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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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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年(198)
三年이라 曹操復擊張繡하다
荀攸曰 繡與劉表相恃爲彊이나 然繡以遊軍仰食於表어늘 表不能供也하니 勢必乖離
不如緩之 可誘而致也 若急之 其勢必相救니이다 操不從하고 圍繡於穰하다
夏四月 詔將軍段煨等하여 討李傕하여 夷三族하다
◑曹操引兵還하다 五月 劉表救張繡어늘 操擊破之러니 繡復追敗操軍하다
袁紹每得詔書 患其有不便於己者하여 欲移天子自近하여
使說曹操以許下埤溼하고 雒陽殘破注+埤, 部靡切, 下濕也. 溼, 古濕字.하니 宜徙都鄄城하여 以就全實이라한대 操拒之어늘
田豐曰 徙都之計 旣不克從이라 宜早圖許하여 奉迎天子하여 動托詔書하여 號令海內 此算之上者
不爾 終爲人所禽이니 雖悔無益也니이다 紹不從이러니 而亡卒有以豐謀白操者하여 操解穰圍而還注+亡卒, 紹亡卒也.이라
張繡 率衆追之러니 劉表遣兵救繡하여 屯於安衆하여 守險以絶軍後注+郡國志, 南陽郡有安衆侯國.어늘
操與荀彧書曰 吾到安衆 破繡必矣로다 及到安衆 操軍前後受敵이라
操乃夜鑿險僞遁하니 表, 繡悉軍來追어늘 操縱奇兵夾攻하여 大破之하다
他日 彧問其故한대 操曰 虜遏吾歸師而與吾死地하니 吾是以 知勝矣注+兵法曰 “歸師勿遏.” 又曰 “置之死地而後生.”로다
繡之追操也 賈詡止之러니 繡不聽하여 敗還하니 詡登城하여 謂曰 促更追之하라 更戰必勝하리라 繡從之하여 果以勝還이라
乃問詡曰 繡以精兵追退兵이어늘 而公曰必敗라하고 以敗卒擊勝卒이어늘 而公曰必克이라하더니 悉如公言 何也
詡曰 將軍 雖善用兵이나 非曹公敵也 曹公軍 新退하니 必自斷後 故知必敗
曹公 旣無失策하고 力未盡이어늘 而一朝引退하니 必國內有故也注+有故, 謂有變也.
已破將軍 必輕軍速進하고 留諸將斷後하리니 諸將雖勇이나 非將軍敵이라 雖用敗兵而戰必勝也니이다 繡乃服이러라
秋九月 呂布復攻劉備러니 曹操擊布하여 殺之하다
呂布復與袁術通하고 遣高順, 張遼하여 攻劉備하여 九月 破沛城하고 虜備妻子하니 備單身走
曹操欲自擊布어늘 諸將 皆曰 劉表, 張繡在後어늘 而遠襲呂布하면 其危必也이리라
荀攸曰 表, 繡新破하니 勢不敢動이요 驍猛하고 又恃袁術注+驍, 堅堯切, 健也.하니 若從横淮, 泗間이면 豪傑 必應之리니
今乘其初叛하여 衆心未一이면 往可破也니이다 操曰 善하다
比行 泰山屯帥臧霸等 皆附於布 操與劉備遇於梁하여 進至彭城하니
陳宮謂布호되 宜逆擊之 以逸擊勞 無不克也리이다 布曰 不如待其來攻하여 蹙著泗水中注+蹙, 迫也. 著, 陟略切, 置也.이라하다
十月 操屠彭城하다 廣陵太守陳登 率郡兵하고 爲操先驅하여 進至下邳하니 布屢戰皆敗하여 還保城不敢出하여 欲降이어늘
陳宮曰 曹操遠來하니 勢不能久 將軍 若以步騎 出屯於外하고
將餘衆하여 閉守於內라가 若向將軍이어든 引兵而攻其背하고 若但攻城이면 則將軍救於外
不過旬月 操軍食盡하리니 擊之可破也니이다 布然之러니 布妻曰 宮與高順 素不和하니 必不同心共守
如有蹉跌이면 將軍 當於何自立乎잇가 且曹氏待公臺如赤子로되 猶舍而歸我注+公臺, 陳宮字.하니
今將軍厚公臺不過曹氏어늘 而欲委全城, 捐妻子하고 孤軍遠出하니 若一旦有變이면 妾豈得復爲將軍妻哉잇가 布乃止하다
張楊 素與布善이라 欲救之로되 不能하여 乃出兵遥爲之勢러니
十一月 楊將楊醜殺楊以應操하니 別將眭固 復殺醜하고 將其衆하여 北合袁紹注+眭, 胥規切. 眭固, 姓名.하다
性仁和하고 無威刑하여 下人 謀反發覺이어든 對之涕泣하고 輒原不問이라 及於難하니라
操圍下邳久 疲敝欲還이러니 荀攸, 郭嘉曰 呂布 勇而無謀하니 今屢戰皆北하여 銳氣衰矣注+軍敗曰北.
