淳漓一變하고 而天地之氣 盈虛消息하니 後世誠不及古矣어니와
혹은 2, 3백 년 혹은 5, 6백 년 만에 인정人情의 후함과 박함이 한 번 변하고 천지天地의 기운이 차고 기울며 사라지고 자라나니, 후세가 진실로 옛날만 못하다.
若夫人之所以爲人 出於本心하야 不可泯滅者 則古猶今爾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 된 까닭으로서 본심에서 우러나와 없어질 수 없는 것(良心)으로 말하면 예나 지금이나 같을 뿐이다.
是故 可以懷之以仁이요 理之以義 先之以敬讓이요 示之以好惡也
이 때문에 으로써 회유하고, 로써 다스리고, 공경과 사양을 앞세우고, 을 좋아하고 을 미워함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魏徵 有見於飢渴者之易爲飮食이로되 而無見於人心之未亡者
위징魏徵은 굶주린 자와 목마른 자에게 음식이 되기 쉬움은 알았으나 사람의 양심良心이 없어지지 않음은 보지 못하였다.
其效止於米斗三錢하고 外戶不閉하니 則無以進矣
이 때문에 그 효험이 쌀 한 말의 값이 3이고 바깥문을 닫지 않는 데에 그쳤으니, 그렇다면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 것이다.
固不能使人人有士君子之行也하니라
진실로 사람마다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 있게 하지는 못하였다.”
上謂長孫無忌曰 貞觀之初 上書者皆云 人主當獨運威權이요 不可委之臣下라하고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이르기를 “정관貞觀 초기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군주君主는 마땅히 홀로 위엄과 권력을 운용해야 하고 신하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又云 宜震耀威武하야 征討四夷라호되
또 이르기를 ‘마땅히 무위武威를 떨치고 드날려서 사방 오랑캐를 정벌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唯魏徵 勸朕하야 偃武修文하야 中國旣安이면 四夷自服이라하야늘 朕用其言하야
오직 위징魏徵만은 에게 권하기를 ‘무력武力을 중지하고 문덕文德을 닦아서 중국이 안정되면 사방 오랑캐가 저절로 복종한다.’고 말하여, 이 그의 말을 따랐다.
今頡利(咸)[成]擒 其酋長 竝帶刀宿衛注+[頭註]宿 守也하고 部落 皆襲衣冠하니 徵之力也니라
지금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사로잡히자 그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칼을 차고 숙위宿衛注+[頭註]宿은 지킴이다. 하며 부락部落들이 모두 중국中國의관衣冠을 따르고 있으니, 이는 위징魏徵공력功力이다.” 하였다.
再拜謝曰 突厥破滅하고 海內康寧 皆陛下威德이니 臣何力焉이리잇고 上曰 朕能任公하고 公能稱所任하니 則其力 豈獨在朕乎
위징魏徵재배再拜하고 사례하기를 “돌궐突厥이 패망하고 해내海內강녕康寧한 것은 모두 폐하의 위엄과 덕이니, 신이 무슨 공력功力이 되었겠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에게 맡겼고 은 소임을 다하였으니, 그 공로가 어찌 다만 에게만 있겠는가.” 하였다.
范祖禹曰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太宗 可謂能審取舍(捨)矣 魏徵仁義之言也 欲順天下之理而治之 封德彛刑罰之言也 欲咈天下之性而治之
태종太宗취사取捨를 잘 살폈다고 이를 만하니, 인의仁義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위징魏徵의 말은 천하의 이치를 순히 하여 다스리고자 한 것이요, 형벌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봉덕이封德彛의 말은 천하의 성품을 어기고서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夫民 莫不惡危而欲安하고 惡勞而欲息하나니 以仁義治之則順하고 以刑罰治之則咈矣
백성들은 위태로움을 싫어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며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편안히 쉬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인의仁義로써 다스리면 순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거스르게 된다.
治天下 在順之而已 咈之而能治者 未之聞也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림은 순히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니, 어기고서 잘 다스렸다는 자는 듣지 못하였다.
