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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6)

자치통감강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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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年(A.D.11)
三年이라
遣將將兵하여 多齎珍寶하고 至雲中塞下하여 招誘呼韓邪單于諸子하니
右犁汗王咸 咸子登, 助三人어늘
則脅拜咸爲孝單于하고 助爲順單于하여 皆厚加賞賜注+汗, 音寒. 右犁汗, 匈奴王之號也, 咸, 其名.하다
走出塞어늘 傳送助, 登長安注+傳, 張戀切.이러니
助病死한대 以登代之하다
單于聞之하고 怒曰
先單于受漢宣帝恩하니 不可負也注+先單于, 謂呼韓邪單于.
今天子非宣帝子孫이니 何以得立이리오하고
遣兵入雲中塞하여 大殺吏民하고 歷告左右部, 諸邊王하고 入塞하여 殺太守, 都尉하고 略吏民畜産 不可勝數注+左右部, 通鑑作左右部都尉. 諸邊王, 諸王庭近漢邊者也.러라
是時 諸將在邊하여 以大衆未集이라하여 未敢出擊이러니
嚴尤諫曰
臣聞匈奴爲害 所從來久矣로되 未聞上世必有征之者也
後世三家周, 秦, 漢征之 然皆未有得上策者也하니
周得中策하고 漢得下策하고 秦無策焉이니이다
周宣王時 獫狁內侵하여 至于涇陽이어늘
命將征之하여 盡境而還하니
其視戎狄之侵 譬猶蟁蝱하여 敺之而已
天下稱明하니 是爲中策注+蟁, 古蚊字. 蝱, 音盲, 齧人飛蟲也.이니이다
漢武帝選將練兵하고 約齎輕糧하여 深入遠戍注+約, 少也, 謂少齎衣裝.하니
雖有克獲之功이나 胡輒報之하여 兵連禍結三十餘年이라
中國罷耗하고 匈奴亦創艾而天下稱武하니 是爲下策注+艾, 讀曰乂.이니이다
秦始皇 不忍小恥而輕民力하여 築長城之固하여 延袤萬里
轉輸之行 起於負海하여 疆境旣完이나
中國內竭하여 以喪社稷하니 是爲無策이니이다
今天下 比年飢饉호되 西北邊 尤甚이라
發三十萬衆하여 具三百日糧인댄
東援海岱하고 南取江淮然後 乃備注+援, 音爰, 引也.하리니
計其道里컨대 一年尙未集合이라
兵先至者 聚居暴露하여 師老械弊하여 勢不可用이니
此一難也注+械, 器械也.니이다
邊旣空虛하여 不能奉軍糧하고 內調郡國 不相及屬이니
此二難也注+調, 徒釣切, 計發之也. 屬, 之欲切, 聯也.니이다
計一人三百日食하면 用糒十八斛하니 非牛力이면 不能勝이요 牛又當自齎食이니 加二十斛重矣 胡地沙鹵하여 多乏水草注+鹵, 鹹地.하니 以往事揆之컨대 軍出未滿百日 牛必物故且盡이요 餘糧尙多하여 人不能負리니
此三難也니이다
胡地 秋冬甚寒하고 春夏甚風이라 多齎釜鍑薪炭이면 重不可勝注+鍑, 音富, 釜之大口者也.이요 食糒飮水하여 以歷四時하면 師有疾疫之憂 是故 前世伐胡 不過百日하니 非不欲久로되 勢力不能이니
此四難也니이다
輜重自隨 則輕銳者少하여 不得疾行이라 虜徐遁逃라도 勢不能及이요 幸而逢虜라도 又累輜重注+謂幸而逢虜, 得與之戰, 又爲輜重所累也.하리니 如遇險阻 銜尾相隨 虜要遮前後하면 危殆不測이니
