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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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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이라
秦建元十四年이라
春二月 作新宮하다
◑ 秦 寇梁州하여 夏四月 陷南陽하다
秦王堅 遣長樂公丕, 將軍苟萇, 石越, 慕容垂等하여 四道會攻襄陽하다
梁州刺史朱序 以秦無舟檝이라하여 不以爲虞러니 旣而 石越 帥騎五千하고 浮渡漢水하니 序惶駭하여 固守中城이어늘 克其外郭하고 獲船百餘艘하여 以濟餘軍하고 丕督諸將攻中城하다
序母韓氏 聞秦兵將至하고 自登城하여 履行西北隅하여 以爲不固라하여 帥百餘婢 及城中女丁하여 築邪城於其内注+① 行, 去聲. 邪, 卽斜切.러니 及秦兵至 西北隅果潰어늘 移守新城하니 襄陽人 謂之夫人城이라하니라
桓沖 在上明하여 擁衆七萬이러니 憚秦兵하여 不敢進이라
丕欲急攻襄陽한대 苟萇曰 吾衆 十倍於敵하고 糗糧山積하니 但稍遷漢沔之民於許洛하여 塞其運道하고 絶其援兵이면 譬如網中之禽이라 何患不獲이완대 而多殺將士하여 急求成功哉 丕從之하다
慕容垂拔南陽하고 執太守鄭裔하여 與丕會하다
秋七月 하다
◑ 秦 遣兵分道하여 寇盱眙, 彭城, 魏興하다
彭超 請攻沛郡太守戴𨔡於彭城注+① 𨔡, 古遁字. 𨔡領沛郡太守, 戍彭城.하고 且曰 願更遣重將하여 攻淮南하여 爲棊劫之勢하여 東西竝進하면 丹楊 不足平也注+② 棊劫者, 以棊勢喩兵勢也. 圍棊者攻其右, 而敵手應之, 則擊其左, 取之, 謂之劫.니이다
秦王堅 從之하여 使俱難으로 帥歩騎七萬하고 寇淮陽盱眙注+③ 俱, 姓也. 淮陽, 晉書載記作淮陰, 當從之. 淮陰․盱眙, 前漢竝屬臨淮郡, 後漢․晉以淮陰屬廣陵.하다
八月 超攻彭城이어늘 詔右將軍毛虎生하여 帥衆鎭姑孰以禦之하니 又使韋鍾으로 圍魏興太守吉挹於西城하다
九月 秦王堅 宴群臣하다
秦王堅 與群臣飲酒할새 以極醉爲限이어늘 趙整 作酒歌曰 地列酒泉이요 天垂酒池로다 杜康妙識이요 儀狄先知注+① 九州春秋曰 “曹公禁酒, 孔融以書嘲之曰 ‘天有酒旗之星, 地列酒泉之郡.’” 天文志曰 “軒轅右角南二星曰酒旗, 酒官之旗也.” 此曰 “天垂酒池”, 旣曰垂矣, 池當作旗. 杜康, 古之造酒者. 戰國策曰 “儀狄作酒, 禹飮而甘之曰 ‘後世必有以酒亡其國者.’ 遂疏儀狄, 而絶旨酒.”로다 紂喪殷邦하고 桀傾夏國이로다 由此言之컨대 前危後則注+② 紂爲酒池肉林, 長夜之飮, 以亡殷. 史曰 “夏桀淫驕, 乃放鳴條”, 蓋亦以酒也. 前危後則, 謂前人之危, 後人之法則也.이로다
大悅하여 命整書之하여 以爲酒戒하고 自是 宴群臣 禮飲而已注+③ 禮, 臣侍君宴, 不過三爵.러라
冬十月 大宛 獻馬于秦하니 不受하다
大宛 獻汗血馬于秦하니 秦王堅曰 吾嘗慕漢文帝爲人하노니 用千里馬何爲리오하고 命群臣하여 作止馬詩而反之하다
北海公重 鎭洛陽하여 謀反注+① 重, 洛之兄也.한대 秦王堅曰 長史呂光 忠正하니 必不與之同注+② 光, 婆樓之子也.이라하고
卽命光收重하여 檻車送長安하여 赦之하고 以公就第하다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太元 3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14년이다.
【綱】 봄 2월에 〈晉나라(東晉)가〉 새 궁궐을 지었다.
【綱】 秦나라(前秦)가 梁州를 침략하여 여름 4월에 南陽을 함락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長樂公 符丕와 將軍 苟萇, 石越, 慕容垂 등을 보내어 네 길로 모여 襄陽을 공격하였다.
