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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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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普通五年이요 魏正光五年이라
春三月 魏遣臨淮王彧하여 督諸軍하여 討拔陵이러니
夏四月 高平敇勒胡琛反하고 拔陵陷武川懷朔鎭하니
五月 彧兵敗績이라 魏復遣都督李崇하여 討之하다
魏以臨懷王彧으로 討破六韓拔陵注+① 彧, 譚之曾孫也.이러니 四月 高平鎭敇勒酋長胡琛反하여 攻高平鎭하여 以應拔陵하니
魏將盧祖遷擊破之한대 琛北走하다
衛可孤攻懷朔鎭하여 經年 外援不至 楊鈞使賀拔勝으로 詣臨淮王彧하여 告急할새
勝募敢死少年十餘騎하여 夜伺隙潰圍出하니 賊追及之어늘 勝曰 我賀拔破胡也라한대 賊不敢逼注+② 破胡, 勝字.하더라
勝見彧說之曰 懷朔被圍하여 旦夕淪陷이어늘 大王今頓兵不進하니 懷朔若陷이면 則武川亦危하여 賊之銳氣百倍리니 雖有良平이라도 不能爲大王計矣리라하니 彧許爲出師하다
勝還하여 復突圍而入이러니 鈞復遣勝出覘武川하니 武川已陷이어늘
勝馳還하니 懷朔亦潰 勝父子俱爲可孤所虜하다
五月 彧與拔陵戰於五原하여 兵敗하니 賊勢日盛이라 魏主引群臣問計한대 尙書元脩義請遣重臣하여 督軍鎭恒朔以捍寇注+① 脩義, 天賜之子也.어늘
魏主曰 去歲 李崇求改鎭爲州하니 開鎭戶非冀之心하여 致有今日之患이나 然崇貴戚重望이요 器識英敏하니 意欲還遣崇行하노니 何如오하니 群臣皆以爲然注+② 崇, 文成皇后兄誕之子, 歷方面, 有時望.한대
乃加崇使持節北討大都督하고 命將軍崔暹廣陽王深하여 皆受節度注+③ 深, 嘉之子也.하다
司馬公曰 李崇之表 所以銷禍於未萌이요 制勝於無形이어늘
魏肅宗旣不能用하고 及亂生之日하여 曾無愧謝之言하고 乃更以爲崇罪하니 彼不明之君 烏可與謀哉아하다
魏秦州莫折大提 反陷高平이러니 大提死 子念生代領其衆이어늘 魏遣兵討之하다
魏自破六韓拔陵反으로 二夏幽涼 寇盗蜂起注+① 二夏, 夏州及東夏州也.
秦州刺史李彦 殘虐城内하니 薛珍等殺之하고 推其黨莫折大提하여 爲秦王注+② 莫折, 虜複姓, 大提, 其名.이어늘 魏遣雍州刺史元志討之하다
南秦州人亦殺刺史崔遊하여 以城應大提하니 大提遣其黨하여 襲高平克之하고 殺鎭將行臺러라
大提尋卒하니 子念生自稱天子어늘 魏遣尙書元脩義하여 爲西道行臺하여 帥諸將討之하다
秋七月 魏將軍崔暹 討拔陵하여 戰于白道라가 敗績하다
崔暹 違李崇節度하여 與拔陵으로 戰于白道라가 大敗注+① 武川鎭北有白道谷, 谷口有白道城, 自城北出有高阪, 謂之白道嶺.하다 拔陵并力攻崇하니 崇力戰不能禦하여 引還雲中이어늘
廣陽王深上言호되 先朝都平城 以北邊爲重하여 盛簡親賢하여 擁麾作鎭하고 配以高門子弟하여 以死防遏하니
非唯不廢仕宦이라 乃更獨得復除하니 當時人物 忻慕爲之注+② 高門子弟, 謂其先世與魏同起於代北者. 復除, 不徭賦也.러니
太和中 李沖用事하여 涼州士人 悉免廝役하고 帝鄉舊門 仍防邊戍하니
本鎭驅使 遂隔淸途하니 自非得罪當世 莫肯與之爲伍注+③ 李寶自敦煌入朝于魏, 至子沖親貴, 厚其鄉人, 故涼土之人悉免廝役.하고 又以或多逃逸이라하여 乃峻邊兵之格하여 鎭人 不聽浮遊在外하니이다
於是 少年 不得從師하고 長者 不得遊宦하여 獨爲匪人이라 言之流涕니이다