此五難也注+銜, 馬銜也, 尾, 馬尾也, 言前後單行, 不得竝驅. 要, 讀曰邀.니이다
大用民力이라도 功不可必立이니 臣伏憂之하노이다
今旣發兵하니 宜縱先至者하여 令臣尤等으로 深入霆擊하여 且以創艾胡虜注+請率見到之兵, 且以擊虜. 霆擊, 言如雷霆震擊, 不可測也.니이다
不聽하고 轉兵穀如故하니 吏士屯邊者 所在放縱하고
而內郡 愁於徵發하여 民棄城郭하고 始流亡爲盜賊이로되
幷州, 平州尤甚注+此時, 未有平州. 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 魏始分幽州, 置平州, 平字誤也.이러라
遣中郞, 繡衣, 執法하여 分督之하니
皆乘便爲姦하여 撓亂州郡注+中郞‧繡衣‧執法三者, 皆官名.이러라
北邊 自宣帝以來 數世不見煙火之警하니
人民熾盛하고 牛馬布野注+謂匈奴款塞之後也.러니
及莽擾亂匈奴하여 與之構難하여
邊民 死亡繫獲하여
數年之間 北邊虛空하여 野有暴骨矣러라
莽太師王舜하다
自莽簒後 病悸寖劇하여注+寖, 漸也.하다
遣使者하여 奉璽書, 印綬, 安車, 駟馬하여 迎龔勝하여
卽拜爲太子師友祭酒注+卽, 就也, 謂就其家而拜之. 莽置師友‧侍中‧諫議‧六經祭酒各一人, 凡九祭酒也. 祭祀時, 唯尊長者以酒沃酹, 故稱祭酒, 尊之也. 一說 “祭酒, 非官名也, 蓋一坐之元長也. 古者, 賓客初得主人饌, 則長者一人, 先擧酒以祭地, 亦尊敬之也.”하니
使者與郡縣長吏, 三老, 官屬, 行義, 諸生千人以上으로 入里致詔注+行, 去聲, 行義, 謂鄕邑有行義之人也. 諸生, 謂學徒也.하고
使者欲令勝起迎하여 久立門外러니
勝稱病篤하고 爲牀室中戶西, 南牖下하고 東首하여 加朝服拖紳注+戶西南牖下, 於戶之西, 室之南牖下也.하다
使者付璽書하고 奉印綬하고 內安車, 駟馬注+內, 讀曰納.하고
進謂勝曰 聖朝制作未定하니 待君爲政하여 以安海內니라
對曰 素愚하고 加以年老被病하여 命在朝夕하니 隨使君上道 必死道路 無益萬分注+示若尊敬使者, 故謂之使君, 君者, 尊之之稱. 無益萬分, 言萬中無一分之益.이니이다
使者要說하여 至以印綬 就加勝身이어늘
輒推不受注+要, 一遙切, 勒也. 說, 式芮切. 推, 土回切.한대
使者卽上言호되 方盛夏暑熱이라 勝病少氣하니 可須秋凉乃發이니이다
許之注+須, 待也.하다
使者爲勝兩子及門人高暉等하여
朝廷虛心하여 待君以茅土之封하니 雖疾病이나 宜動移至傳舍하여 示有行意하면 必爲子孫遺大業注+大業, 謂封邑也.하리라
暉等 白之한대 勝曰
吾受漢家厚恩하여 無以報 今年老矣 旦暮入地하니 誼豈以一身事二姓하여 下見故主哉리오하고
因勅以棺斂喪事하고
語畢 遂不復飮食하여 積十四日死하니 死時 七十九矣러라
是時 淸名之士 又有琅邪紀逡, 齊薛方, 沛唐林唐尊하니
皆以明經飭行으로 顯名注+幷列其人本土及姓名, 他皆倣此. 飭, 與勅同.이러니
逡, 兩唐 皆仕莽하여 封侯貴重하다
莽以安車迎方한대 因使者하여 辭謝曰
堯舜在上호되 下有巢由注+皇甫謐曰 “高士傳 ‘許由聞堯致天下而讓焉, 乃遁於潁水之陽‧箕山之下. 堯又召爲九州長, 由不欲聞之, 洗耳於潁濱. 時有巢父牽犢欲飮之, 見由洗耳, 而問其故, 由對曰 「堯欲召我, 我惡其聲, 是故洗耳.」 巢父曰 「子若處高岸深谷, 誰能見子. 子故浮游欲聞, 求其名譽, 洿吾犢口.」 遂牽犢上流, 飮之.’”
