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太后時時與文信侯私通이러니 王益壯하얀 文信侯恐事覺及禍하야
乃以舍人嫪毐
로 詐爲宦者進之
注+舍人, 本親近左右之通稱, 後遂以爲私屬官號. 嫪, 郞報切. 毐, 烏改切. 嫪毐, 姓名.하야
生二子하고 封毐爲長信侯하야 政事를 皆決於毐러니
王이 下吏治毐한대 毐懼하야 矯王御璽하야 發兵爲亂이어늘
王
이 使相國昌平君昌文君
으로 攻之
注+昌平君, 楚公子也. 立以爲相, 後徙於郢, 項燕立以爲荊王. 史失其名. 昌文君, 名亦不知也.한대
毐戰敗走
어늘 獲之
하야 夷三族
注+三族, 父族‧母族‧妻族也.하고
遷太后於雍萯陽宮
하고 殺其二子
注+萯, 音倍, 山名也. 應劭曰 “宮在扶風鄠縣, 秦文王所建.”하고 下令
호대 敢諫者
면 死
호리라 諫而死者二十七人
이라
趣召鑊欲烹之
注+沫, 音末, 涎也. 趣, 讀曰促. 鑊, 胡郭切, 鼎大而無足.어늘 焦徐行至前
하야 再拜謁
하고 起稱曰
臣은 聞有生者는 不諱死요 有國者는 不諱亡이라하니
諱死者는 不可以得生이요 諱亡者는 不可以得存이니 死生存亡은 聖主의 所欲急聞也라
陛下欲聞之乎
注+陛者, 升堂之陛. 王者必有執兵陳於階陛之側, 群臣與至尊言, 不敢指斥, 故呼在陛下者而告之, 因卑以達尊之意也. 若今稱殿下‧閣下‧節下‧足下‧侍者‧執事, 皆此類.잇가
車裂假父
하며 囊撲二弟
注+假父, 指嫪毐. 囊撲, 以囊盛其人, 撲而殺之.하며 遷母於雍
하고 殘戮諫士
하니
令天下聞之
면 盡瓦解
하야 無嚮秦者
注+解, 下懈切, 散也. 瓦解, 言如衆瓦之解散也.리니 臣竊爲陛下危之
하노이다
臣言
이 已矣
라하고 乃解衣伏質
注+質, 讀曰鑕, 鐵椹也. 古者, 斬人加於椹上而斫之. 椹, 通作枮.한대
目
[目] 처음에 진秦나라 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후가 수시로 문신후文信侯(여불위呂不韋)와 사통하였는데, 왕이 점차 장성하자 문신후가 일이 발각되어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웠다.
이에
사인舍人 노애嫪毐를 거짓으로 환관을 만들어 태후에게 바쳤다.
注+사인舍人은 본래 가까운 주변 사람에 대한 통칭이었는데, 나중에 마침내 개인에게 소속된 관인官人의 호칭이 되었다. 노嫪는 낭보郞報의 절切이고, 애毐는 오개烏改의 절切이다. 노애嫪毐는 성명이다.
태후가 두 아들을 낳고 노애를 봉하여 장신후長信侯로 삼으니, 정사가 모두 노애에게서 결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노애가 실제로 환관이 아니라고 고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옥리獄吏에게 맡겨 노애의 일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노애가 두려워하여 왕의 어새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왕이 재상인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으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注+창평군昌平君은 초楚나라의 공자이다. 진秦나라 왕이 그를 세워 재상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영郢으로 옮겨갔고, 항연項燕이 그를 세워 형왕荊王으로 삼았다. 역사서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창문군昌文君의 이름도 알 수 없다.
노애가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나자 잡아다 삼족을 멸하였다.
注+삼족三族은 부족, 모족, 처족이다.
태후를
옹雍의
부양궁萯陽宮(배양궁)으로 옮기고, 두 아들을 죽이고는
注+부萯는 음이 배倍이니, 산의 이름이다. 가 말하기를 “부양궁萯陽宮은 부풍扶風 호현鄠縣에 있다. 진秦나라 문왕文王이 세운 것이다.” 하였다. 명령을 내리기를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리라.” 하였는데, 간하다 죽은 사람이 27인이었다.
그들의 사지를 잘라 궐문 아래에 쌓아두었는데, 제齊나라에서 온 유세객 모초茅焦가 간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검을 어루만지며 앉았는데 입에 거품을 물 정도였다.
모초를 불러 큰 솥에다 삶아 죽이라고 재촉하였는데,
注+말沫은 음이 말末이니, 침이다. 촉趣(재촉하다)은 촉促으로 읽는다. 확鑊은 호곽胡郭의 절切이니, 솥이 크고 발이 없는 것이다. 모초가 천천히 와서 왕의 앞에 이르러 두 번 절하고 일어나 다음과 같이 크게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살아 있는 자는 죽음에 대한 말을 꺼리지 않고 나라를 소유한 자는 망국에 대한 말을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말을 꺼리는 자는 살 수가 없고 망국에 대한 말을 꺼리는 자는 나라를 존속시킬 수 없으니, 사생死生과 존망存亡은 성명聖明한 군주가 급히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이것을 들어보고자 하십니까?”