自定鼎伊洛으로 邊任益輕하여 唯底滯凡才 乃出爲鎭將하여 轉相模習하여 專事聚斂하고
或諸方姦吏 犯罪配邊 爲之指蹤하여 政以賄立하니 邊人無不切齒러니
及阿那瓌 背恩縱掠 發奔命追之한대 十五萬衆 度沙漠하여 不日而還하니 邊人見之하고 遂輕中國注+① 不日, 謂不多日.이라
李崇求改鎭爲州하니 抑亦先覺이어늘 朝廷未許하고 而拔陵爲亂하니
此段之舉 指望銷平이로되 而崔暹隻輪不返하여 將士之情 莫不解體
今日所慮 非止西北이라 將恐諸鎭尋亦如此 天下之事 何易可量이리오
書奏不省하고 詔徴崔暹하여 繫廷尉러니 暹賂元叉하여 卒得不坐하다
莫折念生 寇魏東益州하여 不克하다
莫折念生 遣其都督楊伯年等하여 攻仇鳩河池二戍注+① 胡三省曰 “河池即今鳳州河池縣, 有河池水. 仇鳩亦當與池相近.어늘 東益州刺史魏子建 擊破之注+② 子建, 蘭根之族兄也.하다
東益州 本氐王楊紹先之國이라 將佐以城民勁勇하고 二秦反者 皆其族類이라하여 請收其器械注+③ 通典註云 “秦州理天水, 今上邽縣, 南秦州理洛谷城, 今天水郡伏羌縣.”한대
子建曰 城民數經行陳하니 撫之 足以爲用이요 急之則腹背爲患이라하고
乃悉召而慰諭之러니 旣而漸分其父兄子弟하여 外戍諸郡하니 内外相顧하여 卒無叛者러라
八月 梁徐州刺史成景儁 拔魏童城注+① 童城, 即下邳僮縣城也.하다
◑ 魏都督元志討莫折念生하여 戰于隴口라가 敗績注+① 隴口, 隴坻之口也.하다
魏散騎侍郎李苗 上書曰 凡食少兵精이면 利速戰하고 粮多卒衆이면 宜持久
今隴賊猖狂한대非有素蓄하니 其勢在於疾攻이라 遲則人情離沮
故高壁深壘者 王師全制之策也로되 但天下久泰하여 人不曉兵이라 奔利不相待하고 逃難不相顧하여
將無法令하고 士非教習이라 不思長久之計하여 各有輕敵之心하니
如令隴東不守하여 汧軍敗散하면 則兩秦遂彊하고 三輔危弱하여 國之右臂 於斯廢矣注+① 汧軍, 謂元志之軍也. 汧在隴阪之東.리니
宜勒大將하여 堅壁勿戰하고 别命偏裨하여 帥精兵數千하여 出麥積崖하여 以襲其後 則汧岐之下 群妖自散矣注+② 胡三省曰 “麥積崖, 在今秦州天水縣東百里, 狀如麥積, 故名.”라한대
以苗爲統軍하여 與别將淳于誕으로 俱出梁益이러니 未至 莫折念生 遣其弟天生하여 將兵下隴이어늘
元志與戰兵敗하여 東保岐州注+③ 魏岐州治雍城.하다
魏改鎭爲州하다
東西部敕勒 皆叛魏하여 附於拔陵이어늘 魏主始思李崇元深之言하여 詔諸州鎭軍貫하여 非有罪配隷者어든 皆免爲民하고 改鎭爲州注+① 貫, 籍也.하다
魏秀容人乞伏莫于等反이어늘 酋長爾朱榮 討平之注+① 地形志 “永興二年, 置秀容郡, 屬肆州”하다
羽徤之玄孫也 御衆嚴整이러니 四方兵起 榮陰散其畜牧資財하여 招合驍勇하고 結納豪傑하니
於是 侯景司馬子如賈顯度段榮竇泰皆往依之注+① 顯度, 顯智之兄也.하다
九月 梁取魏睢陵荆山하고 襲壽陽不克하다
成景儁 拔魏睢陵하고 趙景悅 圍荆山注+① 五代志 “鍾離郡塗山縣, 古當塗也, 後齊置荊山郡.”하고 裴邃 帥騎三千하고 襲壽陽하여 夜斬關而入하여 克其外郭이러니
魏揚州刺史長孫稚禦之하여 一日九戰한대 後軍失道不至 邃引兵還하고
别將擊魏淮陽注+② 此梁所遣別將也, 非裴邃所部.이어늘 魏使行臺酈道元都督河間王琛으로 救壽陽하고 安樂王鑑으로 救淮陽하니 梁兵敗績注+③ 道元, 範之子也. 鑑, 顯祖弟, 長樂之孫也.하다
魏涼州亂이어늘 刺史宋頴 以吐谷渾으로 討平之하다
魏涼州幢帥于菩提 執刺史宋頴하고 據州反注+① 柔然之法, 百人爲幢, 幢有帥.이어늘 頴密求救於吐谷渾한대 伏連籌自將救涼州하니