今明主方隆唐虞之德하시니 小臣 欲守箕山之節하노이다
說其言하여 不彊致하다
隃麋郭欽 爲南郡太守하고 杜陵蔣詡 爲兗州刺史하여 亦以廉直爲名注+地志 “扶風郡, 有隃糜縣.”이러니
莽居攝 欽, 詡 皆以病免官하여 歸鄕里하여 臥不出戶하여 卒於家하니라
沛國陳咸 以律令爲尙書注+中興之後, 沛方爲國, 此由范史以後來所見書之也.러니 見何武, 鮑宣死하고 歎曰
說見幾而作하여 不俟終日이라하니 吾可以逝矣라하고
卽乞骸骨去職하다
莽簒位 召咸爲掌寇大夫한대 謝病不肯應注+掌寇大夫, 當屬作士.하고
三子參, 豐, 欽 皆在位러니
悉令解官歸鄕里하여 閉門不出入하고 猶用漢家祖臘注+王者各以其行盛日爲祖, 墓日爲臘. 漢家, 以火德王, 火盛於午, 墓於戌, 故以.하다
問其故한대 咸曰 我先人 豈知王氏臘乎아하고
悉收斂其家律令, 書文하여 壁藏之하다
又齊栗融, 北海禽慶‧蘇章, 山陽曹竟 皆儒生으로 去官하여 不仕於莽注+禽慶, 姓名.하니라
班固曰
王, 貢之材 優於龔鮑注+王貢, 王吉‧貢禹.
勝實蹈焉하며 貞而不諒 薛方近之注+論語稱 “孔子曰 ‘君子貞而不諒.’” 謂 薛方志避亂朝, 詭引巢許爲諭, 近此義也.
郭欽, 蔣詡 好遯不汚하니 絶紀唐矣注+絶, 殊也, 謂殊於紀逡及兩唐也.로다
瀕河郡 蝗生注+瀕河郡, 謂緣河南北諸郡.하다
◑河決하다
河決魏郡하여 泛淸河以東數郡하다
先是 恐河決爲元城冢墓害注+莽曾祖賀以下冢墓, 在魏郡元城.러니
及決東去 元城不憂水 遂不隄塞하니라


신미년(A.D.11)
나라 왕망王莽시건국始建國 3년이다.
[] 흉노匈奴의 여러 가 길을 나누어 크게 쳐들어와서 태수太守도위都尉를 죽이고 관리와 백성들을 노략질하니, 주군州郡의 군대가 일어났다.
[] 왕망王莽이 장수를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귀중한 보물을 많이 갖고서 운중雲中의 변방 아래에 이르러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여러 아들을 유인하여 불러들이게 하였다.
우리한왕右犁汗王 의 아들 세 사람이 오자,
협박하여 효단우孝單于로 봉하고 순단우順單于로 봉하고는 모두 후하게 상을 내렸다.注+은 음이 이다. 우리한右犁汗은 흉노왕의 호칭이니, 은 그의 이름이다.
이 도망하여 변방을 나가자 파발마로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였는데注+(역참의 거마車馬)은 장련張戀이다.,
뒤에 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으로 대신하였다.
선우는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선대先代 선우單于께서 나라 선제宣帝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注+③ “선선우先單于”는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이른다.
지금의 천자는 선제의 자손이 아니니, 어찌 천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군대를 보내 운중雲中의 변방으로 쳐들어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크게 죽이고, 변경의 여러 왕에게 일일이 알리고 변방으로 쳐들어와 태수太守도위都尉를 죽였으며, 관리와 백성과 축산을 노략질해간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注+④ “좌우부左右部”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좌우부도위左右部都尉’로 되어 있다. “제변왕諸邊王”은 나라 변경과 가까운 여러 왕정王庭이다.
[] 이때에 여러 장수들이 변경에 있으면서, 큰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 하여 감히 출격하지 못하였는데,
엄우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이 들으니, 흉노匈奴가 우리에게 폐해를 입힌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후세에 나라와 나라, 나라 세 왕조에서 흉노를 정벌하였으나 모두 상책上策을 얻은 경우가 없었으니,
나라는 중책中策을 얻었고 나라는 하책下策를 얻었고 나라는 무책無策이었습니다.
[] 선왕宣王 때에 험윤獫狁(고대 흉노匈奴의 칭호)이 국경 안으로 침략하여 경양涇陽에 이르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쫓고 돌아오니,
융적戎狄의 침략을 마치 모기와 등에가 달려드는 것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현명하다고 칭하였으니, 이것이 중책中策입니다.注+고자古字이다. 은 음이 이니,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날벌레이다.
한 무제漢 武帝는 훌륭한 장군을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옷과 행장과 양식을 조금만 갖고 깊이 쳐들어가서 먼 변방에서 수자리하였으니注+은 적음이니, 옷과 행장을 조금만 갖고 감을 이른다.,
비록 흉노를 이기고 노획한 공이 있으나, 오랑캐가 번번이 보복하여 병화兵禍가 3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이 피폐하고 흉노 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에서는 무제의 무용武勇을 칭하였으니, 이것이 하책下策입니다.注+(징계하다)는 로 읽는다.