梁州刺史 朱序가 秦나라에는 배와 노가 없다 하여 대비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윽고 석월이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서 배를 띄워 漢水로 건너오자, 주서는 두렵고 놀라워 中城을 굳게 수비하였다. 석월이 그 外城을 함락시키고 兵船 백여 척을 얻어 나머지 군대를 건너오게 하였고, 符丕가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中城을 공격하였다.
주서의 어머니 韓氏는 秦나라 군대가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성에 올라 신을 신고 서북쪽 귀퉁이로 가서 성이 견고하지 못하다 하여 백여 명의 계집종과 성안의 젊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그 안에 을 쌓았는데,注+① 行(가다)은 去聲이다. 邪(비스듬하다)는 卽斜의 切이다. 秦나라 군대가 이르자 서북쪽 귀퉁이가 과연 무너졌다. 그리하여 이동하여 새로 쌓은 邪城을 지키니, 襄陽 사람들은 이 성을 ‘夫人城’이라 하였다.
【目】 桓沖이 上明에서 7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秦나라(前秦) 군대를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符丕가 襄陽을 급히 공격하려 하자, 苟萇이 말하기를 “우리 병력이 적보다 10배나 많고 미숫가루와 양식이 산처럼 쌓였으니, 다만 漢水와 沔水의 백성들을 許昌과 洛陽으로 약간 옮겨서 적의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막고 구원병을 차단한다면 저들은 그물 속에 잡힌 새와 같을 것입니다. 어찌 사로잡지 못함을 근심하여 많은 장병을 죽이며 급히 성공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부비가 그의 말을 따랐다.
慕容垂가 南陽을 함락하고 太守 鄭裔를 사로잡아 부비와 만났다.
【綱】 가을 7월에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
【綱】 秦나라(前秦)가 군대를 보내어 길을 나누어 盱眙(우이), 彭城, 魏興을 침략하였다.
【目】 彭超가 沛郡太守 戴𨔡(대둔)을 彭城에서 공격할 것을 청하고는注+① 𨔡은 遁의 古字이다. 戴𨔡이 沛郡太守를 겸하여 彭城에 주둔하였다. 또 말하기를 “원컨대 다시 큰 장수를 보내어 淮南을 공격해서 棊劫의 형세로 만들어 동쪽과 서쪽으로 함께 진격하면 丹楊을 굳이 평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注+② ‘棊劫’은 바둑 두는 형세를 가지고 군대의 형세를 비유한 것이다. 바둑을 두는 자가 오른쪽을 공격하여 敵手가 이에 대응하면 그 왼쪽을 공격하여 취함을 劫이라 이른다.
秦王 符堅은 그 말을 따라서 俱難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7만을 거느리고 淮陰과 盱眙를 침략하게 하였다.注+③ 俱는 姓이다. ‘淮陽’은 ≪晉書≫의 〈載記〉에 ‘淮陰’으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한다. 淮陰과 盱眙는 前漢 때에는 모두 臨淮郡에 속하였는데 後漢과 晉나라 때에는 淮陰을 廣陵에 소속시켰다.
8월에 팽초가 팽성을 공격하자, 〈晉나라(東晉)가〉 右將軍 毛虎生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姑孰에 진주하여 방어하게 하니, 秦나라가 또다시 韋鍾으로 하여금 魏興太守 吉挹을 西城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綱】 9월에 秦王(前秦) 符堅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벌였다.
【目】 秦王 符堅이 여러 신하들과 술을 마실 적에 만취할 때까지 마시도록 하자, 趙整이 酒德歌를 짓기를 “땅에는 酒泉이 나열되어 있고, 하늘에는 酒旗가 드리워져 있도다. 杜康이 술맛을 묘하게 알았고, 儀狄이 술맛을 먼저 알았도다.注+① ≪九州春秋≫에 “曹公(曹操)이 술을 금하자, 孔融이 편지를 써서 조롱하기를 ‘하늘에는 酒旗의 별이 있고 땅에는 酒泉의 郡이 나열되어 있다.’ 하였다.” 하였는데, ≪晉書≫ 〈天文志〉에 “軒轅의 오른쪽 귀퉁이의 남쪽에 있는 두 별을 ‘酒旗’라 하니, 酒官의 깃발이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天垂酒池(하늘이 酒池를 드리웠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垂(드리웠다)’라고 말했으면 池는 마땅히 旗가 되어야 한다. 杜康은 옛날에 술을 만든 자이다. ≪戰國策≫에 이르기를 “儀狄이 술을 만들자, 禹임금이 이것을 마시고 달게 여기고 말씀하기를 ‘後世에 반드시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시고는 마침내 儀狄을 멀리하고 맛있는 술을 끊었다.” 하였다. 紂王은 술로 인해 殷나라를 망쳤고, 桀王은 夏나라를 기울게 하였도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앞 시대의 위태로움은 후세의 본보기가 된다.” 하였다.注+② 紂王이 酒池와 肉林을 만들어 긴긴밤 마셔서 殷나라를 멸망하게 하였다. 역사책에 이르기를 “夏나라 桀王이 음탕하고 교만하자, 湯王이 마침내 그를 鳴條로 추방했다.” 하였으니, 하나라 또한 술 때문에 망한 것이다. ‘前危後則’은 前人의 위태로움은 後人의 본보기임을 말한 것이다.
