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있던 큰 나라(後燕, 後秦, 北魏)가 셋이고 西秦과 涼(後涼), 南涼, 北涼 등 작은 나라가 넷이고, 새로 생긴 작은 나라(南燕)가 하나이니, 합하여 僭國이 여덟이다.
綱
【綱】 봄 정월에 燕나라(後燕) 慕容德이 거처를 滑臺로 옮기고 燕王을 칭하였다.(南燕의 건국) 慕容麟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誅殺 당하였다.
魏나라(北魏) 拓跋儀가 鄴城으로 들어갔다.
目
【目】 燕나라 范陽王 慕容德이 鄴城에서 4만 가호를 거느리고 거처를 남쪽 滑臺로 옮기니, 魏나라 衛王 拓跋儀가 업성에 들어가서 모용덕을 추격하여 河水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慕容麟이 모용덕에게 존호를 올리자, 모용덕은 형 慕容垂의 고사를 따라 燕王을 칭하고 統府로서 황제의 制命을 행하고 백관을 설치하니, 이것이 南燕이다.
모용린이 다시 반역을 도모하자 모용덕이 그를 죽였다.注+① 統府라는 것은 여러 方鎭을 燕王府에서 모두 통솔하게 한 것이다. ‘行帝制’는 황제의 制命을 칭하여 일을 행한 것이다.
綱
【綱】 魏나라(北魏)가 行臺를 鄴城과 中山에 설치하고 和跋과 拓跋儀로 지키게 하였다.
目
【目】 魏王 拓跋珪가 中山에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高邑에 이르러 王永의 아들 王憲을 얻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王景略(王猛)의 손자이다.”라고 하고 本州의 中正으로 삼아서 選曹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注+① 王猛은 靑州 北海의 劇縣 사람이다. 太康 연간에 劇縣을 나누어 東筦郡에 소속시켰고, 晉나라 때에는 동관군을 徐州에 소속시켰다. ≪晉書≫ 〈載記〉에 왕맹을 北海 劇縣이라고 썼으니, 왕맹은 예로부터 漢나라 郡縣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魏郡에 집이 있었으나 華陰에 은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秦나라(前秦)에 귀의하였다. 그의 아들 王永이 幽州에 진주하였는데 符丕를 따라 종군했다가 襄陵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므로 王憲이 高邑으로 흘러와서 우거한 것이다. 지금 魏나라(北魏)가 그를 本州의 中正으로 삼았으면 아직 靑州와 徐州를 얻지 못한 것이니, 이는 그로 하여금 東夏의 人士를 전형하여 등용하게 했을 뿐이다. 選曹는 吏部尙書의 직책이다.
탁발규는 鄴城에 이르러 行臺를 설치하고 和跋을 尙書로 삼아 업성에 진주하게 하였다.注+② 行臺는 魏․晉時代부터 있었는데, 後魏(北魏)에서는 尙書大行臺라 하고 별도로 관속을 두었다. 後漢 光武帝가 尙書省에 정사를 맡긴 뒤로부터 정사가 臺閣으로 돌아가니, 尙書省을 일러 尙書臺라 하였다. 晉나라 惠帝가 서쪽의 長安으로 옮기고 留臺를 洛陽에 설치하여 유대의 일을 주관하게 하니, 이에 留臺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拓跋氏에 이르러 行臺를 설치하고 설치한 곳에 따라 한 道의 일을 관장하였다.
탁발규가 중산으로 돌아와서 장차 북쪽으로 돌아가려 할 적에 군대를 동원하여 直道(직선으로 연결된 도로)를 다스리되 望都縣에서부터 恒嶺을 뚫어 代에 이르기까지 500여 리를 파고,注+③ 望都縣은 中山郡에 속하였다. 恒嶺은 恒山의 고개[嶺]이니, 上曲陽 서북쪽에 있다. 다시 행대를 중산에 설치하고는 衛王 拓跋儀에게 명하여 진주하게 하였다.
綱
【綱】 魏王(北魏) 拓跋珪가 북쪽으로 돌아가서 山東의 백성과 오랑캐 십여만 명을 옮겨 代 지역을 채웠다.
綱
【綱】 2월에 燕主(後燕) 慕容寶가 군대를 거느리고 龍城을 출발하였는데 衛卒인 段速骨이 난을 일으키니, 무리가 무너져 흩어져 돌아왔다.
目
【目】 처음에 燕나라 사람 중에 中山에서 龍城으로 온 자가 있어서 拓跋渉珪(拓跋珪)가 쇠약하다고 말하니, 이에 燕主 慕容寶는 다시 中原을 점령하고자 해서 군대를 징발하여 모두 용성에 모이게 하였다.注+① 調는 징발함이다. 그러나 이때 모용보는 중산이 이미 魏나라(北魏)에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遼西王 慕容農이 말하기를 “우리는 새로 천도한 지가 아직 얼마 안 되었으니, 남쪽으로 정벌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집결한 군대를 이용하여 庫莫奚를 기습해서 그곳의 소와 말을 취하여 군수물자에 충당하여야 합니다.” 하니,注+② 庫莫奚는 北狄의 국명이니, 일명은 奚이다. 선대는 東胡로 宇文部의 別種이었는데, 뒤에 점점 많아져서 나누어 五部가 되니, 첫 번째는 辱紇主, 두 번째는 莫賀弗, 세 번째는 契箇, 네 번째는 水昆, 다섯 번째는 室得이다. 이들의 풍속은 목축을 하여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해서 자못 突厥과 같았다. 모용보가 그 말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澆洛水를 건넜다.注+③ 澆洛水는 바로 澆樂水이다. 李賢이 말하기를 “요락수는 바로 지금의 營州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目
【目】 이때 마침 南燕王 慕容德이 사자를 보내어 拓跋渉珪가 〈중국(중원)을 경략하고〉 서쪽으로 돌아가서 중국이 텅 비었다고 말하자,注+① ‘西上(서쪽으로 돌아갔다.)’은 中山에서 恒嶺을 취하고서 서쪽 雲中과 代 지역으로 돌아감을 말한 것이다. 慕容寶가 크게 기뻐해서 당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주둔지로 나아가게 하고 해산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慕容農과 長樂王 慕容盛이 강력히 간하기를 “군대가 피로하고 힘이 약한데 魏나라(北魏)가 새로 뜻을 얻었으니, 위나라와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모용보가 장차 그 말을 따르려 하였는데,
慕輿騰이 말하기를 “지금 병사들이 이미 모였으니 마땅히 성상의 마음에 홀로 결단하여 기회를 틈타 진취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용성을 남겨두어 후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고, 모여등을 前軍으로 삼고 모용농을 中軍으로 삼고 모용보를 後軍으로 삼으니, 서로의 거리가 각각 1頓이었다.注+② 1頓은 1舍와 같으니, 1舍는 30里이다.
