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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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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後唐同光三年이라
○ 蜀咸康元年이요 漢白龍元年이라
○ 是歲 凡四國, 四鎭이라
唐主性剛好勝하야 不欲權在臣下하야 入洛之後 信伶宦之讒하고 頗疎忌宿將하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晉王以夷狄賜姓하니 豈親宗室之比리오
朱氏未滅 偏霸大國하야 周匝三垂(陲)하니 存勖戰克攻取之才 固爲群雄所服이나 而輔世長民之德 天下未聞也
於是 而遽登宸極하니 則欲速見小利
是以 其行不達하야 而大事不成也하니라
○ 九月 唐主與宰相으로 議伐蜀하야 以魏王繼注+[附註]莊宗長子 唐主遣宦官李從襲等하야 從繼岌하니 雖爲都統이나 軍中制置 皆出崇韜하야 將吏賓客 趨走盈庭이로되 而都統牙門 索然하니 從襲等 恥之하다 崇韜素疾宦官하야 嘗密謂繼岌曰 大王他日 (騍)[騬]馬 亦不可乘이어든 況任宦官이리오 宜盡去之하고 專用(土)[士]人하라하니 由是 宦官 皆切齒하다 及崇韜不出迎延嗣하야 〈延〉嗣怒하니 從襲曰 郭公專權하고 其子(延)[廷]誨 日與驍將狎飮하며 指天畫地니이다 近聞自其父請表己以爲蜀帥라하니 一朝有變이면 吾屬 不知委骨何地니이다 延嗣歸하야 以語(對)[劉]后하고 后又訴於主하야 請早救繼岌하다 前此 唐主聞蜀人請崇韜爲帥하고 已不平이러니 至是 不能無疑 遣宦官馬彦珪하야 詣成都한대 彦珪見(對)[劉]后하고 曰 蜀中事勢 憂在朝夕이어늘 安能禀命二千里乎아하니 后復言之 唐主曰 傳聞之言 未知虛實이니라 后退하야 自爲敎與繼岌하야 令殺崇韜하다 繼岌將發 彦珪至하야 以敎示之하니 繼岌曰 彼無釁端이어늘 安可爲此리오 且主上無勅이어늘 獨以皇后敎 殺招討使可乎 從襲等泣하고 相與陳利害하니 繼岌從之하다 (騍)[騬]音(果)[繒]이니 犗馬也 으로 充西川四面行營都統하고 崇韜 充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하야 軍事 悉以委之하다
戊申 大軍 西行入散關하야 倍道而進하니 王承捷注+[頭註]武興節度使 以鳳, 興, 文, 扶 迎降하고 自餘城鎭望風款附
遂進兵逼成都한대 蜀王 輿櫬銜璧注+[釋義]王氏曰 古者相見之禮 皆有所執以爲贄하니 公侯伯子男 執玉이라 賈逵曰 銜璧者 蓋以手縛于後하야 不能執璧이라 銜之 하고 出降하니 大軍 入成都하다
崇韜禁軍士侵掠하야 市不改肆하니 自出師 至克蜀 凡七十日이러라
○ 十二月 閩王審知卒하니 子延翰 自稱威武留後하다
○ 時 成都雖下 而蜀中盜賊群起하야 布滿山林이라
崇韜恐大軍旣去 更爲後患하야 命任圜, 張筠하야 分道招討하니 以是 淹留未還이라
唐主遣宦者向延嗣하야 促之어늘 崇韜待之倨러니 延嗣歸言호되 崇韜專權하니 寄身於虎狼之口니이다
唐主遣馬彦珪하야 馳詣成都하야 觀崇韜去就할새 皇后自爲敎하야 與繼岌하야 令殺崇韜하고 以孟知祥으로 爲西川節度使하다
○ 契丹主 〈億 丙戌年 卒于扶餘하니 廟號太祖皇帝
是年 改天顯하고 次子德光立하니 是爲太宗하니라


을유(925) - 후당後唐 동광同光 3년이다.
나라 함강咸康 원년元年이고, 나라 백룡白龍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네 이다. -
당주唐主는 성품이 굳세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권력이 신하에게 있는 것을 싫어해서 낙양洛陽으로 들어온 뒤에는 광대와 환관들의 참언을 믿고 자못 옛 장수들을 소원히 하고 의심하였다.
[史略 사평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진왕晉王이 오랑캐로서 이씨성李氏姓을 하사받았으니, 어찌 친족의 종실에 비할 수 있겠는가.
