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봄 2월에 秦나라(前秦)가 〈晉나라(東晉)의〉 襄陽을 함락하고 刺史 朱序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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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秦나라의 御史中丞 李柔가 탄핵하여 아뢰기를 “長樂公 符丕 등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작은 城을 공격하여 포위하고서 날마다 1만 금을 허비하나 오랫동안 공효가 없으니, 청컨대 그를 불러 廷尉에게 회부하여 죄를 심리하소서.” 하였다.
秦王 符堅이 使者를 보내어 節을 가지고 가서 부비 등을 크게 꾸짖고 부비에게 劍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내년 봄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네 스스로 자결할 것이요, 다시는 두꺼운 낯을 가지고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다.
부비 등은 황공하여 여러 군대에 명해서 힘을 합쳐 襄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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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符堅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려 하자, 陽平公 符融이 諫하기를 “폐하께서 江南(東晉)을 취하고자 하신다면 진실로 마땅히 여럿이 모여 모의하여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요, 창졸간에 군대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다만 襄陽을 점령하려 하실 경우 직접 大駕를 수고롭게 하신다면 이른바 ‘隨侯의 구슬로 천 길 높이 나는 참새를 맞힌다.’는 것입니다.” 하니, 부견이 마침내 중지하였다.注+① ≪呂氏春秋≫에 말하였다. “隨侯의 진주로 천 길 높이의 참새를 쏘아 맞히면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비웃으니, 이는 사용하는 도구가 귀중하고 얻길 바라는 것이 비천하기 때문이다.” ≪搜神記≫에 말하였다. “수후가 길을 가다가 상처를 입은 큰 뱀을 보고 구원하여 치료하였는데, 그 뒤에 뱀이 진주를 물고 와서 은혜에 보답하니, 그 진주는 지름이 한 치이고 순백색이며 한밤중에도 광채가 집을 환히 비췄다. 그러므로 대대로 ‘隨珠’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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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朱序가 여러 번 秦나라(前秦)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를 믿고〉 마침내 진나라의 반격에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 符丕가 諸軍에게 명하여 진격할 적에 督護 李伯護가 内應이 되어 마침내 襄陽을 함락하고 주서를 사로잡아 長安으로 보냈다.
부견은 주서는 능히 절개를 지켰다 하여 그에게 度支尙書를 제수하였고, 이백호는 不忠하다 하여 참수하였다.注+① 曹魏 때에 度支尙書를 두었다.
진나라 장수 慕容越이 順陽을 함락시키고 太守 丁穆을 사로잡았는데, 부견이 그에게 벼슬을 내리려고 하자, 정목이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부견은 梁成을 荆州刺史로 삼아 襄陽에 진주시켜 그 지역의 재주 있고 명망 있는 인물을 선발해서 예우하여 등용하게 하였다.注+② 梁成은 梁平老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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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秦나라(前秦)가 〈晉나라(東晉)의〉 彭城과 淮陰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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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晉나라(東晉)의〉 謝玄이 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彭城을 구원할 적에 泗水 어귀에 군대를 주둔하여 間使를 보내어 戴𨔡(대둔)에게 보고하고자 하였으나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部曲將 田泓이 물에 잠수하여 은밀히 갈 것을 청하자, 사현이 그를 보냈는데 秦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혔다. 진나라 사람은 전홍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남쪽의 晉나라 군대가 이미 패했다고 말하게 하자, 전홍은 거짓으로 이것을 허락하였다. 얼마 후에 전홍이 성안에 고하기를 “남쪽의 援軍이 장차 이를 것이니, 힘을 내라.” 하니, 진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彭超가 輜重을 留城에 두었는데注+① 留城은 留縣의 城이니, 漢나라 이래로 彭城郡에 소속하였다. 사현이 ‘군대를 파견하여 留城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소문을 퍼트리니, 팽초가 이 말을 듣고 팽성의 포위를 풀고서 군대를 거느리고 유성으로 돌아가 輜重을 보호하였다.