目
【目】 長上 段速骨이 병사들의 마음이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꺼림을 인하여 마침내 난을 일으켜서 高陽王 慕容隆의 아들 慕容崇을 압박하여 세워 군주로 삼았다.注+① 長上은 宿衛의 관명이다. 모든 숙위하는 군대는 모두 번갈아 上番하게 하였으나, 長上은 番을 교대하지 않았다.
慕容寶가 십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慕容農의 병영으로 달아났는데, 모용농과 慕輿騰의 진영의 병사들 역시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싫어하여 달아나 흩어지니, 모용보가 마침내 달아나 龍城으로 돌아왔다.
綱
【綱】 〈晉나라(東晉)는〉 王愉를 都督江․豫州軍事로 삼았다.
目
【目】 會稽王 司馬道子가 王恭과 殷仲堪의 핍박을 꺼려 譙王 司馬尙之와 아우 司馬休之가 재주와 지략이 있다고 여겨 데려와 심복으로 삼았다.注+① 司馬尙之는 司馬恬의 아들이다.
사마상지가 말하기를 “지금 方鎭이 강성하고 宰輔의 권한이 가벼우니, 마땅히 밖에 심복을 심어놓아서 스스로 호위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마도자는 마침내 그의 司馬인 王愉를 江州刺史로 삼아서 江州와 豫州의 네 郡의 軍事를 都督하게 하고서 밤낮으로 모의하며 사방에 틈이 있기를 기다렸다.注+② 王愉는 王國寶의 형이다.
綱
【綱】 魏나라(北魏)가 새로 이주시킨 백성들에게 농지와 소를 주었다.
綱
【綱】 魏나라(北魏)가 爾朱羽健을 秀容川에 봉하였다.
目
【目】 秀容川의 酋長인 爾朱羽健이 魏王(北魏) 拓跋珪를 따라 晉陽과 中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탁발규는 그가 거주하는 곳을 빙 둘러 300리 땅을 떼어 봉하였다.注+① 이곳 秀容川은 北秀容이니, 漢나라 定襄郡의 경계에 있었다. 爾朱는 複姓이니, 그 선대는 契胡의 部落이다. 大人이 대대로 추장이 되어서 爾朱川에 거주하고 인하여 爾朱를 씨로 삼았다. 羽健은 그의 이름이다.
綱
【綱】 3월에 燕나라(後燕) 段速骨이 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燕主(後燕) 慕容寶가 나가 달아났는데, 尙書 蘭汗이 그를 유인하여 시해하였다.
目
【目】 燕나라 尙書 蘭汗이 은밀히 段速骨 등과 내통하여 군대를 이끌고 龍城의 동쪽에 주둔하였다.注+① 汗은 음이 寒이니, 蘭汗은 사람의 성명이다. 遼西王 慕容農이 밤중에 그곳으로 달려가자, 단속골이 그를 데리고서 성을 순행하였다.注+② ≪資治通鑑≫에 “慕容農이 지키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또 蘭汗에게 유인당하여 밤에 몰래 나가 달아나서 스스로 몸을 온전히 하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將은 이끎이고 위협함이다.
모용농은 본래 충절과 위엄과 명성이 있었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그를 믿고 힘껏 싸울 마음을 가졌는데, 그가 갑자기 성 아래에 있음을 보고는 모두 놀라고 士氣를 상실하여 마침내 모두 달아나 무너졌다.
단속골이 성안으로 들어가서 군대를 풀어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燕主 慕容寶와 長樂王 慕容盛 등이 경무장한 기병을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目
【目】 段速骨은 高陽王 慕容崇이 나이가 어리다 하여 다시 慕容農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모용숭의 도당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모용농을 죽였다.
蘭汗이 단속골을 습격하여 죽이고 모용숭을 폐위하고서 태자 慕容策을 받들고서 制命을 받들어 사자를 보내어 慕容寶를 맞이해서 薊城에 이르렀다.
慕容盛 등이 말하기를 “난한이 충성을 바치는 것인지 속이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남쪽으로 范陽王(慕容德)에게 나아가서 병력을 연합하여 冀州를 점령하는 것만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면 천천히 龍城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용보가 이 말을 따라 행군하여 黎陽에 이르러 中黄門令 趙思를 보내어서 범양왕 모용덕에게 고하여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모용덕은 慕輿護를 보내어 장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 조사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서 모용보를 맞이하여 호위한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실제로는 모용보를 도모한 것이었다.
