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이때 會稽王 司馬道子가 권력을 전횡하며 사치하고 방종하다. 趙牙는 본래 倡優(광대) 출신이고, 茹千秋는 본래 도적을 잡는 낮은 관리였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아첨을 하고 뇌물을 써서 등용되니,注+① 茹는 음이 如이고, 또 而據의 切이니 姓이다. 사마도자는 조아를 郡守로 삼고 여천추를 參軍으로 삼았다.
조아가 사마도자를 위하여 東第(王侯의 저택)를 개설하여 산을 쌓고 못을 파니, 공사를 하는 데 鉅萬의 비용이 들었다.注+② ‘牙爲’의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황제(孝武帝)가 일찍이 그의 저택에 가서 사마도자에게 이르기를 “會稽王府 안에 마침내 이러한 산이 있으니, 매우 좋다. 그러나 집을 꾸민 것이 너무 지나치다.”라고 하니, 사마도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황제가 떠난 뒤에 사마도자가 조아에게 이르기를 “황제께서 만약 이 산이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임을 안다면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 조아가 말하기를 “公이 살아 계시니,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저택을 경영하고 짓는 것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目
【目】 茹千秋는 관직을 팔아먹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모은 것이 몇 億이었는데, 博平令 聞人奭이 상소하여 이것을 말하였다.注+① 博平縣은 漢나라 때에는 東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 는 平原郡에 속하였고, 江左(東晉․南朝) 때에는 魏郡에 속하였으니, 郡과 함께 모두 僑置한 것이다. 聞人은 複姓이고 奭은 그의 이름이다.
황제는 司馬道子를 더욱 미워하였으나 太后에게 핍박받아 차마 그를 폐출하지 못하고, 마침내 王恭과 殷仲堪, 王珣과 王雅 등을 발탁하여 내외의 요직에 두어 그를 막게 하니, 사마도자 역시 王國寶와 王緒를 끌어와 심복으로 삼았다.注+② 王緒는 王國寶의 從弟이다.
이로 말미암아 붕당이 다투어 일어나 다시는 예전처럼 우애하는 기쁨이 없으니, 태후가 매번 화해시켰다.
會稽王(司馬道子)이 비록 술에 취하고 설만하게 행동하는 잘못이 있으나,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여 태후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① 媟은 私列의 切이니, 친압하고 설만함이다.
황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서 사마도자를 예전처럼 직무를 맡겼다.
綱
【綱】 여름 5월에 燕나라(後燕)가 太子 慕容寶를 보내어 魏나라(北魏)를 공격해서 가을 7월에 别部를 항복시키고 전진하여 臨河에 주둔하였다.
目
【目】 魏王 拓跋珪가 燕나라를 배반하여 변방에 있는 여러 部를 침략하고 핍박하자, 燕主 慕容垂가 太子 慕容寶를 보내어 8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五原에서 위나라를 공격하니, 散騎常侍 高湖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위나라와 연나라는 대대로 혼인을 하여 우호를 맺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注+① 拓跋什翼犍이 두 번 慕容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내가 모두 일찍 죽었다. 哀帝 隆和 원년(362)에 탁발십익건이 딸을 燕나라에 바쳤고, 연나라에서는 또 딸을 魏나라에게 시집보내었다. 중간에 말[馬]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그 아우를 억류하였으니, 이는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위나라를 공격하십니까.注+② 間은 中間을 이른다.
渉珪(拓跋珪)는 침착하고 용맹하며 지략이 있고, 어려서부터 어려운 일을 겪었으며, 정예병과 강한 군마를 보유하였으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注+③ 涉珪는 바로 拓跋珪이다. 처음에 그 조부 拓跋什翼犍이 涉圭라 이름하였는데, 뒤에 圭를 고쳐 珪라 하였다. 그런데 태자는 나이가 어리고 기운이 왕성하여 반드시 위나라를 얕볼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위엄과 중한 명망을 손상시킬 것이니, 폐하께서는 헤아리소서.”
모용수가 노하여 고호를 파직하니, 고호는 高泰의 아들이다.
目
【目】 魏나라(北魏) 張袞이 拓跋珪에게 말하기를 “燕나라(後燕)가 자주 승리함에 익숙하여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있으니, 마땅히 우리의 형세를 허약하게 보여서 저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야 비로소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탁발규가 이 말을 따라서 부락과 가축을 모두 옮겨서 서쪽으로 河水를 건너 천여 리를 가서 피하게 하였다.
