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分定相四郡
하여 置殷州
하고 以崔楷爲刺史
注+① 按魏收志, 殷州止領趙郡․鉅鹿․南鉅鹿三郡, 蓋初置時兼領相州之廣宗郡也. 殷州治廣阿.하니 楷
가 表乞兵糧不得
이라
或이 勸楷單騎之官한대 楷가 曰 吾聞食人之祿者는 憂人之憂라하니 吾獨往이면 將士가 誰肯固志哉리오 遂擧家之官이러니
葛榮이 逼城에 或이 勸減弱小避之하다 楷가 遣幼子及一女夜出이라가
旣而悔之曰 人謂吾心不固하여 虧忠而全愛也라하고 遂追還하니
賊至에 將士가 爭奮하여 皆曰 崔公이 尙不惜百口하니 吾屬이 何愛一身이리오하고 連戰不息하여 死者가 相枕호되 終無叛志러라
城陷에 楷가 執節不屈하니 榮이 殺之하고 遂圍冀州하다
目
梁領軍曹仲宗直閤陳慶之가 攻魏渦陽하니 尋陽太守韋放이 將兵會之러니
魏兵
이 奄至
하니 放
이 營未立
이요 麾下
가 纔二百人
이라 放
이 免胄下馬
하여 據胡牀處分
注+① 胡牀, 卽交牀.하니 士皆殊死戰
하여 莫不一當百
이라 魏兵
이 遂退
하다 放
은 叡之子也
라
魏又遣將軍元昭等하여 帥衆五萬하여 救渦陽할새 前軍이 未至四十里에 慶之欲逆戰이어늘 放이 曰 前鋒이 必輕銳니 不如勿擊이요 待其來至니라
慶之曰 魏兵이 遠來疲倦하고 去我尙遠하니 必不見疑라 宜及其未集挫之라하고
乃帥麾下進擊破之하고 還與諸將連營而進하여 背渦陽城하여 與魏軍相持하다
自春至冬히 數十百戰에 將士疲弊러니 聞魏欲築壘於軍後하고 曹仲宗等이 恐하여 議引還이어늘
慶之杖節軍門曰 吾
가 聞置兵死地
라야 乃可求生
注+② 兵法 “置之死地而後生.”이라하니 須虜大合
한 然後與戰
하리니
審欲班師인댄 慶之别有密敕하니 犯者는 行之라하니 乃止하다
魏作十三城하여 欲以控制梁軍이러니 慶之銜枚夜出하여 陷四城하니 渦陽城主王緯가 乞降하니 韋放이 簡遣降者三十餘人하여 分報魏諸營하다
陳慶之陳其俘馘
하고 鼓譟隨之
하니 九城
이 皆潰
라 追擊之
하여 俘斬略盡
하니 尸咽渦水
注+③ 咽, 一結切, 塞也.러라
目
葛榮이 圍信都하여 自春至冬하니 冀州刺史元孚가 帥勵將士하여 晝夜拒守호되 糧儲旣竭이요 外無救援이라 城陷에 與兄祐로 俱執하니
榮
이 大集將士
하여 議其生死
할새 孚兄弟
가 爭相爲死
注+① 爲, 去聲.하고 都督潘紹等數百人
이 皆叩頭請死
하여 以活使君
하니 榮曰 此皆魏之忠臣義士也
라하고 皆免之
하다
魏命源子邕討榮할새 裴衍이 表請同行이어늘 許之한대 子邕이 言衍行臣請留하고 臣行請留衍하노이다
若必同行이면 敗在旦夕이리이다 不許러니 行至漳水하여 榮이 擊之하니 果敗俱死하다
相州가 聞冀州陷하고 人不自保어늘 刺史李神이 志氣自若하여 撫勉將士하고 大小致力하니 榮이 盡銳攻之호되 卒不能克하니라
目
【目】 北魏에서는 定州와 相州의 4郡을 분할하여 殷州를 설치하고 崔楷를 殷州刺史로 삼았다.
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殷州는 다만 趙郡ㆍ鉅鹿郡ㆍ南鉅鹿郡 3郡을 관할할 뿐이었으니, 〈定州와 相州의 4郡을 분할하여 은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대개 처음 은주를 설치하였을 때에 相州의 廣宗郡을 겸하여 관할한 것이다. 은주는 廣阿에 治所를 두었다. 최해가 表를 올려 병사와 양식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혹자가 최해에게 〈가족을 남겨두고〉 單騎로 관직에 부임하기를 권하였는데, 최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남의 녹을 먹는 자는 남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니, 내가 혼자 부임하면 將士들 중에 누가 〈은주를 지킬〉 뜻을 굳게 가지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온 집안을 거느리고 관에 부임하였다.
