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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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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宗孝武皇帝寧康元年이라
秦建元九年이라
春二月 하다
桓溫 來朝어늘 詔吏部尙書謝安 侍中王坦之하여 迎于新亭하다 都下恟恟하여 云 欲誅王謝하고 因移晉祚라하니
坦之 甚懼호되 神色不變하여 曰 晉祚存亡 決於此行이라하니라
旣至 百官 拜於道側하니 大陳兵衛하고 延見朝士
坦之 流汗沾衣하고 倒執手版호되 從容就席하여 謂溫曰 安聞諸侯有道 守在四隣이라하니 明公 何須壁後置人邪注+① 守在四隣, 謂古之諸侯親仁善隣, 故隣國不侵, 皆爲之守衛. 左傳楚沈尹戌曰 “天子守在四夷, 諸侯守在四隣.”
笑曰 正自不能不爾라하고 遂命撤之하고 與安笑語移日이러라
郗超卧帳中하여 聽其言이라가 風動帳開하니 笑曰 郗生 可謂入幕之賓矣로다
天子幼弱하고 外有彊臣호되 安與坦之 盡忠輔衛하여 卒安晉室하니라
三月 有疾하여 還姑孰하다
疾篤 諷朝廷하여 求九錫하여 屢使人趣之어늘 謝安, 王坦之 故緩其事하여 使袁宏具草注+① 有心爲之, 謂之故.하니
宏以示王彪之한대 彪之歎其文辭之美하고 因曰 卿固大才 安可以此示人注+② 言不當爲此文也.이리오
見其草하고 輒改之하니 由是 歷旬不就러라
溫弟江州刺史沖 한대 溫曰 渠等 不爲汝所處分也注+③ 吳俗, 謂他人爲渠儂.리라
溫以世子熙이라하여 使沖領其衆이러니 溫卒 熙及弟濟謀殺沖이어늘
徙之長沙하고 稱溫遺命하여 以少子玄爲嗣하니 時方五歲 襲封南郡公하다
旣代溫居任 盡忠王室하여 勸誅除時望호되 不從이러라
溫在鎭 死罪 皆專決이러니 沖以爲生殺之重 當歸朝廷이라하여 須報後行하니라
謝安 以天子幼沖이라하여 欲請崇德太后臨朝한대 彪之曰 上年 垂及冠婚이어시늘 反令從嫂臨朝 豈所以光揚聖德乎注+① 帝, 元帝之孫, 於康帝爲從弟, 故太后爲從嫂.리오
不欲委任桓沖이라 使太后臨朝하고 己得專決하여 遂不從其言하다
彪之與共掌朝政하니 每歎曰 朝廷大事 衆所不能決者 以諮王公하면 無不立決이라하니라
秦寇梁益하여 陷之하다
秦王堅 使王統朱肜으로 帥卒二萬하여 出漢川하고 毛當徐成으로 帥卒三萬하여 岀劍門하여 以冦梁益注+① 統, 擢之子也. 漢川, 卽漢中郡之地.하니 梁州刺史楊亮 拒之라가 戰敗하다
遂拔漢中하고 徐成亦克劍門하고 楊安 進攻梓潼한대 太守周虓 固守涪城하여 遣歩騎하여 送母妻하여 趣江陵이러니 邀而獲之하니 虓遂降注+② 虓, 楚之孫也. 虓, 虛交切.하다
十一月 秦取二州하니 邛筰夜郞 皆附之어늘 秦以楊安鎭成都하고 毛當鎭漢中하고 姚萇屯墊江하고 王統鎭仇池注+① 墊, 音疊.하다
欲以周虓爲尙書郞한대 虓曰 蒙晉厚恩이러니 但老母見獲하여 失節於此하니 母子獲全 秦之惠也 雖公侯之貴라도 不以爲榮하노라하고 遂不仕하고 毎見堅 或箕踞而坐하여 呼爲氐賊注+① 堅, 本氐也, 故以氐賊呼之. 此必虓母死後事.이러라
嘗値元會하여 儀衛甚盛이러니 問之曰 晉朝元會 與此何如 虓攘袂厲聲曰 犬羊相聚하여 何敢比擬天朝注+② 秦之君臣, 皆六夷也, 故詆之爲犬羊. 天朝, 謂晉也.리오 秦人 以虓不遜이라하여 屢請殺之하되 待之彌厚러라
以王坦之爲中書令하여 領丹楊尹하다
하다
彗星 出于尾箕하니 長十餘丈이라 經太微하고 掃東井하여 自四月見하여 及冬不滅注+① 長, 直亮切.이러라
秦太史令張孟 言尾箕 燕分이요 東井 秦分也注+② 天文志 “尾九星․箕四星, 燕幽州分, 東井八星, 秦雍州分.” 今彗起尾箕而掃東井하니 十年之後 燕當滅秦이요 二十年之後 代當滅燕注+③ 按天文志 “雲中入東井一度, 定襄入東井八度, 雁門入東井十六度, 代郡入東井二十八度.” 是皆拓跋氏所有之地也. 所以知代當滅燕者, 天道好還, 彗起燕分而掃秦分, 此燕滅秦之徵, 秦已滅矣, 代乘天道好還之運, 反而滅燕, 自然之大數也. 太元十年, 慕容沖破長安, 距是歲, 僅十一年, 安帝隆安元年, 拓跋珪克中山, 距是歲, 二十三年.이라