三軍 以將爲主 主衰則軍無奮意 陳宮 有智而遲하니 今及布氣之未復하고 宮謀之未定하여 急攻之 可拔也리이다
乃引沂泗灌城하니 月餘 布益困迫注+泗水東南流, 過下邳縣西, 沂水南流, 亦至下邳縣西, 而南入于泗, 故倂引二水以灌城.이러라
十二月 布將魏續等 共執陳宮, 高順하여 率其衆降이라
布登白門樓하니 兵圍之急注+下邳城南門名白門.이어늘 布令左右 取其首詣操하니 左右不忍이라 乃下降하여
布見操하고 曰 明公之所患 不過於布러니 今已服矣 若令布將騎하고 明公將步하면 天下 不足定也니라 操命緩布縛하니
劉備曰 不可하다 明公 不見呂布事丁建陽, 董太師乎아하니 操頷之注+丁原字建陽, 董卓官至太師, 布皆殺之. 頷, 戶感切, 頷之者, 微動頤頷以應之.러라 操謂宮曰 奈卿老母妻子何
宮曰 宮 聞以孝治天下者 不害人之親이요 施仁政於天下者 不絶人之祀라하니 老母妻子存否 在明公이요 不在宮也니라
操未復言 請就刑하고 遂出不顧하니 操爲之泣涕하고 幷布, 順皆縊殺之하다
召宮母養之하여 終其身하고 嫁宮女하여 撫視其家호되 皆厚於初러라 張遼, 臧霸等 皆降하다
操在兗州 以徐翕, 毛暉爲將이러니 及兗州亂 翕, 暉皆叛하여 亡命投霸하니
操語備하여 令霸送二首한대 霸曰 霸所以能自立者 以不爲此也 霸受主公生全之恩하니 不敢違命이어니와
然王霸之君 可以義告 願將軍爲之辭하라 備以霸言白한대
操歎息하고 謂霸曰 此 古人之事어늘 而君能行之하니 孤之願也라하고 以翕, 暉爲太守하고 陳登 以功加伏波將軍하다
以劉備爲左將軍하다
備從操하여 還許하니 操表以爲左將軍하고 禮之愈重이러라
하고 封吳侯하다
孫策 遣張紘하여 獻方物注+方物, 方土所産之物.하니 曹操欲撫納之하여 表策爲討逆將軍하고 封吳侯하고 以紘爲侍御史注+討逆將軍, 亦創置也. 由烏程徙封吳, 進其封也.하다
袁術 以周瑜爲居巢長하고 臨淮魯肅爲東城長注+東城縣, 前漢屬九江郡, 後漢省, 當是術復置也.이러니 瑜, 肅 知術無成하고 棄官渡江從策하다
自將討祖郞於陵陽하여 禽之注+陵陽縣, 屬丹陽郡.하고 謂曰 爾昔襲孤하여 斫孤馬鞍注+上興平元年, 策爲祖郞所襲.이러니
今創軍立事 除棄宿恨하니 汝勿恐怖하라하고 卽破械하여 署門下賊曹注+械, 桎梏也. 除署爲門下賊曹, 以主盜賊之事.하다
又討太史慈於勇里하여 禽之라가 解縛捉其手하고 曰 寧識神亭時邪 若卿 爾時得我 云何注+勇里在涇縣. 捉, 執也. 識, 音志, 記也. 神亭, 事見興平二年.
慈曰 未可量也니라 策大笑曰 今日之事 當與卿共之하리라 聞卿有烈義하고 天下智士也注+慈, 東萊人, 少爲郡奏曹史. 時郡與州有隙, 交章以聞, 而州章先到雒, 慈劫取壞之, 由是知名. 後赴孔融之急, 詣劉備求救, 此策所謂烈義也.로되 但所託未得其人耳注+謂劉繇也.