진 시황秦 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가볍게 백성들의 힘을 써서 견고한 장성長城을 쌓아 만 리에 뻗치게 하였습니다.
군량을 수송하는 행렬이 바다를 등진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완전해졌으나,
중국은 안이 고갈되어 사직社稷을 망쳤으니, 이것이 무책無策입니다.
[] 지금 천하가 매년 기근이 드는데, 서쪽과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합니다.
30만의 군대를 징발하여 300일 동안의 양식을 장만하려 한다면,
동쪽으로는 동해東海대산岱山(태산泰山)에서 끌어오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회수淮水에서 끌어온 뒤에야 비로소 구비할 수 있으니注+은 음이 이니, 끌어옴이다.,
그 도로의 거리를 계산해보건대 1년이 지나도 다 모일 수가 없습니다.
먼저 도착한 군대는 모여 거처하면서 땡볕을 쪼이고 이슬을 맞고 지내느라 병사들이 지치고 병기兵器가 무뎌져서 형편상 쓸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注+는 기계(병기)이다.
변경이 이미 텅 비어서 군량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고 국내의 군국郡國에서 조달할 적에 서로 제때에 연결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注+調도조徒釣이니, 계산하여 징발하는 것이다. 지욕之欲이니 연결함이다.
한 사람이 300일 동안 먹을 양식을 계산해보면 마른 양식(미숫가루) 18을 사용하니, 소의 힘이 아니면 〈수송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는 또 제가 먹어야 할 것을 가져가야 하니 여기에 20의 무게가 더해집니다. 오랑캐 지역은 사막과 염지鹽地라서 대부분 식수食水마초馬草가 부족하니注+는 염지이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헤아려보건대, 군대가 출동한 지 100일이 못 되어 소는 반드시 죽어서 다 없어질 것이요, 남은 양식은 아직도 많아서 사람들이 다 짊어지고 갈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
[] 북쪽 오랑캐 지역은 가을과 겨울이 몹시 춥고 봄과 여름에는 세찬 바람이 붑니다. 취사도구인 가마솥과 섶나무와 숯을 많이 가지고 가면 무거워서 감당할 수가 없고注+는 음이 이니, 가마솥 중에 주둥이가 큰 것이다., 마른 양식을 먹고 냉수를 마시면서 사시四時를 지내면 병사들이 질병에 걸릴 우려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앞선 세대에서 오랑캐를 정벌할 적에 100일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랫동안 싸우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형편상 불가능했던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
치중輜重(짐을 실은 수레)이 뒤따르게 되면 가볍고 재빠른 병사가 적어서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오랑캐가 서서히 도망하더라도 형편상 우리 군대가 따라잡을 수 없고 다행히 오랑캐를 만나 싸우더라도 또 치중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니注+② 〈“행이봉로幸而逢虜 우루치중又累輜重”은〉 다행히 오랑캐를 만나서 싸우더라도 또 치중輜重이 공격에 방해가 될 것임을 이른다., 만일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말의 재갈과 꼬리가 한 줄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때 오랑캐가 앞뒤를 가로막고 차단하면 위태로움을 측량할 수 없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어려운 점입니다.注+은 말의 재갈이고 는 말의 꼬리이니, 앞뒤로 한 줄로만 가서 여러 말을 나란히 몰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맞다)는 로 읽는다.
백성의 힘을 크게 사용하더라도 공을 꼭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은 엎드려 이것을 걱정합니다.
이제 이미 군대를 징발하였으니, 마땅히 먼저 도착한 자를 풀어놓아 엄우嚴尤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데리고 깊이 쳐들어가 번개처럼 공격해서 우선 오랑캐들을 징계하여 두려워 떨게 해야 합니다.”注+④ 현재 도착한 병사만 거느리고 우선 오랑캐를 공격할 것을 청한 것이다. “정격霆擊”은 우레와 벼락이 진동하여 공격하는 것과 같아서 측량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 왕망王莽이 듣지 않고 병사와 곡식을 운반하기를 예전처럼 하니, 변경에 주둔해 있는 관리와 병사들은 있는 곳마다 제멋대로 행동하였고,
내군內郡에서는 징발을 걱정하여 백성들이 성곽을 버리고 흩어지고 도망하여 도적 떼가 되기 시작하였는데,
병주幷州평주平州가 더욱 심하였다.注+① 이때에는 아직 평주平州가 없었다. 후한後漢 말기에 공손탁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 하였고 나라가 처음으로 유주幽州를 나누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니, 자는 오자誤字이다.