慕容氏布列朝廷하여 臣竊憂之하니 宜剪其魁傑하여 以消天變이니이다 不聽하다
陽平公融 亦上疏言之하니 報曰 朕方混六合爲一家하고 視夷狄爲赤子하노니 汝宜息慮하여 勿懷注+① 耿, 勁也. 介, 特也.하라 夫惟修德이면 可以禳災 苟能内求諸己 何懼外患乎리오
其後 有人 入秦明光殿하여 大呼曰 甲申乙酉 魚羊食人하리니 悲哉 無復遺注+① 魚羊, 合成鮮字, 謂鮮卑也. 是後慕容起兵攻秦, 果在甲申․乙酉之歲.로다
命執之不獲하니 朱肜趙整 固請誅諸鮮卑호되 不聽이러라
宦官也 博聞彊記하고 能屬文하고 好直言하고 面諫이러니 慕容垂夫人 得幸於堅注+① 夫人, 卽段夫人也.이라
與之同輦하여 遊于後庭이어늘 歌曰 不見雀來入鷰室이요 但見浮雲蔽白日이라한대 改容謝之하고 命夫人下輦하다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寧康 원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9년이다.
【綱】 봄 2월에 〈晉나라(東晉)〉 大司馬 桓溫이 와서 조회하였다.
【目】 桓溫이 와서 조회하자, 吏部尙書 謝安과 侍中 王坦之에게 명하여 新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도성의 인심이 흉흉하여 말하기를 “환온이 왕탄지와 사안을 주살하고 인하여 晉나라의 國統을 탈취하고자 한다.” 하니,
왕탄지는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사안은 안색이 변치 아니하여 말하기를 “진나라 국통의 存亡이 우리의 이번 행차에 달려 있다.” 하였다.
王謝新亭迎桓溫王謝新亭迎桓溫
【目】 桓溫이 도착한 뒤에 百官들이 길가에서 절을 하니, 환온은 호위병을 크게 포진시켜놓고 조정의 관원들을 접견하였다.
이때 王坦之는 땀을 흘려 옷을 적시고 手版(홀)을 거꾸로 잡았으나, 謝安은 침착하게 자리에 나아가 환온에게 이르기를 “내 듣건대 제후가 道가 있으면 사방의 이웃이 그를 지켜준다 하니, 明公은 어찌 壁 뒤에 호위병을 진열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注+① ‘守在四隣’은 옛날 제후는 仁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이웃나라와 잘 지냈으므로 모든 이웃 나라가 침공하지 않고 그를 위하여 지켜주고 호위함을 말한다. ≪春秋左氏傳≫에 楚나라 沈尹戌이 말하기를 “天子는 사방의 오랑캐가 지켜주고 제후는 사방의 이웃이 지켜준다.” 하였다.
이에 환온은 웃으며 말하기를 “바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호위병들을 거두어 물러가게 하고서 사안과 함께 장시간 동안 웃으며 말하였다.
【目】 郗超가 장막 가운데에 누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장막이 열리니, 謝安이 웃으며 말하기를 “郗生은 장막에 들어온 손님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때에 天子가 幼弱하고 외부에 강한 신하가 있었으나, 사안이 王坦之와 함께 충성을 다하여 보필하고 호위해서 끝내 晉나라 황실을 안정시켰다.
3월에 桓溫이 병이 들어 姑孰으로 돌아갔다.
【綱】 가을 7월에 大司馬 桓溫이 卒하자, 桓沖을 都督揚․豫․江州軍事로 삼았다.
