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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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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年(56)
병진년丙辰年(56)
建武中元元年이라 春正月 以第五倫爲會稽太守하다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중원建武中元 원년이다. 봄 정월에 제오륜第五倫회계태수會稽太守로 삼았다.
京兆掾第五倫 領長安市注+第五, 複姓. 倫, 其名也. 長安市, 謂長安縣之司市也. 周禮地官 “司市, 掌市之治敎政刑量度禁令.”하니 公平廉介하여 市無姦枉이라 每讀詔書 歎息曰 此 聖主也 一見决矣라하니라
경조연 제오륜京兆掾 第五倫장안현長安縣사시司市를 관장하였는데注+제오第五복성複姓이고, 은 그의 이름이다. 장안시長安市장안현長安縣사시司市를 이른다.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사시司市는 시장의 다스림과 가르침, 정사와 형벌, , 금령禁令을 관장한다.” 하였다., 공평하고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서 시장에 간사함과 부정함이 없었다. 매번 황제의 조서詔書를 읽을 때마다 탄식하기를 “이분은 성주聖主이시니 한 번만 보면 대사大事를 결정할 수 있다.” 하였다.
後補淮陽王醫工長注+王國官, 有醫工長, 主醫藥.이러니 王入朝 随官屬得會見이라
뒤에 회양왕淮陽王(유연劉延)의 의공장醫工長에 보임되었는데注+왕국王國의 관원에 의공장醫工長이 있으니, 의약을 주관하였다., 회양왕이 입조入朝할 적에 제오륜도 관속들을 따라 황제를 뵙게 되었다.
帝問以政事한대 因此酬對하니 帝大悦하여 明日 復特召入하여 與語至夕하다
황제가 그에게 정사를 묻자, 제오륜이 이를 계기로 응대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다음 날 특별히 다시 불러들여서 함께 밤늦도록 말하였다.
以倫爲扶夷長注+扶夷縣, 屬零陵郡.이라가 未到官 追拜會稽太守러니 爲政 清而有惠하니 百姓 愛之하니라
제오륜을 부이扶夷으로 삼았다가注+부이현扶夷縣영릉군零陵郡에 속하였다.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뒤따라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하였는데, 제오륜은 정사를 다스림이 깨끗하면서 은혜가 있으니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였다.
】 2월에 황제가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태산泰山하고 양보산梁父山의 북쪽에서 하였다.
讀河圖會昌符하니 曰 赤劉之九 會命岱宗注+符者, 讖記之書也. 會昌, 其書之名. 赤, 火色. 漢姓劉. 以火德王, 故尙赤. 赤劉, 猶言炎正也. 九, 世數也, 帝, 高帝九世孫故云. 岱宗, 泰山也.이라한대
이 ≪하도회창부河圖會昌符≫를 읽어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적유赤劉의 9대종岱宗에서 만난다.”注+는 도참이 기록된 책이니, 회창會昌은 그 책의 이름이다. 의 색깔이고, 나라는 국성國姓유씨劉氏이다.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므로 적색을 숭상하였으니, 세수世數이니, 광무제光武帝고제高帝(유방劉邦)의 9세손이므로 말한 것이다. 대종岱宗태산泰山이다. 하였다.
感此文하여 乃詔虎賁中郎將梁松等하여 按索河洛讖文言九世當封禪者하니 凡三十六事注+河圖有九篇, 洛書有六篇.
은 이 글에 감동하여 마침내 호분중랑장 양송虎賁中郎將 梁松 등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하도河圖낙서洛書에 관한 참문讖文 중에 9에 마땅히 봉선封禪해야 한다고 한 것을 찾게 하니, 모두 36건이었다.注+
於是 張純等 復奏請封禪한대 乃許焉하고 詔有司하여 求元封故事하니 當用方石再累 玉檢金泥注+元封故事, 武帝封禪故事也. 用方石再累, 置壇中, 皆方五尺, 厚一尺. 用玉牒書, 藏方石, 牒厚寸, 長尺三寸, 廣五寸. 有玉檢, 又有石檢十枚, 列於石旁, 東西各三, 南北各二, 皆長五尺, 廣三尺, 厚七寸. 檢中刻三處, 深四寸, 方五寸, 有蓋. 檢用金縷五周, 以水銀和金, 以爲泥.