왕망이 중랑中郞을 보내 나누어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편리한 틈을 타고 간악한 짓을 자행하여 을 소요시키고 혼란하게 하였다.注+중랑中郞수의繡衣, 집법執法 세 가지는 모두 관명이다.
북쪽 변방은 선제宣帝 이래로부터 여러 대 동안 봉화烽火의 경계 신호를 보지 못하여,
백성들이 매우 많고 소와 말이 들에 널려 있었다.注+흉노匈奴가 변경에 와서 화친을 청한 뒤를 이른다.
그런데 왕망이 흉노匈奴를 소란시켜 흉노와 원한을 맺으니,
변경 백성들이 죽고 도망하고 포박당하고 노획당하여,
수년 사이에 북쪽 변경이 텅 비어서 들에는 드러난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
[] 왕망王莽태사太師왕순王舜이 죽었다.
[] 왕순王舜왕망王莽이 찬탈한 뒤로부터 놀라 가슴이 떨리는 병을 앓았는데 점점 심해져 죽었다.注+은 점점이다.
[] 왕망王莽공승龔勝을 맞이하여 태자사우太子師友좨주祭酒(좨주)로 삼았는데, 공승이 먹지 않고 하였다.
[] 왕망王莽사자使者를 보내 옥새를 찍은 친서[새서璽書]와 인수印綬, 안거安車사마駟馬를 받들어서 공승龔勝을 맞이하게 하여
그의 집에 나아가 태자사우太子師友좨주祭酒로 임명하게 하니注+은 나아감이니 그 집에 나아가 제수함을 말한다. 왕망王莽사우師友시중侍中, 간의諫議육경六經좨주祭酒 각 한 사람씩 모두 9명의 좨주祭酒를 두었다. 제사 지낼 적에 오직 존장자尊長者가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였으므로 좨주祭酒라 칭했으니, 높인 것이다. 일설에 “좨주祭酒는 관명이 아니고 한 자리의 원장元長(우두머리)이다. 옛날 빈객이 처음 주인의 음식을 받으면 장자長者 한 사람이 먼저 술을 들어 땅에 고수레하였으니, 또한 존경한 것이다.” 하였다.,
사자使者군현郡縣장리長吏삼로三老, 관속官屬, 행의行義, 제생諸生 등 천 명 이상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다.注+(행실)은 거성去聲이니, 행의行義향읍鄕邑행의行義가 있는 사람을 이른다. 제생諸生학도學徒를 이른다.
사자使者가 공승으로 하여금 일어나 자신들을 맞이하게 하고자 하여 오랫동안 문밖에 서 있었는데,
공승은 병이 위독하다고 칭탁하고는 방 안의 문 서쪽, 남쪽 창문 아래에 침상을 설치하고는
머리를 동쪽에 두고 조복朝服을 몸에 걸치고 띠를 올려놓았다.注+③ “호서戶西 남유하南牖下”는 문의 서쪽, 방의 남쪽 창문 아래이다.
[] 사자使者가 옥새를 찍은 친서를 건네주고 인수印綬를 받들어 올리고 안거安車사마駟馬注+(바치다)은 으로 읽는다. 바치고는
나아가서 공승龔勝에게 이르기를 “성조聖朝에서 전장典章제도制度를 아직 완전히 정하지 못하였으니, 을 기다려 정사를 해서 해내海內를 편안히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공승이 대답하기를 “나는 평소 어리석고 게다가 나이가 늙고 병이 들어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 사군使君을 따라 길에 오르면 반드시 길에서 죽을 것이요, 만분의 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注+사자使者를 군주처럼 존경함을 보이려고 사군使君이라 한 것이니, 은 높이는 칭호이다. “무익만분無益萬分”은 만분 가운데 일분도 유익함이 없음을 말한다.
사자使者가 억지로 설득해서 나아가 인수印綬를 공승의 몸에 채우려 하였는데,
공승이 번번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注+일요一遙이니, 강요함이다. (설득하다)는 식예式芮이고, (밀다)는 토회土回이다.
이에 사자使者가 즉시 상언上言하기를 “지금 한여름이어서 날씨가 무더운데 공승이 병들어 기운이 부족하니, 가을에 날씨가 시원해지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망王莽이 이를 허락하였다.注+는 기다림이다.