目
【目】 慕容寶가 이미 趙思를 보냈는데, 慕容德이 이미 황제의 制命을 칭했다는 말을 듣고는 또한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달아나니, 慕輿護가 이르렀으나 보이는 바가 없었다.
조사를 잡아 돌아가니, 모용덕은 그가 典故에 익숙하다 하여 머물러두어 등용하고자 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개와 말도 오히려 주인을 그리워할 줄 아니, 내가 비록 환관이나 上(모용보)에게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하였다.注+① 환관을 刑臣이라 이른다. 上은 慕容寶를 이른다.
모용덕이 굳이 만류하자, 조사가 노하여 말하기를 “殿下는 친족으로는 숙부가 되고 지위로는 上公이 되는데, 제후들의 솔선이 되어 황실을 바로잡지 못하고 근본이 되는 지역이 기운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目】 慕容寶가 長樂王 慕容盛을 보내어 冀州에서 군대를 수합하고 鉅鹿에 이르러 호걸들을 설득하니, 모두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였다. 이때 마침 蘭汗이 사자를 보내어 모용보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모용보는 난한이 燕主 慕容垂의 외숙이고 모용성의 妃의 부친이니, 반드시 다른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침내 길을 떠났다.
모용성이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도록〉 굳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모용성은 마침내 장군 張眞과 함께 사잇길로 피하여 숨었다.
모용보가 龍城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갔을 때에 난한이 아우 蘭加難을 보내어 기병 500을 거느리고서 바깥 저택으로 맞아들여서 모용보를 죽이고 태자 慕容策과 王公과 卿士 백여 명을 죽이고는 스스로 昌黎王을 칭하였다.
目
【目】 慕容盛이 國喪(慕容寶의 喪)에 달려가고자 하였는데, 張眞이 저지하자, 모용성이 말하기를 “내 지금 곤궁한 몸으로 蘭汗에게 돌아가면 난한은 성품이 어리석고 얕아서 반드시 옛날 혼인한 정을 생각하여 차마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되면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충분히 나의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찾아가서 난한을 만나보았다.
난한의 아내 乙氏와 모용성의 妃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모용성을 초청하자, 난한이 매우 가엾게 여기고서 마침내 모용성을 宮中에 머물게 하여 侍中으로 삼아 옛날처럼 친하게 대하였다.
난한의 형 蘭提가 교만하고 사나우며 음탕하여 난한을 섬김에 예의가 없자 모용성이 인하여 이간질하니, 난한의 형제가 점점 서로 혐의하고 시기하였다.
綱
【綱】 北涼이 涼나라(後涼)를 공격하여 西郡과 晉昌, 敦煌, 張掖을 점령하였다.注+① 西郡은 武威 서쪽에 있으니, 고개[嶺]의 요지에 해당한다.
綱
【綱】 여름 6월에 涼나라(後涼)의 呂纂이 楊軌와 郭黁(곽논)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綱
【綱】 가을 7월에 燕나라(後燕) 長樂王 慕容盛이 蘭汗을 토벌하여 죽이고 황제의 일을 대행하여 다스렸다.
目
【目】 燕나라 太原王 慕容奇는 慕容楷의 아들이고, 蘭汗의 외손이다. 난한이 그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이에 모용기가 궁에 들어가서 慕容盛을 만나자〉 長樂王 모용성이 은밀히 그로 하여금 도망해 나와 군대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자 난한이 仇尼慕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모용기를 토벌하게 하였다.注+① 仇尼는 複姓이다.
이때 龍城에 여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7월까지 이어졌다. 난한은 날마다 燕나라의 여러 사당에 나아가 기도하고 비가 내리기를 청하였고 蘭加難에게 죄를 떠넘기자,注+② 〈蘭加難에게 죄를 떠넘겼다는 것은〉 慕容寶를 시해한 난가난의 죄를 말한 것이다. 난가난이 이 말을 듣고 노해서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서 구니모의 군대를 기습하여 깨트렸다.
난한이 태자 蘭穆을 보내어 난가난을 토벌하니, 난목이 난한과 함께 모용성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目
【目】 李旱과 張眞은 모두 慕容盛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蘭穆이 이한과 장진을 데려다가 심복으로 삼으니, 이한 등이 몰래 모용성과 결탁하여 도모하였다.
난목이 蘭加難을 격파하고 돌아와 장병들에게 연향을 베풀 적에 난한과 난목이 모두 술에 취하였다. 모용성이 인하여 담을 뛰어 넘어 동궁으로 들어가서 이한 등과 함께 난목을 죽였다.
여러 군영에서는 모용성이 탈출해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함성을 지르고 앞을 다투어 난한을 공격하여 참수하니, 온 나라가 평정되고 백성이 서로 경하하였다.
目
【目】 慕容盛이 太廟에게 고유하고 인하여 명령을 내리기를 “다섯 선조의 아름다움과 文武 관원의 도움을 받아 어두워진 사직이 다시 밝게 드러났으니,注+① ‘五祖’는 慕容涉歸, 慕容廆, 慕容皝, 慕容儁, 慕容垂의 다섯 사당을 이른다. 이는 다만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서 원수와 하늘을 함께하지 않는 책임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注+② ≪禮記≫에 “아버지의 원수는 자식이 그와 더불어 한 하늘을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눈을 밝게 뜨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하고는
마침내 大赦令를 내리고 改元하고 長樂王으로서 황제의 일을 섭행하여 다스리고, 慕容奇에게 명하여 군대를 해산하게 하였다.
모용기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3만 병력을 무장하여 横溝로 전진하자, 모용성이 나가 공격하여 깨트리고 모용기를 잡아 賜死하였다.注+③ 橫溝는 龍城과의 거리가 10리이다.
