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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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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年(74)
十七年이라 春正月 謁原陵하다
當謁原陵이러니 夢先帝, 太后如平生歡하고 旣寤 悲不能寐하여 卽案曆하니 明旦日吉이어늘
遂率百官上陵하다 其日 降甘露於陵樹하니 帝令百官으로 采取以薦하다
會畢 帝從席前伏御牀하여 視太后鏡奩中物하고 感動悲涕하니 左右皆泣하여 莫能仰視注+奩, 音廉, 鏡匣也.러라
北海王睦하다
少好學하니 光武及上 皆愛之注+睦, 靖王之子, 齊王縯之孫也. 嘗遣中大夫하여 詣京師朝賀할새
召而謂之曰 朝廷 設問寡人이면 大夫將何辭以對注+中大夫, 王國官也, 掌奉玉使京師, 奉璧賀正月. 朝廷, 謂天子也. 使者曰 大王忠孝慈仁하고 敬賢樂士하시니 敢不以實對리잇가
睦曰 吁 子危我哉인저 此乃孤幼時進趣之行也注+趣, 讀曰趨, 又七喩切. 行, 去聲.
大夫其對以孤襲爵以來 志意衰하여 聲色是娛하고 犬馬是好라하면 乃爲相愛耳라하니 其智慮畏愼 如此注+時禁切藩王, 法憲頗峻, 故睦慮及此.러라
司徒敏하니 以鮑昱爲司徒注+昱, 永之子也. 昱, 余六切.하다
◑白狼等國 入貢하다
益州刺史朱輔 宣示漢德하여 威懐遠夷하니 自汶山以西 前世所不至 正朔所未加 白狼, 槃木等百餘國 皆擧種稱臣奉貢注+汶, 讀曰泯. 槃, 音盤. 白狼ㆍ槃木, 竝西南夷遠國, 在木牛徼外.하다
竇固司馬班超 執疏勒王兜題하고 而更立其故王子忠하다
龜玆王建 爲匈奴所立하니 倚恃虜威하여 據有北道하고 攻殺疏勒王하고 立其臣兜題爲疏勒王하다
班超從間道至疏勒하여 逆遣吏田慮하여 先往降之할새 勅慮曰 兜題 本非疏勒種이니 國人 必不用命하리니
若不卽降이어든 便可執之注+逆遣, 猶言預遣也, 超未至而先遣田慮, 故云逆遣. 勅, 戒勅之也.하라 慮旣到 兜題見慮輕弱하고 無降意
慮因其無備하여 遂前刼縛兜題하니 左右出其不意하여 皆驚懼奔走
慮馳報超한대 超卽赴之하여 悉召疏勒將吏하여 說以龜玆無道之狀하고 因立其故王兄子忠爲王하니 國人 大悦이라
超問忠及官屬호되 當殺兜題邪 生遣之邪 咸曰 當殺之니이다
超曰 殺之라도 無益於事하니 當令龜玆知漢威德이라하고 遂解遣之하다
夏五月 하다
公卿百官 以威德懐遠하고 祥物顯應이라하여 竝集朝堂하여 奉觴上壽注+朝堂, 蓋在殿庭左右也.한대
制曰 天生神物하여 以應王者하고 遠人慕化 實由有德하나니 朕以虛薄으로 何以享斯리오
唯高祖, 光武聖德所被 不敢有辭 其敬擧觴하리니 太常 擇吉日하여 策告宗廟하라하고 仍推恩하여 賜民爵及粟有差注+時賜天下男子爵人二級, 三老ㆍ孝悌ㆍ力田人三級, 流人無名數欲者人一級, 鱞ㆍ寡ㆍ孤ㆍ獨ㆍ篤癃ㆍ貧不能自存者, 粟人三斛.하다
冬十一月 遣竇固等하여 擊車師降之하고 復置西域都護, 戊己校尉하다
遣奉車都尉竇固 駙馬都尉耿秉 騎都尉劉張하여 出敦煌昆侖塞하여 擊西域注+賢曰 “昆侖, 山名, 因以爲塞. 在今肅州酒泉縣西南, 山有昆侖之體, 故名之.” 又曰 “前書 ‘敦煌郡廣至縣, 有昆侖障, 宜禾都尉居也.’ 廣至故城, 在今瓜州常樂縣東.”할새
秉, 張 皆去符傳以屬固注+符ㆍ傳皆合之以爲信. 符, 兵符也. 此傳, 蓋亦行兵所用以爲信, 非度關所用之傳也. 專將則有符傳, 今以兵屬固, 故去之.하고 合兵萬四千騎하여 擊破白山虜於蒲類海上하고 遂進擊車師하다
車師前王 卽後王之子也 其廷 相去五百餘里注+車師前王居交河城, 後王居務塗谷. 以後王道遠하고 山谷深하여 士卒寒苦라하여 欲攻前王이로되
以爲先赴後王하여 并力根本이면 則前王自服이라하니 固計未决이러니
奮身而起曰 請行前注+行, 如字, 行前, 謂置前而行也.하리라하고 乃上馬하여 引兵北入하니 衆軍 不得已竝進하여 斬首數千級하다
後王安得 震怖하여 走出門迎秉하여 脱帽하고 抱馬足降注+安得, 後王名.이어늘 將以詣固러니 其前王亦歸命하여 遂定車師而還하다
於是 固奏하여 復置西域都護及戊己校尉注+宣帝置都護, 元帝置戊己校尉, 自王莽之亂, 西域與中國絶, 不復置, 今通西域, 復置之.하여 以陳睦爲都護하고
司馬耿恭爲戊校尉하여 屯後王部金蒲城注+恭, 況之孫也. 金蒲城, 卽車師後王所治務塗谷.하고 謁者關寵爲己校尉하여 屯前王部柳中城注+賢曰 “柳中, 今西州縣.”하다


갑술년甲戌年(74)
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 영평永平 17년이다. 봄 정월에 원릉原陵(광무제光武帝)에 배알하였다.