孤是卿知己 勿憂不如意也하라하고 卽署門下督하다 軍還할새 祖郞, 太史慈 俱在前導하니 軍人以爲榮이러라
劉繇卒於豫章하니 揚州士衆萬餘人 欲奉華歆爲主한대
以爲因時擅命 非人臣所宜라하고 謝遣之하니 其衆 未有所附
命慈往撫安之하고 謂曰 劉牧 往責吾爲袁氏攻廬江하니 吾先君兵數千人 盡在公路許注+劉牧, 謂劉繇也. 繇先爲揚州刺史, 廬江隷焉. 袁術使孫策攻廬江, 故劉繇往甞責讓策也. 爲, 去聲. 先孫堅有兵數千, 爲袁術所幷, 後以餘兵千餘人還策, 故云盡在公路許. 許, 猶言處也.
吾志在立事하니 安得不屈意以求之乎리오 其後 不遵臣節하고 諫之不從注+事見上二年.하니
丈夫義交 苟有大故 不得不離 吾交求公路及絶之本末 如此
恨不及其生時하여 與共論辨也로라 今兒子在豫章하니 往視之하고 幷宣孤意於其部曲하여
樂來者 與俱來하고 不樂者 且安慰之하고 幷觀華子魚所以牧御方規何如注+子魚, 歆字.하라 須幾兵 多少隨意注+幾, 擧豈切, 數問多少之辭.하라
慈曰 兵不宜多 將數十人이면 足矣니이다 左右皆曰 慈必不還하리이다
策曰 子義捨我하고 當復從誰注+子義, 慈字.리오 子義雖氣勇有膽烈이나 然非縱横之人이라
其心 秉道義하고 重然諾하여 一以意許知己 死亡不相負하나니 諸君 勿憂也注+然, 是也, 決辭也. 諾, 應也, 許辭也. 一, 專一也. 壹以其意自許知己之交, 則雖死不負.하라하더니
果如期而慈反하고 謂策曰 華子魚 良德也 然無他方規하고 自守而已
僮芝自擅廬陵注+僮芝, 姓名. 廬陵縣, 屬豫章郡.하고 番陽 別立宗部注+番, 音婆, 番陽縣, 屬豫章郡. 宗部, 卽所謂江南宗賊也.하여 注+海昏縣, 屬豫章郡. 時縣民數千家, 自相結聚, 作宗伍, 壁於上繚. 水經註 “僚水導源建昌縣, 漢元帝永光二年, 分海昏立. 僚水又東逕新吳縣, 漢中平中立. 僚水又逕海昏縣, 謂之上僚水.” 繚, 讀曰僚.호되 子魚但視之而已러이다 策拊掌大笑하고 遂有兼幷之志注+拊, 拍也.러라
하여 圍之하다
袁紹連年攻公孫瓚이나 不能克하니 欲與釋憾連和러니 瓚不答而增修守備하니 紹於是 大興兵以攻瓚하다
先是 瓚別將 有爲敵所圍者어늘 不救하고 曰 救一人이면 使後將恃救하여 不肯力戰이라하더니
及紹來攻瓚 南界別營 知不見救하고 或降或潰 紹軍 徑至其門하니 瓚衆 日蹙注+門, 易京之門也.이러라


무인년戊寅年(198)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3년이다. 봄에 조조曹操장수張繡를 다시 공격하였다.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장수張繡유표劉表가 서로 믿고 의지하여 그 힘이 강합니다. 그러나 장수는 객군客軍으로서 유표에게 군량을 의지하고 있는데 유표가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니, 두 사람은 형편상 반드시 서로 어그러져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군대의 출동을 늦추는 것이 나으니, 장수를 유인하여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대의 출동을 급박하게 하면 형편상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이를 따르지 않고 양현穰縣에서 장수를 포위하였다.
】 여름 4월에 장군 단외將軍 段煨 등에게 조령詔令을 내려서 이각李傕을 토벌하여 그 삼족三族주멸誅滅하게 하였다.
조조曹操가 군대를 인솔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5월에 유표劉表장수張繡를 구원하자 조조가 이를 격파하였는데, 장수가 다시 조조의 군대를 추격하여 패퇴시켰다.
】 처음에 원소袁紹조서詔書를 받을 때마다 그 안에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을 근심하여 천자天子를 자기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조曹操에게 사람을 보내어 “허도許都 일대는 지세가 낮고 습하며 낙양雒陽잔파殘破되었으니注+부미部靡이니, 땅이 낮고 습한 것이다. 고자古字이다., 견성鄄城(견성)으로 천도하여 지역이 온전하고 재정이 풍족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설득하였는데, 조조가 이를 거절하였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도의 계획은 이미 따를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빨리 허도許都를 도모하여 천자를 받들어 맞이해서 행하는 바가 있을 때마다 곧 조서詔書에 의탁하여 해내海內를 호령하는 것이 바로 상책上策입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잡힐 것이니, 그때에는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원소가 이를 따르지 않았는데, 원소의 도망친 사졸들 중에 전풍의 계책을 가지고 조조에게 아뢰는 자가 있어서 조조가 양현穰縣에 대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注+망졸亡卒”은 원소袁紹의 도망친 사졸이다.