綱
【綱】 魏나라(北魏)가 平城으로 천도하였다.
目
【目】 魏나라가 平城으로 천도하고서 처음으로 宮室을 경영하여 宗廟를 세우고 社稷을 세웠다. 宗廟에는 해마다 다섯 번 제사하였는데, 分至와 臘日을 사용하였다.注+① 魏나라는 平城에 도읍하면서 代尹과 司州를 平城에 설치하였으니, 여기서 말한 宗廟는 代都의 東廟이다. ‘分至及臘’은 春分과 秋分, 夏至와 冬至, 臘日을 이른다.
綱
【綱】 〈晉나라(東晉)의〉 王恭과 殷仲堪, 南郡公 桓玄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여 환현이 江州를 함락하였다.
目
【目】 桓玄이 廣州刺史가 되기를 청하자 會稽王 司馬道子가 환현이 荆州에 있음을 꺼려서 그의 말을 따르니, 환현은 명령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았다.
豫州刺史 庾楷는 사마도자가 네 郡을 떼어 王愉에게 소속시켰다 해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江州는 강남의 内地이고 西府는 북쪽으로 冦戎과 이어졌으니, 왕유로 하여금 나누어 감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注+① 庾楷는 庾亮의 손자이다. 江州는 尋陽을 치소로 하였으니 장강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內地라고 말한 것이다. 晉나라는 京口를 北府라 하고 歷陽을 西府라 하니, 豫州는 歷陽을 치소로 하여 장강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北帶寇戎’이라고 말한 것이다.
조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유해가 노하여 그 아들 庾鴻을 보내어 王恭을 설득하기를 “司馬尙之 형제가 다시 정권을 잡아서 方鎭을 깎아내리고자 하니, 마땅히 일찍 도모해야 한다.”라고 하였다.注+② 司馬尙之 형제는 譙王 사마상지와 아우 司馬休之를 이른다.
目
【目】 王恭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殷仲堪과 桓玄에게 고하니 모두 반란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왕공을 맹주로 추대하고 날짜를 잡아 함께 京師로 달려가기로 하였는데, 司馬 劉牢之가 간하기를 “會稽王 司馬道子는 천자의 숙부이고 또 국가의 정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장군을 위하여 그가 아끼는 자들을 죽였으니, 장군에게 굴복한 것이 이미 많습니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戮其所愛’는 王國寶와 王緖를 죽임을 이른다. 지난번에 관직을 제수하여 맡긴 것이 비록 진실로 합당하지는 못하나 또한 큰 실수가 없었고 庾楷의 네 郡을 떼어서 王愉에게 소속한 것도 장군에게 무슨 손해가 되기에 晉陽의 군대를 어찌 자주 일으킬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目
【目】 王恭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表文을 올려 王愉와 司馬尙之 형제를 토벌할 것을 청하니, 조정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도성 안팎에 계엄을 선포하였다.
司馬道子는 어찌할 방법을 알지 못하여 모두 일을 세자인 司馬元顯에게 맡기고, 날마다 독한 술을 마실 뿐이었다.
사마원현은 총명하여 문장을 상당히 섭렵하였고 志氣가 과감하고 용맹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의 안위를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그를 따르는 자가 이르기를 “그가 英明하고 무용이 있어서
【目】 殷仲堪은 王恭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무장하여 서둘러 출발할 적에 모든 軍事를 南郡相 楊佺期 형제에게 맡기니,注+①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양전기가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서 선봉이 되고 桓玄이 그 다음이 되고 은중감이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서 서로 이어서 내려갔다.
目
【目】 楊佺期는 스스로 자기 선조가 漢나라 太尉 楊震으로서 아버지 楊亮에 이르기까지 9대가 모두 재주와 덕으로 명망이 드러났다고 하여 자기 문벌을 자랑하면서 江左에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여겼으나, 당시 時流들은 그가 뒤늦게 長江을 건너와서 혼인하고 벼슬한 것이 걸맞지 않고 형제가 모두 성품이 거칠고 추악하다 하여 매번 배척하고 억제하였다.注+① 楊佺期의 증조부 楊準은 晉나라의 太常이었으니, 楊震으로부터 양준에 이르기까지 7대가 모두 명망과 덕이 있었다. 조고 楊林은 젊어서부터 재주와 명망이 있었는데, 병난을 만나 오랑캐(匈奴)에게 죽고 부친 楊亮은 젊어서
에서 벼슬하다가 뒤늦게 晉나라로 돌아오니, 王氏와 謝氏 등 여러 집안에 비하면 〈강남으로 온 것이〉 늦었다. 양량과 양전기는 모두 武力으로 벼슬을 하였고 傖荒(東晉과 南朝 시기 南人이 北人을 멸시한 말)과 혼인하였으므로 ‘失類’라 한 것이다. ‘時流’는 時輩라는 말과 같다. 麤는 粗와 통하니, 마음이 정밀하지 못한 것이다. 獷은 古猛의 切이니, 개의 추악함과 같아서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양전기와 그의 형 楊廣, 아우 楊思平, 從弟 楊孜와 楊敬이 모두 성품이 거칠고 추악하였다.
양전기는 항상 이를 갈면서 事變을 인하여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역시 殷仲堪의 계책을 찬성하였다.
8월에 양전기와 桓玄이 갑자기 湓浦의 어구에 이르니, 王愉는 이에 대비함이 없었다. 왕유가 두려워하고 급하여 臨川으로 달아나니, 환현이 추격하여 사로잡았다.注+② ‘湓口’는 湓浦의 어구이다. 晉나라 사람은 이곳에 성을 쌓고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吳나라 孫亮 太平 2년(257)에 豫章의 東部都尉를 나누어서 臨川郡을 세웠다.