于菩提棄城走어늘 追斬之하니 城民復推頴爲刺史하다
冬十月 梁取魏建陵曲木琅邪等城하다
裴邃攻魏建陵城克之하여 拔曲木注+① 曲木當作曲沭. 水經注 “沭水過建陵縣故城東, 又南逕陵山西, 魏立大堰遏水西流, 兩瀆之會, 置城防之, 曰曲沭戍.” 沭, 食聿切.하고 將軍彭寳孫 拔琅邪檀丘하다
裴邃拔狄城甓城하고 進屯黎漿注+② 水經註 “肥水自荻丘過漢九江成德縣故城西, 王莽更曰平阿, 又北入芍陂.”하니 魏東海太守以司吾城降注+③ 漢東海郡司吾縣之故城也.하다
將軍曹世宗 拔曲陽秦墟하니 魏守將多棄城走注+④ 水經注 “洛水逕漢淮南郡曲陽故城東.” 應劭曰 “縣在淮曲之陽. 洛水又北歴秦墟, 下注淮, 謂之洛口.”러라
魏營州人就德興反이어늘 魏遣兵討之하여 不克注+① 就, 姓也.하다
◑ 胡琛寇魏豳夏北華三州어늘 魏遣兵討之注+① 魏高祖太和十五年, 置東秦州於杏城, 後改爲北華州, 領中部․敷城郡.하다
◑ 魏朔方胡反이어늘 夏州刺史源子雍討平之하다
魏朔方胡反하여 圍夏州刺史源子雍하니 城中食盡이로되 衆無二心이라
子雍欲自出求粮할새 留其子延伯하여 守統萬注+① 夏州, 治統萬城.한대 將佐皆曰 不若父子俱去니라
子雍泣曰 吾世荷國恩하니 當畢命此城이로되 但無食可守 故欲往東州하여 爲諸君營數月之食하니 若幸而得之 保全必矣注+② 東州, 謂東夏州也. 爲, 去聲. 下所爲․爲陳同.리라
乃帥羸弱하고 詣東夏州運粮할새 延伯與將佐 哭而送之하더라 行數日 爲胡帥曹阿各拔所擒이라
子雍潛遣人하여 齎書敕城中호되 努力固守하라
延伯曰 吾父吉凶 未可知 方寸焦爛이로되 但奉命守城이라 所爲者重하니 不敢以私害公이니 諸君 幸得此心하라 於是 衆感其義하여 莫不奮厲이러라
子雍雖被擒이나 胡人常以民禮事之 子雍爲陳禍福한대 賊衆遂降하다
子雍見行臺北海王顥하고 具陳諸賊可滅之狀注+③ 顥, 詳之子也.한대 顥使爲先驅러라
東夏闔境皆反이라 子雍轉鬪而前하여 九旬之中 凡數十戰하여 遂平東夏州하고 徴稅粟以饋統萬하니 二夏由是獲全하다 子雍 懷之子也
魏以費穆爲朔州刺史하다
魏廣陽王深上言호되 今六鎭盡叛하여 高車二部亦與之同하니 以此疲兵擊之 必無勝理注+① 高車自阿伏至羅與窮奇分爲二部, 所謂東․西部敕勒也. 不若選練精兵하여 守恒州諸要하여 更爲後圖注+② 諸要, 謂要衝之地.라하고 遂與李崇으로 引兵還平城이라
崇謂諸將曰 雲中者 道之衝이요 賊之咽㗋 若此地不全이면 則并肆危矣 當留一人鎭之 誰可者 衆舉費穆한대 崇乃請穆爲朔州刺史注+③ 請, 奏請也. 時雲中已改爲雲州, 朔當作雲.하다
◯ 賀拔度拔父子及宇文肱糾合鄉里豪傑하여 襲衛可孤殺之러니 度拔尋與鐡勒戰死하다 逸豆歸之玄孫也러라
魏北討都督李崇免하다
李崇引祖瑩爲長史러니 廣陽王深 奏瑩詐增首級하고 盗没軍資라한대 瑩坐除名하고 崇亦免官削爵徵還하니 深遂専總軍政하다
十一月 莫折念生 遣其弟天生하여 陷魏岐州하고 殺都督元志하다
◑ 蜀賊寇魏雍州어늘 討平之注+① 蜀賊者, 蜀人之徙關中者也, 乘魏亂起而爲盜, 因謂之蜀賊.하다
◑ 十二月 梁復取三關하고 圍魏郢州하여 不克하다
◑ 魏汾州胡反하다
◑ 魏秦州平하다
魏魏子建招諭南秦諸氐하여 稍稍降附하니 遂復六郡十二戍 魏以子建爲行臺하여 梁巴秦益 皆受節度하다
是歲 周捨坐事免하니 朱异代掌機密이라 軍旅謀議方鎭改易朝儀詔敕 皆典之하다
异多藝能하고 精力敏贍하니 梁主任之하더라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普通 5년이고, 北魏 肅宗 孝明帝 元詡 正光 5년이다.