장수張繡가 군대를 이끌고 조조曹操를 추격하였다. 유표劉表가 군대를 보내어 장수를 구원하여 안중安衆에 주둔시켜 험조險阻한 지세를 점거해 지켜서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남양군南陽郡안중후국安衆侯國이 있다.
조조가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내가 안중安衆에 도착하면 장수의 군대를 틀림없이 격파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안중에 도착하였을 적에 조조의 군대는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다.
조조가 마침내 밤중에 험조한 지세를 뚫어 길을 통하게 하고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니, 유표와 장수가 전군을 동원하여 추격하였는데, 조조가 기병奇兵(기습부대)을 풀어서 협공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 후일 순욱荀彧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조조曹操가 말하기를 “적군이 나의 돌아가는 군대를 막아서 나를 사지死地에 두니, 내가 이 때문에 이길 줄을 알았다.”注+병법兵法 하였고, 또 하였다. 하였다.
장수張繡조조曹操를 추격할 적에 가후賈詡가 만류하였으나 장수가 이를 듣지 않아 패하고 돌아왔는데, 이때 가후가 성에 올라가서 장수에게 이르기를 “급히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하니, 장수가 이 말을 따라서 과연 이 때문에 승리하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가 가후에게 묻기를 “내가 정예병을 거느려 퇴각하는 적의 군대를 추격할 적에 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패한 사졸을 거느려 승리한 적의 군대를 공격할 적에 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이 한 말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하자,
가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께서 비록 용병用兵을 잘하시지만 조공曹公의 적수는 아닙니다. 조공의 군대가 막 퇴각할 적에 반드시 스스로 그 퇴로를 차단했을 것이기 때문에 장군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고,
조공이 이미 실책한 것도 없고 힘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으니, 이는 틀림없이 국내國內변고變故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注+유고有故”는 변고變故가 발생함을 이른다.
이미 장군의 군대를 격파한 뒤에는 반드시 경무장한 군대로 속히 나아가고 장수들을 남겨두어 퇴로를 차단하였을 것이니, 장수들이 비록 용맹하지만 장군의 적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패한 군대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반드시 이긴 것입니다.” 장수가 이에 탄복하였다.
】 가을 9월에 여포呂布가 다시 유비劉備를 공격하였다. 겨울에 조조曹操가 여포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여포呂布가 다시 원술袁術통호通好하고 고순高順장료張遼를 보내어 유비劉備를 공격하였는데 9월에 패성沛城을 격파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으니, 유비가 단신으로 달아났다.
조조曹操가 직접 여포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유표劉表장수張繡가 우리의 배후에 있는데 먼 길을 가서 여포를 습격하면 틀림없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순유荀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표와 장수는 이제 막 격파되어서 형세상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여포는 굳세고 용감하며 또 원술袁術의 세력에 의지하니注+견요堅堯이니, 굳셈이다., 만약 그가 회수淮水사수泗水 일대에서 횡행한다면 호걸들은 반드시 그에게 호응할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막 배반하여 군중軍中의 인심이 아직 하나로 뭉치지 않은 때를 틈타서 진군한다면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조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 군대가 출동하자, 태산泰山에 주둔하고 있던 도적의 우두머리 장패臧霸 등이 모두 여포呂布에게 귀부하였다. 조조曹操유비劉備 지역에서 만나 진군하여 팽성彭城에 이르렀다.
진궁陳宮이 여포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군대를 출동하여 적을 맞받아 공격해야 합니다. 휴식을 취한 군대를 거느려 피로한 적을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여포는 말하기를 “저들이 진군하여 공격하기를 기다렸다가 사수泗水 속으로 몰아넣는 것만 못하다.”注+은 핍박함이다. 척략陟略이니, 둠이다. 하였다.