葛榮이 殷州城을 압박하자 혹자가 최해에게 집안사람 중에 약소한 사람들을 빼내어 다른 곳으로 피할 것을 권하였다. 최해가 어린 아들과 딸 한 명을 내보내 밤에 나가게 했다가
얼마 뒤에 후회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여 충성심을 훼손하여 父性愛를 온전히 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뒤쫓아가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도적이 이르자 將士들이 다투어 분발하여 모두 말하기를 “崔公께서 오히려 온 가족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으시니, 우리들이 어찌 한 몸을 아낄 것인가.”라고 하고, 연이어 싸우기를 그치지 않아 죽은 자가 이어졌지만 〈장사들이〉 끝내 배반할 뜻이 없었다.
은주성이 함락되자 최해는 부절을 쥐고 굴복하지 않았다. 갈영이 최해를 살해하고 마침내 冀州를 포위하였다.
目
【目】 蕭寶寅이 여러 해 동안 출병하였기 때문에 將士들이 피로하여 지쳤다. 이때에 涇州에서 크게 패배하니 汧城과 岐州가 모두 도적에게 항복하고 豳州刺史 畢祖暉가 싸우다 죽으니 關中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雍州刺史 楊椿이 백성을 모집하여 방어하니, 조서를 내려 양춘을 行臺로 삼아서 關西의 여러 장수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右民郎 路思令이 上疏하기를
注+① 右民郞은 右民曹의 郎官을 말한다. 漢 成帝 때에는 尙書 5인을 두었는데, 그 세 번째를 民曹라고 하였고, 魏나라(曹魏) 때에는 左民郞曹가 있었고, 晉나라 때에는 아울러 右民郞曹를 설치하였다. “근년에 將帥가 대부분 총애 받는 귀족의 子孫이기 때문에 의기양양 눈썹을 추켜올리고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자부하다가
注+② ‘攘腕’은 소매를 걷어올리는 뜻이다. 강대한 적군을 만나게 되어서는 銳氣가 다 없어집니다.
이에 늙고 나약한 병사들을 앞에 세워서 적을 상대하게 하고 강건한 병사들은 뒤에 두어 자신을 보호하게 하고, 더구나 무기가 정밀하지 못하며 호령에 절도가 없습니다.
이러한 군대로써 험준한 곳에 의지한 적도들을 상대하고 여러 번 전투를 겪어 싸움에 능숙한 도적들과 대적하니, 패배하지 않으려고 한들 가능하겠습니까.
注+③ 數(자주)은 음이 朔이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아서 집결하기 시작할 때부터 앞다투어 도망치고 將帥는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國家는 官爵과 포상이 오히려 가볍다고 하여 자주 하사품을 더해주니, 帑藏(國庫)이 텅 비게 되고 백성의 재물이 다 고갈되어 마침내 도적들을 더욱 많아지게 하니 백성들의 피폐함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德은 의로운 사나이를 감동시킬 수 있고 은혜는 죽음을 각오한 군사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賞罰을 밝게 하며 士卒을 훈련시키며 무기를 수선하고, 미리 辯士를 보내 〈도적들에게〉 禍福으로 일깨워서, 만약 그들이 고치지 않거든 順(정의의 군사)으로 逆(반역 무리들)을 친다면 도끼를 갈아서 버섯을 베고 큰 화로에 부채질하여 털을 태우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注+④ 蕭는 약쑥이다. ‘蕭斧’는 쑥을 베는 도끼다. 菌은 其隕의 切이니 地芝(靈芝)이다. 비가 계속 오는 날씨에 두엄더미 위에 열이 나서 菌이 생긴다.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죽기 때문에 朝菌이라고 한다.
目
【目】 北魏 東淸河郡의 山賊들이 떼 지어 일어났는데 조서를 내려 房景伯을 동청하군 太守로 삼았다.
注+① 宋 武帝 때에는 淸河郡을 盤陽에 하여 冀州에 소속하였고, 뒤에 北魏에 편입되어 東淸河郡이 되어 齊州에 소속하였다. 房景伯은 房法壽의 族子이다. 동청하군의 백성 劉簡虎가 일찍이 방경백에게 무례한 짓을 했다가 온 가족이 도망갔다.