【綱】 봄 3월에 北魏에서 臨淮王 元彧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破六韓拔陵을 토벌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高平鎭에서 敇勒 酋長 胡琛이 반란을 일으켰고, 파륙한발릉이 武川鎭과 懷朔鎭을 함락하였다.
5월에 원욱의 군대가 패배하자, 북위에서 다시 都督 李崇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目】 北魏에서 臨懷王 元彧에게 破六韓拔陵을 토벌하도록 하였다.注+① 元彧은 元譚의 증손이다. 여름 4월에 高平鎭의 敇勒 酋長인 胡琛이 반란을 일으켜 고평진을 공격하여 파륙한발릉에게 호응하였다.
북위의 장수 盧祖遷이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호침이 북쪽으로 달아났다.
衛可孤가 懷朔鎭을 공격하여 한 해가 지났는데도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楊鈞이 賀拔勝을 시켜서 임회왕 원욱에게 가서 위급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하발승이 죽음을 각오한 젊은 병졸 10여 騎를 모집하여 밤에 틈을 엿보다가 포위를 뚫고 나가자, 적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뒤쫓아오니, 하발승이 말하기를 “나는 賀拔破胡이다.”라고 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注+② 破胡는 賀拔勝의 字이다.
하발승이 원욱을 만나 그를 설득하기를 “회삭진이 포위를 당하여 조만간에 함락될 지경인데, 大王께서는 지금 군대를 주둔한 채 전진시키지 않으니, 회삭진이 만약 함락되면 무천진 역시 위태로워져서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백배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비록 張良과 陳平이 있다 하더라도 대왕을 위해 계책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원욱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賀拔勝賀拔勝
하발승이 돌아와서는 다시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는데, 양균이 다시 하발승을 보내어 나가서 무천진의 상황을 엿보게 하니, 무천진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하발승이 말을 달려 돌아오니, 회삭진 역시 패배하여 하발승 부자가 함께 위가고의 포로가 되었다.
【目】 5월에 元彧이 破六韓拔陵과 五原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군사들이 패배하니, 적들의 기세가 날마다 올랐다. 魏主(元詡)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계책을 물었는데 尙書 元脩義가 重臣을 보내어 군사들을 독려하고 恒州와 朔州에 鎭守하여 적들을 막자고 요청하였다.注+① 元脩義는 元天賜의 아들이다.
魏主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李崇이 鎭을 고쳐서 州로 삼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鎭의 府戶들의 마음에 분에 넘치는 바람을 일으켜서 지금의 우환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숭은 貴戚인데다가 신망이 두텁고 도량과 식견이 있으며 영민하니, 생각건대 다시 이숭을 파견하여 출정시키려고 하는데 어떠하오.”라고 하니, 신하들이 모두 동의하였다.注+② 李崇은 文成皇后의 오빠 李誕의 아들로, 여러 방면을 역임하고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이숭에게 使持節 北討大都督의 직함을 덧붙여주고 장군 崔暹과 廣陽王 元深에게 명을 내려 모두 이숭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注+③ 元深은 元嘉의 아들이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李崇의 表文은 재앙이 싹트기 전에 없애버리려는 것이었으며, 형세가 이루어지기 전에 승세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北魏의 肅宗(元詡)은 이미 채택하지 못하였고, 난리가 일어난 날에 이르러서는 부끄러워하거나 사과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가 마침내 다시 이숭의 죄라고 여겼으니, 저 명철하지 못한 군주가 어찌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하겠습니까.”
【綱】 北魏의 秦州에서 莫折大提가 반란을 일으켜 高平을 함락하였다. 막절대제가 죽자 아들 莫折念生이 그를 대신해 무리들을 통솔하였는데, 북위에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目】 北魏에서는 破六韓拔陵이 반란을 일으키면서부터 夏州․東夏州, 幽州, 涼州에서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注+① “二夏”는 夏州와 東夏州이다.
秦州刺史 李彦이 성안을 잔혹하고 포학하게 다스리자, 薛珍 등이 그를 죽이고 그들의 무리 중에 莫折大提를 추대하여 秦王으로 삼았다.注+② 莫折은 오랑캐의 複姓이고, 大提는 그의 이름이다. 북위에서 雍州刺史 元志를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南秦州의 백성들도 刺史 崔遊를 죽이고서 城을 가지고 막절대제에게 호응하였다. 막절대제가 그의 무리를 보내어 高平을 습격하게 하여 승리를 거두고 鎭將과 行臺를 죽였다.
막절대제가 얼마 뒤에 卒하니, 아들 莫折念生이 스스로 천자를 칭하였는데, 北魏에서 尙書 元脩義를 보내어 그를 西道行臺로 삼아 諸將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北魏의 장군 崔暹이 破六韓拔陵을 토벌하여 白道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였다.