】 10월에 조조曹操팽성彭城을 함락하여 도륙하였다. 광릉태수 진등廣陵太守 陳登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조조의 선봉이 되어 진군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렀다. 여포呂布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는 회군하여 하비성下邳城을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하면서 조조에게 항복하고자 하였는데,
진궁陳宮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조의 군대는 먼 길을 와서 형세상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군이 만약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서 주둔하고,
제가 나머지 병력을 거느리고 성 안에서 성문을 닫고 지키고 있다가 조조가 만약 장군을 향해 공격해오면 제가 군대를 이끌고서 그 배후를 공격하고, 조조가 만약 다만 성만을 공격하면 장군이 성 밖에서 구원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한 달을 넘기지 못하여 조조의 군대는 식량이 바닥나게 될 것이니, 이때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는 이 말이 옳다고 여겼는데, 여포의 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궁은 고순高順과 평소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차질이 생기면 장군께서는 응당 어디에 스스로 서시겠습니까. 또한 조씨曹氏공대公臺(진궁陳宮)를 적자赤子와 같이 대하였는데도 그는 조씨를 버리고 우리에게 귀의하였습니다.注+공대公臺진궁陳宮이다.
지금 장군께서 공대를 후대하신 것이 조조가 대우했던 것을 넘지 못하는데, 성 전체를 그에게 내맡기고 처자식을 버리고서 고군孤軍으로 먼 길을 떠나려고 하시니, 만약 하루아침에 변고가 발생하면 이 어찌 다시 장군의 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이에 그만두었다.
장양張楊이 평소 여포呂布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그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이에 군대를 출동하여 멀리서 그를 위하여 성원聲援하였다.
11월에 장양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살해하여 조조曹操에게 호응하자, 별장 수고別將 眭固(수고)가 다시 양추를 살해하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袁紹에게 의탁하였다.注+서규胥規이니, 수고眭固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장양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여 위엄과 형벌을 행함이 없어서 아랫사람의 모반이 발각되면 그를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서 번번이 용서해주고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화난禍難에 미친 것이다.
조조曹操하비下邳를 포위한 지 오래되니, 군대가 지치고 쇠약해져 회군하고자 하였는데 순유荀攸곽가郭嘉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포呂布는 용맹하지만 지모智謀가 없으니, 지금 여러 차례 치른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여 예기銳氣가 꺾였습니다.注+군대가 패배한 것을 라고 한다.
삼군三軍은 장수를 로 삼으니, 주장主將이 쇠하면 병사들은 분전奮戰하려는 의지가 없고, 진궁陳宮은 지혜가 있으나 더딥니다. 지금 여포의 예기銳氣가 회복되지 못하고 진궁의 계책이 정해지지 못하였을 적에 급히 공격하면 여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가 이에 기수沂水사수泗水의 물을 끌어다가 하비성下邳城에 대니, 달포가 지나자 여포의 형세가 더욱 절박하게 되었다.注+사수泗水는 동남쪽으로 흘러가 하비현下邳縣 서쪽을 지나고, 기수沂水는 남쪽으로 흘러가 또한 하비현下邳縣 서쪽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흘러가 사수泗水로 들어가기 때문에 두 물을 함께 끌어다가 하비성下邳城에 댄 것이다.
】 12월에 여포呂布의 장수 위속魏續 등이 함께 진궁陳宮고순高順을 사로잡고서 그 군대를 거느려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다.
曹操가 呂布를 죽이다曹操가 呂布를 죽이다
여포가 백문白門성루城樓에 오르니, 조조의 군대가 급박하게 포위하였다.注+하비성 남문下邳城 南門의 이름이 백문白門이다. 여포가 좌우左右의 수하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조조에게 나아가 투항하게 하였는데, 좌우의 수하들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자 여포가 이에 성에서 내려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여포가 조조를 보고 말하기를 “명공明公께서 근심하신 바가 저 여포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제가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만약 저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명공明公께서 보병을 거느리시면 천하는 평정할 것도 못 될 것입니다.” 하자, 조조가 여포의 포박을 느슨하게 해줄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정원丁原)과 동태사董太師(동탁董卓)를 섬겼던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니,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注+정원丁原건양建陽이고 동탁董卓은 관직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는데, 여포가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호감戶感이니, “함지頷之”라는 것은 턱을 약간 움직여서 응답한 것이다. 조조가 진궁에게 이르기를 “의 노모와 처자식을 어찌 하려는가.” 하니,
진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해치지 않고, 천하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자는 다른 사람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제 노모와 처자식의 생사는 명공明公에게 달려 있지, 저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조가 다시 말하기도 전에 진궁이 을 받기를 청하고, 마침내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조조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여포와 고순까지 모두 목을 졸라 죽였다.