방경백이 유간호를 붙잡고 그의 아들을 임용하여 掾吏로 삼아서 그에게 山賊들에게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산적들은 방경백이 이전의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여 서로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방경백의 어머니 崔氏가 經書에 능통하여 밝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貝丘에 사는 婦人이 그의 아들이 불효한다고 진술하였는데,
注+② 貝丘는 僑縣(교치한 현)이니, 또한 宋 武帝 때에 설치되고 淸河郡에 소속하였다. 列은 陳述함이다. 방경백이 어머니께 아뢰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백성이 禮義를 알지 못하니 어찌 매우 질책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최씨가〉 불효자의 모친을 불러와서 평상을 마주하여 함께 밥을 먹으며 불효자에게 당 아래에 모시며 서 있게 하고서 방경백이 〈모친(최씨)에게〉 음식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였다. 채 열흘이 안 되어 〈불효자가〉 잘못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였다.
최씨가 말하기를 “그가 겉으로는 부끄러워하지만 마음속은 아직 아니다. 잠시 그대로 두어라.”라고 하였다. 20여 일이 지나서는 불효자가 머리를 땅에 두드려서 피를 흘리고, 그 모친이 울면서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하자, 그러한 뒤에야 그것을 따랐다. 〈그 불효자는〉 마침내 효자로 이름났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백성은 진실로 어리석은 이가 많지만 그 良心은 끝내 잊지 않는다. 윗사람이 된 자가 教化하여 선한 백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刑法을 숭상하여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지한 백성들이라고 하여 더욱더 심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더욱 완강히 저항하여 심한 자는 〈윗사람을〉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한다.
崔母(房景伯의 어머니)는 일개 부인으로서 교화의 근원이 남에게 말해줌에 달려 있지 않고 몸소 솔선수범하는 데에 있고, 敎化의 효과가 겉모습만 바꾸는 것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을 알아서, 한 달의 사이에 무지하며 패악한 사람을 변화하여 孝子가 되게 하였으니, 누가 백성을 과연 무지하다고 말하겠는가. 윗사람이 되어 이것을 본다면 또한 자기를 살펴서 덕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目
【目】 〈北魏는〉 蕭寶寅이 〈涇州에서〉 패배할 때에 그를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楊椿이 병이 있어 해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다시 소보인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양춘의 아들 楊昱이 洛陽으로 떠나려고 할 적에 양춘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雍州에는 소보인보다 나은 자가 없지만 그 上佐는 朝廷에서 응당 심복인 重臣을 보내야 할 것인데, 어찌 소보인이 文牒을 내려 임용하는 것을 내버려둔단 말인가.
注+① 上佐는 別駕從事이다. ‘任其牒用’은 蕭寶寅이 마음대로 文牒을 내려 직접 上佐를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또 소보인은 刺史 직책을 맡은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보건대 그가 옹주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고 상벌 등을 처리하는 것은 常法에 따르지 않으니 아마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는 듯하다.
너는 마땅히 이러한 뜻을 胡太后와 魏主께 계문을 올리고 아울러 宰輔에게 아뢰어서 〈조정에서〉 다시 長史ㆍ司馬ㆍ防城都督을 보내도록 하게 하라.
注+② ‘二聖’은 胡太后와 魏主를 말한다.
關中을 편안히 하려고 한다면 바로 〈조정에서〉 이 세 사람을 등용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보인은〉 반드시 큰 근심이 될 것이다.” 하였다. 양욱이 그의 말대로 啓聞을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目
【目】 湛僧智가 北魏의 東豫州刺史 元慶和를 廣陵에서 포위하니 북위의 將軍 元顯伯이 구원하였다.
注+① 元慶和는 元天賜의 손자이다. 이 廣陵城은 新息縣의 경계에 있다. 梁나라 司州刺史 夏侯夔가 병사를 인솔하여 담승지를 도우니,
注+② 夏侯夔는 夏侯亶의 동생이다. 원경화가 廣陵城을 바쳐 투항하였다.
하후기가 〈원경화의 투항을〉 담승지에게 양보하였는데, 담승지가 말하기를 “원경화가 公께 투항하려고 하는데 제가 지금 〈항복을 받으러〉 가면 반드시 그의 뜻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또 제가 거느린 군사는 오합지졸들을 모집한 것이니 법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公께서는 군사를 지휘하는 데 평소 엄격하게 하시니 〈군사들이〉 반드시 침포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항복한 자를 받아주고 귀부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적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후기가 이에 성에 올라가서 북위의 깃발을 뽑아내고 梁나라 깃발을 세우니 원경화가 무기를 놓고 나와 항복하므로, 관리와 백성들이 安堵하였다. 원현백이 밤에 달아났는데 양나라 군대가 그를 추격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梁主(蕭衍)가 담승지는 廣陵에 진주하게 하고 하후기는 安陽에 주둔하게 하고 别將을 보내 楚城을 屠戮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義陽 북쪽 길이 마침내 북위와 단절되었다.
