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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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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年이라
秦太初三이요 燕建興三이요 後秦建初三이요 魏登國三年이라 ◑ 西秦王乞伏乾歸太初元年이라
春正月 康樂公謝玄注+① 樂音洛. 康樂縣, 屬豫章郡.하다
諡獻武라하다
秦主登 軍朝那하고 後秦主萇 軍武都注+① 朝那縣, 自漢以來, 屬安定郡, 此武都, 亦當在安定界. 五代志 “朝那縣, 西魏置安武郡.” 安武, 漢舊縣名, 武都之名, 當是因安武而名.하다
◑ 翟遼 自稱魏天王하다
遼遣使하여 謝罪於燕이어늘 燕主垂 以其反覆斬之하니 遼乃自稱魏王하고 徙屯滑臺注+① 遼自黎陽, 徙屯滑臺, 旣與燕絶, 欲阻河爲固也.하다
呂光 殺其武威太守杜進하다
光之定涼州也 進功 居多 貴寵用事하여 群僚莫及이러니
光甥石聡 自關中來어늘 問之曰 中州人 言我爲政何如 聡曰 但聞有杜進耳 不聞有舅라하니 由是 忌進殺之하다
他日 與群僚 語及政事할새 參軍段業曰 明公 用法太峻하시니이다 光曰 呉起無恩而楚彊하고 商鞅 嚴刑而秦興이니라
業曰 起喪其身하고 鞅亡其家하니 皆殘酷之致也어늘 明公慕之하시니 豈此州士女所望哉리잇고 改容謝之러라
夏四月 以朱序 都督司雍等州軍事하여 戍洛陽하고 譙王恬으로 都督兗冀等州軍事하여 鎭淮陰注+① 恬, 無忌之子也.하다
◑ 六月 西秦王乞伏國仁하니 弟乾歸立하다
乾歸 號河南王注+① 時乞伏氏跨有涼州河南之地, 遂爲國號.하고 遷都金城이어늘 封以爲金城王하니 秦涼鮮卑羌胡 多附之러라
秋七月 兩秦兵 各引還하다
兩秦 自春相持하여 屢戰 互有勝負러니 至是 各解歸하니 關西豪傑 以後秦無成功이라하여 多去而附秦이러라
八月 魏遣使如燕하다
魏王珪 密有圖燕之志하여 遣九原公儀하여 奉使至中山注+① 儀, 珪母弟翰之子也.이러니
還言於珪曰 燕主衰老하고 太子闇弱하며 范陽王 自負材氣하니 非少主臣이라 燕主旣没이면 内難 必作이니 於時 乃可圖也 今則未可니이다 珪善之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3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登 太初 3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3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建初 3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3년이다. 西秦王 乞伏乾歸 太初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晉나라(東晉)의〉 康樂公 謝玄이 卒하였다.注+① 樂은 음이 洛이다. 康樂縣은 豫章郡에 속하였다.
【目】 시호를 獻武라 하였다.
【綱】 秦主(前秦) 符登은 朝那에 군대를 주둔하고 後秦主 姚萇은 武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注+① 朝那縣은 漢나라 이래로 安定郡에 소속하였으니, 이 武都 또한 마땅히 안정군의 경계에 있었을 것이다. ≪五代志≫(≪隋書≫ 〈地理志〉)에 “朝那縣은 西魏 때에 安武郡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安武는 漢나라의 옛 縣의 명칭이니, 武都라는 이름은 마땅히 이 安武로 인하여 이름했을 것이다.
【綱】 翟遼가 스스로 魏天王이라고 칭하였다.
【目】 翟遼가 사자를 보내어 燕나라(後燕)에 사죄하자, 燕主 慕容垂는 그가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하여 사신을 참수하니, 적료가 마침내 스스로 魏王을 칭하고 滑臺로 주둔지를 옮겼다.注+① 翟遼가 黎陽에서 滑臺로 주둔지를 옮기니, 燕나라와 절교한 상황에서 河水를 경계로 하여 견고함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綱】 〈涼州(後涼)의〉 呂光이 武威太守 杜進을 죽였다.
【目】 呂光이 涼州를 평정할 적에 杜進의 공이 많았다. 두진은 신분이 귀하고 임금에게 총애를 받아 권력을 행사해서 다른 신료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여광의 생질 石聡이 關中에서 오자, 여광이 그에게 묻기를 “中州의 사람들은 나의 정사에 대해 무어라고 평하는가?”라고 하니, 석총이 대답하기를 “다만 두진이 있음을 들을 뿐이요 외숙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광이 이 때문에 두진을 시기하여 죽였다.
【目】 다른 날에 呂光이 신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정사에 미쳤는데, 參軍 段業이 말하기를 “明公께서는 너무 준엄하게 법을 적용하십니다.”라고 하니, 여광이 말하기를 “呉起는 은혜를 베풀지 않아 楚나라가 강하였고, 商鞅은 형벌을 엄하게 적용하여 秦나라가 흥왕했다.” 하였다.
단업이 말하기를 “오기는 자기 몸을 죽였고 상앙은 자기 집안을 망쳤으니, 이는 모두 잔혹한 형벌이 불러온 결과인데 명공께서 이들을 사모하시니, 이 어찌 涼州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여광이 용모를 고쳐 사과하였다.
【綱】 여름 4월에 〈晉나라(東晉)가〉 朱序를 都督司․雍等州軍事로 삼아 洛陽을 지키게 하고, 譙王 司馬恬으로 都督兗․冀等州軍事를 삼아 淮陰에 진주하게 하였다.注+① 司馬恬은 司馬無忌의 아들이다.
【綱】 6월에 西秦王 乞伏國仁이 卒하니, 아우 乞伏乾歸가 즉위하였다.
【目】 乞伏乾歸가 河南王이라 칭하고注+① 이때 乞伏氏가 涼州의 황하 남쪽의 땅을 점유하고는 마침내 西秦이라고 국호를 삼았다. 金城으로 천도하였는데, 秦나라(前秦)가 봉하여 金城王으로 삼으니, 秦州와 涼州의 鮮卑族, 羌族, 胡族이 대부분 그를 따랐다.
【綱】 가을 7월에 두 秦나라(前秦과 後秦)가 군대가 각각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目】 두 秦나라가 봄부터 서로 대치하여 여러 번 전투를 치르면서 서로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르러 각기 해산하고 돌아가니, 關西의 호걸들은 後秦이 이룬 공이 없다 하여 대부분 그를 버리고 秦나라(前秦)를 따랐다.
【綱】 8월에 魏나라(北魏)가 燕나라(後燕)에 사신을 보내었다.
【目】 魏王 拓跋珪가 은밀히 燕나라를 도모할 뜻이 있어서 九原公 拓跋儀를 보내어 使命을 받들고 中山에 가게 하였는데,注+① 拓跋儀는 拓跋珪의 동모제인 拓跋翰의 아들이다.
탁발의가 돌아와서 탁발규에게 말하기를 “燕主(慕容垂)는 노쇠하였고 태자는 어리석고 연약하며, 范陽王(慕容德)은 자신의 재주와 기개를 자부하니, 어린 군주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燕主가 죽고 나면 반드시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그때 비로소 도모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라고 하니, 탁발규가 옳게 여겼다.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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