조조는 진궁의 노모를 불러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으며, 진궁의 여식을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잘 돌보아주었는데, 모두 처음보다 더 후하게 하였다. 장료張遼장패臧霸 등이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 처음에 조조曹操연주兗州에 있을 때 서흡徐翕모휘毛暉를 장수로 삼았었는데, 연주兗州에 변란이 일어나자 서흡과 모휘가 모두 조조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장패臧霸에게 의탁하였다.
조조가 유비劉備에게 말하여 장패에게 두 사람의 머리를 보내도록 하였는데, 장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장패가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히 을 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왕자王者패자霸者의 사업을 이루는 군주에게는 로써 아뢸 수 있으니, 장군께서 이 말씀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유비가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니,
조조가 탄식하고 장패에게 이르기를 “이는 고인古人이 행한 일인데 그대가 능히 이를 행하니, 이는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고 서흡과 모휘를 태수太守로 삼고, 진등陳登을 세웠다고 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의 직위를 더하였다.
유비劉備좌장군左將軍으로 삼았다.
유비劉備조조曹操를 따라 허도許都로 돌아오자, 조조가 표문表文을 올려서 유비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삼도록 하고 더욱더 후하게 예우하였다.
손책孫策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삼고 오후吳侯에 봉하였다.
손책孫策장굉張紘허도許都에 보내어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자注+방물方物”은 그 지방에서 생산된 물품이다., 조조曹操가 손책을 위무慰撫해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표문表文을 올려서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삼고 오후吳侯에 봉하고, 장굉을 시어사侍御史로 삼았다.注+
孫策과 싸우는 太史慈孫策과 싸우는 太史慈
토역장군討逆將軍도 처음으로 설치한 것이다. 오정烏程에서 지역으로 옮겨 봉하였으니, 그 봉지封地를 더 높여준 것이다.
원술袁術주유周瑜거소현장居巢縣長으로 삼고 임회臨淮 사람 노숙魯肅동성현장東城縣長으로 삼았는데注+동성현東城縣전한前漢 시대에 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가 후한後漢 시대에 없앴으니, 이는 응당 원술袁術이 다시 설치한 것이다., 주유와 노숙은 원술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관직을 버리고 장강長江을 건너서 손책을 따랐다.
손책孫策이 직접 군대를 거느려 능양현陵陽縣에서 조랑祖郞을 토벌하여 사로잡고注+능양현陵陽縣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예전에 나를 습격하여 나의 말안장을 찍었는데注+
지금 내가 군대를 처음 일으켜 큰일을 시작함에 오랫동안 품고 있는 원한은 버리기로 하였으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는 즉시 차꼬와 수갑을 벗기고 문하적조門下賊曹에 임명하였다.注+는 차꼬와 수갑이다. 문하적조門下賊曹에 임명한 것은 도적盜賊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용리勇里에서 태사자太史慈를 토벌하여 사로잡았다가 포박을 풀어주고 그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신정神亭에서 서로 싸웠을 때의 일을 기억하는가? 만약 이 그때 나를 잡았으면 어떻게 하였겠는가?”注+용리勇里경현涇縣에 있다. 은 잡음이다. 는 음이 이니, 기억함이다. 하고 묻자,
태사자가 말하기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손책이 크게 웃고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마땅히 과 함께하겠다. 듣건대 의열義烈이 있고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라고 하는데注+태사자太史慈동래東萊 사람으로 젊어서 주조奏曹(서리胥吏)가 되었다. 당시 의 태수와 의 자사 사이에 혐극嫌隙(틈)이 생겨서 서로 조정에 주장奏章을 올려서 아뢰었는데 주장奏章이 낙양에 먼저 도착하면, 태사자가 이것을 강제로 빼앗아 훼손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뒤에 공융孔融급난急難에 달려가서 유비劉備에게 나아가 구원해주기를 요구하였으니, 이것이 손책이 말한 의열義烈이다., 다만 의탁할 대상을 가릴 적에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을 뿐이다.注+〈“기인其人”은〉 유요劉繇를 이른다.