연나라 군대가 五原에 이르러 위나라의 别部 3만여 가호를 항복시키고 기장밭[穄田]에서 기장 100여만 斛을 거두고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穄는 子例의 切이니 기장이니, 지금 남쪽 사람들은 기장을 불러 穄라 한다. 북쪽 지방은 땅이 추워서 五穀이 자라지 않고 오직 기장만이 자란다. 그러므로 기장밭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項安世가 말하기를 “기장은 두 종류가 있다. 찰기장[正黍]은 조와 비슷한데 크고 5월에 익으니, 지금 荊州 사람들이 이것을 오로지 黍라고 이르고 또 黍穄라고 이르는 것이 이것이다. 또 한 종류는 키가 더욱 크고 줄기의 모양이 갈대와 비슷하고 열매의 모양이 율무와 비슷하니, 형주 사람들이 이것을 討黍라 하고 또 蘆穄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을에 익으니, 찰기장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하여 臨河에 주둔해서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갈 준비를 하였다.注+② ≪水經≫에 “河水는 新秦 중간에서 꺾여 남쪽으로 흐르고 五原, 西安陽, 成宜, 宜梁, 臨沃, 稒陽 등의 縣 남쪽을 지나간다.”라고 하였다.
綱
【綱】 秃髪烏孤가 廉川으로 천도하였다.
目
【目】 秃髪烏孤가 乙部와 折掘部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廉川으로 천도하였다.注+① 乙弗部와 折掘部는 모두 禿髮氏의 서쪽에 있다. 廉川은 湟中과 河西의 경계에 있다.
廣武의 趙振이 어려서부터 기이한 지략을 좋아하였는데, 집을 버리고 독발오고를 따라가자, 독발오고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趙生을 얻었으니, 大事가 이루어지겠다.”라고 하고는 左司馬로 임명하였다.
綱
【綱】 長星이 나타났다.
目
【目】 長星이 나타나 須女星에서 哭星에까지 이르니,注+① ≪晉書≫ 〈天文志〉에 “須女星은 4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니, 須는 賤妾의 칭호로 부인의 직책에 낮은 자이다. 斗宿, 牛宿, 女宿는 揚州의 분야이다. 虛宿는 두 별이고 危宿는 세 별인데, 모두 死喪과 哭泣을 주관한다. 墳墓星 네 별이 危宿의 아래에 있으니, 死喪과 哭泣를 주관하여 墳墓가 된다.”라고 하였다. 황제(晉 孝武帝)가 내심 이것을 싫어하여, 華林園에서 술잔을 들어 축원하기를 “장성아, 너에게 한 잔의 술을 권하노니, 예로부터 어찌 만세의 천자가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注+② 晉나라는 建康에 도읍하면서 洛都을 모방하여 華林園을 세웠다.
綱
【綱】 9월에 魏王(北魏) 拓跋珪가 군대를 거느리고 燕나라(後燕)를 막으니, 겨울 10월에 연나라 군대가 밤에 도망하였다. 11월에 탁발규가 추격하여 參合陂에 이르러서 연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目
【目】 9월에 魏王 拓跋珪가 전진하여 臨河에 주둔하였다. 燕나라 태자 慕容寶가 군대를 진열하여 장차 河水를 건너려 하였는데, 바람에 배가 표류하여 南岸에 정박하니, 魏나라가 연나라의 甲士 300여 명을 사로잡아서 모두 풀어주어 보내었다.
모용보가 中山을 출발할 적에 燕主 慕容垂가 이미 병이 들었는데, 모용보가 五原에 이르자, 탁발규가 사람을 시켜 중산의 길을 막아 모용보의 사자를 살펴서 모두 사로잡으니, 모용보 등이 몇 달 동안 모용수의 안부를 듣지 못하였다.
탁발규는 사로잡은 사자로 하여금 河水에 임하여 모용보에게 고하기를 “네 아비가 이미 죽었으니, 어찌 일찍 돌아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모용보 등이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사졸들이 놀라 동요하였다.
目
【目】 拓跋珪가 略陽公 拓跋遵으로 하여금 7만 騎兵을 거느리고 燕나라(後燕) 군대의 남쪽을 차단하게 하였다.注+① 拓跋遵은 拓跋什翼犍의 손자이다.
10월에 연나라 군대가 배를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니, 이때 河水에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았다. 慕容寶는 위나라 군대가 반드시 하수를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겨 척후병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11월에 폭풍이 불어서 얼음이 얼어 탁발규가 군대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고서, 정예 기병 2만여 명을 선발하여 〈연나라 군대를〉 급히 추격하였다.
연나라 군대가 參合陂에 이르자, 큰 바람이 불어 제방과 같은 먹구름이 군영 뒤에서 와서 군대 위를 덮었다.注+② 後漢 淮陽王(劉玄) 更始 원년(23)에 王邑이 昆陽을 포위하자, 낮에 무너지는 산과 같은 검은 구름이 군대 위로 떨어지니 군인들이 모두 싫어하였는바, 이것을 營頭星이라 한다. 占에 이르기를 “營頭星이 떨어져서 그 아래에 있는 군대를 덮으면 피가 흘러 30리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覆(덮다)는 扶又의 切이다. 沙門 支曇猛이 말하기를注+③ 支는 曇猛의 俗姓이다. “위나라 군대가 장차 몰려올 징후이니, 마땅히 군대를 보내어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모용보가 응하지 않았다.