【目】 崔暹이 李崇의 지휘를 위반하고 破六韓拔陵과 白道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대패하였다.注+① 武川鎭의 북쪽에 白道谷이 있는데, 골짜기 입구에 白道城이 있으며, 성 북쪽에서 솟아나온 높은 비탈이 있으니, 白道嶺이라고 한다. 파륙한발릉이 힘을 합하여 이숭을 공격하니, 이숭이 힘껏 싸웠으나 막아내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雲中으로 돌아갔다.
廣陽王 元深이 상주하기를 “이전 조정에서는 平城에 도읍하였을 적에 북쪽 변방을 중요하게 여겨 친족이나 뛰어난 인재를 많이 선발하여 깃발을 잡고 鎭將을 삼았고, 훌륭한 집안의 자제들을 배치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仕宦의 길을 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역과 부세를 면제해주었으므로 당시 인물들이 그 직책을 기뻐하고 사모하였습니다.注+② “高門子弟”는 이전 시대에 北魏와 함께 代北에서 일어난 자들을 말한다. “復除”는 徭役과 賦稅를 면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에 李沖이 조정에서 권력을 쥐자 涼州의 士人들이 모두 廝役을 면제받았고, 황제의 고향에 살던 오래된 가문들은 여전히 변방의 수비를 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세에 죄를 지은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과 더불어 隊伍에 서려고 하지 않고,注+③ 李寶가 敦煌에서 北魏로 들어와 조회하였는데, 아들 李沖이 황제와 가까워지고 귀해지면서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후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涼州 지역 사람들이 모두 廝役을 면제받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도망친다고 하여 마침내 邊鎭의 군사들에게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변진의 군사들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目】 이에 젊은 사람은 〈외지로 나가〉 스승을 모실 수 없고, 장성한 자들은 벼슬을 구하지 못하여 다만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니, 말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伊洛(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이래로 邊鎭의 직임은 더욱 경시되었기에 오직 적체되어 있던 평범한 인재가 마침내 나가서 鎭將이 되어 서로서로 본받아서 재물을 모으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간혹 여러 지방의 간사한 관리들이 죄를 저질러서 변방에 배치되면 그들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 지휘하여 政事가 뇌물로 결정되니 邊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郁久閭阿那瓌가 은혜를 저버리고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자, 군사들을 출동시키는 명령을 내려 그를 추격하였는데, 15만의 무리가 사막을 건너가서 며칠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으니, 邊鎭에 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드디어 中原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注+① “不日”은 많지 않은 날을 말한다.
李崇이 鎭을 고쳐서 州로 삼자고 요청한 것은 역시 먼저 깨달아서 그랬던 것이지만,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破六韓拔陵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번에 군사를 출동한 것은 소탕하여 평정하기를 희망한 것인데, 崔暹이 〈토벌하러 출정했다가〉 한 대의 수레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장수와 사졸들의 마음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지금의 우려는 서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鎭도 얼마 뒤에 이렇게 될까 두려우니, 천하의 일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글이 상주되었지만 임금은 살펴보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최섬을 불러들여 廷尉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최섬이 元叉에게 뇌물을 바쳐 결국에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綱】 莫折念生이 北魏의 東益州를 침략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다.
【目】 莫折念生이 都督 楊伯年 등을 파견하여 仇鳩戍와 河池戍를 공격하자,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河池는 지금의 鳳州 河池縣이니, 河池水가 있다. 仇鳩도 河池와 서로 가까울 것이다.” 하였다. 東益州刺史 魏子建이 그들을 격파하였다.注+② 魏子建은 魏蘭根의 族兄이다.
동익주는 본래 氐王 楊紹先의 나라였는데, 〈위자건의〉 장수와 보좌들이 城에 사는 백성들이 날래고 용감하며, 秦州와 南秦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모두 그들과 같은 종족이라 생각하여 그들의 무기를 수거할 것을 요청하였다.注+③ ≪通典≫의 註에 이르기를 “秦州의 治所는 天水이니, 지금의 上邽縣이고, 南秦州의 治所는 洛谷城이니, 지금의 天水郡 伏羌縣이다.” 하였다.
위자건이 말하기를 “성안에 사는 백성들이 자주 전쟁을 겪었으니, 그들을 慰撫하면 충분히 쓸 수 있고, 그들을 재촉하면 앞뒤에서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성안의 백성들을 모두 불러 그들을 위로하였는데, 얼마 뒤에 점차 그들의 父兄과 子弟들을 분산시켜서 밖으로 보내어 여러 郡을 지키게 하고, 안팎에서 서로 돌아보아 마침내 배반하는 사람이 없었다.
【綱】 8월에 梁나라 徐州刺史 成景儁이 北魏의 童城을 함락시켰다.注+① 童城은 바로 下邳의 僮縣城이다.