원릉原陵에 배알하려 하였는데, 밤에 선제先帝태후太后가 살아 있을 때처럼 즐거워하는 꿈을 꾸고는 잠에서 깨었다. 은 슬픔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즉시 달력을 살펴보니, 다음 날이 길일이었다.
이에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원릉原陵으로 올라갔다. 이날 의 나무에 감로甘露가 내리니, 황제는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감로甘露를 채취하여 에 올리게 하였다.
배알을 마치자, 황제가 자리 앞의 어상御牀에 엎드린 채 태후太后의 화장갑 속의 물건을 들여다보고는 슬픈 마음이 일어 구슬피 우니, 좌우의 측근들 역시 모두 우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注+은 음이 이니, 〈“경렴鏡奩”은〉 화장갑이다.
북해왕 유목北海王 劉睦하였다.
유목劉睦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니, 광무제光武帝이 모두 그를 사랑하였다.注+유목劉睦정왕 유흥靖王 劉興의 아들이고, 제왕 유연齊王 劉縯의 손자이다. 일찍이 중대부中大夫를 보내 경사京師로 나가 조회하고 축하하게 할 적에,
유목이 중대부를 불러 이르기를 “조정朝廷(천자)에서 과인에 대해 물으시면 대부大夫는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려는가?”注+중대부中大夫왕국王國의 관원이니, 을 받들어 경사京師에 사신 가고 벽옥璧玉을 받들어 정월正月에 축하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조정朝廷천자天子를 이른다. 하니,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대왕大王충효忠孝하고 인자하시며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를 좋아하시니, 이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목이 말하기를 “아. 그대가 나를 위태롭게 하는구나. 이는 바로 내가 어렸을 때에 추구했던 행실이다.注+(추구하다)는 로 읽고 또 칠유七喩이다. (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대부大夫는 ‘내가 관작을 세습한 이래로 의지가 쇠퇴하고 게을러져 음악과 여색을 즐기고 개와 말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면 이것이 바로 서로 아껴주는 방법이다.” 하니, 그의 지혜와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注+이때에 번왕藩王들을 제약하여 이 자못 준엄하였으므로, 유목劉睦의 우려가 여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 왕민司徒 王敏하니, 포욱鮑昱(포욱)을 사도司徒로 삼았다.注+포욱鮑昱포영鮑永의 아들이니, 여육余六이다.
백랑白狼 등의 나라가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익주자사 주보益州刺史 朱輔나라의 덕을 널리 보여 먼 곳에 있는 오랑캐들을 회유하니, 문산汶山(민산)의 서쪽으로부터 전대前代에 이르지 못하고 정삭正朔이 가해지지 못했던 백랑白狼, 반목槃木 등 100여 나라가 모두 온 종족이 이라 칭하고 공물을 받들어 올렸다.注+으로 읽는다. 은 음이 이니, 백랑白狼반목槃木은 모두 서남쪽 오랑캐의 먼 나라로, 목우木牛의 변방 밖에 있다.
두고竇固사마 반초司馬 班超소륵왕 두제疏勒王 兜題(도제)를 사로잡고, 다시 그 고 왕故 王의 〈의〉 아들인 을 세웠다.
】 처음에 구자왕 건龜玆王 建흉노匈奴에 의해 세워지니, 흉노의 위엄을 믿고서 북도北道를 점거하고 소륵왕疏勒王을 공격하여 죽이고는 자신의 신하인 두제兜題소륵왕疏勒王으로 세웠다.
