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건무중원建武中元 원년이다. 봄 정월에 제오륜第五倫을 회계태수會稽太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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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경조연 제오륜京兆掾 第五倫이 장안현長安縣의 사시司市를 관장하였는데注+제오第五는 복성複姓이고, 윤倫은 그의 이름이다. 장안시長安市는 장안현長安縣의 사시司市를 이른다.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사시司市는 시장의 다스림과 가르침, 정사와 형벌, 양量과 도度, 금령禁令을 관장한다.” 하였다., 공평하고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서 시장에 간사함과 부정함이 없었다. 매번 황제의 조서詔書를 읽을 때마다 탄식하기를 “이분은 성주聖主이시니 한 번만 보면 대사大事를 결정할 수 있다.” 하였다.
뒤에 회양왕淮陽王(유연劉延)의 의공장醫工長에 보임되었는데注+왕국王國의 관원에 의공장醫工長이 있으니, 의약을 주관하였다., 회양왕이 입조入朝할 적에 제오륜도 관속들을 따라 황제를 뵙게 되었다.
황제가 그에게 정사를 묻자, 제오륜이 이를 계기로 응대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다음 날 특별히 다시 불러들여서 함께 밤늦도록 말하였다.
제오륜을 부이扶夷의 장長으로 삼았다가注+부이현扶夷縣은 영릉군零陵郡에 속하였다.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뒤따라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하였는데, 제오륜은 정사를 다스림이 깨끗하면서 은혜가 있으니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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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황제가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태산泰山에 봉封하고 양보산梁父山의 북쪽에서 선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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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이 ≪하도회창부河圖會昌符≫를 읽어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적유赤劉의 9세世에 명命이 대종岱宗에서 만난다.”注+부符는 도참이 기록된 책이니, 회창會昌은 그 책의 이름이다. 적赤은 화火의 색깔이고, 한漢나라는 국성國姓이 유씨劉氏이다.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므로 적색을 숭상하였으니,
를 찾게 하니, 마땅히 네모진 돌을 두 겹으로 쌓고 옥검玉檢과 금니金泥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注+“원봉고사元封故事”는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연간에 봉선封禪한 고사故事이다. 네모진 돌을 겹으로 포개어서 단壇 가운데에 두되 모두 사방의 길이가 5척尺이고 두께가 1척尺이다. 옥첩玉牒의 글을 네모진 돌에 보관하였는데, 옥첩의 두께는 5촌寸이고 길이는 1척尺 3촌寸이고 너비는 5촌寸이다. 옥검玉檢이 있고, 또 석검石檢 10매枚를 돌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는데 동쪽과 서쪽에 각각 3매枚, 남쪽과 북쪽에 각각 2매枚를 두되, 모두 길이가 5척尺이고 너비가 3척尺이고 두께가 7촌寸이다. 검檢 안에 세 곳을 조각하였는데, 깊이가 4촌寸이고 사방이 5촌寸이고 뚜껑이 있었다. 검檢은 금루金縷(금실)를 사용하여 다섯 번 두르고 수은水銀을 금가루와 섞어 발라 봉인하였다.
상上은 돌을 다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효무제孝武帝가 예전에 봉선할 때 만들었던 돌을 이용하여 옥첩玉牒을 그 안에 두고자 하니, 양송이 불가하다고 간쟁하였다.
이에 마침내 석공石工에게 명해서 완전한 푸른 돌을 취하고 굳이 오색五色으로 하지는 말라고 하였다.注+옛 제도에, 돌을 사용하여 덮되 각각
【목目】 정묘일丁卯日에 황제의 거가車駕가 동쪽으로 순행하여 2월 기묘일己卯日에 노魯 지역에 가서 태산泰山에 행차하고, 신묘일辛卯日 새벽에 불을 피워 태산 아래 남방南方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여러 신神을 모두 종사從祀(배향)하고注+종從은 재용才用의 절切로 종사從祀함이니, 아래도 같다. 음악을 연주하기를 남교南郊와 같이 하였다. 일이 끝나자, 아침 식사 무렵(오전 7시~9시)에 이르러서 천자가 연輦을 타고 산에 올랐는데, 정오가 지나 산의 정상에 올라注+태산泰山은 산 아래서부터 정상까지가 48리 200보이다. 옷을 바꾸어 입었다.