나는 지기知己이니, 뜻대로 되지 않을까 근심하지 말라.” 하고 즉시 문하독門下督에 임명하였다. 손책의 군대가 돌아올 적에 조랑祖郞태사자太史慈가 모두 앞장서서 인도하자, 군중軍中의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 이때 마침 유요劉繇예장豫章에서 하자, 양주揚州의 병사 1만여 명이 화흠華歆을 받들어 주군主君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화흠이 “시기를 틈타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하고 사절하여 돌려보내니, 양주의 병사들은 귀부歸附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손책孫策태사자太史慈에게 명하여 가서 양주의 병사들을 안무하게 하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목劉牧(유요劉繇)은 예전에 내가 원씨袁氏를 위하여 여강廬江을 공격한 것을 책망하였는데, 우리 선군先君의 병사 수천 명이 모두 원공로袁公路(원술袁術)의 휘하에 있었고注+유목劉牧유요劉繇를 이른다. 유유가 이보다 앞서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었는데 여강廬江이 여기에 예속되었다. 원술袁術손책孫策에게 여강廬江을 공격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유유가 과거에 손책을 책망한 적이 있었다. (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이보다 앞서 손견孫堅이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렸었는데 원술에게 병합되었다가 나중에 남은 병사 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모두 원공로袁公路의 휘하에 있었다.”라고 한 것이다. (처소)와 같다.,
나는 대업大業을 세우는 데에 뜻이 있었으니, 어찌 뜻을 굽혀서 이것을 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원술은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지 않았고, 내가 간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注+
장부丈夫로써 교제함에 만일 큰 변고가 있으면 떠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원공로와 교제하고 또 절교한 전후시말前後始末이 이와 같다.
유목劉牧이 살아 있을 때에 그와 함께 시비를 따지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데, 지금 그의 아들이 예장豫章에 있으니 이 가서 살펴보고, 아울러 나의 뜻을 그의 부곡部曲(부하部下)에게 널리 전달하여,
나에게 오는 것을 기꺼워하는 자들은 함께 데려오고 기꺼워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편안하게 하고 위로하며, 화자어華子魚(화흠華歆)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법도가 어떠한지 아울러 살펴보라.注+자어子魚화흠華歆이다. 은 얼마의 병력이 필요한가? 병력의 많고 적음은 그대의 뜻에 따라 결정하라.”注+거기擧豈이니,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묻는 말이다.
태사자太史慈가 말하기를 “병력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수십 명만 거느리면 충분합니다.”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태사자는 틀림없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손책孫策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의子義(태사자太史慈)가 나를 버리고서 다시 누구를 따르겠는가.注+자의子義태사자太史慈이다. 자의가 비록 용맹하고 담력과 의열이 있지만 반복무상한 사람은 아니다.
그 마음이 도의道義를 잡아 지키고 승낙하는 것을 신중히 하여 한 번 마음으로 지기知己가 될 것을 허락하면 죽더라도 저버리지 않으니, 제군諸君은 근심하지 말라.”注+은 옳음이니 결단하는 말이고, 은 응함이니 허락하는 말이다. 은 전일함이니, 〈“일이의허지기一以意許知己”는〉 한 번 그 마음에 스스로 지기知己가 될 것을 허락하면 비록 죽더라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태사자는 과연 기약한 대로 돌아와 손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자어華子魚(화흠華歆)는 참으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과 법도는 없고 스스로 지킬 뿐입니다.
동지僮芝가 제멋대로 여릉현廬陵縣을 점거하고注+동지僮芝는 성명이다. 여릉현廬陵縣예장군豫章郡에 속하였다., 번양현番陽縣(파양현)의 백성들이 별도로 종부宗部를 세워注+는 음이 이니, 번양현番陽縣예장군豫章郡에 속하였다. 종부宗部는 바로 이른바 강남江南종적宗賊(종족끼리 패거리 지은 도적)이다. 해혼海昏상료上繚예장군豫章郡징집徵集하고 조용調用하는 명령을 받지 않는데도, 화자어는 그저 이것을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손책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注+해혼현海昏縣예장군豫章郡에 속하였다. 당시 의 백성 수천 가호들이 스스로 서로 결집結集하여 종오宗伍를 만들고 상료上繚영루營壘를 쌓았다. ≪수경주水經注≫에 “요수僚水건창현建昌縣에서 발원하니, 나라 원제 영광元帝 永光 2년(B.C.42)에 해혼현海昏縣을 나누어 세웠다. 요수僚水가 또 동쪽으로 흘러가 신오현新吳縣을 지나가니, 나라 중평中平 연간에 세웠다. 요수僚水가 또 해혼현海昏縣을 지나니, 이를 일러 상료수上僚水라 한다.” 하였다. 로 읽는다., 마침내 예장군豫章郡을 겸병하려는 뜻을 품었다.注+는 침이다.
원소袁紹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원소袁紹가 여러 해를 계속하여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원한을 풀고 화친하고자 하였으나 공손찬이 이에 대답도 하지 않고 더욱 수비에 치중하니, 원소가 이에 군대를 크게 일으켜서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손찬의 별장別將 중에 적군에게 포위된 자가 있었는데 공손찬이 이를 구원하지 않고 말하기를 “한 사람을 구원하면 이후로 장수들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어서 힘써 싸우려고 하지 않게 된다.” 하였다.