주씨朱氏가 멸망하기 전에 편벽되이 일방一方을 점거하고 대국大國패자霸者가 되어서 세 변방을 포위하여 차지하였으니, 이존욱李存勖이 싸워서 승리하고 공격하여 점령한 재주는 진실로 군웅群雄에게 복종을 받았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돕고 백성을 기른 은 천하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에 갑자기 제위帝位에 올랐으니,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달성하지 못하고 큰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9월에 당주唐主가 재상들과 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고서 위왕魏王 계급繼岌注+[附註]계급繼岌장종莊宗장자長子이다. 처음에 당주唐主가 환관 이종습李從襲 등을 보내어 계급繼岌을 따르게 하였다. 계급繼岌이 비록 도통都統이 되었으나 군중의 제치制置가 모두 곽숭도郭崇韜에게서 나와, 장리將吏(軍官)와 빈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뜰에 가득하였으나 도통都統의 아문은 쓸쓸하였으므로 이종습李從襲 등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곽숭도郭崇韜가 평소 환관을 미워하여 일찍이 은밀히 계급繼岌에게 말하기를 “대왕大王은 후일에 승마騬馬(거세한 말)도 타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환관에게 맡기신단 말입니까? 마땅히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선비를 등용해야 합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모두 이를 갈며 그를 미워하였다. 곽숭도郭崇韜가 환관인 향연사向延嗣를 나와서 맞이하지 않자 향연사向延嗣가 노여워하니, 이종습李從襲이 말하기를 “곽공郭公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아들 정회廷誨가 날마다 용맹한 장수들과 친하여 술을 마시고 기고만장하여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로 땅에 긋곤 합니다. 근래에 들으니, 그의 아비가 표문表文을 올려 스스로 지방의 장수가 될 것을 청했다 하니,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은 어디에 뼈를 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향연사向延嗣가 돌아가서 이것을 유후劉后에게 말하고, 유후劉后가 또 당주唐主에게 참소하여 계급繼岌을 일찌감치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주唐主 지방 사람들이 곽숭도郭崇韜를 장수로 삼을 것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심이 없지 못하였다. 이에 환관 마언규馬彦珪를 보내자, 마언규馬彦珪성도成都에 이르러서 유후劉后를 보고 말하기를 “ 지방은 사세事勢로 볼 때 조석간에 우환이 닥쳐오게 되었는데, 어찌 2천 리 밖의 명령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유후劉后가 다시 당주唐主에게 말하였다. 당주唐主가 말하기를 “전해들은 말은 허실을 알 수 없다.” 하니, 유후劉后가 물러가서 스스로 교서敎書를 만들어 〈마언규馬彦珪로 하여금〉繼岌에게 주어 곽숭도郭崇韜를 죽이게 하였다. 계급繼岌이 장차 출발하려 할 적에 마언규馬彦珪가 이르러 교문敎文을 보이니, 계급繼岌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잘못한 단서가 없는데 어찌 이렇게 한단 말인가? 또 주상主上의 칙령이 없는데 오직 황후皇后의 교서로 초토사招討使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종습李從襲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함께 이해利害를 말하니, 계급繼岌이 그 말을 따랐다. 은 음이 이니 거세한 말이다.
서천사면행영도통西川四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고 곽숭도郭崇韜동북면행영도초토제치등사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로 임명하여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무신일戊申日(6월 18일)에 대군大軍이 서쪽으로 출동하여 산관散關으로 들어가서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전진하니, 왕승첩王承捷注+[頭註]왕승첩王承捷무흥절도사武興節度使이다. 봉주鳳州흥주興州문주文州부주扶州인신印信무흥절도사武興節度使인신印信정절旌節을 가지고 대군大軍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그 나머지 성진城鎭도 모두 소문만 듣고 귀부歸附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전진하여 성도成都를 핍박하였는데, 촉왕蜀王이 관을 수레에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옛날의 상견례에는 모두 손에 잡고서 예물禮物로 삼는 것이 있었으니, 은 옥을 잡는다. 가규賈逵가 말하기를 ‘구슬을 문다는 것은 손을 뒤로 묶어서 구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입에 문 것이다.’ 하였다.” 나와서 항복하니, 대군大軍성도成都로 들어갔다.
곽숭도郭崇韜가 군사들에게 침략과 노략질을 금지하여 시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교역하니, 출병한 뒤로부터 을 점령하기까지 모두 70일이 걸렸다.
12월에 민중閩中왕심지王審知가 죽으니, 아들 연한延翰이 스스로 위무유후威武留後라 칭하였다.
이때 성도成都가 비록 함락되었으나 지방에는 도둑이 떼 지어 일어나서 산림山林에 가득하였다.
곽숭도郭崇韜는 대군이 이미 떠나간 다음 다시 후환이 될까 걱정하여 임환任圜장균張筠에게 명해 길을 나누어 가서 토벌하게 하니, 이 때문에 지체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당주唐主환관宦官향연사向延嗣곽숭도郭崇韜에게 보내어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하였는데, 곽숭도郭崇韜향연사向延嗣를 매우 거만하게 대하자, 향연사向延嗣가 돌아와 말하기를 “곽숭도郭崇韜가 권력을 독단하니, 왕은 호랑이의 입에 몸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당주唐主마언규馬彦珪를 보내어 성도成都로 달려가서 곽숭도郭崇韜의 거취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때 황후皇后가 따로 교서敎書를 만들어 계급繼岌에게 주어서 곽숭도郭崇韜를 죽이게 하고 맹지상孟知祥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로 임명하였다.
거란주契丹主 - 야율억耶律億이 병술년(926)에 부여扶餘에서 죽으니, 묘호廟號태조황제太祖皇帝이다.
이해에 천현天顯으로 개원改元하고 차자次子 덕광德光을 세우니, 이가 태종太宗이다. -


역주
역주1 孔子曰……見小利則大事不成 : 《論語》 〈子路〉에 子夏가 莒父의 邑宰가 되어 정사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지 말아야 하니, 속히 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 : 급
역주3 四州印節 : 四州의 印信 및 武興節度使의 印信과 旌節이다.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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