【綱】 北魏의 都督 元志가 莫折念生을 토벌하여 隴口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였다.注+① 隴口는 隴坻의 입구이다.
【目】 北魏의 散騎侍郎 李苗가 상서하기를 “무릇 식량이 적고 군사들이 정예병이면 속전속결이 유리하고, 양식이 많고 병졸이 많으면 마땅히 지구전을 펼쳐야 합니다.
지금 隴 지역에 도적들이 창궐하고 있는데 평소 비축된 식량이 없으니, 그 형세는 신속히 공격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공격을 늦추면 병사들의 마음이 저상되어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높이 쌓아 지구전을 펼치는 것은 王師가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계책이지만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사람들은 전쟁을 모르기에, 이익을 다투어 서로 기다려주지 않으며 어려움에 처하면 도망쳐서 서로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장수는 法令이 없고 병졸들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각자 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隴 동쪽 지역을 지키지 못하여 汧의 군사가 패배하여 흩어지게 되면, 秦州와 南秦州의 莫折念生이 마침내 강성해지고 三輔 지역은 위태해지고 약해져서 나라의 오른팔이 이에 버려질 것입니다.注+① 汧의 군대는 元志의 군대를 말한다. 汧은 隴阪의 동쪽에 있다.
마땅히 대장에게 명을 내려 성벽을 견고히 하고 싸우지 말게 하고, 별도로 偏裨들에게 명하여 정예병 수천 명을 인솔하여 麥積崖로 나가서 그들의 후방을 습격하게 하면, 汧ㆍ岐의 아래에 있는 적군들이 절로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麥積崖는 지금 秦州 天水縣의 동쪽 1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모양이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이묘를 統軍으로 삼아 别將 淳于誕과 함께 梁州와 益州로 출동하게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막절염생이 그의 동생인 莫折天生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隴 지역을 함락하였다.
元志가 그와 더불어 싸워서 그의 군대가 패배하여 동쪽으로 가서 岐州를 보존하였다.注+③ 北魏의 岐州는 雍城에 治所를 두었다.
【綱】 北魏에서 鎭을 고쳐 州로 만들었다.
【目】 東部와 西部의 敕勒이 모두 北魏를 배반하여 破六韓拔陵에게 귀순하자, 魏主(元詡)가 비로소 李崇과 元深의 말을 생각하고는 조서를 내리기를 “여러 州와 鎭의 軍籍에 있는 사람들 중에 죄를 짓고 배속되어 服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면제시켜 평민으로 삼도록 하라.”라고 하고, 鎭을 고쳐서 州로 만들었다.注+① 貫은 장부이다.
【綱】 北魏 秀容 사람 乞伏莫于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酋長 爾朱榮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注+① ≪魏書≫ 〈地形志〉에 “永興 2년(410)에 秀容郡을 설치하여 肆州에 소속시켰다.” 하였다.
【目】 爾朱榮은 爾朱羽徤의 玄孫이다. 무리들을 통제할 적에 엄정하였는데,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이주영은 몰래 그가 축적한 재산을 나누어 날래고 용감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호걸들과 교분을 맺었다.
太原王 爾朱榮太原王 爾朱榮
그리하여 侯景, 司馬子如, 賈顯度, 段榮, 竇泰가 모두 가서 그에게 의지하였다.注+① 賈顯度는 賈顯智의 형이다.
【綱】 9월에 梁나라가 北魏의 睢陵과 荆山을 취하고 壽陽을 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目】 成景儁이 北魏의 睢陵을 함락하고 趙景悅은 荆山을 포위하였으며,注+① ≪五代志≫에 “鍾離郡 塗山縣은 옛날의 當塗이니, 後齊(北齊) 때에 荊山郡을 두었다.” 하였다. 裴邃는 기병 3천 명을 인솔하고 壽陽을 습격하여 밤에 관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 바깥 성곽을 점령하였다.
북위의 揚州刺史 長孫稚가 방어하여 하루에 9차례 싸웠으나 後軍이 길을 잃고 도달하지 못하자, 배수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别將이 북위의 淮陽을 공격하자,注+② 이는 梁나라에서 보낸 別將이니, 裴邃의 부하가 아니다. 북위에서는 行臺 酈道元과 都督 河間王 元琛을 시켜서 수양을 구원하게 하고, 安樂王 元鑑을 시켜서 淮陽을 구원하게 하니, 梁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注+③ 酈道元은 酈範의 아들이다. 元鑑은 元顯祖의 아우이고, 元長樂의 손자이다.
【綱】 北魏의 涼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刺史 宋頴이 吐谷渾(토욕혼)을 데리고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北魏의 涼州幢帥 于菩提가 刺史 宋頴을 체포하고 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注+① 柔然의 법에 100명을 幢으로 삼고, 幢에 帥를 두었다. 宋頴이 은밀히 吐谷渾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慕容伏連籌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涼州를 구원하였다.