注+③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東豫州의 汝南郡에 安陽縣에 있다. 梁나라 때에는 西楚州를 楚城에 두었다.
目
【目】 梁나라 領軍 曹仲宗과 直閤 陳慶之가 北魏의 渦陽을 공격하니, 尋陽太守 韋放이 병사를 거느리고 조중종 등과 회합하였다.
북위 병사들이 갑자기 이르니, 위방이 군영을 아직 세우지 않았고 麾下 병사가 겨우 200명이었기 때문에 위방이 투구를 벗고 말에서 내려서 胡牀에 앉아서 지휘하였다.
注+① 胡牀은 바로 交牀이다. 병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으므로 북위 병사들이 마침내 퇴각하였다. 위방은 韋叡의 아들이다.
북위가 또 將軍 元昭 등을 보내서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서 와양을 구원할 적에 선발대가 〈와양에〉 40리쯤 못 미쳤을 적에 진경지가 맞서 싸우려고 하자 위방이 말하기를 “선봉 부대는 반드시 날래고 정예로울 것이니 공격하지 말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진경지가 말하기를 “북위 병사는 멀리에서 와서 피곤하고 우리와 거리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반드시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들이 아직 결집하지 않았을 때에 그들을 꺾어야 한다.”라고 하고,
이에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進擊하여 격파하였다. 돌아와 諸將들과 군영을 연합하여 전진하여 渦陽城을 등지고 북위 군대와 서로 대치하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수십에서 백 번쯤 싸우는 동안 將士들이 피로하여 지쳤다. 북위가 군대의 후미에 보루를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중종 등이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갈 것을 논의하였는데,
진경지가 부절을 쥐고 軍門에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군대는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마침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라고 하니,
注+② 兵法에 “죽을 땅에 놓인 뒤에야 살아난다.” 하였다. 반드시 오랑캐가 크게 연합한 뒤에 그들과 더불어 싸울 것이다.
반드시 회군하려 한다면 내가 별도로 황제의 密敕을 받았으니,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조칙(처벌)을 시행할 것이다.”라고 하니, 마침내 그쳤다.
북위가 13개의 城을 만들어서 양나라 군사를 제압하려고 하였다. 진경지가 군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밤중에 출동하여 4개의 城을 무너뜨리니, 渦陽城主 王緯가 항복을 청하였다. 위방이 항복한 자 중에 30여 명을 선발하여 보내 북위의 여러 군영에 나누어 알렸다.
진경지가 포로들을 늘어서게 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따라 전진하니 〈북위의〉 9개의 城이 모두 궤멸되었다. 양나라 군대가 북위의 군대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고 참수하여 대략 섬멸하니 죽은 시체가 渦水를 가로막았다.
注+③ 咽은 一結의 切이니, 가로막는다는 뜻이다.
目
【目】 蕭寳寅이 涇州에서 패전했을 때에 혹자는 洛陽으로 돌아가 죄를 받으라고 권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關中에 머물러 공을 세워 스스로 贖罪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소보인이 스스로 생각건대 군사를 출동한 지 여러 해 동안 허비한 재화를 셀 수 없고 하루아침에 패배하여 마음속이 절로 편안하지 않고, 北魏 조정도 역시 그를 의심한다고 여겼다.
中尉 酈道元이 평소에 엄격하고 용맹하였다. 汝南王 元悅의 嬖人이 권세를 농락하였는데, 역도원이 그를 죽이고 아울러 원열을 탄핵하였다. 당시에 소보인이 반란한 정황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원열이 이에 아뢰어 역도원을 關右大使로 삼았다. 소보인이 그 소식을 듣고 자기를 잡으려 한다고 여겨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長安의 경박한 자제들이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는데, 소보인이 河東의 柳楷에게 묻자 유해가 말하기를 “세속 노랫말에 ‘蕭鸞이 10명의 아들을 낳아 9명의 아들은 곯아버리고 1명의 아들만 곯지 않아 關中을 다스린다[亂].’라고 하였으니,
注+① 齊 明帝의 성명이 蕭鸞이니, 蕭寶寅의 아버지이다. 毈은 徒玩의 切이며 알이 곯은 것이다. 亂은 다스림입니다.
大王(소보인)께서 關中을 다스려야 하거늘 어찌 의심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소보인이 마침내 장수를 보내 역도원을 공격하여 죽였다.