[] 사자使者공승龔勝의 두 아들과 문인門人고휘高暉 등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마음을 비우고 을 대우하여 를 내리려 하니, 아무리 질병이 심하더라도 마땅히 몸을 움직여 사자使者가 머무는 전사傳舍에 와서 도성에 갈 뜻이 있음을 보여야 하니, 그렇게 하면 반드시 자손에게 대업大業(봉읍封邑)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注+대업大業봉읍封邑을 이른다.
고휘 등이 이 말을 아뢰자, 공승이 말하기를
“내 나라의 많은 은혜를 받고서 보답하지 못하였고, 지금 나이가 늙어서 조석간에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니, 의리상 어찌 한 몸으로 두 을 섬기고 지하에서 옛 군주를 뵐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인하여 관과 염하는 등의 초상의 일을 당부하였다.
말을 마치고 마침내 다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여 14일 만에 죽으니, 죽을 때에 나이가 79세였다.
[] 이때에 깨끗한 명성이 있는 선비 중에 또 낭야琅邪기준紀逡나라의 설방薛方패읍沛邑당림唐林당준唐尊이 있었는데,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삼감으로 이름이 났다.注+① 그 사람의 본토本土성명姓名을 모두 나열하였으니,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삼가다)은 과 같다.
그런데 기준紀逡과 두 당씨唐氏는 모두 왕망王莽에게 벼슬하여 에 봉해져 신분이 귀해졌다.
왕망이 안거安車로 설방을 맞이하려 하자, 설방은 사자使者를 통하여 사양하기를
임금과 임금이 위에 계셨는데도 아래에 소보巢父허유許由가 있었습니다.注+황보밀皇甫謐이 말하기를 “《고사전高士傳》에 ‘허유許由임금이 자신에게 천하를 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사양하고는, 영수潁水의 북쪽, 기산箕山의 아래로 은둔하였다. 임금이 또다시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우두머리로 삼으려 하자, 허유는 그 말을 듣기 싫어하여 영수潁水 가에서 귀를 씻었다. 이때 소보巢父(소보)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고 끌고 왔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그 이유를 물으니, 허유가 대답하기를 「임금이 나를 부르려 하는데,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귀를 씻는 것이다.」 하였다. 소보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높은 언덕과 깊은 골짝에 은거했다면 누가 그대를 볼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일부러 떠돌면서 소문을 내서 자기 명예를 구하고자 하여 결국 내 송아지 입을 더럽히게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송아지를 끌고 상류에 가서 물을 먹였다.’ 했다.” 하였다.
지금 현명한 군주가 막 당우唐虞의 덕을 높이시니, 소신小臣기산箕山의 절개를 지키고자 합니다.” 하였다.
왕망은 그의 말을 기뻐하여 억지로 부르지 않았다.
[] 유미隃麋(유미) 사람 곽흠郭欽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고 두릉杜陵 사람 장후蔣詡(장후)는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어 또한 청렴과 정직함으로 명성이 있었다.注+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부풍군扶風郡유미현隃糜縣이 있다.” 하였다.
왕망王莽거섭居攝하자, 곽흠과 장후는 모두 병으로 관직을 내놓고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누운 채 두문불출하다가 집에서 하였다.
[] 패국沛國 사람 진함陳咸율령律令에 밝아 상서尙書가 되었었는데注+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한 뒤에 패읍沛邑이 비로소 패국沛國이 되었으니, 이는 이후에 본 바를 따라 쓴 것이다., 하무何武포선鮑宣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한탄하기를
“《주역周易》에 하였으니, 내 떠날 만하다.” 하고는
즉시 해골骸骨(치사致仕)을 청하여 관직을 떠났다.
왕망王莽천자天子의 지위를 찬탈하고 진함을 불러 장구대부掌寇大夫로 삼자, 진함은 병을 칭탁하여 명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注+장구대부掌寇大夫는 마땅히 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또 세 아들인 진참陳參진풍陳豐, 진흠陳欽이 모두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진함이 모두 이들로 하여금 관직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와서 문을 닫고 출입하지 말고 그대로 나라의 조일祖日납일臘日을 쓰게 하였다.注+왕자王者는 각기 오행五行이 성한 날을 가지고 조일祖日로 삼고 묘일墓日납일臘日로 삼는다. 나라는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니, 에 성하고 가 되므로 오일午日조일祖日로 삼고 술일戌日납일臘日로 삼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진함은 “우리 선인이 어찌 왕씨王氏납일臘日을 알겠는가.” 하고는,
자신의 집안에 있는 율령律令서문書文을 모두 거두어 속에 보관하였다.