그러자 대둔이 군대를 거느리고 사현에게 달려가니, 팽초가 마침내 팽성을 점거하고서 그곳에 徐褒를 남겨두어 지키게 하고 남쪽으로 盱眙를 공격하였으며, 俱難이 淮陰을 점령하고서 邵保를 그곳에 남겨두어 지키게 하였다.注+② 淮陰縣은 淮水와 50보 거리에 있으니,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淸河口와 마주하고 있다. 나아가면 山東 지방을 엿볼 수 있고, 안으로는 장강 연안의 방위가 될 수 있으니, 晉나라와 宋나라가 중요한 진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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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3월에 〈晉나라(東晉)이〉 조령을 내려 재정의 사용을 줄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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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렸다. “국경에 근심이 많고 농사는 흉년이 들어서 供御하는 물건을 되도록 검약함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황실의 9親에 供給하는 물자와 여러 관원의 녹봉을 임시로 반으로 줄이게 하고,注+① 九親은 바로 九族이다. 모든 부역의 비용의 경우 軍國의 중대한 일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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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 4월에 秦나라(前秦)가 〈晉나라(東晉)의〉 魏興을 함락하니, 魏興太守 吉挹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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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秦나라 韋鍾이 魏興을 함락하니, 吉挹이 칼을 가져다가 자살하려고 하자, 左右의 부하들이 그 칼을 빼앗았다. 마침 秦나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사로잡으니, 길읍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다가 죽었다.
丁彥遠은 뒤에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였고, 吉祖沖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죽었으니, 晉나라에는 忠臣이 어찌 이리도 많은가.” 하였다.注+① 孟威는 周虓의 字이고, 彦遠은 丁穆의 자이고, 祖沖은 吉挹의 자이다.
길읍의 參軍인 史潁이 도망하여 晉나라 조정으로 돌아오니, 조정에서 길읍이 죽을 때 손수 쓴 상소문을 얻고서 조령을 내려 길읍에게 益州刺史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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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5월에 秦나라(前秦)가 盱眙를 함락하고서 전진하여 三阿를 포위하니, 〈晉나라(東晉)의〉 謝玄이 연달아 싸워 이들을 패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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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秦나라 俱難과 彭超가 盱眙를 함락하여 内史 毛璪之를 사로잡고注+① 璪는 음이 早이다. 마침내 田洛을 三阿에서 포위하니, 이곳은 廣陵과 100리 떨어진 곳이었다.注+② 田洛은 幽州刺史이니, 晉나라가 幽州, 冀州, 靑州, 幷州 네 州를 長江 북쪽 지역에 僑置하였다. 胡三省이 말하였다. “三阿는 바로 지금의 寶應軍이다.” 〈晉나라〉 朝廷이 크게 놀라 강가에 임하여 수비병을 진열하였다.
謝玄이 廣陵에서 三阿를 구원하니, 구난과 팽초가 싸우다가 패하고서 후퇴하여 盱眙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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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6월에 謝玄이 俱難과 彭超를 공격하였는데, 〈구난과 팽초가〉 또다시 패하고서 후퇴하여 淮陰에 주둔하였다. 사현이 何謙을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潮水를 타고 淮水를 거슬러 올라가 밤에 회수의 교각을 불태우니,注+① 〈‘淮橋’는〉 秦나라가 淮水에 다리를 만들어 병사들을 건너게 한 것이다. 구난과 팽초는 후퇴하여 회수 북쪽에 주둔하였다.
사현과 하겸 등이 함께 추격하여 君川에서 싸워 또다시 그들을 대파하니,注+② 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盱眙縣 북쪽 6리 지점에 君山이 있으니, 君川은 아마도 君山의 냇물일 것이다.” 구난과 팽초가 북쪽으로 달아나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사현이 廣陵으로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徐州刺史의 직위를 더 겸임하게 하였다. 秦王 符堅이 크게 노하여 팽초를 불러 廷尉에게 회부하여 그 죄를 심리하게 하니, 팽초는 자살하고 구난은 삭탈관작되어 평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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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謝安이 정승이 되었을 적에 秦나라(前秦) 사람이 여러 번 쳐들어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사안은 매번 온화하고 안정된 방법으로 진정시키고, 정사를 할 적에는 되도록 큰 綱領만 살피고 세세한 것까지 살피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사안을
역주1秦陷襄陽……朱序以歸 :
“執은 좋게 여긴 말이니, 힘에 굴복하여 잡힌 것이다.[執 善辭也 力屈而被執也]” ≪書法≫
역주2周孟威는……않았고 :
본서 제21권 하 寧康 원년(373) 11월 기사에 보인다. 周虓가 前秦에 항복한 후에 符堅을 볼 때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역주3王導 :
晉 元帝가 琅邪王으로 있을 때 천하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인재들을 거두어 모아서 국사를 상의할 것을 낭야왕에게 권유했고, 원제가 帝位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으며, 원제․明帝․成帝를 섬기면서 出將入相하여 많은 공훈을 세웠던 인물이다.(≪晉書≫ 권65 〈王導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