【目】 처음에 桓溫이 병이 위독하자, 朝廷에 넌지시 말하여 九錫을 요구하고서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재촉하였는데, 謝安과 王坦之가 고의로 시일을 끌다가 袁宏으로 하여금 〈환온에게 九錫을 加하는〉 詔書의 초고를 작성하게 하였다.注+① 마음을 두고 고의적으로 하는 것을 故라 한다.
원굉은 작성한 초고를 王彪之에게 보여주자, 왕표지가 文辭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卿은 참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다. 어찌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注+② 〈‘安可以此示人’은〉 마땅히 이러한 글을 지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사안은 원굉의 초고를 보고서 번번이 더 수정하니, 이 때문에 열흘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였다.
환온의 아우 江州刺史 桓沖이 사안과 왕탄지의 職任을 묻자, 환온이 말하기를 “저들은 너의 처분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注+③ 吳 지방의 풍속에 他人을 일러 渠儂이라 한다.
【目】 桓溫은 世子 桓熙가 재주가 부족하다 하여 아우 桓沖으로 하여금 자기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는데, 환온이 죽자 환희와 아우 桓濟가 환충을 죽일 것을 모의하므로
환충이 그들을 長沙로 귀양 보내고 환온의 遺命을 칭하여 작은아들 桓玄을 후사로 삼았다. 환현이 이때 나이가 막 다섯 살이었는데, 南郡公을 襲封하였다.
【目】 桓沖이 桓溫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자, 황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혹자가 당시 명망 있는 사람들을 주살하여 제거할 것을 권하였으나, 환충은 따르지 않았다.
당초에 환온은 姑孰의 진영에 있을 적에 사형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결단하였는데, 환충은 “生殺與奪의 중대한 권한은 마땅히 조정에 귀속되어야 한다.” 하여 반드시 조정의 비답을 기다린 뒤에 형벌을 하였다.
【綱】 〈晉나라(東晉)〉 皇太后(褚太后)가 조정에 임하여 攝政하고 王彪之를 尙書令으로 삼고 謝安을 僕射로 삼았다.
【目】 謝安은 天子가 유약하다 하여 에게 조정에 임할 것을 청하려고 하자, 王彪之가 말하기를 “上의 나이가 관례하고 혼례할 때에 이르렀는데, 도리어 從嫂(사촌 형수)로 하여금 조정에 임하게 하면 어찌 성상의 덕을 밝게 드날리게 하는 방법이겠는가.” 하였다.注+① 황제는 元帝의 손자이니, 康帝에게 從弟가 된다. 그러므로 太后가 從嫂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안은 桓沖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태후로 하여금 조정에 임하게 하고서 자기가 마음대로 정사를 결단할 수 있게 하여 마침내 왕표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왕표지가 사안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맡으니, 사안이 매번 감탄하기를 “조정의 큰 사안 중에 여러 사람이 결단하지 못하는 것을 王公에게 자문하면 바로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綱】 겨울에 秦나라(前秦)가 〈晉나라(東晉)의〉 梁州와 益州를 침략하여 함락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王統과 朱肜(주융)으로 하여금 2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漢川으로 출동하고 毛當과 徐成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劍門으로 출동해서 梁州와 益州를 침략하게 하니,注+① 王統은 王擢의 아들이다. 漢川은 바로 漢中郡의 땅이다. 梁州刺史 楊亮이 이들을 막다가 敗戰하였다.
주융이 마침내 漢中을 함락하고 서성 또한 검문을 함락하고 楊安이 梓潼으로 진격하자, 太守 周虓(주효)가 涪城을 굳게 지키면서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아내와 부인을 호송해서 江陵으로 가게 하였는데, 중도에 주융이 이들을 막아서 사로잡으니, 주효는 마침내 항복하였다.注+② 周虓는 周楚의 손자이다. 虓는 虛交의 切이다.
【目】 11월에 秦나라(前秦)가 梁州와 益州 두 주를 점령하니, 邛筰(공작)과 夜郞이 모두 歸附하였다. 그러자 진나라는 楊安을 成都에 진주시키고 毛當을 漢中에 진주시키고 姚萇을 墊江(첩강)에 주둔시키고 王統을 仇池에 진주시켰다.注+① 墊은 음이 疊이다.