저녁 식사 무렵(오후 3시~5시)에 단壇에 올라 북면北面을 하니, 상서령尙書令이 옥첩玉牒과 옥검玉檢을 받들어 올리자, 천자가 1촌寸 2분分 크기의 옥새를 사용하여 친히 봉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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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봉함이 끝나자, 태상太常이 2천여 명의 추기騶騎에게 명하여 제단祭壇 위의 네모진 돌을 들어올리게 하고 상서령尙書令이 옥첩玉牒을 그 속에 보관한 뒤에 다시 돌로 덮게 하였으며注+복覆(덮다)는 부구敷救의 절切이다., 상서령尙書令이 5촌寸 크기의 인印으로 석검石檢을 봉함하였다.
일이 끝나자 천자天子가 재배再拜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만세를 부르고 마침내 옛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注+〈“복도하復道下”는〉 옛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옴을 이른다. 한밤중이 지난 뒤에야 상上이 산 아래에 이르렀고, 백관百官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마쳤다.
갑오일甲午日에 양보산梁父山 북쪽에서 땅에 선禪 제사를 하면서 고후高后(여후呂后)를 배향配享하고 산천의 여러 신神들을 종사從祀하여
【목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72명의 군주가 봉선封禪한 기록이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예전禮典의 경문에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진실로 이 일이 있었다면 이는 바로 천하天下와 국가國家의 거룩한 일이다.
요堯와 순舜, 우禹와 탕湯, 주周나라의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강왕康王과 소왕昭王, 선왕宣王이 모두 몸소 태평성세를 이룩하였는데, 어찌 이 제도를 빠뜨리고 강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전대에 태산에 올라가 봉하는 일을 논한 자는 허무許懋(허무)보다 더 잘한 자가 없으니注+양 무제梁 武帝 때에 회계산會稽山에 봉封을 하고 국산國山에 선禪을 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허무許懋가 이를 간하여 중지하였다., 애석하다. 세조世祖의 신하들이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해서 그 군주를 잘못된 일에 빠뜨리면서도 이것을 아뢰지 못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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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연평 진씨延平 陳氏(진관陳瓘)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건무建武 30년(54)에 여러 신하들이 봉선封禪을 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령詔令에
을 인용하여 중지시켰다. 그러나 성인聖人(공자孔子)의 말씀을 믿은 것이 도참圖讖을 믿은 것만큼 돈독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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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사공 장순司空 張純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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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4월에 황제가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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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사면을 하고 개원改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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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6월에 풍방馮魴(풍방)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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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사도 풍근司徒 馮勤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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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경사京師에서 예천醴泉이 나오고 적초赤草가 자라고, 군국郡國에서는 감로甘露가 내린다고 말하였다.注+예천醴泉은 샘물 맛이 달아 마치 단술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적초赤草는 바로 주초朱草이니, 하루에 한 잎씩 나오고 15일 이후로는 날마다 한 잎씩 떨어져서 30일이 되면 다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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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여러 신하들이 신령스러운 물건이 계속하여 내리니 마땅히 태사太史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모아 기록하게 해서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상주上奏하였으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스스로 덕德이 없다고 겸양하여 매번 군국郡國에서 올린 상서로운 일을 억제하고 자신에게 해당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관史官이 이것을 기록한 일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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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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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이흔李訢(이흔)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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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박태후薄太后(한 문제漢 文帝의 모母)를 높여 고황후高皇后라 하고 여태후呂太后의 신주를 원園으로 옮겼다. 박후薄后는 지지地祗(지신地神)에게 배식配食(배향)하고 여후呂后에게는 사시四時에 제사를 올렸다.注+여태후呂太后의 신주를 원園으로 옮긴 것은 여태후呂太后가 유씨劉氏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원園은 영역塋域(묘지)을 이르니, 영역塋域 안에 침寢을 설치한다.