원소가 진군하여 공손찬을 공격하자, 남쪽 경계의 별영別營이 구원받지 못할 줄을 알고 혹은 항복하거나 혹은 궤멸되었다. 이에 원소의 군대가 곧장 전진하여 역경易京의 문에 도달하니, 공손찬의 군대는 그 형세가 날로 위축되었다.注+의 문이다.


역주
역주1 돌아가는……말라 : 이 내용은 ≪孫子≫ 〈軍爭〉에 “돌아가는 군대는 막지 말고, 적을 포위할 때에는 반드시 한쪽을 비워주고, 궁지에 빠진 적은 압박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용병하는 법이다.[歸師勿遏 圍師必闕 窮寇勿迫 此用兵之法也]”라고 보인다.
역주2 死地에……살아난다 : 이 내용은 ≪孫子≫ 〈九地〉에 “병사들을 망할 땅에 투입한 뒤에야 생존하고, 죽을 땅에 빠뜨린 뒤에야 살아난다.[投之亡地然後存 陷之死地然後生]”라고 보인다. ‘死地’란 죽을 땅이란 뜻으로, 生과 死가 판가름 나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임을 이른다.
역주3 제가……받았으니 : 臧霸는 泰山郡 華縣 사람으로, 字는 宣高이며, 또 다른 이름은 奴寇이다. 黃巾賊의 난이 일어났을 적에 陶謙을 따라 적을 격파하여 騎都尉에 임명되었고, 이후 徐州에서 군대를 모아 孫觀, 吳敦, 尹禮 등의 세력을 규합하여 開陽 일대에서 할거하였다. 建安 3년(198), 曹操가 呂布를 토벌할 때에 장패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여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결국 여포가 붙잡히는 바람에 조조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은신하였는데, 조조가 수색해 그를 찾아내어 한번 만나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琅邪相으로 삼고, 그에게 靑州와 徐州를 맡겼다.(≪三國志≫ 권18 〈魏書 臧霸傳〉)
역주4 以孫策爲討逆將軍 : “앞에서 ‘孫策을 會稽太守로 삼아서 袁術을 토벌하게 하였다.’라고 썼고, 여기에서 ‘孫策을 討逆將軍으로 삼았다.’라고 썼으니, 이는 과연 역적을 토벌한 것을 가지고 손책을 인정한 것인가. 거듭 명하여 원술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한 명의 병사를 내어 한 명의 역적을 죽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쓴 것은 그를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孫氏에 대해서 孫堅 이후로는 취한 것이 없다.[前書以爲會稽太守討袁術矣 此書以爲討逆將軍 果予策以討賊乎 再命討術 而未聞出一兵殺一賊 書所以愧之也 綱目於孫氏 自堅以後無取焉]” ≪書法≫
역주5 위의……당하였다 : 자세한 내용은 본서 120쪽 참조.
역주6 神亭에서의……보인다 : 자세한 내용은 본서 138쪽 참조.
역주7 이……보인다 : 자세한 내용이 본서 178쪽에 보인다.
역주8 海昏上繚不受發召 : ≪資治通鑑≫에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미 별도로 海昏郡과 上繚郡을 세웠으니 徵集하고 調用하는 명령을 받지 않겠다.[言我已別立郡海昏上繚 不受發召]’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역주9 袁紹攻公孫瓚 : “劉虞가 公孫瓚을 공격할 적에는 ‘토벌[討]’이라 쓰고, 袁紹가 公孫瓚을 공격할 적에는 ‘공격[攻]’이라 쓴 것은 원소가 사사로이 세력을 키워서 서로 병탄하는 데에 힘썼으니, 이는 사실 또 한 명의 공손찬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節度(조정의 지휘)를 받아서 大義에 의거하여 공격해 토벌하는 자(劉虞)와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劉虞擊瓚則書討 袁紹擊瓚則書攻者 紹私自封殖 務相併吞 其實亦一瓚耳 豈得與受其節度 仗義攻討者 比而同之哉]” ≪發明≫
역주10 易京 : 公孫瓚이 易河 부근에 축조한 구릉[京]을 가리킨다. 공손찬이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자, 易河 주위에 삼중으로 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6리이고, 그 가운데에 흙으로 높은 구릉을 쌓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幽州 歸義縣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後漢書≫ 권9 〈獻帝紀〉 建安 4년 李賢注)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22.07.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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