【目】 符堅이 周虓를 尙書郞으로 삼으려 하자, 주효가 말하기를 “내 晉나라(東晉)에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다만 노모가 사로잡혔기 때문에 충절을 잃고 秦나라(前秦)에 歸附하였다. 우리 母子가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었던 것은 秦나라의 은혜이다. 비록 公侯의 귀한 지위라도 나는 榮華로 여길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秦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부견을 만나볼 때마다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氐賊’이라 부르곤 하였다.注+① 符堅은 본래 氐族이다. 그러므로 그를 ‘氐賊’이라 부른 것이니, 이는 필시 周虓의 어머니가 죽은 뒤의 일일 것이다.
일찍이 元會(정월 초하루의 조회)를 할 적에 의장과 호위병이 매우 융성하였는데, 부견이 주효에게 묻기를 “晉나라 조정의 元會는 이것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자, 주효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개와 양 같은 오랑캐가 서로 모여 있는 것을 어찌 감히 天朝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注+② 秦나라의 君主와 신하가 모두 여섯 夷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秦나라를 개와 양이라 꾸짖은 것이다. 天朝는 晉나라를 이른다. 秦나라 사람들은 주효가 불손하다 하여 여러 번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부견은 그를 더욱 厚待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王坦之를 中書令으로 삼아 丹楊尹을 겸하게 하였다.
【綱】 彗星이 나타났다.
【目】 彗星이 尾宿와 箕宿에 나타나니, 길이가 10여 丈이었다. 太微垣을 지나 東井을 쓸어버렸는데, 4월에 나타나 겨울까지 없어지지 않았다.注+① 長(길이)은 直亮의 切이다.
秦나라(前秦) 太史令 張孟이 말하기를 “미수와 기수는 燕나라 분야이고, 동정은 진나라 분야입니다.注+② ≪晉書≫ 〈天文志〉에 “尾宿 아홉 별과 箕宿 네 별은 燕나라 幽州의 분야이고, 東井의 여덟 별은 秦나라 雍州의 분야이다.” 하였다. 지금 혜성이 미수와 기수에서 시작하여 동정을 쓸었으니, 10년 뒤에 연나라가 마땅히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요, 20년 뒤에 代나라가 마땅히 연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注+③ 살펴보건대 ≪晉書≫ 〈天文志〉에 “雲中은 東井으로 1度가 들어갔고, 定襄은 東井으로 8도가 들어갔고, 雁門은 東井으로 16도가 들어갔고, 代郡은 東井으로 28도가 들어갔다.” 하니, 이는 모두 拓跋氏가 소유한 땅이다. 代나라가 마땅히 燕나라를 멸망할 줄을 안 이유는 天道가 돌려주기를 좋아하여 彗星이 연나라 분야에서 시작되어 秦나라 분야를 쓸었기 때문이니, 이는 연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조짐이다. 그리고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 代나라는 天道가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운수를 타고서 다시 연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니, 이는 자연의 큰 운수이다. 太元 10년(385)에 慕容沖이 長安을 격파하니, 이해와의 거리가 겨우 11년이었다. 安帝 隆安 元年(397)에 拓跋珪가 中山을 함락하니, 이해와의 거리가 23년이었다.
慕容氏가 朝廷에 포진해 있으므로 臣은 삼가 근심스러우니, 마땅히 그중에 걸출한 자들을 제거하여 하늘의 변고를 사라지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符堅은 듣지 않았다.
【目】 陽平公 符融 또한 상소하여 慕容氏를 제거할 것을 말하니, 符堅이 답하기를 “朕은 막 六合을 통일하여 한 집안으로 삼고 오랑캐를 나의 갓난아이처럼 여기노니, 너희들은 마땅히 염려를 그치고 근심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注+① 耿은 굳셈이요, 介는 꼿꼿함이다. 오직 德을 닦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니, 만일 자기 몸을 살핀다면 어찌 外患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目】 그 뒤에 어떤 사람이 秦나라(前秦) 明光殿에 들어가서 크게 고함치기를 “갑신년(384)과 을유년(385)에 魚羊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니, 슬프구나! 다시는 남은 종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注+① 魚羊은 합하여 ‘鮮’자가 되니, 鮮卑族을 말한 것이다. 이 뒤에 선비족인 慕容氏가 군대를 일으켜 秦나라를 공격한 것이 과연 갑신년과 을유년에 있었다.