급사중 환담給事中 桓譚(환담)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사람들은 드러난 일은 소홀히 하고 기이한 말은 귀하게 여깁니다.注+견見은 음이 현現이니, “현사見事”는 현재의 일이다. 그러나 선왕先王들이 기술하신 것을 살펴보면 모두 인의仁義와 정도正道를 근본으로 삼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목目】 지금 공교한 지혜와 작은 재주, 기술과 술수가 있는 사람들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더 보태고 참기讖記를 사칭하여 탐욕스럽고 간사한 사람들을 속여 유혹하고 군주를 그르치니, 어찌 억제하여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注+기伎는 방기方伎와 의방醫方의 가家를 이르고, 삭數는 술수와 명당, 희화羲和와 사복史卜의 관官을 이른다. 언焉(어찌)은 어건於虔의 절切이다.
신 환담臣 桓譚은 삼가 듣건대 폐하께서 방사方士들의 황백黄白의 술법(신선술)을 힘써 배척하셨다 하니 매우 영명하십니다. 그런데 도리어 도참기를 받아들이고자 하시니, 또 어찌하여 잘못을 저지르려 하십니까.注+황백黃白은 단약丹藥을 사용하여 금金과 은銀을 만듦을 이른다. 도참의 일이 비록 때로 맞는 경우도 있으나,
비유하건대 점칠 적에 홀수가 아니면 짝수가 나오는 따위와 같습니다.注+“척우隻偶”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이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밝게 들으시고 성스러운 뜻을 발하시어 여러 소인들의 부정한 말을 물리치고 오경五經의 바른 뜻을 따르소서.” 상소를 아뢰자,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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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마침 영대靈臺를 세울 곳을 의논할 적에注+처處(처소)는 상성上聲이니, “소처所處”는 영대靈臺를 세우기에 마땅한 장소를 이른다. 황제가 환담桓譚에게 이르기를 “내 도참서로 결정하겠다.” 하니, 환담이 침묵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아뢰기를 “신臣은 도참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이유를 묻자, 환담이 다시 도참서가 경서經書가 아님을 지극히 말하였다.注+〈“참지비경讖之非經”은〉 도참서가 경전의 의리에 부합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환담이 성인聖人을 비난하고 법法을 무시하니, 붙잡아 끌고 가 참형에 처하라.”注+장將은 가짐이며, 데리고 감이다. 하니, 환담이 머리를 땅에 두드려 이마에 피가 흘렀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는데 외직으로 좌천되어 육안군六安郡의 승丞이 되어, 부임지로 가는 길에 병으로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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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범엽范曄(범엽)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범엽范曄은 유송劉宋(남조 송南朝 宋) 사람이니, ≪후한서後漢書≫를 찬하였다. “환담桓譚은 도참설을 좋지 않다고 여겼으므로 유배 가다가 죽었고, 정흥鄭興은 공손한 말로 겨우 화를 면하였고注+건무建武 7년(31)에 황제가 정흥鄭興과 교사郊祀의 일을 논할 적에 황제가 말하기를 “내 도참설로 결단하겠다.” 하니, 정흥이 말하기를 “신臣은 도참서를 읽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경卿이 도참설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정흥이 황공해하며 말하기를 “신臣은 도참서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였을 뿐, 비난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니, 황제의 노여워하는 뜻이 마침내 풀렸다.,
가규賈逵는 능히 견강부회하고 문식하여 가장 귀하고 현달한 데에 이르렀다.注+가규賈逵는 가의賈誼의 9세손이다. 명제 영평明帝 永平 연간에 가규가 상언上言하기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도참설과 부합되니, 유씨劉氏가 요堯임금의 후손이 됨이 분명합니다.” 하자, 황제가 그를 가상히 여겼다. 가규는 벼슬이 시중侍中을 역임하고 기도위騎都尉를 겸하여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시의 군주[세주世主]가 이것을 가지고 학문을 논하니, 참으로 슬프다.”注+〈“세주이차론학世主以此論學”은〉 당시의 군주가 경서를 중하게 여기지 않고 도참설을 중하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목目】 황제가 사자使者를 남선우南單于에게 보내 옥새를 찍은 친서를 가지고 가서 인새印璽와 인끈을 내려 작위를 제수하고 옷과 관, 채색 비단을 하사하니, 이후로는 이를 준례로 삼았다.
