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왕망王莽이 글을 내려 낙양洛陽을 동도東都라 하고 상안常安(장안長安)을 서도西都라 하고注+왕망王莽이 장안長安을 고쳐 상안常安이라 하였다., 제후諸侯의 인원을 1,800명으로 정하고 부성附城(부용附庸)의 인원수 또한 이와 같이 하여 공功이 있는 자를 기다렸다.注+8개의 주州에 주州마다 210개국이고 기내畿內를 합하여 모두 1,773개국이니, 1,800개국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숫자[성수成數]를 든 것이다.
공公들은 전지田地 1동同에 백성 1만 호戶를 소유하고, 그 나머지는 이로써 차등을 삼았으나注+땅의 넓이가 100리里인 것을 동同이라 한다. 차差는 차등이다.지도地圖와 호적戶籍 등 문서가 아직 정해지지 못했다 하여 나라와 식읍食邑을 받지 못하고,
우선 도내都內에서 녹봉을 받게 하되 매월 수천 전錢을 받게 하니注+봉奉(녹봉)은 봉俸으로 읽는다., 제후들이 모두 곤궁하여 심지어는 품팔이를 하는 자도 있었다.
綱
【강綱】 백성들로 하여금 전지田地를 매매할 수 있게 하였다.
目
【목目】 왕망王莽은 성품이 조급하고 소란스러워서 가만히 있지 못하였는데, 매번 일을 일으키거나 만들 때마다 번번이 옛 제도를 흠모하여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르려 하였고,
제도가 또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이를 이용하여 간악한 짓을 저지르니, 천하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형벌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注+오謷는 음이 오敖이니, “오오謷謷”는 여러 사람이 근심하는 소리이다.
왕망은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왕전王田을 경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전지田地를 매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기타 미혹되고 혼란한 정사와 가혹한 형벌, 무겁고 번다한 세금과 부역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注+패誖는 혼란함이다. 삭數(자주)은 음이 삭朔이다.
이고, 려驪는 려麗와 통하니 력지力之의 절切이다. 고구려高句驪는 나라의 이름이니,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부여왕 금와扶餘王 金蛙가 태백산太白山 남쪽에서 한 여자를 얻어 물으니,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이 유화柳花이다.” 하였다. 금와가 괴이하게 여겨 방 안에 그녀를 유폐幽閉하였는데, 햇빛이 비쳐들자 인하여 임신을 하여 하나의 큰 알을 낳았다. 그 어미가 알을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의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 아이는 겨우 일곱 살에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백발백중하였다. 이 지역의 풍속은 활을 잘 쏘는 자를 주몽朱蒙이라 불렀으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왕자와 신하들이 모의하여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서 마침내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고高를 성씨姓氏로 삼으니, 바로 한漢나라 원제 건소元帝 建昭 2년(B.C.37)이다.
目
【목目】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마땅히 주군州郡들로 하여금 우선 오랑캐들을 위무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흉노匈奴를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夫餘와 예맥濊貉이 다시 일어나니, 이는 큰 걱정입니다.”注+맥貉은 맥貊과 같다. 하였으나,
왕망王莽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高句驪의 후侯인 추騶를 유인해 오게 하여 참수하니, 이에 예맥 사람들이 더욱 변방을 침범하여 동쪽과 북쪽, 서쪽과 남쪽 변방이 모두 혼란하였다.注+동쪽은 예맥濊貊이고 북쪽은 흉노匈奴이다.
그러나 왕망은 의욕이 매우 왕성하여, 사방의 오랑캐들을 굳이 병탄하고 멸망시킬 것이 못 된다고 여기고, 오로지 옛것을 상고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역주
역주1新나라……4년이다 :
A.D.12년에서 A.D.24년까지는 無統이다. 朱熹의 凡例에 國號, 諡號, 姓名, 年號, 年度의 경우 正統은 大字로 쓰고 無統은 小字로 쓴다고 하였는데, 이를 따라 小字로 처리하였다. A.D.25년 光武帝가 등극한 이후로는 다시 大字로 처리하였다.
역주2王莽의……것이다 :
新나라 始建國 3년(A.D.11)에 王莽이 呼韓邪單于의 아들들을 불러 單于로 봉하였다. 당시 右犁汗王 咸과 아들 登, 助가 왔는데, 咸을 孝單于, 助를 順單于로 봉하였다. 이후 咸이 도망가고 助가 병으로 죽자 登을 순선우로 봉하였다.
역주4殺牂柯大尹 :
“大尹을 죽인 것은 叛逆인데 ‘叛’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王莽이 배반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益州에서 大尹을 죽였으나 다만 ‘擊’이라고 쓴 것이다.[殺大尹 叛也 不書叛 何 莽叛者也 故益州殺大尹 止書擊]” ≪書法≫ 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 傳文을 따랐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만을 소개하되,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은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
역주5切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