符堅은 그를 잡으라고 명하였으나 잡지 못하니, 朱肜과 趙整은 여러 鮮卑族들을 주살할 것을 굳이 청하였으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
【目】 趙整은 宦官이었다. 문견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문장을 잘 지었고 직언을 좋아하고 面前에서 간쟁하였는데, 慕容垂의 夫人이 符堅에게 총애를 얻었다.注+① 夫人은 바로 段夫人이다.
부견이 그녀와 함께 輦을 타고 後庭에서 놀자, 조정이 노래하기를 “참새가 와서 제비집에 들어옴은 보지 못하고 다만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림을 볼 뿐이다.” 하니, 부견이 용모를 고쳐 사과하고 부인에게 명하여 輦에서 내리게 하였다.


역주
역주1 大司馬溫來朝 : “大司馬 桓溫이 와서 조회했다고 쓰고 애초에 별다른 말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흉악한 위엄과 포학한 기염이 진실로 이 가운데에 은연히 나타나니, 그렇다면 당시의 기상이 어떠한가. 아, 두려워할 만하였다.[書大司馬溫來朝 初無異詞 而其兇威虐燄 固自隱然於中 則當時之氣象爲如何耶 吁 可畏也哉]” ≪發明≫
역주2 大司馬溫……豫江州軍事 : “≪資治通鑑綱目≫에 蜀漢과 晉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卒했을 적에 姓을 쓰지 않은 자가 없는데, 여기에서 桓溫에 대해 성을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삭제한 것이다. 蜀漢으로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 卒하였는데 姓을 쓰지 않은 경우는 대사마 환온 한 사람 뿐이다.[綱目卒蜀漢及晉諸臣 無不書姓者 此其不書 何 削之也 自蜀漢及晉 卒不書姓者 大司馬溫一人而已矣]” ≪書法≫“환온이 졸했을 적에 그의 관직을 썼으나, 결국에는 그의 작위를 쓰지 않고, 또 그의 姓도 삭제한 것은 어째서인가. 환온은 晉나라에서 진실로 跋扈한 인물이지만 만일 그가 曹操나 司馬懿처럼 한결같이 무도한 짓을 자행하였다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오직 환온만은 그래도 자신의 언행을 다소 염려하고 꺼릴 줄 알았다. 그러므로 비록 晉나라의 솥(황제의 자리)에 군침을 흘렸으나 끝내 솥의 국에 손가락을 담그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 그의 죄를 저울질하여 書法의 사이에 붙여 인정하였으나 다 인정하지는 않았으므로 다만 그의 관직을 썼으며, 폄척하였으나 다 폄척하지는 않았으므로 겨우 그의 작위를 제거하기만 하였다. 이름을 쓰되 氏를 쓰지 않은 것은 또 그의 강대한 실제가 王莽이나 董卓과 같아서 묻지 않아도 그가 환온이 됨을 알 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아, 이것이 ≪자치통감강목≫이 ≪자치통감강목≫이 된 이유일 것이다.[桓溫之卒 旣書其官 乃不書其爵 又削其姓 何哉 溫在晉 誠爲跋扈 然使其爲操爲懿 一以無道行之 則亦何難之有 惟溫尙能稍知顧忌 故雖垂涎晉鼎 終莫染指 是以綱目權其輕重 寓諸書法之間 予之而不盡予 故止書其官 貶之而不盡貶 故僅去其爵 至於名而不氏 又以著其强大之實 若莽卓然 不問可知其爲溫也 噫 此綱目之所以爲綱目也歟]” ≪發明≫‘晉나라의 솥에 군침을 흘렸으나 끝내 솥의 국에 손가락을 담그지는 않았다.’는 것은 환온이 분수를 벗어난 짓을 하였으나 황제 자리는 함부로 넘보지 않았다는 뜻으로, 고기 국물 속에 손가락을 넣어 맛보면서 침을 흘린다는 뜻의 ‘染指垂涎’을 원용한 것이다.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이 鄭나라 靈公에게 자라를 바쳤다. 子公이 子家와 더불어 영공을 만나러 가는데 자공의 食指가 저절로 움직이니, 자공이 자가에게 “평소 내 손가락이 이렇게 움직이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라고 하였다. 영공을 만나보니, 요리사가 자라를 요리하므로 서로 돌아보며 웃었다. 영공이 “왜 웃느냐?”고 묻자, 자가는 들은 대로 얘기하였다. 이에 영공은 대부들에게 자라 끓인 국을 나누어 줄 적에 자공을 빼놓고 주지 않으니, 자공은 화가 나서 손가락으로 솥 안의 자라 국물을 찍어 맛보고 나왔다고 한다.(≪春秋左氏傳≫ 宣公 4년)
역주3 問安坦之所在 : ≪新譯資治通鑑≫(張大可 等 譯注, 三民書局)에 장래에 사안과 왕탄지가 맡을 직무로 해석하였다.