綱
【綱】 魏나라(北魏)가 사자를 보내어 郡國을 순행하게 하였다.
目
【目】 魏王 拓跋珪가 有司에게 명하여 封畿(왕도와 기내)를 바로잡고 道路의 里數를 표시하고 저울추와 저울대를 바르게 하고 度量을 살폈으며 사자를 보내어 郡國을 순행해서 수령 중에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을 살피게 하고서 직접 考課하고 살펴서 내치거나 올려주었다.注+① 宋白이 말하였다. “魏나라(北魏) 道武帝가 平城에 도읍하니, 동쪽으로는 上谷軍 都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河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中山의 隘門塞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五原에 이르러 땅이 사방 1천 리였는데, 이곳을 甸服이라 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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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9월에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黄鉞을 더해주고 王恭을 토벌하게 하니, 왕공의 司馬 劉牢之가 왕공을 잡아 항복하므로 왕공을 참수하고, 유뇌지를 都督青․兗七州軍事로, 桓玄은 江州刺史로, 楊佺을 雍州刺史로 삼고, 殷仲堪에게 칙명을 내려서 회군하게 하였다.
目
【目】 9월에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黄鉞을 더해주고 세자 司馬元顯을 征討都督으로 삼고 王珣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王恭을 토벌하게 하고,
譙王 司馬尙之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庾楷를 토벌하게 하였다. 사마상지가 유해를 牛渚에서 대파하자, 유해가 桓玄에게로 달아났다.
환현이 관군을 白石에서 대파하고 전진하여 横江에 이르니, 사마상지가 후퇴하여 달아났다.注+① 白石은 巢縣의 경계에 있다. ≪水經註≫에 “柵江은 수원이 巢湖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왼쪽으로 淸溪水와 합류하니, 이곳을 淸溪口라고 한다. 柵水가 또 동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白石山의 물과 만나니, 물이 백석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李鵲城 남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柵水에 주입된다.”라고 하였다. 사마도자가 中堂에 주둔하고 사마원현이 石頭를 지키고 왕순이 北郊를 지키면서 대비하였다.
目
【目】 王恭이 평소 재주와 문벌이 높다 하여 남을 능멸하였는데, 王國寶를 죽이고 나자 스스로 위엄이 행해지지 못함이 없다고 여겨 劉牢之를 의지하여 호위하는 심복으로 삼았으나 그를 部曲의 장수로 천하게 대우하니,注+① 將(장수)은 郞亮의 切이다. 유뇌지가 재주를 믿고 원한을 품었다.
司馬元顯은 이것을 알고는 사람을 보내어 유뇌지를 설득해서 하여금 왕공을 배반하게 하고서 일이 이루어지면 왕공의 지위와 칭호를 주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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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劉牢之가 그의 아들 劉敬宣에게 이르기를 “王恭은 황제(晉 安帝)의 외숙이 되어서 황실을 도와 떠받들지 못하고 자주 군대를 일으켜 京師를 향하니, 내 그를 토벌하고자 하노니 어떠한가.” 하였다.
유경선이 대답하기를 “조정(황제)이 비록 周나라의 成王과 康王의 아름다운 정사가 없으나 또한 幽王과 厲王의 포악함이 없는데, 왕공이 자기 군대의 위세를 믿고서 황실을 능욕하고 멸시하니, 大人(부친)께서는 그와 골육 간의 친족이 아니요, 군신 간의 의리도 없습니다. 오늘날 토벌하는 것이 情과 義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目
【目】 參軍 何澹之가 이러한 계책을 알고 王恭에게 고하니, 왕공은 믿지 않고서注+① ≪資治通鑑≫에 “王恭은 河澹之가 평소 劉牢之와 틈이 있으므로 믿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다시 술자리를 베풀어 劉牢之에게 절하며 형이라 하고 예리한 병기와 견고한 갑옷을 모두 유뇌지에게 맡겨서 帳下督 顔延을 통솔하여 선봉이 되게 하였다.
유뇌지가 竹里에 이르러서 안연을 참수하고 항복한 다음 劉敬宣을 보내어 도리어 왕공을 기습하게 하니, 왕공의 군대가 무너져서 도망하여 달아나다가 남에게 사로잡혀 京師로 압송되어 참수당하였다.
目
【目】 王恭은 형벌을 받을 적에 정신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여 형벌을 감독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사람을 믿는 데 어두워서 이 지경에 이르렀노라.注+① 〈‘我闇於信人’은〉 모든 군사의 일을 유뇌지에게 위임함을 스스로 후회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따져보면 어찌 社稷에 충성하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百世의 뒤에 이 왕공이 있음을 알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왕공을 대신하여 劉牢之를 都督과 刺史로 삼아 京口에 진주하게 하였다.
目
【目】 얼마 후 楊佺期와 桓玄이 石頭에 이르고 殷仲堪이 蕪湖에 이르러 표문을 올려서 王恭을 변호하고 劉牢之를 죽일 것을 요구하니, 유뇌지가 北府의 군대를 거느리고 京師로 달려와서 新亭에 주둔하였다.
양전기와 환현은 유뇌지를 보고 모두 실색하여 蔡洲로 회군하였다.注+① 胡三省이 말하였다. “蔡洲는 지금 建康府 上元縣 서쪽 25리 지점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서쪽 군대의 허실을 알지 못하여 안으로 근심하고 밖으로 핍박을 받았다.注+② 〈‘内外憂逼’은〉 안으로 근심하고 밖으로 핍박받음을 말한 것이다.