太宗 從魏徵하고 而不從德彛하야 行之四年 遂致太平하니 仁義之效 如此其速也
태종太宗위징魏徵의 말을 따르고 봉덕이封德彛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행한 지 4년 만에 마침내 태평을 이룩하였으니, 인의仁義의 효험은 이와 같이 신속한 것이다.
治道 在人主所力行耳 孰不可爲太宗乎
그러므로 정치하는 인주人主가 힘써 행하는 바에 달려 있을 뿐이니, 누군들 태종太宗이 될 수 없겠는가.
及其成功하야는 復歸美於下하니 此近世帝王之所不及也니라
그 성공함에 이르러서는 다시 훌륭함을 아랫사람에게 돌렸으니, 이는 근세近世제왕帝王태종太宗에게 못 미치는 이유이다.”
房玄齡奏호되 閱府庫甲兵하니 遠勝隋世니이다 上曰 甲兵 武備 誠不可闕이나 然煬帝甲兵 豈不足耶
방현령房玄齡이 아뢰기를 “부고府庫의 갑옷과 병기를 사열해보니 나라 때보다 월등히 낫습니다.” 하니, 이 말하기를 “갑옷과 병기는 무비武備여서 진실로 없을 수 없으나 나라 양제煬帝의 갑옷과 병기가 어찌 부족하였겠는가.
卒亡天下하니 若公等 盡力하야 使百姓乂安注+[頭註] 治也이면 此乃朕之甲兵也니라
그런데도 끝내 천하를 멸망시켰으니, 만약 등이 힘을 다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注+[頭註]는 다스림이다. 이것이 바로 의 갑옷과 병기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露布 : 사실을 환히 드러내어[露]천하에 알리는[布]포고문인데, 주로 戰勝을 급히 알릴 때에 사용하였다. 봉함하지 않은 詔書나 奏章도 露布라 부른다.
역주2 漢高祖困白登 : 漢 高祖 7년(B.C. 200)에 高祖가 직접 大軍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였는데, 平城 동쪽에 있는 白登山에서 冒頓에게 7일간 포위당한 일이 있다.
역주3 : 타
역주4 五胡 : 東漢에서 南北朝 시대에 이르기까지 華北 지역에서 흥망했던 다섯 나라를 가리키는 바, 匈奴‧羯‧鮮卑‧氐‧羌이다.
역주5 : 부
역주6 有敎無類 : 《論語》 〈衛靈公〉에 보이는 내용으로, 누구나 가르치면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이른다. 一說에는 “가르칠 때에는 貴賤과 出身 등의 부류를 따지지 않는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역주7 先王之制 戎狄荒服 : 《國語》 〈周語〉에 이르기를 “先王의 제도에 邦內는 甸服이요, 邦外는 侯服이요, 侯服에서 衛服에 이르기까지는 賓服이요, 夷蠻은 要服이요, 戎狄은 荒服이다.[周語云 夫先王之制 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夷蠻要服 戎狄荒服]” 하였다.
역주8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 : 《論語》 〈憲問〉에 孔子가 말씀하기를 “管仲이 桓公을 도와 제후의 霸者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管仲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하였다.
역주9 : 손
역주10 : 휴
역주11 : 갱
역주12 明堂鍼灸(침구)書 : 《新唐書》 〈藝文志〉의 醫書에 《黃帝明堂經》, 《明堂偃側人圖》, 《明堂人形圖》, 《明堂孔穴圖》 등이 있는데, 모두 鍼灸에 관한 책이다.
역주13 議事以制……懼民之有爭心也 : 《春秋左傳》 昭公 6年條에 “옛날에 先王은 일의 輕重을 헤아려서 결단하고 형률(형법서)을 쓰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다투는 마음을 갖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昔先王 議事以制 不爲刑辟 懼民之有爭心也]”라고 보인다.
역주14 未知夫道之以德……而可使民遷善遠罪而不自知也 : 이 내용은 《論語》 〈爲政〉에 보이는 바,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인도하기를 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형벌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함은 없을 것이다. 인도하기를 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禮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善에 이를 것이다.[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하였는데, 朱子의 集註에 “법제와 형벌은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할 뿐이지만 덕과 예의 효과는 백성으로 하여금 날로 改過遷善하면서도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한다.[政刑能使民遠罪而已 德禮之效 則有以使民日遷善而不自知]” 하였다.