역주
역주1帝東巡……禪梁陰 :
“앞서 여러 신하들이 封禪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는 河圖의 글에 감동하여 마침내 봉선을 행하였으니, 황제가 또한 이에 대해서 定見이 있지 못하였다. 이것을 써서 비판한 것이다.[先是群臣請封禪 不許 至是感河圖文 遂行之 帝於是亦不得爲有定見矣 書譏之]” ≪書法≫ “唐나라 貞觀 연간에 여러 신하들이 封禪을 청하였으나 太宗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資治通鑑綱目≫에서 책에 빠짐없이 썼는데, 지금 建武 30년(54)에도 여러 신하들이 봉선을 청했으나 光武帝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자치통감강목≫에서 어찌하여 삭제하고 쓰지 않았는가. 태종의 이른바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 뒤에 끝내 행하지 않았고, 광무제의 이른바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書法이 다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封禪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先儒들의 변론이 이미 자세하다. 秦 始皇과 漢 武帝의 사치한 마음을 어찌 굳이 기술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태종이 봉선하지 않은 것도 확고하게 의혹이 없던 것이 아닌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남이 선행을 한 것을 기꺼이 인정하였으므로 태종의 허락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크게 써서 찬미하였다. 世祖(光武帝)로 말하면 이미 그 잘못을 저질렀으니, ≪자치통감강목≫에 비록 인정하고자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무릇 ‘봉선을 허락하지 않았다.[不許封禪]’고 쓴 것은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인정해준 것이요, ‘封禪을 하였다.’라고 쓴 것은 모두 비판하고 폄하한 것이다.[唐貞觀間 群臣有請封禪 太宗不許 綱目備書于冊 今此建武三十年 群臣亦請封禪 光武不許 綱目何爲削而不書 蓋太宗之所謂不許 其後終於不行 光武之所謂不許 曾未幾而行之 此書法之所以異也 然則封禪 是耶否耶 先儒辯論 旣已詳矣 秦皇漢武之侈心 何足多述 然太宗之不封禪 亦非確然不惑者 惟綱目樂予人爲善 故幸其不許 大書以美之 若世祖 旣蹈其失 綱目雖欲予之 不可得也 故凡書不許封禪者 皆幸之予之也 其書封禪者 皆譏之貶之也]” ≪發明≫
역주2元封……故事 :
元封은 漢 武帝가 B.C.110년에서 B.C.105년까지 사용한 연호로, 처음으로 泰山에 封하였기 때문에 ‘元封’이라 하였다.
역주3(玉)[五] :
저본에는 ‘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五’로 바로잡았다.
역주4赤劉는……같다 :
赤劉는 火德으로 왕 노릇 하는 劉氏란 뜻으로 漢王朝를 가리키며, 炎正의 炎은 불꽃이므로 火德을 가리킨다.
역주5河圖는……있다 :
河圖와 洛書는 간단한 그림이나 여기에 ‘篇’이라 한 것으로 보아 緯書인 듯하다.
역주6방위의 색깔 :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인바, 이것을 五方의 색깔이라 하였다.
역주7元始……故事 :
‘元始’는 漢 平帝가 A.D.1년에서 5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北郊는 冬至에 북쪽 교외에서 지내던 제사이다.