이에 장순張純 등이 다시 봉선할 것을 주청하자, 이 마침내 허락하고 유사有司에게 조령을 내려 를 찾게 하니, 마땅히 네모진 돌을 두 겹으로 쌓고 옥검玉檢금니金泥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注+원봉고사元封故事”는 무제武帝원봉元封 연간에 봉선封禪고사故事이다. 네모진 돌을 겹으로 포개어서 가운데에 두되 모두 사방의 길이가 5이고 두께가 1이다. 옥첩玉牒의 글을 네모진 돌에 보관하였는데, 옥첩의 두께는 5이고 길이는 1 3이고 너비는 5이다. 옥검玉檢이 있고, 또 석검石檢 10를 돌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는데 동쪽과 서쪽에 각각 3, 남쪽과 북쪽에 각각 2를 두되, 모두 길이가 5이고 너비가 3이고 두께가 7이다. 안에 세 곳을 조각하였는데, 깊이가 4이고 사방이 5이고 뚜껑이 있었다. 금루金縷(금실)를 사용하여 다섯 번 두르고 수은水銀을 금가루와 섞어 발라 봉인하였다.
上以石功難就라하여 欲因孝武故封石하여 置玉牒其中하니 梁松 爭以爲不可한대
은 돌을 다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효무제孝武帝가 예전에 봉선할 때 만들었던 돌을 이용하여 옥첩玉牒을 그 안에 두고자 하니, 양송이 불가하다고 간쟁하였다.
乃命石工하여 取完青石하고 無必五色注+舊制, 用石蓋, 各依方色也.하라하다
이에 마침내 석공石工에게 명해서 완전한 푸른 돌을 취하고 굳이 오색五色으로 하지는 말라고 하였다.注+옛 제도에, 돌을 사용하여 덮되 각각 을 따랐다.
丁卯 車駕東巡하여 二月己卯 幸魯하여 進幸泰山하고 辛卯晨하여 祭天於泰山下南方하되
정묘일丁卯日에 황제의 거가車駕가 동쪽으로 순행하여 2월 기묘일己卯日 지역에 가서 태산泰山에 행차하고, 신묘일辛卯日 새벽에 불을 피워 태산 아래 남방南方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群神皆從注+從, 才用切, 從祀也, 下同.하고 用樂如南郊하다 事畢 至食時하여 天子御輦登山이러니 日中後 到山上注+泰山, 從山下至頭, 四十八里二百步.하여 更衣하다
여러 을 모두 종사從祀(배향)하고注+재용才用종사從祀함이니, 아래도 같다. 음악을 연주하기를 남교南郊와 같이 하였다. 일이 끝나자, 아침 식사 무렵(오전 7시~9시)에 이르러서 천자가 을 타고 산에 올랐는데, 정오가 지나 산의 정상에 올라注+태산泰山은 산 아래서부터 정상까지가 48리 200보이다. 옷을 바꾸어 입었다.
晡時 升壇北面하니 尙書令 奉玉牒檢이어늘 天子以寸二分璽 親封之하다
저녁 식사 무렵(오후 3시~5시)에 에 올라 북면北面을 하니, 상서령尙書令옥첩玉牒옥검玉檢을 받들어 올리자, 천자가 1 2 크기의 옥새를 사용하여 친히 봉함하였다.
太常 命騶騎二千餘人하여 發壇上方石하고 尙書令 藏玉牒已 復石覆訖注+覆, 敷救切.이어늘 尙書令 以五寸印으로 封石檢하다
】 봉함이 끝나자, 태상太常이 2천여 명의 추기騶騎에게 명하여 제단祭壇 위의 네모진 돌을 들어올리게 하고 상서령尙書令옥첩玉牒을 그 속에 보관한 뒤에 다시 돌로 덮게 하였으며注+(덮다)는 부구敷救이다., 상서령尙書令이 5 크기의 으로 석검石檢을 봉함하였다.