우보리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니 城의 백성들이 다시 송영을 추대하여 刺史로 삼았다.
【綱】 겨울 10월에 梁나라가 北魏의 建陵, 曲木, 琅邪 등의 城을 탈취하였다.
【目】 裴邃가 北魏의 建陵城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曲木을 함락시켰으며,注+① 曲木은 曲沭이 되어야 한다. ≪水經註≫에 “沭水는 建陵縣 故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陵山의 서쪽을 경유하는데, 北魏에서 큰 방죽을 세워 물을 막아 서쪽으로 흐르게 하였으니,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城을 세워 방어하게 하고 이름을 曲沭戍라 하였다.” 하였다. 沭은 食聿의 切이다. 將軍 彭寳孫이 琅邪와 檀丘를 함락하였다.
배수가 狄城과 甓城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黎漿에 주둔하니,注+② ≪水經註≫에 “肥水는 荻丘에서 나와 漢나라 때의 九江 成德縣 故城을 경유하니, 王莽이 고쳐서 平阿라고 하였고, 또 북쪽으로 가서 芍陂로 유입된다.” 하였다. 북위의 東海太守가 司吾城을 가지고 항복하였다.注+③ 〈“司吾城은”〉 漢나라 때의 東海郡 司吾縣의 故城이다.
將軍 曹世宗이 曲陽과 秦墟를 함락하였는데, 북위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들이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注+④ ≪水經註≫에 “洛水는 漢나라 때의 淮南郡 曲陽 故城 동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應劭가 말하기를 “曲陽縣은 淮曲의 북쪽에 있다. 洛水는 또다시 북쪽으로 秦墟를 지나서 淮水로 내려가는데, 그곳을 洛口라고 한다.” 하였다.
【綱】 北魏의 營州 사람 就德興이 반란을 일으키자, 북위에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注+① 就는 성씨이다.
【綱】 胡琛이 北魏의 豳州, 夏州, 北華州 세 지역을 침략하자, 북위에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다.注+① 北魏 高祖(元宏) 太和 15년(491)에 杏城에 東秦州를 설치하였고, 뒤에 고쳐서 北華州라고 하고 中部郡과 敷城郡을 관할하게 하였다.
【綱】 北魏 朔方의 胡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夏州刺史 源子雍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北魏 朔方의 胡族이 반란을 일으켜서 夏州刺史 源子雍을 포위하니, 성안에서는 군량이 다 떨어졌지만, 무리들이 배반할 마음이 없었다.
원자옹이 직접 나가서 양식을 구하려고 할 적에 그의 아들 元延伯을 남겨두어 統萬을 지키게 하였는데,注+① 夏州는 統萬城에 治所를 두었다. 그의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자옹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이 城을 목숨으로 지켜야 한다. 다만 식량이 없으면 지킬 수 없기에 東州로 가서 여러 諸君들을 위하여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을 마련하려고 하니, 만약 다행히 군량을 얻는다면 반드시 성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② 東州는 東夏州를 말한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所爲”와 “爲陳”의 爲도 동일하다.
마침내 수척하고 약한 군사들을 데리고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동하주로 갈 적에, 원연백이 장수와 보좌들과 함께 통곡하며 그들을 전송하였다. 행군을 한 지 며칠이 지나서 胡族의 장수 曹阿各拔에게 사로잡혔다.
원자옹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가지고 가서 성안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전하여 힘써 굳게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원연백이 말하기를 “저희 부친의 생사를 모르니 가슴이 타지만, 명령을 받들고 성을 지키는 처지라 맡은 바가 막중하니, 감히 사사로운 일로 公務를 헤쳐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리들이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원자옹이 비록 사로잡혔지만 胡人들이 항상 백성이 윗사람을 대하는 禮로 그를 섬겼는데, 원자옹이 그들을 위해 禍와 福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적들의 무리가 드디어 항복하였다.
원자옹이 行臺인 北海王 元顥를 만나 여러 적들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을 갖추어 진술하였는데,注+③ 元顥는 元詳의 아들이다. 원호가 그에게 선봉에 서도록 하였다.
당시에 東夏州의 모든 지역에서 모두 반란을 일으켜서 원자옹이 이리저리 전투하며 전진하였고, 90일 동안에 수십 차례 전투를 벌여 마침내 동하주를 평정하고, 稅粟을 징수하여 統萬에 보내니, 夏州와 東夏州는 이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었다. 원자옹은 源懷의 아들이다.
【綱】 北魏에서 費穆을 朔州刺史로 삼았다.