역주9改元 :
“改元한 것을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비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文帝로부터 이래로 개원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비상한 일이 된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가 즉위한 지 31년이 되도록 개원하지 않다가 이때에 특별히 中元으로 개원하였으니, 이것을 비상한 일로 여겨서 쓴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가 後元으로 개원한 것을 ‘更’이라고 쓰고 世祖가 中元으로 개원한 것을 ‘改’라고 썼으니, 모두 비상한 일로 여긴 것이다.[改元不書 此何以書 非常也 自文帝以來 改元多矣 此其爲非常 何 帝卽位三十一年 不改元矣 於是特改中元 以是爲異也 故書 是故文帝改後元書更 世祖改中元書改 皆異之也]다” ≪書法≫
역주10起明堂……於天下 :
“‘起’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靈臺를 겸하여 말했기 때문이다. 辟雍을 세운 것은 훌륭한 일인데 뒤이어 圖讖을 선포했다는 글이 있으니, 황제가 배운 것이 잡박하다. 이에 특별히 써서 비판하였으니, 도참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도참을 쓴 것이 5번인데 모두 금지한 내용이고, 오직 光武帝가 선포한 일을 쓴 것은 비판한 말이다.[書起 何 兼靈臺言之也 建辟雍盛典也 而繼有宣布圖讖之書 則帝之所學駁矣 特書譏之 書圖讖始此 終綱目 書圖讖五 皆禁之者也 惟光武書宣布爲譏辭]” ≪書法≫ “역적 王莽이 거짓으로 符命을 칭하고 漢나라의 國運을 찬탈하였으며, 公孫述이 스스로 符命을 말하고 蜀 지역을 도둑질하여 점거하였다가 모두 실패하고 멸망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황제가 직접 본 것이다. 황제가 이미 大寳(황제의 지위)에 군림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때에야 비로소 도참을 천하에 선포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황제가 漢나라의 基業을 中興한 것은 험난함을 겪으면서 백 번 싸워 얻은 것이요, 圖讖書에 자신의 이름이 있어서 팔짱 끼고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저 前秦의 苻堅의 무리들도 도참서와 緯書를 금하고 꺼렸는데, 황제가 도리어 선포하고 숭상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낸 聖武의 군주가 도리어 패망한 夷狄의 추장만 못하단 말인가. 이것을 써서 비난함이 마땅하다.[賊莽詐稱符命 簒奪漢祚 公孫述自陳符命 竊據蜀土 皆不免敗滅 此帝之所親覩者也 帝旣君臨大寳 踰三十載 乃始宣布圖讖於天下 何哉 且帝之中興漢業 以間關百戰得之 非以圖讖在己 拱手而得之也 彼苻堅醜類 猶能禁絶讖緯 帝乃宣布崇尙之 曾謂聖武天挺之君 乃不如夷狄敗亡之酋乎 書以譏之 宜也]” ≪發明≫
역주11上이……오르니 :
赤伏符는 王莽이 세운 新나라 말년에 讖緯家가 만든 符籙으로, 여기에 “劉秀가 위로 天命에 응하여 漢나라의 정통을 이어 황제가 된다.”라고 하였다.
역주12天道와……못했는데 :
‘天道’는 元, 亨, 利, 貞의 이치를 가리키고, ‘性命’은 하늘이 사람에게 명하여 부여해준 仁, 義, 禮, 智의 性을 이르며,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論語≫ 〈公冶長〉에 “夫子의 文章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부자께서 性과 天道를 말씀하심은 얻어 들을 수 없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子貢의 말이 보인다.
역주13奇耦 :
奇는 홀수로 1ㆍ3ㆍ5ㆍ7ㆍ9를 이르고, 耦는 짝수로 2ㆍ4ㆍ6ㆍ8ㆍ10을 이른다. ≪周易≫은 河圖의 數를 기본으로 하였는바, ≪周易≫ 〈繫辭傳 上〉에 “天이 1이고 地가 2이며, 天이 3이고 地가 4이며, 天이 5이고 地가 6이며, 天이 7이고 地가 8이며, 天이 9이고 地가 10이다.[天一 地二 天三 地四 天五 地六 天七 地八 天九 地十]” 하였다. 天은 陽으로 奇數가 여기에 해당하고 地는 陰으로 耦數가 여기에 해당하는바, 爻 역시 陽爻를 奇, 陰爻를 耦라 한다. ≪周易≫ 占은 50개의 蓍草를 가지고 점을 치는데, 홀수가 아니면 짝수가 나와 이로써 吉凶을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