事畢 天子再拜하니 群臣稱萬歲하고 乃復道下注+謂復古道而下山也.하여 夜半後 乃到山下하고 百官 明旦乃訖하다
일이 끝나자 천자天子재배再拜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만세를 부르고 마침내 옛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注+〈“복도하復道下”는〉 옛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옴을 이른다. 한밤중이 지난 뒤에야 이 산 아래에 이르렀고, 백관百官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마쳤다.
甲午 禪祭地于梁陰하여 以高后配하고 山川群神從하여 如元始中北郊故事注+梁陰, 謂梁父山之北也.하다
갑오일甲午日양보산梁父山 북쪽에서 땅에 제사를 하면서 고후高后(여후呂后)를 배향配享하고 산천의 여러 들을 종사從祀하여 와 똑같게 하였다.注+양음梁陰”은 양보산梁父山의 북쪽을 이른다.
胡氏曰 七十二君之編錄 詩, 書, 禮典 略不經見하니 審有是事 乃天下國家之盛擧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72명의 군주가 봉선封禪한 기록이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예전禮典의 경문에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진실로 이 일이 있었다면 이는 바로 천하天下국가國家의 거룩한 일이다.
堯, 舜, 禹, 湯, 周武, 成, 康, 昭, 宣 皆身致太平하니 安得闕而弗講이리오
, , 나라의 무왕武王성왕成王, 강왕康王소왕昭王, 선왕宣王이 모두 몸소 태평성세를 이룩하였는데, 어찌 이 제도를 빠뜨리고 강구하지 않았겠는가.
前世論登封者 莫善於許懋注+梁武帝時, 有請封會稽禪國山者, 許懋諫之而止.하니 惜乎 世祖之臣 智不及此하여 陷其君於過擧而不得聞也로다
그러므로 전대에 태산에 올라가 봉하는 일을 논한 자는 허무許懋(허무)보다 더 잘한 자가 없으니注+양 무제梁 武帝 때에 회계산會稽山을 하고 국산國山을 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허무許懋가 이를 간하여 중지하였다., 애석하다. 세조世祖의 신하들이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해서 그 군주를 잘못된 일에 빠뜨리면서도 이것을 아뢰지 못하였도다.”
延平陳氏曰 三十年 群臣請封禪한대 詔引欺天林放之語以止之 然而信聖人之言 不如信圖讖之篤也로다
연평 진씨延平 陳氏(진관陳瓘)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건무建武 30년(54)에 여러 신하들이 봉선封禪을 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령詔令을 인용하여 중지시켰다. 그러나 성인聖人(공자孔子)의 말씀을 믿은 것이 도참圖讖을 믿은 것만큼 돈독하지는 못하였다.”
三月 司空純하다
】 3월에 사공 장순司空 張純하였다.
◑夏四月 帝還宮하다
】 여름 4월에 황제가 환궁하였다.
◑赦하고 하다
】 사면을 하고 개원改元하였다.
◑六月 以馮魴爲司空하다
】 6월에 풍방馮魴(풍방)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司徒勤하다
사도 풍근司徒 馮勤하였다.
◑京師 醴泉出하고 赤草生하고 郡國 言甘露降注+醴泉, 言泉之味甘如醴也. 赤草, 卽朱草也, 日生一葉, 至十五日以後, 日落一葉, 周而復始.하다
경사京師에서 예천醴泉이 나오고 적초赤草가 자라고, 군국郡國에서는 감로甘露가 내린다고 말하였다.注+예천醴泉은 샘물 맛이 달아 마치 단술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적초赤草는 바로 주초朱草이니, 하루에 한 잎씩 나오고 15일 이후로는 날마다 한 잎씩 떨어져서 30일이 되면 다시 자라난다.
群臣 奏言호되 靈物仍降하니 宜令太史撰集하여 以傳來世니이다
】 여러 신하들이 신령스러운 물건이 계속하여 내리니 마땅히 태사太史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모아 기록하게 해서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상주上奏하였으나,
帝不納하고 常自謙無德하여 毎郡國所上 輙抑而不當이라 史官 罕得記焉하니라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스스로 이 없다고 겸양하여 매번 군국郡國에서 올린 상서로운 일을 억제하고 자신에게 해당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관史官이 이것을 기록한 일이 적었다.