目
【目】 桓脩가 司馬道子에게 말하기를注+① 桓脩는 桓仲의 아들이다. “지금 만약 많은 이익으로 桓玄과 楊佺期를 유인하면 두 사람이 반드시 마음속으로 기뻐할 것이니, 환현으로 殷仲堪을 제재할 수 있고 양전기로 창을 거꾸로 잡고서 은중감을 잡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마도자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환현을 江州刺史로, 양전기를 雍州刺史로 삼고 은중감을 내쳐 廣州刺史로 삼고, 사자를 보내어 조명을 내려서 은중감으로 하여금 회군하도록 칙명하였다.
綱
【綱】 南涼이 嶺南의 5개 郡을 점령하였다.
目
【目】 楊軌가 廉川에 주둔하여 夷族과 漢族을 수합하니, 무리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사자를 보내어 南涼에 항복하였는데, 양궤가 얼마 후 羌族의 추장인 梁飢에게 패하여 서쪽으로 𠏡海로 달아나니,注+① 𠏡은 零과 같으니, 음이 憐이다. 闞駰이 말하기를 “金城의 臨羌縣 서쪽에 卑和羌海가 있다.”라고 하였고, 酈道元이 말하기를 “옛날 西零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양기가 마침내 西平을 공격하였다.
南涼王 秃髪烏孤가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신하들은 양기의 군대가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망설였다.
目
【目】 左司馬 趙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楊軌가 막 패하였고 呂氏(後涼)가 한창 강성하니, 洪池 이북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嶺南의 다섯 郡은 아마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注+① 洪池는 고개 이름이니, 涼州 姑臧의 남쪽에 있다. 嶺南은 洪池嶺의 남쪽을 이른다. 다섯 군은 廣武郡, 西平郡, 樂都郡, 澆河郡, 湟河郡을 이른다. 대왕께서 만약 국경을 개척할 원대한 뜻이 없으시다면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기필코 사방을 경영하고자 하신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羌族들로 하여금 西平을 얻어 夷族과 漢族이 진동하면 우리의 이익이 아닙니다.”
秃髪烏孤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때를 틈타 공을 세우고자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궁벽한 골짝을 지키겠는가.”라고 하고는注+② 廉川은 변방 밖(만리장성 밖)에 있으므로 궁벽한 골짜기라 한 것이다. 마침내 진격하여 梁飢를 크게 격파하자, 樂都와 湟河와 澆河의 太守가 모두 郡을 가지고 항복하였고, 嶺南의 羌族과 胡族 수만의 부락이 모두 독발오고에게 붙으니, 독발오고가 다시 武威王을 칭하였다.
綱
【綱】 겨울 10월에 燕나라(後燕) 長樂王(慕容盛)이 황제를 칭하였다.
綱
【綱】 〈晉나라가〉 또다시 殷仲堪으로 荆州와 益州의 軍事를 감독하게 하니, 은중감 등이 군대를 해산하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目
【目】 殷仲堪이 詔書를 얻고 크게 노하고 桓玄과 楊佺期를 재촉하여 진군하게 하였다.注+① 詔書를 얻었음은 廣州로 내치는 詔書를 얻은 것이다.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환현 등은 조정의 명령에 기뻐하여 지시를 받고자 하였는데, 은중감이 갑자기 蕪湖에서 남쪽으로 돌아가
에게 고유하기를 “너희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내 江陵에 가서 너희들의 남은 식구를 다 죽이겠다.”라고 하였다.注+② ‘餘口’는 蔡洲의 군사 중에 江陵에 가솔을 남겨둔 자를 이른다.
양전기가 거느리고 있던 2천 명이 먼저 돌아가니, 환현 등은 크게 두려워하여 바삐 서쪽으로 돌아가서 은중감을 쫓아가 尋陽에 이르러 따라잡았다.
目
【目】 殷仲堪이 이미 직책을 잃자, 桓玄 등에게 의지하여 지원세력으로 삼고 환현 등이 또한 은중감의 병력에 의뢰하니, 비록 속으로는 의심하고 사이가 막혔으나 형편상 연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자제를 보내어 서로 인질로 삼은 뒤에 맹약하고 연명하여 상소해서 王恭을 변호하고 劉牢之와 譙王 司馬尙之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으며, 아울러 은중감에게 죄가 없음을 하소연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매우 두려워하여 마침내 다시 荆州를 은중감에게 돌려주고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 위로하고 타일러 달랬다.
目
【目】 殷仲堪 등이 마침내 조명을 받들고 桓玄을 맹주로 추대하니, 환현은 더욱 스스로 자랑하고 거만하였다. 이에 楊佺期는 매우 원망하여 은밀히 은중감을 설득하여 환현을 기습하게 하였다.
은중감은 양전기 형제가 용맹하고 건장함을 시기하여 환현을 죽이고 나면 다시 제재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해서 굳이 만류하니, 이에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환현은 이것을 알고서 또한 양전기를 취할 뜻이 있어서 마침내 夏口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卞範之를 데려다가 謀主로 삼았다. 이때 詔書가 내려왔으나 유독 庾楷만 사면하지 않았으니, 환현은 유해를 武昌太守로 삼았다.
綱
【綱】 12월에 魏王(北魏) 拓跋珪가 황제를 칭하였다.
目
【目】 魏王 拓跋珪가 吏部郞 鄧淵에게 명하여 官制를 확립하고 音律을 맞추게 하고, 儀曹郞 董謐이 禮儀를 만들고, 三公郞 王德이 律令을 정하고, 太史令 鼂崇이 天象을 상고하고, 尙書 崔宏이 총괄해 제재해서 영원한 법식으로 만들게 하였다.注+① 鄧淵은 鄧羌의 손자이다. 吏部, 儀曹, 三公郞은 모두 曹魏(삼국시대 魏나라) 때에 설치한 것이다.