사람 율융栗融북해北海 사람 금경禽慶소장蘇章, 산양山陽 사람 조경曹竟은 모두 유생儒生으로 관직을 떠나 왕망에게 벼슬하지 않았다.注+금경禽慶(금경)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 반고班固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왕길王吉공우貢禹의 재주는 공승龔勝포선鮑宣보다 낫다.注+왕공王貢왕길王吉공우貢禹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지키고 를 잘 따름은 공승이 실로 이를 행하였고, 바르게 하고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음은 설방薛方이 이에 가까우며注+② 《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에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군자君子는 바르게 하고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군자君子는 그 를 바르게 할 뿐이니, 말에 작은 신의를 기필하지 않음을 말씀한 것이다. 설방薛方의 마음이 어지러운 조정을 피하려 해서 거짓으로 소보巢父허유許由를 인용하여 비유하였으니, 이 뜻에 가까운 것이다.,
곽흠郭欽장후蔣詡는 은둔을 좋아하고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기준紀逡과 두 당씨唐氏보다 크게 낫다.注+은 크게 뛰어남이니, 〈“절기당絶紀唐”은〉 기준紀逡과 두 당씨唐氏보다 크게 뛰어남을 이른다.
[] 황하의 연안에 있는 황충蝗蟲의 피해가 발생하였다.注+① “빈하군瀕河郡”은 황하의 연안에 있는 남북의 여러 을 이른다.
[] 황하가 터졌다.
[] 황하가 위군魏郡으로 터져서 청하군淸河郡 동쪽의 여러 으로 범람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망은 황하가 터져 원성元城의 선조 무덤이 폐해를 입을까 염려했었다.
그런데 황하가 터져 동쪽으로 흘러가자, 원성元城이 수해를 염려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제방을 쌓아 터진 황하를 막지 않은 것이다.注+왕망王莽의 증조인 왕하王賀 이하의 선대 무덤이 위군魏郡원성元城에 있었다.


역주
역주1 匈奴諸部……州郡兵起 : “夷狄의 폐해가 가벼우면 ‘入塞’라 쓰고 중하면 ‘入寇’라 쓰는 것이 떳떳한 書法이다. 이때에 太守와 都尉를 죽이고 官吏와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는데, ‘入寇’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王莽이 진실로 도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匈奴가 入塞했다’라고 쓰고 아래에서는 ‘貉人이 入邊했다.’라고 쓴 것이다. ‘군대가 일어났다.[兵起]’란 무슨 말인가. 도둑이 일어난 것이다. 도둑을 어찌 ‘兵起’라고 썼는가. 王莽이 진실로 도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起兵’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군대가 일어난 것이 많다는 말이니, ‘起義(義를 일으킴)’와는 약간 다르다. 匈奴와 貉人을 ‘寇’라고 쓰지 않고 도둑을 ‘盜’라고 쓰지 않았으니, 《資治通鑑綱目》에 역적을 토벌함이 엄격하다.[夷狄之害輕 書入塞 重 書入寇 恒辭也 於是 殺守尉 略吏民矣 其不書入寇 何 莽故寇也 故此書匈奴入塞 下書貉人入邊 兵起 何 盜也 盜也 曷爲以兵起書 莽故盜也 然則曷爲不書起兵 衆辭也 與起義者微異矣 匈奴貉人 不書寇 盜不書盜 綱目之討賊 嚴矣哉]” 《書法》 “匈奴는 夷狄인데 ‘入寇’라고 쓰지 않고 ‘入塞’라고 썼으며, 州郡은 部의 소속인데, ‘도둑이 일어났다.’라고 쓰지 않고 ‘군대가 일어났다.’라고 쓴 것은 진실로 나라를 찬탈한 역적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를 주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바꾸어 義를 일으킨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니, 역적을 토벌함에 급급한 뜻이 어떠한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이 편수되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한 것이다.[匈奴 夷狄也 不曰入寇而曰入塞 州郡 部屬也 不曰盜起而曰兵起 誠以簒逆之賊 人皆得而誅之 故變文起義 書法若此 其汲汲討賊之意 爲何如哉 故曰 綱目修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2 左部와……都尉 : 胡三省의 註에는 “左右大都尉”라고 하였다. 匈奴의 官職에는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등이 나오며, 大將, 大都尉, 大當戶 등은 중급 지휘관으로 보는 설이 있다.
