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於是에 少年은 不得從師하고 長者는 不得遊宦하여 獨爲匪人이라 言之流涕니이다
自定鼎伊洛으로 邊任益輕하여 唯底滯凡才가 乃出爲鎭將하여 轉相模習하여 專事聚斂하고
或諸方姦吏가 犯罪配邊에 爲之指蹤하여 政以賄立하니 邊人無不切齒러니
及阿那瓌
가 背恩縱掠
에 發奔命追之
한대 十五萬衆
이 度沙漠
하여 不日而還
하니 邊人見之
하고 遂輕中國
注+① 不日, 謂不多日.이라
李崇求改鎭爲州하니 抑亦先覺이어늘 朝廷未許하고 而拔陵爲亂하니
此段之舉는 指望銷平이로되 而崔暹隻輪不返하여 將士之情이 莫不解體니
今日所慮는 非止西北이라 將恐諸鎭尋亦如此니 天下之事를 何易可量이리오
書奏不省하고 詔徴崔暹하여 繫廷尉러니 暹賂元叉하여 卒得不坐하다
目
魏散騎侍郎李苗가 上書曰 凡食少兵精이면 利速戰하고 粮多卒衆이면 宜持久라
今隴賊猖狂한대非有素蓄하니 其勢在於疾攻이라 遲則人情離沮니
故高壁深壘者는 王師全制之策也로되 但天下久泰하여 人不曉兵이라 奔利不相待하고 逃難不相顧하여
將無法令하고 士非教習이라 不思長久之計하여 各有輕敵之心하니
如令隴東不守
하여 汧軍敗散
하면 則兩秦遂彊
하고 三輔危弱
하여 國之右臂
가 於斯廢矣
注+① 汧軍, 謂元志之軍也. 汧在隴阪之東.리니
宜勒大將
하여 堅壁勿戰
하고 别命偏裨
하여 帥精兵數千
하여 出麥積崖
하여 以襲其後
면 則汧岐之下
에 群妖自散矣
注+② 胡三省曰 “麥積崖, 在今秦州天水縣東百里, 狀如麥積, 故名.”라한대
以苗爲統軍하여 與别將淳于誕으로 俱出梁益이러니 未至에 莫折念生이 遣其弟天生하여 將兵下隴이어늘
元志與戰兵敗
하여 東保岐州
注+③ 魏岐州治雍城.하다
目
魏朔方胡反하여 圍夏州刺史源子雍하니 城中食盡이로되 衆無二心이라
子雍欲自出求粮
할새 留其子延伯
하여 守統萬
注+① 夏州, 治統萬城.한대 將佐皆曰 不若父子俱去
니라
子雍泣曰 吾世荷國恩
하니 當畢命此城
이로되 但無食可守
라 故欲往東州
하여 爲諸君營數月之食
하니 若幸而得之
면 保全必矣
注+② 東州, 謂東夏州也. 爲, 去聲. 下所爲․爲陳同.리라
乃帥羸弱하고 詣東夏州運粮할새 延伯與將佐로 哭而送之하더라 行數日에 爲胡帥曹阿各拔所擒이라
延伯曰 吾父吉凶을 未可知니 方寸焦爛이로되 但奉命守城이라 所爲者重하니 不敢以私害公이니 諸君은 幸得此心하라 於是에 衆感其義하여 莫不奮厲이러라
子雍雖被擒이나 胡人常以民禮事之라 子雍爲陳禍福한대 賊衆遂降하다
子雍見行臺北海王顥
하고 具陳諸賊可滅之狀
注+③ 顥, 詳之子也.한대 顥使爲先驅
러라
時에 東夏闔境皆反이라 子雍轉鬪而前하여 九旬之中에 凡數十戰하여 遂平東夏州하고 徴稅粟以饋統萬하니 二夏由是獲全하다 子雍은 懷之子也라
目
【目】 北魏에서 臨懷王 元彧에게 破六韓拔陵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注+① 元彧은 元譚의 증손이다. 여름 4월에 高平鎭의 敇勒 酋長인 胡琛이 반란을 일으켜 고평진을 공격하여 파륙한발릉에게 호응하였다.
북위의 장수 盧祖遷이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호침이 북쪽으로 달아났다.
衛可孤가 懷朔鎭을 공격하여 한 해가 지났는데도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楊鈞이 賀拔勝을 시켜서 임회왕 원욱에게 가서 위급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하발승이 죽음을 각오한 젊은 병졸 10여 騎를 모집하여 밤에 틈을 엿보다가 포위를 뚫고 나가자, 적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뒤쫓아오니, 하발승이 말하기를 “나는 賀拔破胡이다.”라고 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注+② 破胡는 賀拔勝의 字이다.
하발승이 원욱을 만나 그를 설득하기를 “회삭진이 포위를 당하여 조만간에 함락될 지경인데, 大王께서는 지금 군대를 주둔한 채 전진시키지 않으니, 회삭진이 만약 함락되면 무천진 역시 위태로워져서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백배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비록 張良과 陳平이 있다 하더라도 대왕을 위해 계책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원욱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賀拔勝
하발승이 돌아와서는 다시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는데, 양균이 다시 하발승을 보내어 나가서 무천진의 상황을 엿보게 하니, 무천진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하발승이 말을 달려 돌아오니, 회삭진 역시 패배하여 하발승 부자가 함께 위가고의 포로가 되었다.