目
【目】 12월에 拓跋珪가 황제에 즉위하고는 朝野에 명해서 모두 머리를 묶어 상투를 틀고 冠帽를 쓰게 하고,注+① 帽는 어린아이의 머리에 씌우는 오랑캐의 모자이다. ≪晉書≫ 〈輿服志〉에 “帽는 冠과 같다. 뜻이 그 머리를 덮어 씌움을 취하였으니, 본래 纚(머리싸개)이다. 옛날 冠은 幘(망건)이 없어서 관 아래에 纚가 있고 이것을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후세에 幘을 冠에 베풀고 인하여 다시 纚를 잘라 帽를 만들어서 황제가 사사로이 거처할 때로부터 관작이 없는 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착용하였다. 江左 때에 野人들이 이미 帽를 착용하고 人士들도 왕왕 그러하였으나, 다만 정수리를 둘렀을 뿐이었는데, 뒤에 마침내 그 뚜껑을 높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纚는 所爾의 切이다. 먼 선조인 拓跋毛 이하 27명을 추존하여 모두 황제라 하였다.
魏나라(北魏)의 옛 풍속은 4월에 하늘 및 東廟에 제사하고, 6월에 무리를 모아 陰山에서 서리가 내리지 말라고 기도하고, 7월에 西郊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는데,注+② 〈東廟는〉 宗廟가 동쪽에 있는 것이니, 이는 또한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옛 제도를 따라서 郊祭와 종묘, 조정의 연향 등의 禮樂을 정하고 또다시 崔宏의 의논을 따라 스스로 黃帝의 후손이라 하여 土德으로 왕 노릇 하고 6개의 州와 22개의 郡의 守宰와 豪傑 2천 가호를 代都로 옮겼으며, 동쪽으로 代都에 이르고 서쪽으로 善無에 이르고 남쪽으로 陰館에 이르고 북쪽으로 參合 끝까지를 모두 畿內로 삼고는 그 외 四方과 四維에 八部師를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注+③ 魏나라(北魏)는 平城에 도읍하고 평성을 代都라 하였으니, 漢나라가 건국했을 때 〈代郡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善無縣은 漢나라 때에는 雁門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定襄郡에 속하였는데 元魏(北魏) 天平 2년(535)에 善無郡을 설치하였다. ≪漢書≫ 〈地理志〉에 “陰館縣은 雁門郡에 속하니 본래 樓煩鄕이었는데 景帝 後元 3년(B.C. 141)에 陰館縣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累頭山이 있으니 治水가 발원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五代志≫(≪隋書≫ 〈地理志〉)에 “代州의 雁門縣에 纍頭山이 있으니, 漢나라의 陰館縣은 이미 雁門縣으로 합병되어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八部師는 ≪魏書≫에 八部帥로 되어 있으니, 八部帥가 백성들에게 농사와 밭 가는 일을 권장하고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지방관의
【目】 처음에 孫泰가 杜子恭에게 요망한 방술을 배우니, 士人과 백성들이 많이 그를 받들었다. 王珣이 그를 미워하여 손태를 廣州로 유배 보냈는데, 王雅가 그를 孝武帝에게 천거하면서 ‘養生하는 방법을 안다.’라고 말하니, 효무제가 불러 여러 번 벼슬을 주어 벼슬이 新安太守에 이르렀다.
손태는 晉나라의 국운이 장차 끝날 줄을 알고 王恭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병기를 수집하고 재화를 모아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으나, 中領軍 司馬元顯이 그와 친하다 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마침 會稽内史 謝輶가 그의 음모를 발설하니, 會稽王 司馬道子가 유인하여 참수하고 그의 여섯 아들을 함께 죽였다.
손태의 형의 아들 孫恩이 도망하여 海島로 들어갔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손태가 매미 껍질을 벗듯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물자를 공급하니,注+① 蛻는 輸芮와 吐外의 두 切이다.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을 蛻라 한다. 神仙家에 尸解라는 설이 있으니, 시신이 해체되어 신선으로 올라가기를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과 같이한다고 한다. ‘資給之’는 ≪資治通鑑≫에 ‘資給恩(孫恩에게 물자를 주다.)’이라고 되어 있다. 손은이 마침내 망명 온 자들을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어서 복수할 것을 도모하였다.
역주
역주1[燕平] :
저본에는 ‘燕平’이 없으나, ≪資治通鑑綱目≫의 기술 방식에 따라 추가하였다.
