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繡之追操也에 賈詡止之러니 繡不聽하여 敗還하니 詡登城하여 謂曰 促更追之하라 更戰必勝하리라 繡從之하여 果以勝還이라
乃問詡曰 繡以精兵追退兵이어늘 而公曰必敗라하고 以敗卒擊勝卒이어늘 而公曰必克이라하더니 悉如公言은 何也오
詡曰 將軍이 雖善用兵이나 非曹公敵也라 曹公軍이 新退하니 必自斷後라 故知必敗요
曹公
이 旣無失策
하고 力未盡
이어늘 而一朝引退
하니 必國內有故也
注+有故, 謂有變也.라
已破將軍에 必輕軍速進하고 留諸將斷後하리니 諸將雖勇이나 非將軍敵이라 故로 雖用敗兵而戰必勝也니이다 繡乃服이러라
目
十月에 操屠彭城하다 廣陵太守陳登이 率郡兵하고 爲操先驅하여 進至下邳하니 布屢戰皆敗하여 還保城不敢出하여 欲降이어늘
陳宮曰 曹操遠來하니 勢不能久라 將軍이 若以步騎로 出屯於外하고
宮이 將餘衆하여 閉守於內라가 若向將軍이어든 宮이 引兵而攻其背하고 若但攻城이면 則將軍救於外면
不過旬月에 操軍食盡하리니 擊之可破也니이다 布然之러니 布妻曰 宮與高順이 素不和하니 必不同心共守라
如有蹉跌
이면 將軍
이 當於何自立乎
잇가 且曹氏待公臺如赤子
로되 猶舍而歸我
注+公臺, 陳宮字.하니
今將軍厚公臺不過曹氏어늘 而欲委全城, 捐妻子하고 孤軍遠出하니 若一旦有變이면 妾豈得復爲將軍妻哉잇가 布乃止하다
目
十二月에 布將魏續等이 共執陳宮, 高順하여 率其衆降이라
布登白門樓
하니 兵圍之急
注+下邳城南門名白門.이어늘 布令左右
로 取其首詣操
하니 左右不忍
이라 乃下降
하여
布見操하고 曰 明公之所患이 不過於布러니 今已服矣라 若令布將騎하고 明公將步하면 天下는 不足定也니라 操命緩布縛하니
劉備曰 不可
하다 明公
이 不見呂布事丁建陽, 董太師乎
아하니 操頷之
注+丁原字建陽, 董卓官至太師, 布皆殺之. 頷, 戶感切, 頷之者, 微動頤頷以應之.러라 操謂宮曰 奈卿老母妻子何
오
宮曰 宮은 聞以孝治天下者는 不害人之親이요 施仁政於天下者는 不絶人之祀라하니 老母妻子存否 在明公이요 不在宮也니라
操未復言에 宮이 請就刑하고 遂出不顧하니 操爲之泣涕하고 幷布, 順皆縊殺之하다
召宮母養之하여 終其身하고 嫁宮女하여 撫視其家호되 皆厚於初러라 張遼, 臧霸等이 皆降하다
目
初에 操在兗州에 以徐翕, 毛暉爲將이러니 及兗州亂에 翕, 暉皆叛하여 亡命投霸하니
操語備하여 令霸送二首한대 霸曰 霸所以能自立者는 以不爲此也라 霸受主公生全之恩하니 不敢違命이어니와
然王霸之君은 可以義告니 願將軍爲之辭하라 備以霸言白한대
操歎息하고 謂霸曰 此는 古人之事어늘 而君能行之하니 孤之願也라하고 以翕, 暉爲太守하고 陳登은 以功加伏波將軍하다
目
【목目】 장수張繡가 조조曹操를 추격할 적에 가후賈詡가 만류하였으나 장수가 이를 듣지 않아 패하고 돌아왔는데, 이때 가후가 성에 올라가서 장수에게 이르기를 “급히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하니, 장수가 이 말을 따라서 과연 이 때문에 승리하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가 가후에게 묻기를 “내가 정예병을 거느려 퇴각하는 적의 군대를 추격할 적에 공公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패한 사졸을 거느려 승리한 적의 군대를 공격할 적에 공公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공公이 한 말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하자,
가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께서 비록 용병用兵을 잘하시지만 조공曹公의 적수는 아닙니다. 조공의 군대가 막 퇴각할 적에 반드시 스스로 그 퇴로를 차단했을 것이기 때문에 장군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고,
조공이 이미 실책한 것도 없고 힘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으니, 이는 틀림없이
국내國內에
변고變故가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注+“유고有故”는 변고變故가 발생함을 이른다.