반초班超가 지름길을 따라 소륵疏勒에 이르러서 관리인 전려田慮를 미리 보내 먼저 가서 항복을 받게 할 적에, 전려에게 경계하기를 “도제는 본래 소륵의 종족이 아니니, 소륵 사람들이 반드시 그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도제가 만약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로잡아라.”注+역견逆遣”은 미리 보낸다는 말과 같으니, 반초班超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려田慮를 보내었으므로 “역견逆遣”이라 한 것이다. 은 경계하고 신칙함이다. 하였다. 전려가 소륵에 도착하였으나 도제는 전려의 병력이 적고 약한 것을 보고는 항복할 뜻이 없었다.
전려는 그에게 대비가 없음을 틈타서 앞으로 나가 도제를 협박하여 포박하니, 좌우가 모두 뜻밖에 발생한 일에 놀라고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전려가 말을 달려 반초에게 보고하자, 반초는 즉시 달려가서 소륵의 장수와 관리들을 모두 불러 구자왕의 무도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인하여 그 고 왕故 王의 형의 아들인 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소륵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반초가 과 관속들에게 묻기를 “도제를 죽여야 하는가? 살려 보내주어야 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하였다.
반초는 말하기를 “죽이더라도 일에 유익함이 없으니, 마땅히 구자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위엄과 덕을 알게 해야 한다.” 하고는 마침내 풀어주어 보냈다.
】 여름 5월에 백관百官들이 축수를 올렸다.
공경公卿백관百官들이, 황제가 위엄과 덕으로 먼 나라를 회유하고 상서로운 물건이 크게 응했다 하여, 모두 조당朝堂에 모여서 술잔을 받들어 축수를 올리니注+조당朝堂은 궁전의 뜰 좌우에 있다.,
황제가 다음과 같이 제령制令을 내렸다. “하늘이 신령스러운 물건을 내어서 왕자王者에 응하고 먼 나라 사람들이 교화를 사모하는 것은 실로 덕이 있음에 연유하니, 덕이 부족한 이 어찌 이것을 누리겠는가.
오직 고조高祖광무제光武帝성덕聖德을 입었기 때문이니, 감히 사양하지 않겠다. 공경히 술잔을 들어 올릴 것이니, 태상太常길일吉日을 택하여 책서策書종묘宗廟에 고하라.” 황제는 이어 은혜를 미루어서 백성들에게 차등을 두어 와 곡식을 하사하였다.注+이때 천하의 남자男子들()에게는 사람마다 작위爵位 2급(상조上造)을 하사하고,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에게는 사람마다 3급(잠뇨簪裊)을 하사하고, 유리流離하는 사람으로 호적이 없어서 자진하여 신고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1급(공사公士)을 하사하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독신, 큰 병이 있는 자와 가난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곡식 3을 하사하였다.
】 겨울 11월에 두고竇固 등을 보내 거사車師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다시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설치하였다.
봉거도위 두고奉車都尉 竇固부마도위 경병駙馬都尉 耿秉기도위 유장騎都尉 劉張을 파견하여 돈황敦煌곤륜새昆侖塞에서 출동하여 서역西域을 공격할 적에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곤륜昆侖의 이름인데 이것으로 요새의 이름을 삼았다. 지금의 숙주 주천현肅州 酒泉縣 서남쪽에 있는데, 곤륜昆侖(광대하고 끝이 없음)의 형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서漢書≫에 ‘돈황군 광지현敦煌郡 廣至縣곤륜장昆侖障이 있으니, 의화도위宜禾都尉가 거주하는 곳이다.’ 하였다.” 하였다. 광지廣至고성故城은 지금의 과주 상락현瓜州 常樂縣 동쪽에 있다.,
경병과 유장이 모두 을 떼서 두고에게 맡기고는注+은 모두 신표로 삼아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맞추어보는 것이다. 병부兵符이다. 이 또한 신표로 삼아 행군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니, 관문을 지나갈 때에 사용하는 이 아니다. 장수가 전적으로 군대를 거느리게 되면 이 각각 있어야 하지만, 지금 병력을 두고竇固에게 소속시켰으므로 을 뗀 것이다. 기병 1만 4천을 모아 백산白山의 오랑캐를 포류해蒲類海 가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거사車師로 진격하였다.
은 바로 후왕後王의 아들인데, 그 조정의 거리가 서로 500여 리 떨어져 있었다.注+차사전왕車師前王교하성交河城에 거주하였고, 차사후왕車師後王무도곡務塗谷에 거주하였다. 두고는 후왕後王이 있는 곳은 길이 멀고 산골짜기가 깊어서 사졸士卒들이 춥고 고생한다 하여 전왕前王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경병은 먼저 후왕後王에게 달려가서 근본인 곳에 힘을 합쳐 공격하면 전왕前王이 스스로 복종할 것이라고 하니, 두고가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경병이 몸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행군의 앞에 서겠습니다.”注+(가다)은 본음대로 읽으니, “행전行前”은 앞장서 가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말에 올라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가니, 여러 군대가 부득이해서 함께 전진하여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다.