역주4 (寸)[才] : 저본에는 ‘寸’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奎7512)에 의거하여 ‘才’로 바로잡았다.
역주5 皇太后……謝安爲僕射 : “太后가 이때 조정에 세 번 임하였다. 漢나라 殤帝의 鄧太后와 桓帝의 梁太后가 두 번 조정에 임했을 때에는 ‘猶(아직도)’라고 썼고, 北魏 馮氏와 胡氏, 唐나라 武氏가 두 번 조정에 임했을 때에는 ‘復(또다시)’라고 썼는데, 이때 세 번 조정에 임하였는데도 ≪資治通鑑綱目≫에 평상적인 말처럼 쓴 것은 오직 褚太后가 조정의 정사를 독단할 뜻이 없어서이다. 무릇 조정에 임했다고 쓰는 것은 비난한 것인데, 오직 저태후에게는 비난함이 없고 두 번 ‘攝’이라고 쓴 것도 뜻이 이와 같다.[太后於是三臨朝矣 漢殤鄧太后 桓梁太后 再臨朝 則書猶 魏馮胡 唐武氏 再臨朝 則書復 於是三臨朝 而綱目書之如恒辭 惟無意於擅朝也 凡書臨朝 譏也 惟褚太后無譏焉 再書攝 義同]” ≪書法≫
역주6 崇德太后 : 褚太后로 晉 康帝의 황후이다. 344년 강제 사후 대리청정을 하였고 357년 아들 穆帝에게 정사를 돌려주었다가 361년 목제가 후사 없이 죽자 저태후가 司馬丕를 세우니, 이가 哀帝이다. 364년 애제의 병환으로 다시 저태후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365년 애제가 죽자 司馬奕이 황제가 되니, 이가 廢帝이다. 桓溫이 폐제를 폐하고 簡文帝를 세웠는데, 372년 간문제가 죽으니 孝武帝가 즉위하였다. 373년 권력자 환온이 죽자 저태후가 다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역주7 彗星見 : “彗星이 尾宿와 箕宿에서 나와 東井을 쓸었으니, 燕나라(後燕 등)가 秦나라(前秦)를 멸망시킬 조짐임이 분명하다. ≪資治通鑑綱目≫에 혜성이 어느 곳에서 나왔다고 쓰지 않은 것은 대략 ‘하늘에 큰 경계가 있으니, 무릇 나라를 소유한 자가 다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한 뜻과 같다.[彗星出尾箕 掃東井 燕滅秦之兆明矣 綱目不書所出 若曰天有大戒 凡有國者 皆當有警懼之心云耳]” ≪書法≫“별의 변고가 이와 같자, 秦나라(前秦)의 太史가 燕나라와 진나라의 興하고 멸망할 과정을 말하였는데, 후일에 이 말이 모두 맞았다. 그러나 符堅으로 하여금 선비족들을 다 주살하여 하늘의 변고에 응하게 하고자 한 것은 잘못이다. 또 부견이 망한 것은 선비족을 죽이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요, 또 무력을 남용하고 전쟁을 함부로 일으켜 그치지 않음에 달려 있으니, 이는 진나라 太史가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때 천하가 오이조각처럼 분열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썼으나, 分野를 쓰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사람들에게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는 실제를 알게 한 것이요, 한갓 천문에 소속된 곳에 집착하여 그 마음을 달리함이 없도록 한 것이다.[星變如此 秦太史言燕秦興滅之由 他時皆驗 然欲使之誅殺之應之 則非矣 且堅之亡 非在於不殺鮮卑 而在於窮黷不已 此則非秦太史之所能知也 是時 宇宙瓜分 綱目書彗見 而不書分野 正欲夫人知敬畏修省之實 無徒泥於天象之所屬 而異其心也]” ≪發明≫
역주8 耿介 : 아래 訓義의 뜻으로 보면 고집스럽고 꼿꼿하여 남과 화합하지 못하는 뜻으로 풀었으나, ≪資治通鑑≫ 胡三省의 註에서 ‘耿’을 ‘憂心耿耿’으로 보고 또 ‘介介’는 ‘耿耿’과 같다고 하여 근심하는 뜻으로 풀었다.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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