司徒 慕容德이 모용보에게 지담맹의 말을 따를 것을 권하자, 모용보는 마침내 趙王 慕容麟을 보내어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군대 후미에 있으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용린 또한 지담맹의 말을 허망한 말이라 하여 기병들을 풀어놓아 나가 사냥하고는 더 이상 대비하지 않았다.
目
【目】 魏나라(北魏) 군대가 새벽부터 밤늦도록 행군하면서 속도를 배가하여 參合陂 서쪽에 이르니, 燕나라(後燕) 군대는 삼합피 동쪽 산 남쪽의 물가에 있었다.注+① 山은 蟠羊山을 이른다. ≪水經註≫에 “可不埿水는 雁門 沃陽縣 동남쪽 60리 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沃水에 흘러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參合縣 남쪽을 지나간다.”라고 하였다.
拓跋珪가 밤에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고 사졸에게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의 주둥이을 묶고 은밀하게 진군하여 새벽에 산에 올라가 아래의 연나라 진영을 굽어보니, 연나라 군사들이 크게 놀라 소요하였다. 탁발규가 군대를 풀어 공격하니,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略陽公 拓跋遵이 군대를 돌려 그 앞을 공격해서 다시 4, 5만 명을 사로잡으니, 慕容寶 등은 單騎로 도망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目
【目】 拓跋珪는 燕나라 신하 중에 재주가 있는 자를 가려서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내어 中州(中原)의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게 하니,
中部大人 王建이 말하기를 “연나라 무리가 강성하니 이들을 다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들을 다 죽이면 연나라가 텅 비어서 취하기가 쉽습니다.”라고 하자, 탁발규는 마침내 모두 묻어 죽이고 돌아갔다.
연나라 司徒 慕容德이 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오랑캐들은 參合陂의 승리로 인하여 태자를 얕보는 마음이 있으니, 마땅히 폐하께서 신묘한 지략이 있을 때에 저들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용수는 마침내 중산에 군대를 모아 다음 해 크게 거병하여 위나라를 공격할 것을 기약하였다.
역주
역주1漢나라……하였으니 :
淮南王 劉長은 漢 高祖의 아들이자 文帝의 아우이다. 그는 오만불손한 행동을 하였으나 문제가 눈감아주며 타일렀으나, 오히려 흉노 등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문제는 회남왕의 추종자들을 모두 토벌하고 그를 蜀 지역으로 귀양 보냈는데, 회남왕은 도중에 분을 참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문제는 이를 슬퍼하여 회남왕을 ‘厲王’이라 시호하고, 列侯의 禮로 雍 땅에 장례하고 무덤을 지키는 30가호를 배치하였으며, 그의 세 아들을 모두 王으로 봉하였다.(≪資治通鑑綱目≫ 권3 漢 文帝 6년(B.C. 174))
역주2部 :
참고로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는 ‘郡’으로 되어 있다.
역주3銳 :
참고로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는 ‘壯’으로 되어 있다.
역주4長星見 :
“≪資治通鑑綱目≫에 長星을 쓴 것이 3번이다.(漢 文帝 8년(B.C. 172), 景帝 3년(B.C. 154), 武帝 元狩 4년(B.C. 119)이다.) 長星이 나온 곳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다만 나타났다고만 쓴 것은 어째서인가. 특별히 생략한 것이다. 이때 長星이 나타나서 須女星에서 哭星까지 이르렀는데, 貴人 張氏가 황제를 시해한 것이 부절을 맞춘 듯이 징험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은 견강부회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다만 나타났다고 쓴 것이다.[綱目 書長星三矣(漢文帝八年 景帝三年 武帝元狩四年) 未有不書所出者 此其止書見 何 特略之也 於是長星見 自須女至于哭星 貴人張氏之弑 若合符節矣 綱目 惡傅會 故止書見]” ≪書法≫“옛사람은 별의 변고를 만나면 두려워하였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별의 변고를 만나면 안일하게 여겼으니, 秦主 符生이 ‘太白星이 목말라 우물에 들어갔다.’라고 하고, 晉나라 孝武帝가 長星에 술잔을 권한 것이 그 예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쓸 적에 애당초 특이한 말이 없다. 그러나 당시에 별의 변고를 보고 실제로 행실을 닦고 살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일찍이 한 해를 넘기기 전에 화가 미쳤으니, 하늘의 변고의 형체가 매우 빠르게 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얕보고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이것을 쓴 것은 또한 후세의 감계로 삼은 것이다.[古人遇星變則恐懼 後世遇星變則戲豫 若秦主生謂太白爲渴入井 晉孝武勸長星杯酒 是已 綱目書之 初無異詞 然當時不聞有修省之實 曾未閲歲而見及 則知天變之形 其應甚速 尙可以玩忽待之乎 書此 亦所以爲後世鑑也]” ≪發明≫
역주5將 :
참고로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는 ‘部’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