후왕 안득後王 安得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문으로 달려 나와 경병耿秉을 맞이해서 모자를 벗고 말발굽을 안고 항복하자注+안득安得후왕後王의 이름이다., 경병이 그를 두고竇固에게 데리고 갔다. 그 전왕前王 또한 귀순하여 마침내 거사車師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이에 두고가 아뢰어서 서역도호西域都護기교위己校尉를 다시 설치하여注+선제宣帝도호都護를 설치하고 원제元帝무기교위戊己校尉를 설치했었는데, 왕망王莽으로부터 서역西域중국中國과 왕래가 끊겨서 다시는 관원을 배치하지 않다가, 이제 서역과 통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진목陳睦도호都護로 삼고
사마 경공司馬 耿恭무교위戊校尉로 삼아서 후왕後王부내部內금포성金蒲城에 주둔하게 하고注+경공耿恭경황耿況의 손자이다. 금포성金蒲城은 바로 차사후왕車師後王이 다스리고 있는 무도곡務塗谷이다., 알자 관총謁者 關寵기교위己校尉로 삼아서 전왕前王부내部內유중성柳中城에 주둔하게 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유중柳中은 지금의 서주현西州縣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與)[興] : 저본에는 ‘與’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興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墮)[惰] : 저본에는 ‘墮’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惰’로 바로잡았다.
역주3 百官上壽 : “‘上壽’를 쓰지 않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황제가 자만함을 비난한 것이다. 이로부터 西北 지역이 비로소 일이 많게 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어진 자에게 완비하기를 요구하였으므로, 특별히 이것을 써서 비난한 것이다.[上壽不書 此何以書 譏滿也 自是西北始多事矣 綱目責備賢者 故特書譏之]다” ≪書法≫
역주4 爵位 : 秦나라에서 軍功의 多寡에 따라 내린 爵制를 20等爵制라 한다. 이것이 漢代에 들어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내리는 民爵制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를 통해 향촌 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한편 이제는 백성들이 봉건귀족에게 귀속된 것이 아닌 백성들이 황제의 지배에 직접 속하게 되었음을 보이게 하였다. 20등작은 ①公士 ②上造 ③簪裊 ④不更 ⑤大夫 ⑥國大夫․官大夫 ⑦七大夫․公大夫 ⑧公乘 ⑨五大夫 ⑩左庶長 ⑪右庶長 ⑫左更 ⑬中更 ⑭右更 ⑮少上造 ⑯大良造․大上造 ⑰駟車庶長 ⑱大庶長 ⑲關內侯 ⑳徹侯․通侯․列侯인데, 열후가 가장 높고 공사가 가장 낮다. 백성에게 작위를 내린 것은 1급인 공사에서 8급인 공승까지로 보인다.
역주5 (古)[占] : 저본에는 ‘古’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占’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戊․己校尉 : 이는 車師前王國의 왕정인 高昌 交河城에 설치되었다. 漢나라 宣帝 때 車師國에 둔전을 하였으며, 이후 元帝 때 고창에 戊己校尉를 설치하였다. 後漢 明帝 때 설치된 무기교위는 戊校尉와 己校尉로 별개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前漢 때 무기교위를 무교위와 기교위로 나누어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戊己는 흉노의 멸망을 상징하는 ‘以土塡水’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역주7 車師前王 : 車師는 姑師라고도 불리었다. 前漢 武帝 때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車師라고 불리었다. 宣帝 때 이곳에 둔전을 시작하였으나 흉노의 집요한 공격으로 둔전을 포기하였고 車師人을 渠犁로 이주시켰다. 이후 흉노도 거사왕 兜莫을 내세워 거사인을 동쪽으로 이동시키자 이후 軍宿을 거사왕으로 내세웠다. 이후 西域都尉가 설치되고 거리의 거사인을 高昌으로 이동시켜 車師前王國이 형성하였다. 거사전왕국은 지금의 新疆省 투르판에 있고 그 도읍은 交河城이었다. 흉노 쪽 거사인을 중심으로 車師後王國이 형성되고 天山 북쪽에 위치하였다. 이후 元帝 시기에 戊己校尉가 거사전왕국에 설치되어 흉노의 남하를 견제하였다. 王莽 때 거사전왕국과 후왕국이 匈奴의 손에 떨어졌고 이후 흉노와 後漢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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