하다
】 가을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冬十月 以李訢爲司徒하다
】 겨울 10월에 이흔李訢(이흔)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尊薄太后曰高皇后라하고 遷呂太后主于園하여 薄后 配食地祗하고 呂后 四時上祭注+遷呂太后主于園, 以呂太后幾危劉氏也. 園, 謂塋域也, 於中置寢.하다
박태후薄太后(한 문제漢 文帝)를 높여 고황후高皇后라 하고 여태후呂太后의 신주를 으로 옮겼다. 박후薄后지지地祗(지신地神)에게 배식配食(배향)하고 여후呂后에게는 사시四時에 제사를 올렸다.注+여태후呂太后의 신주를 으로 옮긴 것은 여태후呂太后유씨劉氏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영역塋域(묘지)을 이르니, 영역塋域 안에 을 설치한다.
◑十一月晦 日食하다
】 11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명당明堂영대靈臺, 벽옹辟雍(태학太學)을 일으키고, 도참圖讖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上以赤伏符 卽帝位하니 由是 信用讖文하여 多以决定嫌疑
】 처음에 이로 인해 도참의 글을 신봉하여 이로써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給事中桓譚 上疏諫曰 凡人忽於見事而貴於異聞注+見, 音現. 見事, 見在之事也.하나니 觀先王之所紀述컨대 咸以仁義正道爲本이요 非有奇恠虛誕之事
급사중 환담給事中 桓譚(환담)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사람들은 드러난 일은 소홀히 하고 기이한 말은 귀하게 여깁니다.注+은 음이 이니, “현사見事”는 현재의 일이다. 그러나 선왕先王들이 기술하신 것을 살펴보면 모두 인의仁義정도正道를 근본으로 삼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蓋天道性命 聖人所難言也 自子貢以下 不得而聞이어든 況後世淺儒 能通之乎잇가
하물며 후세에 학문이 얕은 유자儒者가 이것을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今諸巧慧小才伎數之人 增益圖書하고 矯稱讖記하여 以欺惑貪邪하고 詿誤人主하니 焉可不抑遠之哉注+伎, 謂方伎․醫方之家也. 數, 謂數術․明堂․羲和․史卜之官也. 焉, 於虔切.잇가
】 지금 공교한 지혜와 작은 재주, 기술과 술수가 있는 사람들이 하도河圖낙서洛書를 더 보태고 참기讖記를 사칭하여 탐욕스럽고 간사한 사람들을 속여 유혹하고 군주를 그르치니, 어찌 억제하여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注+방기方伎의방醫方를 이르고, 는 술수와 명당, 희화羲和사복史卜을 이른다. (어찌)은 어건於虔이다.
