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목目】 북흉노北匈奴가 연이어 거사車師(거사)와 함께 하서河西 지역을 침략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다시 폐쇄하여 오랑캐에 대한 근심을 끊고자 하였다.
이에 돈황태수 장당敦煌太守 張璫이 다음과 같이 상서上書하였다. “신臣도 경사京師에 있을 적에는 서역西域을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직접 이 지역에 와보니, 서역西域을 버리면 하서河西가 자연 보존될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삼가 세 가지 계책을 아룁니다. 북쪽의 오랑캐인
호연왕呼衍王이 항상
포류蒲類와
진해秦海의 사이에
전전展轉하여 자기 마음대로
서역西域을 통제해서 함께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습니다.
注+대진국大秦國(로마)이 의 서쪽에 있으므로 진해秦海라 하였다. 서해西海는 넓고 멀어서 북흉노北匈奴의 군대의 위엄이 일찍이 이들을 예속시켜 부리지 못하였으니, “전전이해간展轉二海間”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당시에 상서上書한 자가 과장해서 말했을 뿐이다.
이제
주천속국酒泉屬國 관리와 병사 2천여 명을
곤륜새昆侖塞에 집결하여 먼저
호연呼衍을 공격해서 그 근본을 끊고, 인하여
선선鄯善의 병력 5천 명을 동원해서
거사車師의
후부後部를 위협하는 것이 바로
상책上策입니다.
注+≪한서漢書≫에 “돈황군 광지현敦煌郡 廣至縣에 곤륜장昆侖障이 있으니, 의화도위宜禾都尉가 거주하는 곳이다.” 하였다.
군사마軍司馬를 설치하여 5백 명의 병력을 거느리되 네
군郡에서 밭을 가는 소와 곡식을 제공하고 〈
관새關塞를〉 나가서
유중柳中을 점거하는 것이 바로
중책中策입니다.
注+“사군四郡”은 무위武威, 주천酒泉, 장액張掖, 돈황敦煌이다.
교하성交河城을 버리고
선선鄯善 등을 거두어서 모두
관새關塞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바로
하책下策입니다.”
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차사전왕車師前王이 교하성交河城에 거처하였는바, 하수河水가 나뉘어 흘러서 성城 아래를 둘러싸므로 ‘교하交河’라 이름하였다. 장안長安과는 8,100리里 떨어져 있으니, 옛 성城은 지금의 서주 교하현西州 交河縣에 있다.” 하였다.
조정(황제)이 그의 의논을 내려 토론하게 하니, 진충陳忠이 돈황敦煌에다가 다시 교위校尉를 설치하고 네 군郡의 둔병屯兵을 증가시켜서 여러 나라를 어루만질 것을 청하였다.
이에 다시
반용班勇을
서역장사西域長史로 삼아
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서역장사西域長史는〉 서역도호西域都護의 장사長史이다.” 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내가 살펴보건대, 반초班超는 아직 도호都護가 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장병장사將兵長史가 된 것이다.” 하였다. 5백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
관새關塞를〉 나가서
유중柳中에 주둔하게 하였다.
目
【목目】 이때 조령詔令을 내려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왕성王聖을 위해 크게 집을 수리하고 번풍樊豐, 주광周廣, 사운謝惲(사운) 등이 조정을 뒤흔들었다.
이에
양진楊震이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현재
재해災害가 더욱더 심하여 백성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세 변경 지역은 위태로워서
국고國庫가 고갈되었는데도
아모阿母를 위하여 집을 수리하는 공사를 일으키니, 그 비용이
억億으로 헤아릴 정도입니다.
注+
주광과 사운 형제가 군주의 측근에 있는 행신倖臣들을 의지하여 그들과 더불어 위엄을 나누어서 주군州郡에 청탁하고 대신大臣을 두렵게 하며, 해내海內의 탐욕스럽고 더러운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그들의 재화와 뇌물을 받고 다시 현관顯官과 요직要職에 등용하니,
흑백이 뒤섞여서 온 천하가 시끄럽게 떠듭니다.
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심지어는 장물죄로 금고禁錮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무리들이 다시 현관顯官과 요직要職에 등용되었다.”라고 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여러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황제)이 자초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注+“사언師言”은 여러 사람들의 말이다., 백성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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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중에 원망하고 배반하는 사람은 다시 부릴 수 없으니, 부디 폐하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소서.” 상上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