역주2燕慕容德……麟謀反伏誅 :
“慕容麟을 ‘反’이라고 쓰고 ‘誅’라고 썼으니, 慕容德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을 인정한 것인가. 모용덕을 인정한 것이 아니요, 모용린을 죄책한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죄책하였는가. 모용덕에게 존호를 올린 자도 모용린이고 배반한 자도 또한 모용린이다. ‘伏誅’라고 쓴 것은 번복하여 불충함을 징계한 것이다.[麟書反書誅 其予德之自王乎 非予德也 罪麟也 曷爲罪之 上尊號者 麟也 反之者 亦麟也 書曰伏誅 所以懲反覆也]” ≪書法≫
역주3(往)[征] :
저본에는 ‘往’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趙王 司馬倫의 짓 :
사마륜(?~301)은 晉나라의 趙王으로 자는 子彝이며, 晉나라 宣帝 司馬懿의 9번째 아들이다. 王位를 찬탈하여 차지했다가 다시 뒤집혀서 사약을 받았다. 또 정권을 전횡하면서 封爵을 남발하여 관리들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담비 꼬리가 부족해지자 개 꼬리로 대신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 꼬리로 잇네.[貂不足 狗尾續]”라고 하였다.(≪晉書≫ 권59 〈趙王倫列傳〉)
역주5申包胥가……것 :
春秋時代 楚나라 사람으로, 昭王의 大夫를 지냈다. 伍子胥가 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 수도인 郢을 함락하자, 秦나라의 哀公에게 7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감동한 秦나라 애공은 구원병을 보내어 결국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史記≫ 권66 〈伍子胥列傳〉)
역주6龔君賓이……것 :
君賓은 龔勝의 字인데, 漢나라 哀帝 때 사람으로, 세 번 孝廉의 추천을 받아 諫議大夫가 되었다. 그가 諫官이 되자 자주 상소하여 조정의 정사를 논하였고, 뒤에 외직으로 나가 渤海太守로 있었는데, 王莽이 帝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왕망이 사자를 보내어 上卿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문인 高暉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만간에 땅속으로 들어갈 터인데, 어찌 한 몸으로 두 성씨를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14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漢書≫ 권72 〈兩龔傳〉)
역주7(復)[複] :
저본에는 ‘復’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明帝 :
東晉의 황제였던 司馬紹를 가리킨다. 太寧 2년(324)에 王敦이 반란을 일으키자 직접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역주9僞朝 :
오호십육국 시기 오랑캐의 조정 중 하나인 姚襄의 세력을 가리킨다. 356년 東晉의 桓溫이 북벌을 개시하여 洛陽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요양을 공격하여 낙양을 회복하였다. 이때 요양의 밑에 있던 楊亮이 환온에게 투항하였다.
역주10加會稽王……使回軍 :
“앞에서는 ‘桓玄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여 江州를 함락하였다.’라고 썼고 여기서는 ‘환현을 江州刺史로 삼았다.’라고 썼으며, 여기서는 ‘殷仲堪에게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했다.’라고 썼고 이 아래에는 ‘다시 은중감으로 荆州와 益州의 軍事를 감독했다.’라고 썼으니, 晉나라에 정사가 없음이 더욱 심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桓玄과 楊佺期를 劉牢之와 똑같이 쓴 것은 진나라가 賞을 내림에 법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前書桓玄擧兵反 陷江州矣 此書以桓玄爲江州刺史 此書敕殷仲堪 使回軍矣 下書復以殷仲堪督荆益軍 晉之無政 益甚矣 綱目以桓楊 與牢之同書 所以見晉賞之無章也]” ≪書法≫“王恭과 殷仲堪이 원래 함께 반란하였다. 그러나 유독 왕공을 토벌하게 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왕공은 두 차례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였고 또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유독 그를 토벌함을 지극히 한 것이요, 劉牢之는 왕공의 부장이었는데 왕공을 잡아서 항복하였으니, 또한 이를 다시 혐의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당시 다시 典午(東晉의 司馬氏)가 쇠미해서 여러 軍鎭이 다투어 반란을 일으켰다. 왕공이 비록 죽었으나 여러 흉악한 자들이 여전히 주벌을 피하였고 심지어는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다시 군대로 막고 따르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晉나라의 정사가 없음을 또한 알 수 있다. ≪資治通鑑綱目≫에 이것을 자세하게 구비하여 썼으니, 이를 서글퍼 한 것이다.[恭仲堪元同反 然獨討恭 何也 恭再擧兵向闕 且身爲盟主 故朝廷獨致其討 而牢之是其部將 執之以降 亦不復爲嫌也 當是時 典午衰微 諸鎭鬨亂 王恭雖死 而群凶尙爾逋誅 甚至敕使回軍 猶復旅拒不從 晉之無政 抑可知矣 綱目備而書之 蓋傷之也]” ≪發明≫
역주11原 :
참고로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는 ‘然’으로 되어 있다.
역주12復以殷仲堪……罷兵還鎭 :
“‘復以’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조정에서 마음대로 명령하지 못함을 비난한 것이다. 다시 荆州와 益州를 감독하게 한 뒤에야 군대를 해산하였으니, 殷仲堪을 쓴 것은 괜찮지만 어찌하여 ‘等’이라고 썼는가. 은중감이 지위를 회복하지 않았으면 두 鎭(桓玄과 楊佺期)의 군대가 여전히 해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晉나라의 약함과 세 진영의 패악함이 더욱 나타난다. ‘復以’는 네 가지의 예가 있으니, 허물을 고친 말이 있고, 허물을 두 번 저지른 말이 있고, 능히 호령하지 못하는 말이 있고, 그대로 따른 말이 있다. 은중감이 형주와 익주의 군사를 도독한 것과 唐나라 時溥가 感化節度使가 된 것과 王建이 西川節度使가 된 것과 崔㣧이 司空 同平章事가 된 것과 後唐의 石敬瑭이 河東節度使가 된 것은 모두 조정에서 마음대로 명령하지 못한 말이다.(漢나라 文帝 14년(B.C. 166)에 자세히 보인다.)[書復以 何 譏不能令也 復督荆益而後罷兵 書仲堪可也 曷爲以等書之 仲堪不復 則二鎭之兵 猶未罷也 然則晉之弱 三鎭之悖 益見矣 復以之例有四 有改過之辭 有貳過之辭 有不能令之辭 有因仍之辭 殷仲堪督荆益軍 唐時溥感化節度 王建西川節度 崔㣧司空同平章事 後唐石敬瑭河東節度使 皆不能令之辭也(詳漢文帝十四年)]”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