역주15 張蘊古之死 : 唐나라 太宗 貞觀 5년(631)에 河內 사람 李好德이 정신병을 얻어서 함부로 요망한 말을 하니, 太宗이 명하여 그 일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大理丞 張蘊古가 아뢰기를 “李好德이 병을 앓는 징후가 있으니, 법에 비추어 볼 때 죄를 주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治書侍御史 權萬紀가 탄핵하여 아뢰기를 “張蘊古는 貫籍이 相州에 있고 李好德의 兄 李厚德은 相州의 刺史가 되었으니, 張蘊古의 마음이 李厚德에게 아첨하여 李好德을 놓아주려는 데 있어서 일을 조사함이 진실하지 않습니다.” 하니, 太宗이 노하여 張蘊古를 시장에서 斬刑하도록 명하였다. 太宗은 이윽고 이를 후회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지금부터 죽을 죄가 있거든 비록 즉시 결정하게 하였더라도 인하여 세 번 살펴 아뢴 뒤에 형을 집행하라.” 하였다.
역주16 失出 : 失은 실수(잘못)이고 出은 罪網에서 나가게 하는 것으로, 무거운 죄를 가볍게 처벌하거나 구형해야 할 사람을 구형하지 않고 잘못 풀어줌을 이른다.
역주17 失入 : 入은 죄망에 넣는 것으로, 가벼운 죄를 무겁게 처벌하거나 구형해서는 안 될 사람을 잘못 구형함을 이른다.
역주18 飢者易爲食 渴者易爲飮也 : 이 내용은 《孟子》 〈公孫丑 上〉에 “王者가 나오지 않음이 지금보다 더 성근 적이 있지 않으며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림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으니, 굶주린 자에게 밥 되기가 쉽고 목마른 자에게 음료 되기가 쉬운 것이다.[王者之不作 未有疏於此時者也 民之憔悴於虐政 未有甚於此時者也 飢者易爲食 渴者易爲飮]”라고 보인다. 굶주린 자는 거친 밥도 맛있게 먹고 목마른 자는 나쁜 음료도 달게 마시므로 이것을 빌어 난리를 겪은 백성들은 조금만 善政을 베풀어도 백성들이 감동하여 교화하기 쉬움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19 : 치
역주20 顓頊 : 전욱
역주21 : 임
역주22 五嶺 : 大庾嶺‧越城嶺‧騎田嶺‧萌渚嶺‧都龐嶺의 총칭으로, 江西省‧湖南省‧廣東省‧廣西省 사이에 있다. 長江과 珠江 유역의 분수령이다.
역주23 惜不令封德彛見之 : 封德彛는 貞觀 元年(627)에 죽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24 書契 : 文字를 가리킨다. 《周易》 〈繫辭傳 下〉에 “上古 시대에는 〈文字가 없던 때이므로〉 노끈으로 매듭을 지어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書契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하였고, 梁나라 昭明太子의 《文選序》에 “옛날 伏羲氏가 천하에 왕 노릇 할 때에 八卦를 처음 그리고 書契를 만들어서 노끈을 맺어 다스리던 정치를 대신하니, 이로부터 文籍이 생겨났다.[古者 伏羲氏之王天下也 始畫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由是文籍生焉]” 하였으며, 陸德明은 “書는 문자이며, 契는 나무를 깎고 그 옆에 쓰는 것이다.[書者文字 契者刻木而書其側]” 하였다.
역주25 周禮司市 : 이 내용은 《周禮》 〈地官 質人〉에 보인다.
역주26 質劑 : 質과 劑는 매매 사실을 증명하는 文券으로, 大市에는 質을 쓰고 小市에는 劑를 쓰는 바, 大市는 사람과 소와 말 등을 매매하는 큰 거래를 가리키고 小市는 兵器와 진기한 물자 등을 매매하는 작은 거래를 가리킨다.
역주27 結繩之治…可以變絲竹矣 : 문자도 관현악도 없던 太古時代의 政治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