臣譚 伏聞陛下窮折方士黄白之術하니 甚爲明矣어시늘 而乃欲聽納讖記하시니 又何誤也注+黃白, 謂以藥化成金銀也.잇가 其事雖有時合이나
신 환담臣 桓譚은 삼가 듣건대 폐하께서 방사方士들의 황백黄白의 술법(신선술)을 힘써 배척하셨다 하니 매우 영명하십니다. 그런데 도리어 도참기를 받아들이고자 하시니, 또 어찌하여 잘못을 저지르려 하십니까.注+황백黃白단약丹藥을 사용하여 을 만듦을 이른다. 도참의 일이 비록 때로 맞는 경우도 있으나,
譬猶卜數隻偶之類注+隻偶, 猶易所謂奇耦也. 陛下宜垂明聽하고 發聖意하사 屛群小之曲說하고 述五經之正義하소서 疏奏 帝不悦하다
비유하건대 점칠 적에 홀수가 아니면 짝수가 나오는 따위와 같습니다.注+척우隻偶”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이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밝게 들으시고 성스러운 뜻을 발하시어 여러 소인들의 부정한 말을 물리치고 오경五經의 바른 뜻을 따르소서.” 상소를 아뢰자,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會議靈臺所處注+處, 上聲. 所處, 謂靈臺所宜處之地也.할새 帝謂譚曰 吾欲以讖决之하노라 黙然이라가 良久曰 臣不讀讖이니이다
】 마침 영대靈臺를 세울 곳을 의논할 적에注+(처소)는 상성上聲이니, “소처所處”는 영대靈臺를 세우기에 마땅한 장소를 이른다. 황제가 환담桓譚에게 이르기를 “내 도참서로 결정하겠다.” 하니, 환담이 침묵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아뢰기를 “은 도참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帝問其故한대 復極言讖之非經注+言讖文不合經典.하니 帝大怒曰 桓譚 非聖無法하니 將下하여 斬之注+將, 持也, 領也.하라 叩頭流血이어늘
황제가 그 이유를 묻자, 환담이 다시 도참서가 경서經書가 아님을 지극히 말하였다.注+〈“참지비경讖之非經”은〉 도참서가 경전의 의리에 부합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환담이 성인聖人을 비난하고 을 무시하니, 붙잡아 끌고 가 참형에 처하라.”注+은 가짐이며, 데리고 감이다. 하니, 환담이 머리를 땅에 두드려 이마에 피가 흘렀다.
良久 乃得解하고 出爲六安郡丞이러니 道病卒하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는데 외직으로 좌천되어 육안군六安郡이 되어, 부임지로 가는 길에 병으로 하였다.
范曄曰注+曄, 劉宋人, 撰後漢書. 桓譚 以不善讖流亡하고 鄭興 以遜辭僅免注+建武七年, 帝與鄭興議郊祀事曰 “吾欲以讖斷之.” 興曰 “臣不爲讖.” 帝怒曰 “卿非之邪.” 興惶恐曰 “臣於書, 有所未學, 而無所非也.” 帝意乃解.하고
범엽范曄(범엽)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범엽范曄유송劉宋(남조 송南朝 宋) 사람이니, ≪후한서後漢書≫를 찬하였다.환담桓譚은 도참설을 좋지 않다고 여겼으므로 유배 가다가 죽었고, 정흥鄭興은 공손한 말로 겨우 화를 면하였고注+건무建武 7년(31)에 황제가 정흥鄭興교사郊祀의 일을 논할 적에 황제가 말하기를 “내 도참설로 결단하겠다.” 하니, 정흥이 말하기를 “은 도참서를 읽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 도참설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정흥이 황공해하며 말하기를 “은 도참서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였을 뿐, 비난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니, 황제의 노여워하는 뜻이 마침내 풀렸다.,
賈逵 能附會文致하여 最差貴顯注+逵, 誼九世孫也. 明帝永平中, 逵上言 “左氏與圖讖合, 明劉氏爲堯後.” 帝嘉之. 歷遷侍中, 領騎都尉, 甚見信用.이라 世主以此論學하니 悲哉注+言時主不重經而重讖也.인저
가규賈逵는 능히 견강부회하고 문식하여 가장 귀하고 현달한 데에 이르렀다.注+가규賈逵가의賈誼의 9세손이다. 명제 영평明帝 永平 연간에 가규가 상언上言하기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도참설과 부합되니, 유씨劉氏임금의 후손이 됨이 분명합니다.” 하자, 황제가 그를 가상히 여겼다. 가규는 벼슬이 시중侍中을 역임하고 기도위騎都尉를 겸하여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시의 군주[세주世主]가 이것을 가지고 학문을 논하니, 참으로 슬프다.”注+〈“세주이차론학世主以此論學”은〉 당시의 군주가 경서를 중하게 여기지 않고 도참설을 중하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南單于比 死하니 弟莫하다
남선우 비南單于 比가 죽으니, 아우 (남흉노南匈奴의 제2대 선우)이 즉위하였다.
帝遣使齎璽書하여 拜授璽綬하고 賜以衣冠及繒綵하니 是後 遂以爲常하다
】 황제가 사자使者남선우南單于에게 보내 옥새를 찍은 친서를 가지고 가서 인새印璽와 인끈을 내려 작위를 제수하고 옷과 관, 채색 비단을 하사하니, 이후로는 이를 준례로 삼았다.