부견이 크게 기뻐하여 조정에게 이것을 써서 酒戒로 삼게 하고 이때부터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禮로 절제하여 〈술 석 잔을〉 마시게 했을 뿐이다.注+③ 禮에 의하면 신하가 군주를 모시고 잔치할 때에는 술이 세 잔을 넘지 않는다.
【綱】 겨울 10월에 大宛에서 秦나라(前秦)에 말을 바쳤으나, 받지 않았다.
【目】 大宛이 汗血馬를 秦나라에 바쳤는데, 秦王 符堅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漢나라 文帝의 인품을 사모하노니, 千里馬를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는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止馬詩를 짓게 하고 말을 돌려주었다.
【綱】 秦나라(前秦) 豫州刺史 符重이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사면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目】 北海公 符重이 洛陽에 진주하여 반역을 도모하자,注+① 符重은 符洛의 형이다. 秦王 符堅이 말하기를 “長史 呂光은 사람이 충성스럽고 정직하니, 반드시 그와 함께 모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는注+② 呂光은 呂婆樓의 아들이다.
즉시 여광에게 명하여 부중을 체포해서 檻車에 태워 長安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사면하고서 公의 신분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역주
역주1 邪城 : 城의 한쪽 모서리에 비스듬히 쌓은 성벽을 이른다.
역주2 新宮成 : “모든 宮室을 지을 적에 ‘作’을 쓰거나 ‘成’을 씀은 공사를 오랫동안 함을 비판한 말이다. 이 궁실은 겨우 5개월 만에 지은 것인데, ‘成’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속히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도 ‘成’이라고 쓰고 속히 완성한 것도 ‘成’이라고 썼다. 晉나라는 蘇峻이 임금을 石頭城으로 옮긴 뒤부터 궁궐이 불타고 재만 남았었는데, 成帝가 다시 새 궁궐을 지었으니, 급박하게 대충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 근 60년이 되었는데, 다시 새롭게 지음은 당연하다. 2월에 처음 시작하여 7월에 완성을 고하였으니, 그렇다면 孝武帝는 절제할 줄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成이라고 쓴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궁이 완성되었다고 쓴 것이 네 번인데,(漢 高帝 7년(B.C. 200)에 자세히 보인다.) 모두 비판한 글이고 오직 이것만 찬미한 글이다.[凡宮室 書作書成 久辭也 此僅五月耳 書成 何 速成也 綱目久成 書成 速成 書成 晉自蘇峻遷帝石頭 宮闕灰燼矣 成帝更造新宮 倥傯可知 至此近六十年 改而新之宜也 二月經始 七月告成 則孝武可謂知節矣 故特書成 終綱目 書宮成 四(詳見漢高帝七年) 皆譏也 惟此爲美辭]” ≪書法≫
역주3 秦豫州刺史……赦就第 : “반역을 도모했는데 사면했다고 쓴 것은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함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모반했을 때 ‘사면했다’고 쓴 것이 두 번이니, 燕王 劉旦과 符重인데, 다시 배반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謀反 書赦 譏失刑也 終綱目 謀反書赦二 燕王旦符重 未有不復反者也]” ≪書法≫“신하는 장차 나쁜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주살된다. 符重에 대해 이미 ‘반란했다’고 썼는데, 또다시 ‘사면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썼으니, 이는 그를 풀어주어 반역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란의 계제가 어떻게 그치겠는가. 후일에 다시 반란한 것이 당연하다.[人臣無將 將則必誅 符重旣書其反 而又書赦之就第 是縱使爲逆爾 亂階 何自而弭 宜乎他日復反也]” ≪發明≫‘人臣無將 將則必誅’는 ≪春秋公羊傳≫ 莊公 32년에 “君親無將 將而誅焉(임금과 어버이에게는 나쁜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니 그런 마음을 갖기만 해도 주살된다.)”이라 하였고, ≪史記≫ 〈叔孫通列傳〉에도 “人臣無將 將卽反 罪死無赦(신하는 나쁜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곧바로 반역을 일으켜 그 죄는 죽더라도 용서되지 않는다.)”라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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