注+폐陛는 당에 오르는 섬돌이다. 왕은 반드시 무기를 소지한 병사를 섬돌 옆에 두는데, 신하들이 임금과 말을 할 때에 감히 임금을 바로 부를 수가 없으므로 섬돌 아래에 있는 자를 불러서 고하니, 낮은 데에서 높은 데로 전달하는 의미이다. 지금의 전하殿下, 각하閣下, 절하節下, 족하足下, 시자侍者, 집사執事와 같은 호칭이 모두 이러한 부류이다.
모초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포악하고 사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셨는데 스스로 모르십니까?
가부假父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고, 두 동생을 자루에 넣어 쳐서 죽이고,
注+가부假父는 노애嫪毐를 가리킨다. “낭박囊撲”은 사람을 자루에 넣어 쳐서 죽이는 것이다. 모후를
옹雍에 옮기고, 간하는 선비를 잔혹하게 죽이셨습니다.
걸왕桀王와 주왕紂王의 악행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한다면 민심이 모두 와해되어
진秦나라에 충성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注+해解는 하해下懈의 절切이니, 흩어진다는 뜻이다. “와해瓦解”는 많은 기와가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해 위태롭게 생각합니다.
신이 드릴 말씀은 끝났습니다.” 하고는 옷을 벗고 모루 위에 엎드렸다.
注+지質은 질鑕로 읽으니, 모루이다. 옛날에 사람을 벨 때에 모루[심椹] 위에 올려두고 벴다. 심椹은 침枮와 통용하여 쓰인다.
왕이 전각을 내려와 그를 직접 맞이하여 상경上卿의 작위를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수레를 몰아 왼편의 자리를 비우고 가서, 태후를 맞이하여 돌아와 모자의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였다.
目
[目] 초楚나라 고열왕考烈王이 아들이 없자, 춘신군春申君이 아들을 낳을 만한 부녀자를 찾아 많이 바쳤으나 끝내 아들이 없었다.
조趙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누이를 춘신군에게 바쳤는데, 임신이 되자 이원이 누이를 시켜 춘신군을 설득하게 하기를 “
초楚나라 왕이 아들이 없으니, 왕이 죽은 뒤에 장차 형제가 즉위할 것입니다.
注+사람들이 죽은 뒤를 백 세 뒤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이 또한 각각 자신이 옛날에 친했던 자들을 존귀한 자리에 앉힐 것이니, 군께서 다시 어떻게 이러한 총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군께서 존귀한 지위에서 정사를 맡은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왕의 형제들에게 실례를 범한 일이 많습니다.
형제가 즉위하면 재앙이 장차 몸에 미칠 것입니다.
진실로 군의 존귀한 신분으로 첩을 왕에게 올려서 하늘이 보우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이것은 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초楚나라를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이니,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몸에 닥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하였다.
目
[目]
춘신군春申君이 이에 그녀를 집에서 빼내어 안전하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왕에게 아뢰었다.
注+“근사謹舍”라는 것은 별도로 머물 곳을 마련하여 살게 하고 호위를 매우 신중하게 하는 것이다.
왕이 그녀를 불러 총애하여 마침내 아들을 낳으니, 태자로 세우고 이원李園의 누이를 왕후로 삼았다.
이원도 존귀하게 되어 권세를 누렸는데, 춘신군이 자신의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을 몰래 양성하여 춘신군을 죽여서 입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병이 들자
주영朱英이
춘신군春申君에게 이르기를 “이원은 군의 원수이니, 나라의 군사는 돌보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용사를 양성한 지 오래입니다.
注+“군지구君之仇(그대의 원수)”는 이원李園이 춘신군春申君의 원수라는 말이다. .
왕이 훙薨하시면 반드시 먼저 궁궐에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고 군을 죽여 입을 막을 것입니다.
군께서 만약 신을
낭중郞中의 자리에 두신다면, 왕이
훙薨하여 이원이 들어왔을 때에 신이 군을 위해 그를 죽이겠습니다.”
注+《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낭郞은 문호를 담당하고 수레와 말을 내어주는 것을 담당한다. 의랑議郞, 중랑中郞, 시랑侍郞, 낭중郞中이 있다.”라고 하였다. 하니, 춘신군이 말하기를 “이원은 나약한 사람입니다.
내가 또 그를 잘 대해주었으니, 장차 어찌 그런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였다.
주영이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을 줄 알고서 두려워 달아났다.
17일 뒤에 왕이
훙薨하자 이원이 과연 궁궐에 먼저 들어와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을
극문棘門 안에 매복시켰다가
注+극문棘門은 수춘성壽春城의 문 이름이다. 춘신군을 찔러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