역주
역주1 帝東巡……禪梁陰 : “앞서 여러 신하들이 封禪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는 河圖의 글에 감동하여 마침내 봉선을 행하였으니, 황제가 또한 이에 대해서 定見이 있지 못하였다. 이것을 써서 비판한 것이다.[先是群臣請封禪 不許 至是感河圖文 遂行之 帝於是亦不得爲有定見矣 書譏之]” ≪書法≫ “唐나라 貞觀 연간에 여러 신하들이 封禪을 청하였으나 太宗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資治通鑑綱目≫에서 책에 빠짐없이 썼는데, 지금 建武 30년(54)에도 여러 신하들이 봉선을 청했으나 光武帝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자치통감강목≫에서 어찌하여 삭제하고 쓰지 않았는가. 태종의 이른바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 뒤에 끝내 행하지 않았고, 광무제의 이른바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書法이 다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封禪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先儒들의 변론이 이미 자세하다. 秦 始皇과 漢 武帝의 사치한 마음을 어찌 굳이 기술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태종이 봉선하지 않은 것도 확고하게 의혹이 없던 것이 아닌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남이 선행을 한 것을 기꺼이 인정하였으므로 태종의 허락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크게 써서 찬미하였다. 世祖(光武帝)로 말하면 이미 그 잘못을 저질렀으니, ≪자치통감강목≫에 비록 인정하고자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무릇 ‘봉선을 허락하지 않았다.[不許封禪]’고 쓴 것은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인정해준 것이요, ‘封禪을 하였다.’라고 쓴 것은 모두 비판하고 폄하한 것이다.[唐貞觀間 群臣有請封禪 太宗不許 綱目備書于冊 今此建武三十年 群臣亦請封禪 光武不許 綱目何爲削而不書 蓋太宗之所謂不許 其後終於不行 光武之所謂不許 曾未幾而行之 此書法之所以異也 然則封禪 是耶否耶 先儒辯論 旣已詳矣 秦皇漢武之侈心 何足多述 然太宗之不封禪 亦非確然不惑者 惟綱目樂予人爲善 故幸其不許 大書以美之 若世祖 旣蹈其失 綱目雖欲予之 不可得也 故凡書不許封禪者 皆幸之予之也 其書封禪者 皆譏之貶之也]” ≪發明≫
역주2 元封……故事 : 元封은 漢 武帝가 B.C.110년에서 B.C.105년까지 사용한 연호로, 처음으로 泰山에 封하였기 때문에 ‘元封’이라 하였다.
역주3 (玉)[五] : 저본에는 ‘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五’로 바로잡았다.
역주4 赤劉는……같다 : 赤劉는 火德으로 왕 노릇 하는 劉氏란 뜻으로 漢王朝를 가리키며, 炎正의 炎은 불꽃이므로 火德을 가리킨다.
역주5 河圖는……있다 : 河圖와 洛書는 간단한 그림이나 여기에 ‘篇’이라 한 것으로 보아 緯書인 듯하다.
역주6 방위의 색깔 :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인바, 이것을 五方의 색깔이라 하였다.
역주7 元始……故事 : ‘元始’는 漢 平帝가 A.D.1년에서 5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北郊는 冬至에 북쪽 교외에서 지내던 제사이다.
역주8 하늘을……말 : 본서 22쪽 참조.