이미 장군의 군대를 격파한 뒤에는 반드시 경무장한 군대로 속히 나아가고 장수들을 남겨두어 퇴로를 차단하였을 것이니, 장수들이 비록 용맹하지만 장군의 적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패한 군대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반드시 이긴 것입니다.” 장수가 이에 탄복하였다.
目
【목目】 여포呂布가 다시 원술袁術과 통호通好하고 고순高順과 장료張遼를 보내어 유비劉備를 공격하였는데 9월에 패성沛城을 격파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으니, 유비가 단신으로 달아났다.
조조曹操가 직접 여포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유표劉表와 장수張繡가 우리의 배후에 있는데 먼 길을 가서 여포를 습격하면 틀림없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순유荀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표와 장수는 이제 막 격파되어서 형세상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여포는 굳세고 용감하며 또
원술袁術의 세력에 의지하니
注+효驍는 견요堅堯의 절切이니, 굳셈이다., 만약 그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일대에서 횡행한다면 호걸들은 반드시 그에게 호응할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막 배반하여 군중軍中의 인심이 아직 하나로 뭉치지 않은 때를 틈타서 진군한다면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조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目
【목目】 10월에 조조曹操가 팽성彭城을 함락하여 도륙하였다. 광릉태수 진등廣陵太守 陳登이 군郡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조조의 선봉이 되어 진군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렀다. 여포呂布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는 회군하여 하비성下邳城을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하면서 조조에게 항복하고자 하였는데,
진궁陳宮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조의 군대는 먼 길을 와서 형세상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군이 만약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서 주둔하고,
제가 나머지 병력을 거느리고 성 안에서 성문을 닫고 지키고 있다가 조조가 만약 장군을 향해 공격해오면 제가 군대를 이끌고서 그 배후를 공격하고, 조조가 만약 다만 성만을 공격하면 장군이 성 밖에서 구원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한 달을 넘기지 못하여 조조의 군대는 식량이 바닥나게 될 것이니, 이때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는 이 말이 옳다고 여겼는데, 여포의 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궁은 고순高順과 평소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차질이 생기면 장군께서는 응당 어디에 스스로 서시겠습니까. 또한
조씨曹氏가
공대公臺(
진궁陳宮)를
적자赤子와 같이 대하였는데도 그는 조씨를 버리고 우리에게 귀의하였습니다.
注+공대公臺는 진궁陳宮의 자字이다.
지금 장군께서 공대를 후대하신 것이 조조가 대우했던 것을 넘지 못하는데, 성 전체를 그에게 내맡기고 처자식을 버리고서 고군孤軍으로 먼 길을 떠나려고 하시니, 만약 하루아침에 변고가 발생하면 첩妾이 어찌 다시 장군의 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이에 그만두었다.
目
【
목目】 12월에
여포呂布의 장수
위속魏續 등이 함께
진궁陳宮과
고순高順을 사로잡고서 그 군대를 거느려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다.
曹操가 呂布를 죽이다
여포가
백문白門의
성루城樓에 오르니, 조조의 군대가 급박하게 포위하였다.