目
【目】 이에 젊은 사람은 〈외지로 나가〉 스승을 모실 수 없고, 장성한 자들은 벼슬을 구하지 못하여 다만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니, 말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伊洛(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이래로 邊鎭의 직임은 더욱 경시되었기에 오직 적체되어 있던 평범한 인재가 마침내 나가서 鎭將이 되어 서로서로 본받아서 재물을 모으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간혹 여러 지방의 간사한 관리들이 죄를 저질러서 변방에 배치되면 그들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 지휘하여 政事가 뇌물로 결정되니 邊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郁久閭阿那瓌가 은혜를 저버리고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자, 군사들을 출동시키는 명령을 내려 그를 추격하였는데, 15만의 무리가 사막을 건너가서 며칠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으니, 邊鎭에 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드디어 中原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注+① “不日”은 많지 않은 날을 말한다.
李崇이 鎭을 고쳐서 州로 삼자고 요청한 것은 역시 먼저 깨달아서 그랬던 것이지만,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破六韓拔陵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번에 군사를 출동한 것은 소탕하여 평정하기를 희망한 것인데, 崔暹이 〈토벌하러 출정했다가〉 한 대의 수레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장수와 사졸들의 마음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지금의 우려는 서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鎭도 얼마 뒤에 이렇게 될까 두려우니, 천하의 일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글이 상주되었지만 임금은 살펴보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최섬을 불러들여 廷尉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최섬이 元叉에게 뇌물을 바쳐 결국에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目
【目】 北魏의 散騎侍郎 李苗가 상서하기를 “무릇 식량이 적고 군사들이 정예병이면 속전속결이 유리하고, 양식이 많고 병졸이 많으면 마땅히 지구전을 펼쳐야 합니다.
지금 隴 지역에 도적들이 창궐하고 있는데 평소 비축된 식량이 없으니, 그 형세는 신속히 공격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공격을 늦추면 병사들의 마음이 저상되어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높이 쌓아 지구전을 펼치는 것은 王師가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계책이지만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사람들은 전쟁을 모르기에, 이익을 다투어 서로 기다려주지 않으며 어려움에 처하면 도망쳐서 서로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장수는 法令이 없고 병졸들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각자 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隴 동쪽 지역을 지키지 못하여 汧의 군사가 패배하여 흩어지게 되면, 秦州와 南秦州의 莫折念生이 마침내 강성해지고 三輔 지역은 위태해지고 약해져서 나라의 오른팔이 이에 버려질 것입니다.
注+① 汧의 군대는 元志의 군대를 말한다. 汧은 隴阪의 동쪽에 있다.
마땅히 대장에게 명을 내려 성벽을 견고히 하고 싸우지 말게 하고, 별도로 偏裨들에게 명하여 정예병 수천 명을 인솔하여 麥積崖로 나가서 그들의 후방을 습격하게 하면, 汧ㆍ岐의 아래에 있는 적군들이 절로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麥積崖는 지금 秦州 天水縣의 동쪽 1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모양이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이묘를 統軍으로 삼아 别將 淳于誕과 함께 梁州와 益州로 출동하게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막절염생이 그의 동생인 莫折天生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隴 지역을 함락하였다.
元志가 그와 더불어 싸워서 그의 군대가 패배하여 동쪽으로 가서 岐州를 보존하였다.
注+③ 北魏의 岐州는 雍城에 治所를 두었다.
目
【目】 北魏 朔方의 胡族이 반란을 일으켜서 夏州刺史 源子雍을 포위하니, 성안에서는 군량이 다 떨어졌지만, 무리들이 배반할 마음이 없었다.
원자옹이 직접 나가서 양식을 구하려고 할 적에 그의 아들 元延伯을 남겨두어 統萬을 지키게 하였는데,
注+① 夏州는 統萬城에 治所를 두었다. 그의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자옹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이 城을 목숨으로 지켜야 한다. 다만 식량이 없으면 지킬 수 없기에 東州로 가서 여러 諸君들을 위하여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을 마련하려고 하니, 만약 다행히 군량을 얻는다면 반드시 성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② 東州는 東夏州를 말한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所爲”와 “爲陳”의 爲도 동일하다.
마침내 수척하고 약한 군사들을 데리고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동하주로 갈 적에, 원연백이 장수와 보좌들과 함께 통곡하며 그들을 전송하였다. 행군을 한 지 며칠이 지나서 胡族의 장수 曹阿各拔에게 사로잡혔다.
원자옹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가지고 가서 성안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전하여 힘써 굳게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원연백이 말하기를 “저희 부친의 생사를 모르니 가슴이 타지만, 명령을 받들고 성을 지키는 처지라 맡은 바가 막중하니, 감히 사사로운 일로 公務를 헤쳐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리들이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원자옹이 비록 사로잡혔지만 胡人들이 항상 백성이 윗사람을 대하는 禮로 그를 섬겼는데, 원자옹이 그들을 위해 禍와 福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적들의 무리가 드디어 항복하였다.
원자옹이 行臺인 北海王 元顥를 만나 여러 적들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을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注+③ 元顥는 元詳의 아들이다. 원호가 그에게 선봉에 서도록 하였다.
당시에 東夏州의 모든 지역에서 모두 반란을 일으켜서 원자옹이 이리저리 전투하며 전진하였고, 90일 동안에 수십 차례 전투를 벌여 마침내 동하주를 평정하고, 稅粟을 징수하여 統萬에 보내니, 夏州와 東夏州는 이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었다. 원자옹은 源懷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