역주9 改元 : “改元한 것을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비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文帝로부터 이래로 개원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비상한 일이 된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가 즉위한 지 31년이 되도록 개원하지 않다가 이때에 특별히 中元으로 개원하였으니, 이것을 비상한 일로 여겨서 쓴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가 後元으로 개원한 것을 ‘更’이라고 쓰고 世祖가 中元으로 개원한 것을 ‘改’라고 썼으니, 모두 비상한 일로 여긴 것이다.[改元不書 此何以書 非常也 自文帝以來 改元多矣 此其爲非常 何 帝卽位三十一年 不改元矣 於是特改中元 以是爲異也 故書 是故文帝改後元書更 世祖改中元書改 皆異之也]다” ≪書法≫
역주10 起明堂……於天下 : “‘起’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靈臺를 겸하여 말했기 때문이다. 辟雍을 세운 것은 훌륭한 일인데 뒤이어 圖讖을 선포했다는 글이 있으니, 황제가 배운 것이 잡박하다. 이에 특별히 써서 비판하였으니, 도참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도참을 쓴 것이 5번인데 모두 금지한 내용이고, 오직 光武帝가 선포한 일을 쓴 것은 비판한 말이다.[書起 何 兼靈臺言之也 建辟雍盛典也 而繼有宣布圖讖之書 則帝之所學駁矣 特書譏之 書圖讖始此 終綱目 書圖讖五 皆禁之者也 惟光武書宣布爲譏辭]” ≪書法≫ “역적 王莽이 거짓으로 符命을 칭하고 漢나라의 國運을 찬탈하였으며, 公孫述이 스스로 符命을 말하고 蜀 지역을 도둑질하여 점거하였다가 모두 실패하고 멸망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황제가 직접 본 것이다. 황제가 이미 大寳(황제의 지위)에 군림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때에야 비로소 도참을 천하에 선포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황제가 漢나라의 基業을 中興한 것은 험난함을 겪으면서 백 번 싸워 얻은 것이요, 圖讖書에 자신의 이름이 있어서 팔짱 끼고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저 前秦의 苻堅의 무리들도 도참서와 緯書를 금하고 꺼렸는데, 황제가 도리어 선포하고 숭상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낸 聖武의 군주가 도리어 패망한 夷狄의 추장만 못하단 말인가. 이것을 써서 비난함이 마땅하다.[賊莽詐稱符命 簒奪漢祚 公孫述自陳符命 竊據蜀土 皆不免敗滅 此帝之所親覩者也 帝旣君臨大寳 踰三十載 乃始宣布圖讖於天下 何哉 且帝之中興漢業 以間關百戰得之 非以圖讖在己 拱手而得之也 彼苻堅醜類 猶能禁絶讖緯 帝乃宣布崇尙之 曾謂聖武天挺之君 乃不如夷狄敗亡之酋乎 書以譏之 宜也]” ≪發明≫
역주11 上이……오르니 : 赤伏符는 王莽이 세운 新나라 말년에 讖緯家가 만든 符籙으로, 여기에 “劉秀가 위로 天命에 응하여 漢나라의 정통을 이어 황제가 된다.”라고 하였다.
역주12 天道와……못했는데 : ‘天道’는 元, 亨, 利, 貞의 이치를 가리키고, ‘性命’은 하늘이 사람에게 명하여 부여해준 仁, 義, 禮, 智의 性을 이르며,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論語≫ 〈公冶長〉에 “夫子의 文章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부자께서 性과 天道를 말씀하심은 얻어 들을 수 없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子貢의 말이 보인다.
역주13 奇耦 : 奇는 홀수로 1ㆍ3ㆍ5ㆍ7ㆍ9를 이르고, 耦는 짝수로 2ㆍ4ㆍ6ㆍ8ㆍ10을 이른다. ≪周易≫은 河圖의 數를 기본으로 하였는바, ≪周易≫ 〈繫辭傳 上〉에 “天이 1이고 地가 2이며, 天이 3이고 地가 4이며, 天이 5이고 地가 6이며, 天이 7이고 地가 8이며, 天이 9이고 地가 10이다.[天一 地二 天三 地四 天五 地六 天七 地八 天九 地十]” 하였다. 天은 陽으로 奇數가 여기에 해당하고 地는 陰으로 耦數가 여기에 해당하는바, 爻 역시 陽爻를 奇, 陰爻를 耦라 한다. ≪周易≫ 占은 50개의 蓍草를 가지고 점을 치는데, 홀수가 아니면 짝수가 나와 이로써 吉凶을 판단한다.
역주14 : ≪後漢書≫ 〈南匈奴傳〉에는 丘浮尤鞮單于라 하였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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