注+하비성 남문下邳城 南門의 이름이 백문白門이다. 여포가
좌우左右의 수하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조조에게 나아가 투항하게 하였는데, 좌우의 수하들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자 여포가 이에 성에서 내려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여포가 조조를 보고 말하기를 “명공明公께서 근심하신 바가 저 여포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제가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만약 저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명공明公께서 보병을 거느리시면 천하는 평정할 것도 못 될 것입니다.” 하자, 조조가 여포의 포박을 느슨하게 해줄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
정원丁原)과
동태사董太師(
동탁董卓)를 섬겼던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니,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注+정원丁原은 자字가 건양建陽이고 동탁董卓은 관직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는데, 여포가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함頷은 호감戶感의 절切이니, “함지頷之”라는 것은 턱을 약간 움직여서 응답한 것이다. 조조가 진궁에게 이르기를 “
경卿의 노모와 처자식을 어찌 하려는가.” 하니,
진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해치지 않고, 천하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자는 다른 사람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제 노모와 처자식의 생사는 명공明公에게 달려 있지, 저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조가 다시 말하기도 전에 진궁이 형刑을 받기를 청하고, 마침내 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조조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여포와 고순까지 모두 목을 졸라 죽였다.
조조는 진궁의 노모를 불러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으며, 진궁의 여식을 시집보내어 그 집안을 잘 돌보아주었는데, 모두 처음보다 더 후하게 하였다. 장료張遼와 장패臧霸 등이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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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조조曹操가 연주兗州에 있을 때 서흡徐翕과 모휘毛暉를 장수로 삼았었는데, 연주兗州에 변란이 일어나자 서흡과 모휘가 모두 조조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장패臧霸에게 의탁하였다.
조조가
유비劉備에게 말하여 장패에게 두 사람의 머리를 보내도록 하였는데, 장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장패가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히
명命을 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왕자王者와 패자霸者의 사업을 이루는 군주에게는 의義로써 아뢸 수 있으니, 장군께서 이 말씀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유비가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니,
조조가 탄식하고 장패에게 이르기를 “이는 고인古人이 행한 일인데 그대가 능히 이를 행하니, 이는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고 서흡과 모휘를 태수太守로 삼고, 진등陳登은 공功을 세웠다고 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의 직위를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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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 마침 유요劉繇가 예장豫章에서 졸卒하자, 양주揚州의 병사 1만여 명이 화흠華歆을 받들어 주군主君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화흠이 “시기를 틈타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하고 사절하여 돌려보내니, 양주의 병사들은 귀부歸附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손책孫策이
태사자太史慈에게 명하여 가서 양주의 병사들을 안무하게 하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유목劉牧(
유요劉繇)은 예전에 내가
원씨袁氏를 위하여
여강廬江을 공격한 것을 책망하였는데, 우리
선군先君의 병사 수천 명이 모두
원공로袁公路(
원술袁術)의 휘하에 있었고
注+유목劉牧은 유요劉繇를 이른다. 유유가 이보다 앞서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었는데 여강廬江이 여기에 예속되었다. 원술袁術이 손책孫策에게 여강廬江을 공격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유유가 과거에 손책을 책망한 적이 있었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이보다 앞서 손견孫堅이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렸었는데 원술에게 병합되었다가 나중에 남은 병사 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모두 원공로袁公路의 휘하에 있었다.”라고 한 것이다. 허許는 처處(처소)와 같다.,
나는
대업大業을 세우는 데에 뜻이 있었으니, 어찌 뜻을 굽혀서 이것을 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원술은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지 않았고, 내가 간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
注+
장부丈夫가 의義로써 교제함에 만일 큰 변고가 있으면 떠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원공로와 교제하고 또 절교한 전후시말前後始末이 이와 같다.
유목劉牧이 살아 있을 때에 그와 함께 시비를 따지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데, 지금 그의 아들이 예장豫章에 있으니 경卿이 가서 살펴보고, 아울러 나의 뜻을 그의 부곡部曲(부하部下)에게 널리 전달하여,
나에게 오는 것을 기꺼워하는 자들은 함께 데려오고 기꺼워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편안하게 하고 위로하며,
화자어華子魚(
화흠華歆)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법도가 어떠한지 아울러 살펴보라.
注+자어子魚는 화흠華歆의 자字이다. 경卿은 얼마의 병력이 필요한가? 병력의 많고 적음은 그대의 뜻에 따라 결정하라.”
注+기幾는 거기擧豈의 절切이니,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묻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