역주3 繡衣執法 : 아래 訓義에는 繡衣와 執法을 달리 보았으나, 《後漢書》 〈伏湛傳〉의 註에 漢 武帝 때 繡衣御史를 王莽 때 숙의집법으로 개칭하였다고 하였다.
역주4 莽迎龔勝……而卒 : “王莽의 신하를 모두 ‘死’라고 쓴 것은 왕망을 역적으로 여긴 것이다. 왕망의 篇이 끝날 때가지 오직 龔勝을 ‘卒’이라고 썼으니, 이는 왕망의 신하와 달리한 것이다.[莽臣皆書死 賊莽也 終莽之篇 惟龔勝書卒 所以殊之於莽臣也]” 《書法》 “王舜이 비록 가슴이 떨리는 병에 걸려 죽었으나 ‘王莽의 太師’라고 쓰고 ‘死’라고 씀을 면치 못한 것은 漢나라를 찬탈하는 모의에 왕순이 실제로 참여하였고 또 그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龔勝은 비록 왕망에게 초청을 받았으나 특별한 筆法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라고 쓴 것은 찬탈한 역적에게 벼슬하지 않고 능히 大節을 온전히 하여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해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한 번 허여하고 한 번 빼앗음에 포폄하는 실정이 나타났고 命과 義의 경계가 엄격하니, 士君子의 출처의 이치가 분명하다.[王舜雖殞於病悸 然不免書莽太師書死者 簒漢之謀 舜實預之 且又居其位也 龔勝雖爲莽所迎 然特筆書不食卒者 不仕簒逆 能全大節 歸潔其身也 一予一奪 而褒貶之情見矣 命義之戒嚴矣 士君子出處之致 昭矣]” 《發明》
역주5 머리를……올려놓았다 : 동쪽에 머리를 두는 것은 生氣를 받기 위해서이다. 봄은 방위상 동쪽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므로 病者가 소생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이다. 病者가 군주나 군주의 使者를 만나볼 적에 병석에 누워 환자복으로 만나볼 수도 없고 또 환자에게 조복을 입히고 띠를 매게 할 수도 없으므로 조복을 환자의 몸 위에 걸치고 띠를 올려놓는 것이다. 孔子가 병환이 있어 군주가 문병 왔을 적에 이렇게 하였는데, 《論語》 〈鄕黨〉에 이 내용이 보인다.
역주6 茅土(封邑) : 王‧侯에게 토지를 봉하여 작위를 내리는 것을 이른다. 고대에 天子가 王‧侯를 분봉할 적에 방위를 대표하는 다섯 가지의 흙으로 단을 쌓았는데, 封地가 있는 방향을 살펴 한 가지 색깔의 흙을 취한 다음 흰 띠풀로 싸서 건네주어, 이를 제후국을 소유하고 사직을 세우는 표징으로 삼게 하였다.
역주7 기미를……않는다 : 기미는 낌새란 말과 유사한바, 군주의 마음이 속으로 잘못되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벼슬을 버리고 당장 떠나감을 이르는바, 《周易》 豫卦 九二 爻辭에 “절개가 돌과 같아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貞하고 吉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는데, 〈繫辭傳 下〉에 “군자가 기미를 보고 떠나가서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주역》에 ‘절개가 돌과 같아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 하였다. 절개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리겠는가.[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라고 보인다.
역주8 范史 : 南朝 宋나라의 范曄이 편찬한 《後漢書》의 별칭이다.
역주9 作士 : 王莽의 新나라에 있었던 관직으로, 형법을 관장하였다.
역주10 午祖戌臘 : 《後漢書》 〈陳寵傳〉의 이에 대한 注에 應劭의 《風佑通》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共工의 아들이 멀리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죽어서 祖神이 되었다. 漢나라에서는 火의 운행이 午에 성하므로 午日을 祖라 하였다. 臘은 연말에 여러 神에게 제사하는 이름으로 臘은 接의 뜻이니, 새것과 옛것이 交接하므로 크게 제사하여 功에 보답하는 것이다. 火의 운행은 戌에 쇠하므로 臘祭를 戌日로 쓰는 것이다.” 하였다. 牛는 南方이고 火에 해당하므로 火의 운행을 午日에 성하다 하였다. 墓는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파묻힌 것이므로 火의 운행이 쇠하는 戌日을 墓라 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1 守死善道 : 《論語》 〈泰伯〉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12 君子之人……言不必信也 : 《論語注疏》 〈衛靈公〉 何晏의 注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6)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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