目
【目】 〈蕭寳寅의〉 行臺郎中 蘇湛이 병으로 집에 누워 있었다. 소보인이 그의 姨弟 姜儉에게 명하여 소담을 설득하기를 “酈道元이 오는 것은 일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앉아서 죽음을 받을 수 없으므로 다시는 北魏의 신하가 될 수 없다. 生死와 榮辱을 卿과 함께 하고자 하오.”라고 하니,
소담이 크게 곡을 하고 말하기를 “王(소보인)께서는 본래 궁박한 새의 처지로 남에게 歸附하였는데 북위 朝廷에서 왕에게 羽翼(보좌)을 주어서 금일의 영총에 이르렀습니다.
國運에 憂患이 많을 때를 만나서 충성을 다하여 은덕에 보답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남(북위)의 위태로움을 틈타서 潼關을 지키면서 천자의 자리를 엿보려 하십니다.
注+① 屬은 음이 燭이며 만나다는 뜻이다. ‘守關’은 蕭寶寅이 潼關의 험준함을 지켜서 關中을 분할 점령하려 함을 말한다. ‘問鼎’은 천자의 자리를 엿보려고 함을 말한다.
북위의 德이 비록 쇠퇴하였지만 天命이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온 가족이 왕을 위하여 멸족을 당하게 할 수 없습니다.
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사직하고 鄉里로 돌아가서 병들어 죽어서 지하에 가서 조상들을 뵙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注+③ 蘇湛은 武功 사람이다.
소보인은 평소에 소담을 중시하였고, 또 소담이 자기에게 쓰이지 않을 것을 알아서 武功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소보인은〉 마침내 스스로 齊나라 황제를 칭하여 연호를 바꾸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長史 毛遐가 동생 毛鴻賓과 함께 氐人과 羌人을 거느리고 병사를 일으켜 소보인을 막고,
注+④ 蕭寶寅이 雍州ㆍ涇州 등 4州의 都督이 되었고, 또 西討大都督이 되어서 毛遐를 府長史로 삼았다. 북위에서 長孫稚를 行臺로 삼아서 소보인을 토벌하였다.
正平의 백성 薛鳳賢과 薛脩義가 역시 河東에서 무리를 모아서 鹽池를 점거하고 蒲阪을 포위하여 동서로 연결하여 소보인에게 호응하였다.
注+⑤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世祖(拓跋壽) 때에 河東 聞喜縣에 太平郡을 설치하였고, 孝文帝(元宏) 太和 18년(494)에 고쳐서 正平郡이라고 하고 東雍州에 소속하고 聞喜와 曲沃 2縣을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薛脩義는 薛鳳賢의 宗人이다. 북위에서 都督 宗正珍孫에게 조서를 내려서 설봉현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注+⑥ 宗正은 複姓이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蕭寶寅이 北魏로 달아날 때의 마음은 본래 그 兵力을 빌려서 宗國(齊나라)을 위해 復讐하려고 하였으니 〈義理에〉 유사하다.
그렇다면 마땅히 淮水ㆍ漢水의 북쪽을 떠나지 않아서 틈을 엿보아 남쪽(梁나라)을 토벌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공을 이루는 일은 하늘의 뜻인데 冀州와 雍州 2州가 어찌 梁나라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 때문에 刺史가 되었으니, 비록 이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남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의리로 시작하여 이익으로 끝을 맺었으니, 환란을 일으켜 죽음을 받는 데에 이르지 않으면 국가를 안정시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小人의 本末입니다.”
目
【目】 葛榮이 信都를 포위하여 봄부터 겨울에 이르렀다. 〈北魏의〉 冀州刺史 元孚가 將士들을 이끌고 독려하여 밤낮으로 지켰는데 비축했던 양식이 이미 고갈되었고 외부에서 구원 병력이 오지 않았다. 城이 함락될 때에 원부가 형 元祐와 함께 잡혔다.
갈영이 將士들을 크게 모아 生死를 논의할 때에 원부 형제가 다투어 서로를 위해 죽겠다고 하고,
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都督 潘紹 등 수백 명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使君(元孚)을 살려주고 자신들을 대신 죽여달라고 하였다. 갈영이 말하기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北魏의 忠臣이며 義士이다.”라고 하고, 그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북위가 源子邕에게 명하여 갈영을 토벌할 적에 裴衍이 表文을 올려 同行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원자옹이 말하기를 “배연이 가면 臣은 남기를 청하고 신이 가면 배연이 남기를 청합니다.
만약 반드시 〈두 사람이〉 同行하게 되면 패배가 아침이나 저녁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행군하다가 漳水에 이르러서 갈영이 공격하니 과연 패하여 모두 죽었다.
相州에서는 冀州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相州刺史 李神은 志氣가 태연자약하여 將士들을 어루만지며 면려하고 크고 작은 일에 힘을 기울였다. 갈영이 정예의 군사를 다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끝내 상주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