【目】 北魏 廣陽王 元深이 상주하기를 “지금 六鎭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高車의 두 部도 그들과 동조하고 있으니, 이렇게 지친 군사들을 데리고 그들을 공격하면 필시 승리할 리가 없습니다.注+① 高車는 阿伏至羅가 阿伏窮奇와 함께 나뉘어 두 部가 된 뒤로부터 이른바 東部와 西部의 敕勒이라 하였다. 정예의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시켜서 恒州에 있는 여러 요충지를 지키다가, 다시 후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고,注+② “諸要”는 요충지를 말한다. 드디어 李崇과 군사를 이끌고 平城으로 돌아갔다.
이숭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雲中은 白道의 요충지이며 적들의 목구멍에 해당하니, 만약 이 땅이 온전하지 못하면 并州와 肆州가 위험하다. 마땅히 한 사람을 남겨서 그곳을 지켜야 하니, 누가 좋겠는가.”라고 하니, 무리들이 費穆을 천거하자, 이숭이 마침내 비목을 朔州刺史로 삼을 것을 요청하였다.注+③ 請은 주청하는 것이다. 당시에 雲中이 이미 雲州로 바뀌었으니, 朔은 雲이 되어야 한다.
【目】 賀拔度拔 父子와 宇文肱이 향리의 호걸들을 규합하여 衛可孤를 습격하여 죽였는데, 하발도발이 얼마 뒤에 鐡勒과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우문굉은 宇文逸豆歸의 玄孫이다.
【綱】 北魏에서 北討都督 李崇을 면직시켰다.
【目】 李崇이 祖瑩을 발탁하여 長史로 삼았다. 廣陽王 元深이 조영이 허위로 首級을 늘리고 군용 물자를 사적으로 빼돌린 일을 상주하였는데, 조영은 죄에 걸려 제명되고, 이숭 역시 면직되어 작위가 삭탈되어 부름을 받고 돌아오니, 마침내 원심이 전적으로 軍政을 총괄하였다.
【綱】 11월에 莫折念生이 그의 아우 莫折天生을 보내어 北魏의 岐州를 함락하고 都督 元志를 죽였다.
【綱】 蜀賊이 北魏의 雍州를 침략하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注+① 蜀賊은 蜀人 중에 關中으로 옮겨와 살던 사람인데, 北魏의 난리를 틈타 봉기하여 도적질을 하였기에 그로 인해 蜀賊이라고 한 것이다.
【綱】 12월에 梁나라가 三關을 다시 탈취하고 北魏의 郢州를 포위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綱】 北魏에서 汾州의 胡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綱】 北魏의 秦州가 평정되었다.
【目】 北魏의 魏子建이 南秦의 여러 氐族을 불러 달래서, 차츰 항복하고 귀순하니 드디어 6郡의 12戍를 회복하였다. 북위에서 위자건을 行臺로 삼아서 梁州, 巴州, 秦州, 益州가 모두 그의 통제를 받았다.
【綱】 梁나라가 散騎常侍 朱异에게 중요한 정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目】 이해에 周捨가 어떤 일에 걸려 면직되었는데, 朱异가 대신 중요한 정무를 관장하여 군사에 관한 모의와 方鎭의 개편, 조정의 의례와 조칙을 모두 담당하였다.
주이는 재주가 많고 정신과 기력이 민첩하며 넉넉하니, 梁主(武帝)가 그를 신임하였다.


역주
역주1 太和 연간 : 北魏 孝文帝의 연호로 477년에서 499년까지이다.
역주2 本鎭에서……막혔으니 : ≪資治通鑑≫에는 이 부분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本鎭에서 부리는 자들이 다만 虞侯나 白直이 되고 일생동안 승진하여도 軍主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京師에 있는 동족들은 上品의 고관이 되니 鎭에 있는 자는 바로 淸宦의 길이 막혀서 혹 도망가는 사람이 많습니다.[本鎮驅使 但為虞侯白直 一生推遷 不過軍主 然其同族留京師者 得上品通官 在鎮者即為清塗所隔 或多逃逸]”
역주3 (可)[河] : 저본에는 ‘可’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河’로 바로잡았다.
역주4 (百)[白] : 저본에는 ‘百’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梁以散騎常侍朱异 掌機政 : “‘기밀 정무를 관장하였다.[掌機政]’는 것은 무엇인가. 나무란 것이다. 무엇을 나무랐는가. 國家의 機密은 무릇 심복 大臣들이 모두 참여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다. 梁나라의 재앙은 朱异가 시작한 것이므로 신중히 기록하였다.[掌機政 何 譏也 何譏 國家機密 凡腹心大臣 皆與知焉 梁之禍 朱异始也 故謹志之]” ≪書法≫
“‘掌機政’은 아직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임금을 가리며 나라를 망친 단서를 기록한 것이다.[掌機政 未有書 而此書之者 所以志其蔽主亡國之端也]” ≪發明≫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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